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유물에 깃든 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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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순영 작성일13-02-02 19:2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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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포화가 멎은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오늘도 전쟁로병들은 잊지 못할 사연들이 깃든 전시유물들을 소중히 간직하고있다.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사는 전쟁로병 박찬우에게도 수십년간 정히 간직해온 공화국기발이 있다.
《내가 이 공화국기발을 받아안은것은 1951년 2월이였습니다.》
이제는 80고개를 눈앞에 둔 백발의 박찬우로인은 어제이런듯 생생히 떠오르는 그날을 더듬으며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당시로 말하면 인민군대의 재진격에 의하여 서울이 또다시 해방을 맞이한 감격과 환희로 설레이고있던 때였다.
어느날 서울시 녀맹과 민청조직의 성원들이 박찬우가 속한 부대에 찾아왔다. 그들은 정성껏 마련한 원호물자들을 군인들에게 넘겨주고 축하공연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한 녀맹대표가 부대적으로 제일 어린 전사인 박찬우에게 공화국기발을 안겨주며 남녘땅을 해방하고 이 공화국기발을 제주도 한나산에 띄워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였다.
순간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박찬우는 자기의 두손에 받쳐든 공화국기발을 눈여겨보았다.
한뜸한뜸 정성스레 바느질하여 만든 크지 않은 기발이였다. 그러나 박찬우에게는 그것이 결코 소박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하루빨리 인민의 새 나라, 김 일 성장군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누리고싶은 자기의 소원이, 아니 온 남녘땅인민들의 념원이 그대로 어려있는 기발이였던것이다.
바로 그 념원을 안고 용약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박찬우였다.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시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곧 의용군에 입대하였고 얼마후에는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14살이였다.
나이가 어려 입대가 불가능하였지만 박찬우는 무작정 떼를 썼다. 총도 쏠수 있고 적들속에 들어가 정찰임무도 수행할수 있으니 꼭 입대시켜달라고 청원하는 소년의 절절한 목소리는 부대지휘관들을 감동시키고야말았다.
이렇게 되여 그는 조선인민군의 당당한 전사가 되였고 서울을 해방하는 전투에도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
박찬우는 공화국기발을 쓰다듬으며 자기가 입은 군복을 새삼스럽게 눈여겨보았다.
사랑하는 고향사람들과 온 남녘땅인민들의 절절한 념원을 기어이 실현해야 할 임무가 바로 총잡은 병사, 자기의 두어깨우에 실려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박찬우는 용감히 싸웠다.
미제원쑤놈들과 치렬한 격전을 치를 때에도 그의 총대에는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이 펄럭이였고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그의 품속에는 늘 그 기발이 간직되여있었다.
3년간의 전쟁은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루지 못한 조국통일의 념원은 박찬우의 가슴속에서 그 기발을 순간도 떼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과학탐구의 나날을 보낼 때에도, 연구사업으로 밤낮이 따로없는 긴장한 전투를 벌릴 때에도 그는 언제나 그 기발을 안고살았다. 부교수가 되던 날에도, 박사학위를 수여받던 날에도 박찬우는 그 사연깊은 전시유물앞에 마음을 세워보군 하였다.
박찬우로인의 맏아들 박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아버지의 전시유물에 깃든 사연을 알게 된것은 인민군대에 입대할 때였습니다.》
박진이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던 날 그의 아버지는 지금껏 고이 간수해온 공화국기발을 아들의 품속에 넣어주며 거기에 깃든 사연을 들려주었다.
며칠후 인민군대의 한 지휘관은 이런 편지를 받게 되였다.
《…이 로병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공화국기발을 품고 입대한 저의 아들이 꼭 최전연부대에서 복무할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조국통일성전의 맨 앞장에서 싸울수 있게 말입니다. …》
이렇게 되여 박진은 최전연부대에서 군사복무를 하게 되였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아들이 제대되고 이제는 손자들이 조국보위초소에 섰건만 아직도 겨레의 숙원인 조국통일은 이룩되지 못하고있다.
얼마전 박찬우로인은 한생토록 소중히 간직해온 공화국기발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기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나의 아들들과 손자들만이 아닌 이 나라의 모든 새 세대들에게 전쟁로병으로서 하고싶은 절절한 부탁을 이 공화국기에 그대로 안고왔습니다.
조국통일이 언제까지나 념원으로만 남아있을수는 없습니다. 나는 후대들이 우리 전세대들이 이루지 못한 그 념원을 꼭 실현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로병은 공화국기를 마음속에 안고산다.
아침저녁 쓸어보던 전시유물이 이제는 비록 손에 닿지 않지만 이 땅의 후대들을 조국통일위업실현에로 고무추동하는데 다소나마 이바지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하니 결코 아쉽지 않다고 하면서 그는 말하였다.
《제주도 한나산에 공화국기발을 휘날려달라던 그 절절한 부탁이 실현될 날을, 수십년세월 헤여져 살아온 그리운 형제들과 뜨겁게 상봉할 통일의 그날을 이 로병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본사기자 김순영
주체102(2013)년 2월 2일 토요일 로동신문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사는 전쟁로병 박찬우에게도 수십년간 정히 간직해온 공화국기발이 있다.
60여년전의 이야기
《내가 이 공화국기발을 받아안은것은 1951년 2월이였습니다.》
이제는 80고개를 눈앞에 둔 백발의 박찬우로인은 어제이런듯 생생히 떠오르는 그날을 더듬으며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당시로 말하면 인민군대의 재진격에 의하여 서울이 또다시 해방을 맞이한 감격과 환희로 설레이고있던 때였다.
어느날 서울시 녀맹과 민청조직의 성원들이 박찬우가 속한 부대에 찾아왔다. 그들은 정성껏 마련한 원호물자들을 군인들에게 넘겨주고 축하공연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한 녀맹대표가 부대적으로 제일 어린 전사인 박찬우에게 공화국기발을 안겨주며 남녘땅을 해방하고 이 공화국기발을 제주도 한나산에 띄워달라고 절절히 부탁하였다.
순간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박찬우는 자기의 두손에 받쳐든 공화국기발을 눈여겨보았다.
한뜸한뜸 정성스레 바느질하여 만든 크지 않은 기발이였다. 그러나 박찬우에게는 그것이 결코 소박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하루빨리 인민의 새 나라, 김 일 성장군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누리고싶은 자기의 소원이, 아니 온 남녘땅인민들의 념원이 그대로 어려있는 기발이였던것이다.
바로 그 념원을 안고 용약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박찬우였다.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주시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곧 의용군에 입대하였고 얼마후에는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14살이였다.
나이가 어려 입대가 불가능하였지만 박찬우는 무작정 떼를 썼다. 총도 쏠수 있고 적들속에 들어가 정찰임무도 수행할수 있으니 꼭 입대시켜달라고 청원하는 소년의 절절한 목소리는 부대지휘관들을 감동시키고야말았다.
이렇게 되여 그는 조선인민군의 당당한 전사가 되였고 서울을 해방하는 전투에도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
박찬우는 공화국기발을 쓰다듬으며 자기가 입은 군복을 새삼스럽게 눈여겨보았다.
사랑하는 고향사람들과 온 남녘땅인민들의 절절한 념원을 기어이 실현해야 할 임무가 바로 총잡은 병사, 자기의 두어깨우에 실려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공화국기발과 함께 흘러온 한생
박찬우는 용감히 싸웠다.
미제원쑤놈들과 치렬한 격전을 치를 때에도 그의 총대에는 사연깊은 공화국기발이 펄럭이였고 어려운 적후공작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그의 품속에는 늘 그 기발이 간직되여있었다.
3년간의 전쟁은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루지 못한 조국통일의 념원은 박찬우의 가슴속에서 그 기발을 순간도 떼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과학탐구의 나날을 보낼 때에도, 연구사업으로 밤낮이 따로없는 긴장한 전투를 벌릴 때에도 그는 언제나 그 기발을 안고살았다. 부교수가 되던 날에도, 박사학위를 수여받던 날에도 박찬우는 그 사연깊은 전시유물앞에 마음을 세워보군 하였다.
박찬우로인의 맏아들 박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아버지의 전시유물에 깃든 사연을 알게 된것은 인민군대에 입대할 때였습니다.》
박진이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던 날 그의 아버지는 지금껏 고이 간수해온 공화국기발을 아들의 품속에 넣어주며 거기에 깃든 사연을 들려주었다.
며칠후 인민군대의 한 지휘관은 이런 편지를 받게 되였다.
《…이 로병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공화국기발을 품고 입대한 저의 아들이 꼭 최전연부대에서 복무할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조국통일성전의 맨 앞장에서 싸울수 있게 말입니다. …》
이렇게 되여 박진은 최전연부대에서 군사복무를 하게 되였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아들이 제대되고 이제는 손자들이 조국보위초소에 섰건만 아직도 겨레의 숙원인 조국통일은 이룩되지 못하고있다.
언제까지나 념원으로만 남아있을수 없다
얼마전 박찬우로인은 한생토록 소중히 간직해온 공화국기발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기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나의 아들들과 손자들만이 아닌 이 나라의 모든 새 세대들에게 전쟁로병으로서 하고싶은 절절한 부탁을 이 공화국기에 그대로 안고왔습니다.
조국통일이 언제까지나 념원으로만 남아있을수는 없습니다. 나는 후대들이 우리 전세대들이 이루지 못한 그 념원을 꼭 실현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로병은 공화국기를 마음속에 안고산다.
아침저녁 쓸어보던 전시유물이 이제는 비록 손에 닿지 않지만 이 땅의 후대들을 조국통일위업실현에로 고무추동하는데 다소나마 이바지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하니 결코 아쉽지 않다고 하면서 그는 말하였다.
《제주도 한나산에 공화국기발을 휘날려달라던 그 절절한 부탁이 실현될 날을, 수십년세월 헤여져 살아온 그리운 형제들과 뜨겁게 상봉할 통일의 그날을 이 로병은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본사기자 김순영
주체102(2013)년 2월 2일 토요일 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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