[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15장 1. 불굴의 투사 박달(2) 46,47,48-75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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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15장 1. 불굴의 투사 박달(2) 46,47,4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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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2-26 18:2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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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제15장 1. 불굴의 투사 박달(제4회) 46-75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제15장 1. 불굴의 투사 박달(제5회) 47-75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5 권 제15장 1. 불굴의 투사 박달(제6회) 48-75

 

 

 

제5권 제15장 1. 불굴의 투사 박달(2)

 

 

그렇다고 하여 그가 우리의 조치와 방침들을 어느것이나 다 지지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조국광복회의 명칭이나 일부 조항들에 대해서는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있었다.

 

《나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기는 하지만 최종목적은 어디까지나 공산사회건설에 있다는것을 굳게 믿고있습니다. 그런데 조국광복회 명칭이나 10대강령을 보면 이러한 공산주의적강령의 요구를 멀리 떠나서 민족주의계선까지 후퇴한 감이 듭니다. 말하자면 최고강령은 포기하고 최저강령만을 내걸었다고 할가.…》

 

박달은 아마도 우리가 운동의 최고목적을 포기하고 모종의 기회주의적립장에로, 적극적인 투쟁형식보다도 타협적인 개량주의운동에로 돌아섰다는 비난이라도 받을가봐 두려워하는것 같았다. 그도 역시 《대통령감》이 초기에 가지고있던 교조주의적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혁명이란 공산주의자들 몇사람만의 힘으로는 할수 없다,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이 총동원되여야 우리 혁명은 승산있는 혁명으로 될수 있다, 동무도 다 아는바이지만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는 로동자, 농민이나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온 민족이 압제속에서 신음하고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조선독립에 리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력량을 다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워야 한다, 동무는 조국광복회 명칭문제에 의견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것은 어떤 계층이나 다 받아들일수 있는 적합한 명칭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단체명을 하나 지어도 혁명이라는 말이나 적색이라는 말이 꼭 들어가야 되는것으로 알고있는데 이것은 좌경의 한개 표현이다, 우리는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조직체의 명칭에 조국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단체가 어떤 한정된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조직인것이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한 조직으로 된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려 하였다고 말해주었다.

 

박달은 성진, 학성, 길주, 단천, 북청 지방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서로 경험도 나누군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지하활동을 우둔하고 거칠게 하고있는것 같다고 하였다. 가령 성진 같은곳에서는 농조원들이 단오명절날 씨름판에 가서도 표가 나게 붉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쭉 둘러앉는다는것이였다. 그런 방법으로 그들은 비조직군중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씨름판에서 자기편이 눌리게 되면 승산이 있건없건 련달아 선수들을 내보내는 인해전술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극성을 부리는데 실력으로 당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씨름판에 고의로 분쟁을 일으켜 적색농조의 위력을 시위하였다. 시상부에 앉아있는 사복경찰들은 그런 기회를 리용하여 농조핵심들을 장악하였으며 그것을 단서로 하여 농조열성분자들을 검거하거나 지하조직들을 색출해냈다.

 

그 당시 일부 지방들에서는 향교와의 관계에서도 좌경을 범하였다. 향교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제사지내는 지방유지들의 봉건냄새가 나는 조직이였다. 여기서는 장의, 교감 등의 명예직을 주는 놀음을 하였는데 서로 만나 인사를 할적에 아무개 장의님, 아무개 교감님 하면서 상대를 높여부르는 례법을 썼다. 이것은 물론 봉건유교도덕을 선양하는것으로서 크게 장려할것은 못되나 그렇다고 그것을 로골적으로 반대하거나 하루아침에 깨여버리겠다고 해서는 안되는것이다.

 

그런데 좌경에 중독된 어떤 청년들은 봉건을 반대한다고 하면서 할아버지의 장의감투를 태워버리거나 찢어버리는것과 같은 망동을 하여 늙은이들의 대통에 얻어맞는 창피까지 당하였다. 늙은이들은 공산당패거리들이란 삼강오륜도 모르고 웃어른도 몰라보는 망종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야단법석을 하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덕을 보는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뿐이였다. 그들은 향교에서 공자의 제사를 지낼 때 군수도 함께 참석시켜 절을 하게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할아버지들을 반대하지만 일본관청은 그러지 않는다는것을 시위하자는 속심이였다. 적들은 이처럼 지방의 향교조직도 공산주의세력을 반대하는데 교묘하게 리용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무슨〈적색〉이니, 〈혁명〉이니 하는 요란스러운 명칭이나 단다고 해서 단체의 일이 잘돼나가는것도 아니며 조직의 혁명성이 스스로 보장되는것도 아닙니다. 조국광복회조직은 해당 지방의 형편과 대중의 각성정도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내올수 있습니다. 가령 로동자들은 로동조합을 조직하고 농민들은 농민조합을 조직하며 청년들은 반제청년동맹이나 공산청년동맹 같은것을 조직하는 식으로 실정에 맞게 조직들을 내와야 합니다. 우리가 료해한바에 의하면 국내 여러 지방들에는 진흥회라는 어용단체가 있는데 거기에 적지 않은 군중들이 망라되여있다고 합니다. 각계각층 군중을 쟁취하려면 이런 단체들에도 뚫고들어가야 합니다. 뚫고들어가서 거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혁명화하면 조국광복회의 창립선언정신에 부합되게 단체의 성격도 점차적으로 변경시킬수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것은 외형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우리 혁명에 리로운것이라면 그 어떤 명칭을 가진 조직이건 구애될것이 없습니다.》

 

박달은 이 말을 듣자 자기를 뉘우치였다.

 

《말씀을 듣고보니 확실히 우리의 운동방식에 문제가 있는것 같습니다.》

 

나는 박달을 통하여 국내투사들의 사고방식에서의 허점과 제한성을 발견할수 있었다. 사고와 실천에서 그들이 범하고있는 가장 큰 과오는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리해였다. 그들이 민족주의운동일반을 배척하고 경원시하는것은 그 당시 맑스-레닌주의를 씹어서 소화하지 않고 통채로 받아들이던 행세식공산주의자들과 독경식맑스주의신봉자들 일반이 범하고있던 좌경적편향이였다.

 

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해방보다 더 큰 대의가 없다는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민족을 떠난 공산주의운동이란 있을수 없으며 또 그런 공산주의운동은 필요도 없다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속에는 로동자, 농민뿐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창조적로동을 사랑하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사랑하는 각계각층 군중이 다 포함되여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총동원의 기준이며 조국광복회 입회기준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준에 기초하여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동원할수 있는 사람은 다 동원해야 합니다.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하며 또 이룩할수 있다는 자주독립사상에 기초한 민족의 총동원만이 조선의 운명을 칠성판에서 건져낼수 있습니다.》

 

박달은 사고와 실천에서 교조를 적지 않게 범한 사람이였지만 그것을 교조로 대담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주장을 허심하게 받아들이였다.

 

나는 박달에게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으로 하되 그 명칭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바꿀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박달은 그 제의에 흔연히 동의하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조국광복회망을 국내에 확대하는데서 나서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임무와 구체적인 방도들을 협의하였다. 밖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불을 쪼이면서도 담화하였다. 박달이 밀영에 머무르는동안 나는 그와 함께 국내에 당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원호문제, 적통치기관 침투문제, 국내혁명가들의 신변보호문제, 앞으로의 련락방법과 련락장소, 암호, 련락원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론의하고 모든 문제에서 완전한 리해와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박달과의 접촉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인상은 그의 솔직성과 소탈한 품성, 혁명에 대한 진지한 태도였다. 그는 좋은것은 좋다고 말하고 싫은것은 싫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런 류형의 인간이였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싫다고 생각하는것도 입으로는 좋다고 표현하며 나쁘다고 생각하는것도 상대방의 눈치와 시세를 봐가며 좋다고 말한다. 설사 상대방의 기분을 좀 거슬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만을 말해야겠다는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검은것은 검다고 말하고 흰것은 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하겠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웃사람들의 눈치를 봐가며 흰것을 검다고 하거나 검은것을 희다고 하며 시세에 따라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방법으로 웃사람들에게 발라맞추는것은 충신이 아니라 간신이다. 간신들의 혀끝에서는 진실이 서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박달은 마음에 들지 않는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털어놓고 말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그의 그런 성품에 완전히 반해버리였다. 매력이란 결코 복잡하고 현란하고 다사스럽고 야단스러운것에서 생기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고 소박하고 솔직한 여기에 인간이 지니고있는 매력의 핵이 있다.

 

공화국정부의 초대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인 정준택도 소시민출신의 인테리이고 종파분자들에게서 정치적박해를 많이 받은 간부였지만 내앞에서는 항상 바른말을 하였다. 그는 경제정책집행에서 가능한것만 가능하다고 말하였고 불가능한것은 절대로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가령 내가 외곡된 보고를 듣고 어떤 생산지표에 대하여 정확치 못한 견해를 가질 우려가 있으면 나의 집무실에 와서 4시간, 5시간을 기다려서라도 기어이 나에게 정확한 실태를 보고하군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도움으로 나라의 살림살이전반을 항상 진상대로 정확히 파악할수 있었고 경제사업에 대한 지도를 바로해나갈수 있었다.

 

옛날에는 인재를 등용하는데서 첫째로는 문벌이 좋은것을 취하고 둘째로는 모습이 청미한자를 취하고 셋째로는 말씨가 순한것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다나니 출신이 미천하고 체격이 왜소하고 말씨가 무뚝뚝한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장원급제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훈계하였다.

 

《사람은 문벌이나 재산이나 생김새나 말씨를 보고 취할것이 아니라 능력과 됨됨이를 보고 취해야 하느니라.》

 

박달을 만나고보니 어째서인지 외할아버지가 하던 이 말이 되살아났다. 외형상으로 수더분하게 보이는 이 박달이야말로 속대가 바로선 사람이였고 허식이나 겉치레를 모르는 솔직하고 소탈하고 성실한 인간이였다. 요새 사람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는 정녕 심장에 남는 사람이였다.

 

《내 몸이 열쪼각, 백쪼각이 되더라도 끝까지 장군님과 뜻을 같이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리라는것을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국내당공작위원회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은 념려말아주십시오.》

 

박달은 이런 말을 남기고 나와 헤여졌다. 물론 그는 약속대로 리제순이네 동네에서 만주산메주콩을 한달구지 사가지고 가서 순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7년 1월 갑산공작위원회의 지도핵심들은 박달의 사회하에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기 위한 모임을 열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집행대책도 겸하여 토의하였다.

 

조직대렬을 갑산지방범위로부터 도범위, 전국적인 범위에로 확대해나갈데 대한 문제, 동맹조직내에 일체 종파주의적요소가 침습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경계할데 대한 문제, 비밀을 엄수할데 대한 문제, 동맹원교양문제, 기관지발행문제 등 당면한 여러가지 실천적문제들이 진지하게 토의되였다.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한것은 조국광복회운동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또하나의 력사적사변이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 조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발진기지로 되였다.

 

갑산공작위원회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된 그때로부터 갑산지방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일본새에서는 전환이 일어났다.

 

그들은 조선민족해방동맹기관지 《화전민》에 우리의 로선을 소개하는 글들도 실어 하부조직들에 배포하였다. 갑산을 비롯한 함남북일대에는 우리의 로선과 방침이 빠른 속도로 침투되고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급속히 자라났다. 반일투쟁의 불길은 전례없는 열도를 가지고 타올랐다.

 

1937년 5월에 나는 다시 박달을 만났다. 최현부대의 무산방면진출과 관련하여 갑산일대의 정세는 대단히 험악해졌다. 국경일대에는 또다시 쥐새끼 한마리 얼씬할수 없는 삼엄한 경비진이 늘여졌다.

 

그러나 박달은 이번에도 경찰을 잘 구슬려 합법적으로 자기 마을을 떠나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국내형편과 사업정형을 놓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내운동정형에 대한 박달의 보고를 듣고 우리는 모두 만족해하였다.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전위투사들의 줄기찬 노력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진척되여가고있었다. 조국광복회조직은 갑산지방을 비롯한 현재의 량강도일대는 말할것도 없고 멀리 성진, 길주, 단천, 홍원을 비롯한 동해안일대의 주요지역들에 널리 뻗어가고있었다. 투쟁방법도 훨씬 세련되여갔다.

 

우리는 박달에게 전투에서 로획한 경기관총 2정을 보여주었다. 박달이 그 무기들을 만져보며 기뻐하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국내동무들을 만나보는 과정에 내가 느낀 문제점은 그들이 운동의 국내적측면만을 놓고 문제를 설정하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국제적판도에로 확대하면서 폭넓게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우리 혁명이 처하여있는 국제적환경, 말하자면 국제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 그리고 일본공산당과 같은 조직들과의 관계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국제적으로 벌어지고있는 사변들과의 련관속에서 조선혁명문제를 설정하도록 그들의 안목을 넓혀주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바치였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적극화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였다.

 

그무렵의 국제정세는 매우 류동적이였다.

 

구라파대륙이 에스빠냐국내전쟁으로 한창 달아오르고있을 때 아프리카대륙은 이딸리아의 에티오피아강점으로 하여 떠들썩하였다. 이딸리아의 에티오피아강점은 어떤 의미에서 에스빠냐내전보다 더 큰 문제점이라고 할수 있었다. 에스빠냐공민전쟁이 국제적인 성격을 크게 띤것만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국내전쟁에 지나지 않는 사변이였다. 그러나 이딸리아의 에티오피아강점은 한 약소국가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이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것은 이른바 강대국들이라고 하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그러한 무력침공을 조장하였으며 특히는 국제련맹이 아무러한 효과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에티오피아를 침략의 희생물로 고스란히 바쳤다는데 있었다.

 

일본의 만주침략과 독일에서의 나치스정권의 출현은 이딸리아로 하여금 강도적이고 파렴치한 침략행위를 감행할수 있게 한 국제적배경이였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대독일제국건설에 달라붙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자본주의렬강들은 히틀러정권의 출현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의 반공정책에 공감하고 관대하게 양보함으로써 독일무력을 공산주의세력에 대한 방벽으로 리용하려 하였다. 거기에서 고무를 받은 파쑈독일은 1935년 1월에 자르를 병합하였으며 그해 3월에는 베르사이유강화조약의 군사조항을 페기하는데 이르렀다. 베르사이유강화조약은 독일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부과하는 한편 그 나라가 10만이상의 군대를 못가지며 땅크와 비행기는 물론, 1,000톤급이상의 함선조차 못가지게 규정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독일은 이러한 조항들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36개 사단에 55만의 상비군을 설치할데 대한 《국방군편성법》을 발표하였다. 게링그는 독일공군의 공식편성을 선언하였다. 나치스독일의 이 모든 움직임은 이딸리아를 로골적인 무력침공에로 사촉하고 고무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되였다.

 

이딸리아는 침공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에티오피아를 반대하는 여러가지 군사적충돌을 일으켰다.

 

이딸리아의 대대적인 군사적침공이 시간을 다투어 준비되고있는 절박한 정세하에서 국제련맹성원국이였던 에티오피아는 이 사실을 국제련맹에 제소하였다. 그러나 국제련맹은 이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국제련맹에서 주도적지위를 차지하고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들의 리해관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식민지문제를 놓고 이딸리아와 엇서려고 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는 거듭 중재를 요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에티오피아황제는 제네바에 자리잡고있는 국제련맹의 총회에서 울면서 에티오피아를 도와줄것을 호소하였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는 국제련맹성원국이 아닌 미국에까지 각서를 보내여 영향력을 행사하여줄것을 청원하였으나 《중립법》제정 등으로 고립주의정책을 쓰던 미국도 아닌보살하였다.

 

1935년 10월 이딸리아는 선전포고 없이 에티오피아에 쳐들어갔다.

 

군민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는 패망하였다.

 

국제련맹은 이딸리아에 대한 아무러한 효과적인 제재도 가하지 않았으며 형식상 선포하였던 경제제재의 막뒤에서 영국, 프랑스가 이딸리아에 무기를 공급하는것을 뻔히 보면서도 못본체하였다. 가재는 게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맞았다.

 

국제련맹의 위신은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하기는 제국주의렬강들의 침략도구로 시종일관 복무해온 그 련맹이 강자의 편을 든다고 하여 크게 놀랄것은 없었다. 국제련맹은 초창기에 벌써 《위임통치령분배》형식에 의한 식민지재분할을 로골적으로 비호하였고 로골적인 반쏘정책을 실시하였다. 국제련맹이 일제의 만주침략을 얼마나 뻔뻔스럽게 두둔하였는가 하는것을 세계의 량심들은 오늘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다. 국제련맹은 파쑈독일의 자르강점과 에스빠냐에 대한 독일, 이딸리아의 무력간섭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지어는 그 나라들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 한장 내돌리지 못하였다.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기구로서의 사명을 띠고 출현하였던 국제련맹은 그후 오지리와 체스꼬슬로벤스꼬에 대한 독일의 침략행위도 묵인함으로써 사실상 그것을 도와주고 고무하였다.

 

파쑈세력과 군국주의세력의 전횡이 날로 우심해지고있던 국제정세의 급격한 발전과 국제련맹의 무맥한 존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적해방을 위한 투쟁을 주체적인 력량에 기초하여 자주적으로 벌려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똑똑히 가르쳐주었다.

 

내가 박달을 다시 만났던 그 시기는 중국본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시간문제로 남아있던 때였다.

 

《화북사변》은 실제로 화북을 일본제국주의의 천하로 되게 하였다.

 

《화북사변》후 일본제국주의는 군비확장과 전쟁준비를 더욱 다그쳤다. 1936년 8월 히로다내각은 일본은 동아대륙에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남양으로 발전하여야 한다고 하는 기본국책을 확정하였다. 이것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략하며 동시에 북진하여 쏘련을 반대하고 시기를 기다려 남으로 진공하려는 전력방안의 하나였다.

 

박달을 비롯한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제정세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매우 심중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멀지 않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될것이라는 전제밑에서 국내의 혁명가들이 그에 맞게 력량결속을 잘하고 조성된 정세를 잘 리용하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벌려나갈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은 조만간 중국에서 더 큰 전쟁을 일으킬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투쟁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게 될것입니다. 물론 그네들이 전쟁수행을 위해서 수탈도 강화하고 목조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후방에는 빈구석이 많이 생기게 될것입니다. 일본이 전선을 넓혀갈수록 우리도 넓은 판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할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것입니다. 그러니 박달동무는 새로운 정세에 주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잘 움직여서 반일력량을 더 많이 집결시키며 폭동적진출에로 나갈수 있는 차비도 잘 갖추어놓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또한 박달에게 보천보시가의 략도를 그려오며 일제의 국경경비정형을 상세히 조사보고할데 대한 특별과업을 주어 밀영을 떠나보냈다. 박달은 우리가 준 과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그린 략도와 조사보고자료는 보천보전투의 성과를 보장하는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때로부터 엿새째 되는날 우리는 통신원을 보내여 박달을 다시 불렀는데 부대를 데리고 간삼봉쪽으로 총총히 가다보니 만나지 못하였다. 보천보가 된타격을 받은후 조선총독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함흥 74련대 병력과 장백현주둔군, 국내경찰들을 집결하여 우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공세를 준비하고있었다.

 

나는 그해 7월에 다시 박달을 불렀다. 그러나 그가 적들에게 붙잡힌것으로 하여 이번에도 우리의 상봉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리병선만이 박달의 체포와 관련한 소식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실태보고를 하였다.

 

나는 리병선에게 우리가 명천, 성진 지방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만날수 있도록 련계를 지어줄데 대하여 부탁하였다. 동시에 국내에서 생산유격대를 내올데 대한 과업도 겸하여 주었다.

 

리병선을 통하여 준 임무는 후날 류치장에서 나온 박달에게 전달되였다.

 

1938년 6월 박달은 국내조직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는 어려운 정세속에서 그 수습책과 관련된 우리의 조언을 받으려고 장백일대의 수림에서 한달이상이나 우리를 찾아헤매였다고 한다.

 

그 당시 림강, 몽강 방향에 나가서 활동하고있던 나는 퍽 후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일제경찰은 박달을 비롯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핵심력량을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혜산경찰서의 조선인경부 최령이 사복경관, 자위단, 소방대까지 다 끌어내여 박달의 뒤를 추적하였다.

 

박달과 김철억은 김철억의 4촌형인 김창영의 변절로 하여 1938년 9월과 10월에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그후 리룡술(리경봉)도 붙잡혔다.

 

교형리들은 박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들이대였다. 그들이 알고싶어한것은 우리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조직성원명단이였다. 그러나 그 어떤 모진 고문도 철석같은 의지를 지닌 박달을 굴복시킬수 없었다. 적들은 처음에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가 증거부족으로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살인귀들의 고문장은 박달의 육체를 여지없이 파괴해버리였다.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다. 그렇지만 그의 넋은 변하지도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우리의 후대들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옥고를 치르며 7∼8년동안이나 기적적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해방후 어느날인가 나는 박달이 살아서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는 통지를 받았다. 들것에 실리여 감옥문을 나선 박달은 한동안 서울에 주저앉아 부인의 간호를 받고있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척수염이라는 진단을 내리였다. 후에 의학박사인 최응석이 다시 진찰을 하고 박달의 병명을 척수결핵이라고 정정하였다. 박달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사무국장을 서울로 보내여 박달을 평양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이전날의 박달은 하루밤에도 수백리길을 날아다니던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강기가 있는 혈기왕성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날 남의 등에 업혀 내앞에 나타난 박달은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옛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는 처참한 몰골의 불구였다. 피골이 상접한 그의 갑삭한 몸은 한줌안에라도 들것처럼 작아보이였다.

 

그래도 박달은 두팔로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좔좔 흘리였다. 살아서 나를 다시 만났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고 하였다. 박달을 진찰한 의사들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진단을 내리였다. 구원할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의사는 한명도 없었다. 박달은 감옥문을 나설 때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있었던것이다.

 

나는 우리 집옆에 박달의 집을 잡아주고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면밀한 치료대책을 세웠다. 명약이란 명약은 다 구해다주고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에 오갈 때면 문병을 하군하였다. 어느해인가는 남포 우산장에 젖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젖소를 가져다가 우유를 짜서 그에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3년간의 큰 전쟁이 있은후에는 주을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내오고 그를 치료해주었다. 박달이 주을에서 료양생활을 할 때마다 우리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그가 좋아하는 남새를 평양에서 실어다 공급해주었다.

 

《빨리 병을 고치고 장군님을 도와드려야겠는데…》

 

이것은 박달이 침상에서 노상 걱정하던 말이다. 그는 병마를 털고 일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의료진의 성의있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날을 따라 악화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박달이 그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위중한 상태에서도 당과 혁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늘 마음을 쓰고있었다는 사실이다.

 

1949년에 있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산장휴양소에서 료양생활을 하고있던 박달은 주변농촌의 과수원들에서 사과에 봉투를 씌우지 않아 병충해를 입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휴양소에 와있던 남반부출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 휴양소직원들을 발동하여 사과봉투를 만드는 일을 조직하였다. 박달자신도 침상에 누워 가슴에 널판자를 놓고 봉투를 만들었다.

 

전후 주을에서 치료받을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박달은 우리가 보내준 삼륜차를 타고 주변농촌에 나갔다가 당에서 심으라는 벼종자를 심지 않아 벼이삭에 쭉정이가 많이 생겼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쭉정이가 많은 벼이삭을 봉투에 넣어보내면서 당의 농업정책이 정확히 집행되지 않고있는 현상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우리는 그의 보고를 받고 어느 회의에선가 박달과 같이 불구의 몸으로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도 당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이 너무나 가슴아파서 당중앙에 보고하는데 지방일군들은 왜 그런 현상을 모르고있는가고 비판하였다. 그후 함북도당위원장은 박달을 찾아가서 자기비판을 하였다고 한다.

 

박달은 자기가 영영 일어날수 없다는것과 또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깨닫게 된 때부터 침상에 누워서 청소년교양에 이바지할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기 바쁘게 박달을 찾아가 그런 무리한 일은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자 박달은 내 손을 꼭 붙잡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것은 장군님덕인데 조금이라도 혁명에 도움을 주는것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서 오래오래 살것 같습니다, 나는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책임자의 임무를 다 수행하지 못하고 일제경찰에게 붙잡혀서 결국 지금은 국가의 밥만 축내는 페인이 되였지만 그날에 받은 혁명임무를 마저 수행하려는 심정에서 다소나마 힘을 바치고저하니 부디 막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오스뜨롭스끼는 눈먼 장님이 되여가지고도 혁명을 위해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래도 밝은 눈을 가지고있는데 글이야 왜 못쓰겠습니까. 물론 글재간이 없어 걸작이야 못내놓겠지요.》

 

박달은 한평생 자기의 손발이 되여주고 간호원이 되여준 충실한 안해 현금선과 의료일군들의 방조를 받으며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하였다. 심장의 피를 찌워 한자한자 쪼아박듯이 쓴 그의 글줄들은 그속에 담긴 혁명에 대한 열화같은 충정으로 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주었다.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앞으로 독후감과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박달은 자기의 글이 삶의 귀중한 길동무로 되고있다는 독자들의 편지에서 고무를 받으며 여러편의 글을 연방 써냈다.

 

어느날 그는 자를 가지고 침대를 재여가며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수자를 적은 종이장을 안해에게 내보이였다. 거기에 적은 치수대로 책상을 하나 짜주면 그것을 침대우에 가로건너놓고 글을 쓰겠다는것이였다.

 

며칠후 그가 부탁한 책상을 목수가 정성껏 짜서 보내왔다.

 

박달은 책상다리를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부인에게 말하였다.

 

《책상을 아주 잘 짰소. 여보, 이 책상을 잘 건사해주오. 내 이제 좀 쉬고 이 책상을 놓고 글을 쓰겠소.》

 

그러나 박달은 그 책상에서 한번도 글을 써보지 못하였다.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충정으로 높뛰던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것이다. 그의 서거에 대한 부고를 듣고 온 나라가 깊은 애도의 정에 휩싸이였다.

 

우리는 박달의 집에서 력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열고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고인을 발인할 때 나는 령구와 함께 나갔다. 백두산에서 박달과 헤여질 때 멀리까지 바래주지 못했던 그 아쉬움이 항상 심중에 매달려있었는데 영결하는 순간에나마 그를 바래주고싶었다. 어떻게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손수건이 푹 젖어있었다. 나는 김책을 잃었을 때처럼 또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가 해방된 조국땅을 제발로 걷는것을 보았더라면 그다지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것이다.

 

우리는 그후 박달이 해방전에 쓰던 보천군 운흥리의 집을 원상대로 복구하고 집앞에 그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아마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혁명가들을 위해 건립한 최초의 동상일것이다.

 

박달은 원쑤와의 싸움에서 날개를 잃었지만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혁명을 위해 굴함없이 싸운 투사였다.

 

참으로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이후시기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의 일원화를 맨처음으로 실현한 국내혁명가의 당당한 대표자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일도 제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겪은 우리의 국내전권대표였다. 박달과 같은 이런 투사들의 덕으로 우리는 해방직후 그처럼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단시일안에 당을 창건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울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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