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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새 나라》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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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21 23:5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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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새 나라》를 연재하며

 

편집국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편집국은 북 바로알기 운동을 위해 북 문예소설 작품인 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새 나라》를 소개합니다. 《새 나라》는 윤경찬 저자이며 2013년 문학예술출판사에서 발행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1945년 해방된 북 조국 땅에 어떻게 새나라가 건설되었는가를 문학적 감동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32

 

오성재는 일을 끝내고 어슬녘에야 중성리로 떠났다. 오늘 오후에 수영이를 현장에서 만났는데 외삼촌이 집에 한번 오라고 했다는것이였다. 오성재는 리유를 묻지도 않고 저녁에 찾아가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는 요즘 세월가는줄 모르고 살고있었다. 하루가 천년같던 고달프고 지루한 인생이 지금은 천년이 하루같다고 할가… 하여튼 세상이 자기를 향해 반갑게 웃어주는듯 한 느낌에 취해보기는 처음이였다. 밭에 나가면 비록 남들이 묻어놓은 씨앗일망정 야들야들한 봄배추가 새파랗게 땅을 덮었고 한이랑씩 건너심은 수수도 이제는 퍼그나 자랐다. 오성재는 그 밭에 온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면서도 불안이 영 없는것은 아니였다. 얼마전에 나라에서는 모든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증서를 교부해주었는데 오성재에게는 아직 인민정권의 큼직한 도장이 찍힌 그 증서가 없었다. 그게 있어야 마음이 놓이겠는데 농촌위원회에서는 그 일을 감감 잊어버린듯 아무 소리도 없었다. 속이 상해서 엊그제는 특별한 일거리도 없으면서 농촌위원회에 들려보았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으나 그저 지나가다 들렸다고만 하고는 차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땅타발을 하면서 농민을 망신시킨 처지에 무슨 렴치로 증서를 돌려달라는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래도 토성랑에서 오성재와 이웃해 사는 리재익이 대문가로 향한 그를 불러세웠다.

 

《자네가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지 누가 모를라구? … 임자, 마음 푹 놓구 농사나 착실히 짓게. 일전에 웬 젊은 군대가 와서 임자이름으로 토지소유권증서를 교부해갔네. 김일성장군님께서 그리하라고 하셨다더군.》

 

《장군님께서요?》

 

믿어지지 않는 말이였지만 믿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왜 돌려주지 않고 그냥 가지고갔을가?

 

《다른 말은 없었나요?》

 

《없었네.》

 

곁에 앉았던 박아바이가 리재익에게 한눈을 끔적하며 오성재의 마음을 달구어놓았다.

 

《임자가 땅을 어떻게 다루는가 보구 결심하시려고 장군님께서 그 증서를 도로 가져오라고 분부하셨을수도 있지. 비록 임자이름으로 증서는 만들어놨지만 농사를 잘 짓지 못하문야 어떻게 임자한테 그 땅을 주겠나?》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소리같았다. 땅타발을 하던 놈이 농사까지 잘못 지으면 그땐 정말 그 땅을 가지겠다는 말을 할수 없지 않는가.

 

그래서 오성재는 새벽부터 밭에 붙어살고 오후에는 공사장에 나가군 했다. 제땅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이 공사에 자기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는것이 보통벌농민의 도리라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서성교를 넘은 오성재는 중성리의 골목골목을 지나 정근식의 집대문을 두드렸다. 날이 어두웠기로서니 은인의 집을 헛갈릴 그가 아니였다. 집주인들은 저녁식사도 안하고 기다리고있었다. 정근식은 오성재를 상앞으로 이끌었다.

 

《어서 나앉게. 수영이가 자네 온 다음에 함께 하자구 해서 기다리고있었네.》

 

《아니, 원…》

 

오성재는 말문이 막혔다. 이 집 식구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인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안주인이 약주를 가지고 들어와 수영에게 넘겨주었다. 수영은 외삼촌의 알른거리는 놋잔에 먼저 술을 붓고 오성재에게도 부어주었다. 오성재는 선뜻 술잔을 손에 쥘수 없었다. 여태 그런 술잔으로 술을 마셔본적 없는 오성재였다.

 

《어서 들자구.》

 

정근식이 먼저 술잔을 내였다.

 

《오아저씨두 어서 드세요.》

 

수영이가 재차 권해서야 오성재는 땅을 다루며 험상스러워진 손으로 작은 놋잔을 움켜쥐고 조심히 입으로 가져갔다. 손이 자꾸 후들거려 아까운 술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따끈한 술이 목젖을 적시며 넘어가자 감미로운 술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난생 처음 마셔보는 약주였다.

 

《내가 주는 술도 한잔 받으라구.》

 

그제서야 오성재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정근식의 손에서 술주전자를 뺏아들었다.

 

《이러지 마시우다. 내가 어떻게 주인어른의 술을 먼저 받겠나요. 제가 한잔 붓겠수다.》

 

정근식은 마다하지 않았다. 두사람은 권커니작커니 하면서 몇순배 돌았다. 술기운이 퍼진 오성재는 기분이 붕 떴다. 좋은 술, 좋은 안주가 위에 들어가고 사람대접을 받으니 왜 즐겁지 않으랴. 한생이 오늘 같았으면… 지지리 천대받고 눌리우던 헌털뱅이인생에 오늘같은 날이 있다는것이 기이하게만 느껴졌고 그럴수록 이 집 식구들에 대한 고마움이 북받쳐올랐다.

 

《저… 그런데 나를 오라구 한건…》

 

《천천히 말해주겠네. 술이나 들라구.》

 

정근식은 서두르지 않았다. 밥상을 내가고 수영이도 제 방에 건너간 다음에야 정근식은 오성재를 웃방에 불러들였다.

 

《내 임자에게 긴히 부탁할게 있네.》

 

《어서 말씀하시우. 아, 주인어른 분부라면야…》

 

오성재는 무릎걸음으로 바투 다가앉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 집에서 입은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속을 태우댔는데 이쪽에서 먼저 부탁할게 있다니 오성재로서는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판이였다.

 

정근식은 권연을 붙여물고 오성재에게도 권한 다음에야 말머리를 헐었다.

 

《다른게 아니구 일전에 시인민위원회에서 보통강개수공사장에 자원출동하라는 령을 내리지 않았나? 나두 로력동원증을 받았네만 질통을 지구 공사장에 나가자니 좀 우습더군. 해방전에두 <부역>같은데 한번 나가보지 않던 내가 토목공사장에 나가서 정갱이를 걷어붙이구 일한다는게 별스럽더란 말일세. 사람마다 제 푼수에 맞는 일이 있는 법이거던.》

 

오성재는 정근식이 뭘 부탁하고싶어하는지 어렵지 않게 넘겨짚었다. 이걸 어쩐다? 그는 순간이나마 주춤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미 공사장에서는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이 로력을 사서 대신 내보내는 현상을 없앨데 대하여 강조했던것이다. 그러나 오성재는 자기를 꾸짖었다. 사람은 인정에 살고 인정에 죽는다는데 규정이 어떻소 하면서 몸을 사리면 그게 무슨 사람이랴.

 

《그런 부탁이라면 걱정마시우. 내 그러지 않아도 신세갚을 길이 없어 속이 타댔는데 이 육신을 놀려서 주인어른을 도와드릴수 있다면야… 어서 동원증을 주시우다. 난 아무래두 공사장에 매일 나가는 놈이니 주인어른 대신으로 일하구 동원증에 지장을 받아다 주겠수다.》

 

《고맙네. 내 체면에 임자에게 이런 부탁 하기가 뭣했는데…》

 

 

 

정근식이 미안해하자 오성재는 아니할 소리라는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문 제가 섭섭하지요. 다 죽게 된 로친이 이 집덕분에 살아났는데…》

 

《허허, 그게 다 제 복이지.》

 

정근식은 움쭉 몸을 일으키더니 탁자우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돈묶음을 집어들었다.

 

《아무리 자별한 사이래두 남의 품을 공짜로 쓸수야 없지. 이 돈을 받게.》

 

어지간히 두툼한 돈뭉치여서 오성재는 와뜰 놀랐다. 술이 말짱 깨는것 같았다.

 

《이건 웬 돈이웨까?》

 

《2천원일세. 열이틀품삯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성의로 알고 받아두게. 그 돈이면 저 뺑대거리나 굴원동근방에 단칸초가집이라두 장만할수 있을거네. 지금 산다는 토성랑움막보다야 낫겠지.》

 

오성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돈을 밀어놓았다.

 

《이러지 마시우다. 주인어른대신에 일하겠다는건 내 진심이우다. 돈을 받자는게 아니란 말이우다. 이 집에서 품삯을 받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요. 우리 로친이 날 가만놔두지 않을거우다.》

 

《아닐세.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난 임자에게 일을 부탁하지 않겠네. 임자가 돈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하거던.》

 

정근식으로서는 오성재의 육신을 공짜로 리용하고 죄의식에 시달리기보다는 2천원을 내놓는것이 훨씬 마음편했던것이다.

 

그러나 오성재의 고집도 여간 아니였다.

 

《그럼 나두 동원증을 안 받겠수다. 주인어른… 나도 사람이우다. 사람의 낯가죽을 쓰고야 내가 어떻게 그 돈을 받겠나요. 천벌을 받을 일이지요. 그러지 말구 동원증을 그냥 주시우.》

 

정근식은 양보할수밖에 없었다.

 

(참 순박한 사람이군. 하긴 후에 내 손으로 단칸집이라도 한채 사주는게 낫지.)

 

밤이 이슥해서야 오성재는 정근식의 로력동원증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넣고 그 집을 나섰다.

 

남산재를 넘어서니 철길건너편에는 불빛한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엊그제 태여난 초생달이 오성재에게 주위를 간신히 분간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운 달빛이였다. 오늘은 사람이구 달빛이구 자기에게 친절하기만 한것 같았다. 토성랑근방에 들어서니 이제는 눈을 감고도 제 집을 찾을수 있었다.

 

집앞에 다달은 오성재는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와뜰 놀랐다.

 

두억시니같은 검은 형체가 손전지로 오성재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쳤다.

 

《당신이 오성재씨요?》

 

《거긴 뉘시우?》

 

오성재는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가슴이 방망이질하는것을 느끼며 떠듬떠듬 물었다.

 

자기에게 《오성재씨》라고 깍듯이 부르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군가?

 

검은 형체가 전지불을 끄자 순간에 먹물을 뿌린듯 앞이 캄캄해졌다.

 

《집에 들어가 이야기합시다. 난 당신에게 복을 가지고온 사람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복이라니?

 

어쨌든 찾아온 손님이니 사연이라도 들어야 할것 같았다. 오성재는 어둠에 익숙해지자 움막의 거적문을 들쳤다. 문옆의 바람벽에 또 다른 검은 형체가 붙어서있는것을 오성재는 눈으로 보았다기보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집안에 들어가 고콜불을 켜고보니 로친네는 한켠 구석에서 잠들고있었다. 변변치도 않은 몸으로 하루종일 밭에 나가 일하고는 저녁이면 저렇게 꼼짝 못하군 한다.

 

《좌우간 들어와 앉으시우.》

 

오성재는 까닭없이 불안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뒤따라들어온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손님은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것 없는 움막안을 휘둘러보더니 알만 하다는듯 말대가리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마니짝을 펴놓은 방안에 올라앉았다. 그는 다름아닌 구진배였다. 오성재는 해방전에 구진배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지주 구문선의 집 대문안에 들어가본적이 한두번밖에 안되는데다 구진배가 원래 집에 붙어있지 않아서 두사람이 만날 기회가 없었던것이다.

 

월남하는 날 밤 대동강선창까지 짐을 져다주긴 했지만 구진배와 마주서보지는 못했었다. 구진배도 자기가 구문선의 아들이라는걸 밝히지 않기로 했다. 구진배는 불안해하는 오성재의 마음을 눙쳐볼양으로 빚문서부터 꺼내놓았다.

 

《난 서울에서 구문선어른이 보내서 왔습니다. 해방전에 오성재씨한테 미안한 일이 많았다면서 그때 일들을 사죄하는 의미로 빚을 다 없애준다고 합디다.》

 

오성재는 땅이 하늘로 바뀐다는 소리를 들은것만치나 놀랐다.

 

아직은 자기 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간의 투쟁은 불가피하다는 계급투쟁의 사회력사적원리를 알수 없었던 오성재로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오성재의 마음속 동요를 알아차린 구진배는 이때다 하고 품속에서 돈뭉치를 꺼내놓았다.

 

《이 돈은 지주어른이 살림에 보태쓰라고 보내는것입니다. 소를 한마리 사두었다가 이다음에 제땅이 생기면 농사를 잘 지어보시우.》

 

얼이 빠진 오성재는 가마니짝우에 던져진 돈뭉치를 머룩머룩 바라보기만 했다.

 

장리쌀 한말을 꿔주면서도 리자를 곱으로 물게 하던 지주가 왜 이렇게 선심을 쓰는걸가?

 

도대체 오늘은 무슨 날인가? 귀신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일생 단돈 한푼 공짜로 생겨본적 없던 자기한테 이렇게 많은 돈뭉치가 하루저녁에 두번씩이나 생길수 없지 않는가?

 

아직도 알싸한 인쇄잉크냄새가 풍기는듯싶은 새 돈뭉치였다. 그것은 오성재의 심신을 꽁꽁 얽어매는 포승과도 같은것이였다.

 

오성재는 머리를 마구 휘젓는 돈뭉치를 보지 않으려는듯 눈을 뚝 감았다.

 

《지주어른이 나한테 이 돈을 공짜로 주지는 않았겠는데 대체 날더러 어쩌라는건지 모르겠수다.》

 

이제는 구진배가 말할 차례였다.

 

《지금 공산당에서 벌려놓은 보통강토목공사에 해방전부터 지주어른의 돈이 투자된걸 아시겠지요?》

 

《그야 알지요.》

 

《지주어른은 오성재씨같은 소작인들이 홍수피해를 받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하려고 제 돈으로 공사를 벌려놓았지요. 일본이 망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지되였지만 지주어른은 공산당에서 이 공사에 손을 대는걸 바라지 않습니다. 앞으로 세상이 바뀌면 제 돈으로 공사를 마저 끝내겠다는거지요. 지금 공산당에선 장마철전까지 공사를 끝낸다고 생색을 내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립니다. 그러니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다음에 지주어른이 다시 평양에 오면 누가 공사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댔는가 따질텐데 그때 가서 지주어른을 노엽히지 말구요. 좋기는 백성들이 공산당의 선전에 속아서 공사에 열성을 부리지 못하도록 잘 타일러야 합니다.》

 

오성재는 공사를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지주어르신이 잘 리해되지 않았다. 보통벌을 안전하게 다루자면 개수공사를 하루빨리 끝내야 할텐데 그게 뭐가 나쁘다는걸가? 어째서 날 보고 공사에 훼방을 놓으라는건가?

 

《그건 안될 소리우다. 그때문이라면 이걸 도로 가져가시우.》

 

오성재는 빚문서와 돈뭉치를 결패있게 쭉 밀어놓았다. 구진배는 저으기 당황해졌다. 애비의 말은 오성재가 땅이나 돈밖에 모르는 무골충이라고 했는데 웬걸, 눈앞의 돈뭉치를 마다하는 배짱이 있을줄이야.… 해방바람에 어제날의 소작인도 담이 커졌는가.

 

오성재를 민심교란의 제물로 리용해볼가 했는데 정작 만나고보니 아버지가 말하던 노예가 아니였다. 구진배는 자기가 이북의 변화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일을 꾸미려 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다가 손털고 돌아설수야 없지 않는가.

 

구진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성재를 안심시켰다.

 

《그 돈은 넣어두시우. 지주어른이 다 생각이 있어서 돈을 보냈겠지요. 하여튼 지주어른의 뜻을 잊지 마시우. 이다음에 지주어른이 다시 오면 서로 웃으며 만나야지요.》

 

오성재는 구진배가 떠나는것도 바래워주지 못하고 방바닥에 놓인 돈뭉치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난뱅이에게 있어서 눈앞의 돈뭉치는 정신을 흐리게 하는 마약과 같은것이였다.

 

(내가 이 돈을 가져도 정말 일없을가?)

 

그는 여러가지로 그 타당성을 찾아보았다. 지주어른이 지난날을 사죄하는 의미에서 준것이 분명하다면 가져도 되지 않을가? 아까 정근식이 주는 돈은 받을 체면이 없어서 사양했지만 이 돈이야 마다할 필요가 뭔가.

 

아무렴, 옛날에 치르던 고역을 생각하면야…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꺼리낄게 없을것 같았다. 오성재는 빚문서와 뭉치돈을 궤짝안에 간수하고 자리에 누웠다. 이쪽저쪽으로 돌아누우며 잠을 청해보았으나 정신은 더 새록새록해졌다.

 

저 돈을 어떻게 쓸가. 뺑대거리쯤에 집을 한채 살가, 아니면 소를 한짝 살가? 아니면… 아니면… 로친네치마저고리도 한감 끊어야겠고… 그보다는 농쟁기부터 그쯘히 마련하는게 더 급하지…

 

수중에 돈이 생기니 마음이 커지고 평생 묵어있던 온갖 소원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쳐드는듯싶었다. 돈이 없어 풀수 없었던 소원들, 소박하고 또 소박한 그 소원들은 해를 넘기고 년대를 이어가면서도 가슴속 깊이에서 곰팽이도 끼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었던것이다.

 

(그래, 집을 사는건 그만두자. 지금 사는 움막도 판자를 좀 사다가 지붕이랑 바람벽이랑 잘 손질하면 그런대로 살수 있지. 이 돈으로는 소나 한짝 사매고 보습이랑 농쟁기를 마련해야겠어. 농사를 몇해 잘 지으면 집 한채 살 돈이 생기겠지.)

 

그날 밤 오성재는 난생처음 비단조끼에 명주바지저고리를 입은 자기 모습을 꿈에서 보았었다.

 

한편 오성재의 집을 나선 구진배는 밖에서 망을 보던 심복을 데리고 토성랑을 떠났다. 오성재를 만났던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인지 속에 돌맹이를 매단 기분이였다.

 

전지불도 안 켜고 가다가 진창에 발목까지 빠지자 그의 입에서는 절로 쌍욕이 나왔다. 그는 이런 밤길을 걷고있는 자신이 보잘것 없고 사람스럽지 못한 시정배로 느껴졌다. 공사를 파탄시키는것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리익에 부합되는것이라고 대의명분을 내세우긴 해도 어쨌든 구질구질한노릇인것만은 틀림없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말로 계급의 리익을 지키는 정의로운것이라면 무지렁이같은 오성재따위나 도적고양이처럼 찾아다니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담하게 행동해야 할것 같았다.

 

서문동을 거쳐 종로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는 자정이 넘은 뒤였다. 거리는 인적기 하나없이 고요하였다.

 

세상에 살아움직이는것은 자기네 둘뿐인듯싶었다. 문득 구진배는 심복의 품안에 있는 삐라뭉치가 생각났다. 이 주변은 평남도당청사를 비롯해서 공산당의 중요기관들이 자리잡고있는 번화한 곳이여서 한번도 얼씬해본적이 없었다. 미리 계획했던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조용한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과 무덤속 같은 정적이 대의를 위해 남아답게 행동하라고 검은 피를 끓게 해주는듯싶었다.

 

《날 따라와.》

 

구진배는 졸개에게 속삭이듯 지시하고 옆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서문고녀의 담장을 끼고 한참 가다가 전차선이 지나간 큰길과 마주치는 곳에 멈추어섰다. 어둠속에서도 담장에 붙어있는 종이장이 눈에 띄였다. 자세히 볼수는 없었지만 《평양시민들은 건국의기로 보통벌에 애국제방을 쌓자!》는 표어가 분명했다.

 

구진배는 표어를 와락 찢어버리고 졸개에게 명령했다.

 

《여기다 붙여!》

 

《예.》

 

졸개는 어느새 삐라에 풀을 먹이고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저앞에서 전지불이 번쩍거리고 뒤따라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구얏! 서라!》

 

서라 하면 뛰여야 하는것이 구진배와 같은 족속들의 생존법칙이였다. 뛰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구진배는 벌써 본능적으로 땅을 차며 뛰였다. 삐라를 손에 들었던 심복도 어느새 다 줴버리고 구진배와 마라손경주라도 하듯이 내달렸다. 서라고 웨치는 고함소리가 뒤따랐으나 그럴수록 죽기내기로 달렸다. 전차선로를 따라 달리다가 큰길로만 달리면 재미없을것 같아 옆골목으로 꺾어들었다. 고함소리에 뒤이어 심장을 멎게 하는 총소리가 야밤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래도 멈춰설수 없었다. 이제 멈춰서면 자기 운명은 영원히 정지될것이다. 두번째 총성이 울리는것과 동시에 옆에서 씩씩거리며 달리던 심복이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어푸러졌다. 그래도 구진배는 몇발자국 더 내달렸다.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하고 돌아섰다.

 

심복은 자기의 거처지를 알고있었다. 만약 심복이 부상을 당한채 보안서원들의 손에 잡힌다면 자기도 끝장이였다. 대의를 위해서는 심복이 깨끗하게 죽어야 했다.

 

이것은 구진배가 단도를 뽑아들고 심복에게 달려가는 짧은 순간에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한 론거였다. 구진배는 땅바닥에 코를 박고있는 심복의 목덜미어방에 힘껏 단도를 찔러넣었다. 저승길로 가는 인생의 마지막경련이 단도자루를 통해 손바닥에 전달되였다. 단도를 뽑는 순간 뜨끈한 피가 얼굴에 확 뿜어올라왔다. 구진배는 팔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다시 돌아서서 달렸다. 생사를 겨루는 정황이여서 발이 땅에 닿는지도 몰랐다.

 

숨가삐 달리던 구진배는 오물장을 지나다가 뚝 멈춰섰다. 지형을 알수 없는 조건에서 자꾸 골목으로만 들어가다간 오히려 더 막다른 처지에 빠질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는 어둠속에서 가까와 오는 보안서원의 발소리에 쫓기워 큼직한 쓰레기무지에 얼른 몸을 묻었다. 뒤따르던 보안서원은 전지불로 쓰레기장을 둬번 훑어보고는 옆골목으로 뛰여갔다.

 

쓰레기무지에 얼굴을 박고 새우처럼 꼬부린채 꼼짝않고있던 구진배는 주위가 조용해진 다음에야 조심히 얼굴을 들었다. 그때에야 그는 쓰레기장에서 풍기는 더러운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옷을 대강 털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옷에 께끈한것이 묻었는지 아니면 그런 의심때문인지 더러운 냄새는 코밑을 자극하며 그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보안서원에게 잡히지 않은것이 오히려 구슬퍼지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 쓰레기장에 신통히 어울리는 존재란 말인가? 만약 그 보안서원이 거기서 나를 발견했다면 나는 절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혀있을 몸이 아니라는것만이라도 확인했을게 아닌가.)

 

구진배는 자기라는 존재의 고귀함을 그렇게라도 인정받고싶었다. 그러다가 또 반대쪽으로 자기를 위안했다. 까짓거, 죽은 정승 산 개만도 못하다는데 고귀한 몸으로 잡혀죽느니보다는 쓰레기같은 모양을 하고라도 살아남는것이 중요한것이다. 그런즉 자기를 구원해준 그 쓰레기장은 자애로운 부처님이 안내해준 극락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는 자정이 넘어서야 자기의 은거지인 로이문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작지만 그래도 담장을 쌓고 대문을 세운데다 부엌에 파놓은 움에는 집뒤로 빠지는 비상구까지 있어서 은신처로는 맞춤했다. 방안에는 로이문이 술병과 안주접시를 올려놓은 쪽상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왜 이처럼 늦으셨소?》

 

그러다가 얼굴이며 옷에 피칠갑을 한것을 보고는 들었던 술잔을 떨구며 화닥닥 일어났다. 피비린내가 방안을 꽉 채웠다. 살기가 번뜩이는 그 눈길과 마주치기조차 섬찍해서 로이문은 구진배의 등뒤를 살피며 혀아래소리로 물었다.

 

《뚱보는?》

 

《죽었다.》

 

구진배는 단마디로 내뱉았다. 로이문은 온몸을 사시나무떨듯 하며 더 물어볼념도 하지 못했다. 구진배는 피에 젖은 양복저고리를 팔에서 뽑아 아무렇게나 훌 집어던졌다. 저고리는 날개를 편 박쥐처럼 방안을 가로질러 웃목에 날아떨어졌다. 로이문의 처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없이 그 옷을 뭉그려가지고 부엌에 나가더니 조금 있다가 더운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구진배는 대충 손과 얼굴의 피흔적을 닦고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잔이 성차지 않아 병채로 입에 가져다댔다. 꿀꺽꿀꺽…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게걸스레 물마시듯 목을 잔뜩 젖히고 말짱 다 마셔버렸다.

 

그때까지도 로이문은 얼혼이 나가서 앉지도 못하고있었다.

 

《앉으라구.》

 

나이는 구진배가 썩 아래지만 종속관계로 보면 상급이여서 로이문은 공손히 자리에 앉았다.

 

《일이 어떻게 돼가나?》

 

《그럭저럭…》

 

로이문은 적당히 대꾸하려다가 미친개처럼 빨간 눈으로 자기를 사납게 노려보는 구진배의 시선과 마주치자 앉은자리에서 꼿꼿이 굳어졌다.

 

《우리가 하는 일은 빼앗긴 세상을 되찾는 대업이다. 피를 물고 해야 할 일을 그럭저럭이라구?…》

 

로이문은 구진배의 칼날이 당장이라도 제 몸을 쑤시고 들어오는것만 같았다.

 

《잘못했습니다.》

 

구진배는 제 손으로 술을 부어마시고서야 좀 누그러진 어조로 뒤를 달았다.

 

《백성들이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가 장마철전으로 공사를 끝낸다구 죽을둥살둥 모르고 나서면 야단이다. 중요한건 백성들이 합심하지 못하게 하는거야. 그래야 일에서 능률을 못 내거던.》

 

구진배는 로이문의 긴장을 풀어줄양으로 술잔을 그에게 넘겨주며 덧붙였다.

 

《아무 일에서나 요진통을 찾아야 해. 그리구 공사판에선 주먹 쎈 왈짜들이 판을 치는 법이야. 머리를 짜보라구.》

 

로이문은 어느새 술잔을 비우고 입술을 빡 씻으며 얼른 주어섬겼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공책임자녀석도 좀 주물러보려구 합니다.》

 

《어떤 놈인가?》

 

《장혁수라구 토성랑에서 사는 놈인데 해방전부터 공사장에서 일하던 놈입니다. 얼마전까지 향토건설돌격대를 책임지고있었는데 이번에 시공책임자로 발탁이 돼서 제세상처럼 날칩니다.》

 

《장혁수, 장혁수…》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봐도 처음 듣는 이름이였다.

 

《어쨌든 우린 목숨을 걸고라도 장마철전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 공사는 옛 주인과 새 주인간의 싸움이야. 우리는 그들이 절대로 이 땅의 주인노릇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다시 주인이 될수 있어.》

 

《지당한 말씀입니다.》

 

《공사장주변의 식당을 장악하는 일은 어떻게 됐소?》

 

《그건 념려마십쇼. 공사장과 가까운 뺑대거리에 국수집을 하나 손에 넣었습니다. 원래는 국수사리나 팔아서 연명해가던 집인데 제가 돈을 주어서 영업을 확대하게 했습니다.》

 

《잘했다. 주변음식점들보다 값을 눅게 해서 로동자들이 많이 쓸어들게 하구 그 기회에 잡소리들이 많이 퍼져서 일을 보이코트하게 해야 한다. 또 한가지는 최악의 경우에 제방을 폭파해야 하는만큼 폭약과 도화선을 준비해야겠다.》

 

《마침 공사장에서두 장석채취때문에 발파를 하니까 제가 노력해보지요.》

 

구진배는 술병 두개를 더 눕히고서야 습기찬 움속에 펴놓은 잠자리에 두더쥐처럼 들어박혔다. 통풍이 안되는 움속에서 하루밤만 자고나오면 몸에서는 곰팡이냄새와 땀내가 섞인 시취같은 냄새가 코를 찌르군 했다. 그래도 거기가 안전하니 냄새쯤은 참을수밖에 없었다. 하긴 밝은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기를 포기한 구진배이고보면 세상에 날 때부터 그 냄새가 몸에 배여있었는지도 모른다.

 


 

♦ 헌털뱅이 : 《헌옷》을 천하게 이르는 말.

♦고콜불 : 고콜에 켜는 광솔불.

⇒고콜(방안에 광솔불을 켜기 위하여 바람벽에 광솔을 끼울수 있게 만들어놓은 자리)

⇒광솔(바늘잎나무의 뿌리와 줄기에서 송진이 엉겨붙은 나무살이 생긴 부분)불.

⇒바늘잎나무(《잎이 바늘모양으로 생긴 나무》를 통털어 이르는 말. 잣나무, 소나무, 이깔나무, 노가주나무 등이 이에 속한다.)

♦ 서발막대 : 서발이나 되는 막대란 뜻으로 《긴 막대》를 이르는 말.

♦ 무골충 : ① 뼈없는 벌레. ② 《주대가 없는 사람》을 홀하게 이르는 말.

♦ 뺑대거리 : 전날에, 뺑대쑥이나 수수대 같은것으로 어설프게 지은 집들이 들어앉은 빈민촌거리.

 

 

연재

►장편소설《새 나라》 31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04-22 12:09:50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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