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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기자의 '내가 본 박정희'(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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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30 02:0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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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기자의 '내가 본 박정희'(연재)1 

1장 - 미 정보기관은 5.16을 지원했다.

 

 

 

 

 

눈 속에서 펼쳐진 케네디 취임식

 

6.25가 터졌을 때 나는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생이었다. 막 들어간 대학을 석 달도 다니지 못한 채 학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 전쟁 중인 1951년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피난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으셨던 어머니가 나의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본에서 메이지대학 경제학부를 마친 후 와세다대학 국제법 대학원에 다니면서 당시 한국 최대의 여성지였던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1956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1961년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우선 61년 1월 미국의 일간지 [존 크로니클]의 초청으로 두 달 간 미국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존 크로니클]은 오랜 전통의 지방신문으로서 이승만에 대해 많이 보도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나를 초청했던 것이다.

 

 

 특히, 1월 20일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나는 60년 11월 취임식 준비위원장인 험프리 상원의원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한국의 [여원]이라는 여성지의 도쿄지국장이다. [여원]은 미국의 [레이디스 홈 저널]과 같은 성격의 품위있는 여성 잡지다. 케네디 대통령의 역사적인 취임식 광경을 우리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싶다. 부디 나의 취재 신청을 허가해 주기 바란다."

 

 편지를 보낸지 한 달 후 거짓말처럼 한 묶음의 초청장이 왔다. 취임식 및 그 부대 행사들에 대한 취재 초청장이었다. 일본 기자들도 "전에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 했다. 내가 이 초청장을 받기까지 사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펄 벅 여사가 애를 많이 써 주었다. 펄 벅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1961년 1월 16일 내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연일 내리는 눈으로 워싱턴은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이미 대통령 취임식 축하 전야제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워싱턴 시는 물론이고 주변의 버지니아, 메릴랜드주의 호텔들까지도 미국 내는 물론 외국에서 온 수백만의 축하객들로 초만원이었다. 취임식장은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다. 취임식 후 백악관까지 축하 퍼레이드가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백악관 정문 앞에 마련된 퍼레이드 접견대와 나무 의자들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1월 20일, 무릎까지 눈이 쌓이던 날 나는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거행된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그 유명한 연설을 경청할 수 있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

 

 좌석이 앞자리라서 젊은 케네디 대통령은 물론 그의 부인 재클린, 큰딸 캐롤라인의 모습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후 나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땅에 정착해 케네디, 존슨,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에 이르는 장장 8명의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케네디의 취임식은 그 가운데 그다지 요란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식 두 달 전에 제왕절개 수술로 아들을 출산한 몸이었다. 그날따라 눈은 멈출 줄 모르고 사람들의 입에는 햐얀 입김이 끊이지 않았다. 비서들이 담요를 가져와 재클린의 무릎에 덮어 주고 계속 뜨거운 커피를 갖다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취임식을 마친 케네디 대통령 부부는 오픈카로 백악관을 향해 퍼레이드를 펼쳤다. 연변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케네디 부부가 손을 흔들 때마다 군중들을 "와와"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앞다투어 악수를 청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는 시종 미소를 지으며 '생큐'를 연발했다.

 

 백악관 정문 앞에서는 전국 갖 주의 특생있는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이후 취임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공식행사가 모두 끝났을 때 눈은 10인치 이상이나 쌓여 있었다. 교통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참석자들은 자동차를 길가에 주차에 놓은 채 모두들 걸어서 각자의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 나는 워싱턴 16번가에 있는 YMCA 호텔에 묵었는데, 거기에서 기억이 인상깊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 페서디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서 케네디 선거운동을 했는데 당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케네디 선거운동 하는 동안 공화당측으로부터 얼마나 압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화당 대통령 전성시대 아니었습니까. 선거운동 하려고 책상을 가져다 놓으면 지방 주경찰이 와서 '여기에 놓지마라' , '저리로 옮기라'는 둥 또 '이것도 선거법 위반, 저것도 선거법 위반'하는 바람에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막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필자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을 알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피땀흘려 개척한 땅을 백인들에게 모조리 빼앗긴 것입니다. 그 문제로 소송중인데 케네디가 당선돼야만 그 소송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케네디 당선을 위해 뛰었던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 인디언의 역사를 취재하러 한 번 캘리포니아에 와 주길 바랍니다."

 

 그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필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한 맺힌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살펴보니 미국 정부의 내무성에 아메리칸 인디언 국이 있기는 한데 간부자리는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예산도 인디언들을 위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었다. 
 

 케네디 취임식 때 발생한 또 하나의 사건은 훗날 나의 남편이 된 최동현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과의 만남이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우선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당시 주미대사는 장리욱 씨였다. 나는 그가 서울법대 학장을 재직하던 시절 인사를 드린 일이 있었다. 장 대사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미스 문 참 대단하네. 케네디 취임식 초청장 가지고 워싱턴에 나타난 사람은 미스 문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최동현 특파원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봐요, 최 기자. 여기 미스 문은 한국의 애니 파일(미국 [UPI 통신]의 유명한 종군 여기자)이야. 미스 문, 우리 최 기자는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워싱턴 특파원입니다. 서로 인사하지."

 

최 특파원은 나의 안내역을 자청했다. 다음 날 그는 고물 폭스 바겐을 몰고 YMCA 호텔에 나타났다. 그 차를 타고 국회의사당까지 간것은 좋았는데 취임식 후 시내 미술관에서 열린 축하무도회에 갔다가 돌아노는 길에 그만 문제의 폭스바겐이 고장나 버렸다. 덕분에 나는 무도회 때 입었던 롱드레스 차림으로 신발을 벗어 들고 씨근덕거리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숙소까지 걸어와야 했다. 하긴 차가 고장나지 않은 사람들도 폭설로 차를 세워 두고 걸어가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에서 도쿄로 돌아온 후 최 특파원으로부터 계속 편지가 날아왔다. 구혼의 편지였다. 인연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61년 4월 나는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등록도 했다. 백악관 출입기자증을 내주기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14세 이후 나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슴을 알게 되었다. 주함 미대사관의 조사관이 통역자를 데리고 나의 본적지인 경북 김천에까지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간 후 최 특파원과 나는 급속히 가까워져 우리 집안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5월 6일 주미 한국대사관저에서 장리욱 대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집안에서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그가  혈혈단신의 이북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가 결혼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발발한 5.16 군사 쿠데타 때문이다.

 

김윤환의 형 김규환은 경북 중학 좌익 학생운동 지도자

 5.16 당시 워싱턴에 주재하던 한국 특파원은 [합동통신]의 이용후,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최동현, 그리고 [조선일보]의 필자 이 네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워싱턴에서 제일 먼저 안 않국 사람은 아마 남편 최동현이 아닐까 싶다.
남편은 "민족교육은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제시대에 서울에 와서 중앙고보에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았는데 3.8선과 곧이어 터진 6.25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이다.

 이남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그는 미국에 오기 전 기자 생활을 해서 모은 얼마간의 돈을 어머니처럼 믿고 따르던 같은 평안도 출신의 하숙집 주인 차씨 아주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그런데 결혼도 하고 해서 돈이 필요해지자 남편은 한국시간으로 61년 5월 16일 꼭두새벽에 전화통을 붙들고 그 아주머니에게 맡긴 돈을 보내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까 총소리가 났는데 방송에서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남편은 돈 보내라는 용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황급히 전화를 끊더니 도널드 맥도널드 미 국무성 한국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데 아십니까? 모르겠다고요? 알겠습니다."

남편은 이번에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도 깜깜부지였다. 결국 서울에 연락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와 남편은 주동자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전화통에 매달렸다. 얼마 후 한 외신에서 "5.16의 주동자는 전직 공산주의자인 박정희, 김종필" 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남편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다른 이북 출신들처럼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 그가 박정희, 김종필 등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크게 우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5.16 주체들의 사상 문제 때문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5.16이 일어난 지 한 달쯤 돼서 나와 같은 대구 출신이자 일본 유학생 동료이기도 한 동양 통신사 외신부장 김규환이 워싱턴에 왔다. 현 한나라당 고문 김윤환의 친형이기도 한 김규환은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다가 6.25동란으로 중퇴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밀항해 한국의 조선대 졸업장을 가지고 청강생으로 동경대에 다녔다. 50년대 일본에 있던 한국 남자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그 같은 '밀항패'였다.

그 뒤, 김규환은 동향 출신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의 후원으로, 자유당 시절 김성곤이 삼킨 동양통신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동경대에 다녀 한국 최초로 신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성곡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 4대 민의원 당선하여 정치 참여 이후 6,7,8대 국회의원 역임)

 그는 4.19 이후 귀국해 동양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61년 6월 IPI(국제언론인협회) 총회가 유럽에서 열렸는데, 김규환은 사장 김성곤을 수행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김성곤은 먼저 귀국하고 김규환은 미국에 들렀던 것이다.

 당시 남편은 동양통신사로부터 받을 밀린 월급도 받아낼 겸 해서 김규환을 집으로 초대했다.

"미스터 김, 그런데 이번에는 용하게 미국 비자 받았네요?"
- "하여간 미국놈들 굉장합디다. 공항에 떨어지자마자 FBI가 졸졸 미행하는데 혼이 났습니다."

자기 회사 외신부장이긴 하지만 김규환을 개인덕으로 잘 모르는 남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이 둥그래졌다.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김규환의 애인이자 나의 친구인 ㅈ의 소식을 물었다.

"ㅈ은 지금 보스턴에 있어요?"
- "예."

"이번에 만납니까?"
-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이것 봐요. 미스터 김. 김성곤 씨가 지금 우리 남편 밀린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돌아가면 김성곤 씨에게 말해서 월급 좀 보내 주세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그가 돌아가고 난 후 남편이 물었다.

"여보, 아까 그게 무슨 소리요? FBI가 왜 그사람을 미행한다는 말이요?"

- "규환이가 옛날에 남로당 했거든요. 경북중학 시절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고 대구 10.1 사건 때도 가담했지요. 6.25 때는 인민군 군복까지 입고 행세했는 걸요."

"뭐요?"

-"규환이가 그것 때문에 경찰에 쫓겨 다닐 때 내 친구 ㅈ이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러다 그 애가 먼저 미국으로 유학갔는데 '미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대요. 규환이가 일본으로 밀항해 온 후 미국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비자가 안 나와서 결국 못 갔어요. 그러다 4.19 나고 나서 김성곤씨 덕으로 한국에 돌아가 동양통신 일을 하게 된거죠. 자유당 때 주일 한국대표부의 유태하 참사관에게 이화고녀 나와 미국 유학 간 외동딸이 있었는데 유 참사관 부인이 규환이를 사윗감으로 탐냈거든요. 동경대에서 박사를 딴 수재라고요. 그래서 미국 보내서 사위 삼으려고 미국 대사관에 알아보는데 '이 사람은 과거 좌익 전력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절대 비자 안 나온다' 고 하더래요. 그래서 규환이가 미국 오는 건 결국 포기 했다던데 이번에는 용케 비자를 받았네요."

"그런데 김성곤 씨가 어째서 그사람을 봐줬지요?"

-"김성곤씨도 빨갱이 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그사람은 일제 때는 남대구경찰서 순사로 칼을 차고 다니더니 해방 후에는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들어가 대구 10.1 사건 때 경북도 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을 지냈고, 부인 김미희는 여성동맹 위원장을 했어요. 김성곤은 경북 지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 황태성과도 친한 사이였어요. 6.25 때 그 사람이 인민군 장교 계급장을 달고 서울 거리를 활보 하는 걸 본 사람도 있어요."

김성곤은 그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25 때 이기붕이 대구로 피난 오자 그와 사귀어 자유당이 몰락할 때까지 재정부장을 지낸 수완 있는 인물이었다. 이기붕을 등에 업은 위세에다 한국 운크라(UNKRA -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단) 단장 콜트 장군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성 방직을 설립해서 기업가로 승승장구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이승만이 '내 아들' 이라면서 뒤를 봐주던 연합신문사 양우정 사장과도 대구 피난 시절 친교를 맺어 연합신문 이사직을 맡았다. 그런데 연합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정국은이 간첩으로 몰린 이른바 '정국은 사건'으로 양우정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서 회사를 빼앗아 연합신문 사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후 동양통신까지 인수했다.

 자유당 재정부장에다 신문사, 통신사까지 소유하게 된 김성곤은 자식들을 모두 도쿄에 유학 시키면서 도쿄에 부지런히 왔다갔다 했다. 내가 김성곤을 처음 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김성곤도 4.19 이후 마침내 부정축재자로 걸려 들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법망을 무사히 빠져 나온다.

60년 12월 내가 미국 [존 크로니클] 신문사 초청으로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무렵에 나는 도쿄에 온 김성곤과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양통신과 미국 UP통신사의 계약 갱신을 위해 자기도 곧 미국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문 기자, 내 처가 막내를 임신해 지금 만삭이라 곧 출산하러 미국으로 떠날텐데 말이오. 미국에서 출산을 하면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에게도 시민권을 준다는게 그게 사실인지 좀 알아봐 주시오."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럴리가 있습니까?"

"하여간 좀 부탁하오. 뉴욕에서 만납시다."

나는 내심 '이 사람은 그런 전력을 가지고도 정권이 부침할 때마다 교묘하게 살아남더니 이젠 미국 시민권까지 필요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남편은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어느 놈이 암까마귀고 어느 놈이 수까마귄지 알 수가 없구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09-30 02:22:37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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