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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 <쾌걸 춘향>, <바람의 화원>에 이어 영화 <마이파더> 등 소위 잘나가는 드라마와 영화에는 감초처럼 그가 꼭 등장한다.
특히 최근에는 지난해 27만 관객을 동원한 연극 <웃음의 대학>이
10월 2일부터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에서 앙코르 공연을 하고 있다.
1998년 한국연극협회 우수공연상 연기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
굵직한 상을 수상할 만큼 연기 잘하는 배우인 그는
배우라는 직업만큼이나 사회활동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5월, 부산에서 북녘 양묘장 건립을 위해
6150명과의 ‘프리허그’에 도전하기도 하고
아름다운재단의 ‘아름다운 1% 나눔’ 캠인에 참여하는 등
사회 곳곳에서 희망을 전달하는 배우 안석환, 그를 만나봤다.
딱히 불교 신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울적할 때면 절을 찾는다는 그는 한참을 대웅전에서 절을 하다보면 울적함이 사라져 격식에 맞추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108배를 올리곤 한단다.
“절이 보이면 절에 가고 성당이 보이면 성당에 가니 신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절에 가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니 마음 한켠에 불교에 대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울적할 때면 대웅전에 가서 하염없이 절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카타르시스를 느껴 어느새 마음이 개운해집니다. 태백산에도 가끔 가서 절을 올리기도 하고 마음이 동할 때면 격식에 맞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만족할 때까지 절을 하곤 합니다.”
´능동적인 삶 위해 연기자의 길 선택’
이런 그의 이력을 보면 독특한 것이 있다. 그는 단국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으로 흔히 연기를 전공한 것과는 달리 소위 취업이 잘되는 잘나가는 전공을 버리고 연기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1979년 대학에 입학, 누구나 그 시절 데모를 한번쯤 해봤을 시절, 연극반에 들어가 젊은 시절을 의로움과 함께했고 결국은 그것이 아예 직업으로 됐다. 이유를 묻자 그는 단호히 수동적으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영학은 계산을 하고 따지는 학문입니다. 인생에 있어 계산하고 따지기만 하기 싫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넘게 DHL도 다녔으나 지시에 의한 수동적인 삶이 싫어 접고 나왔죠. 결국 대학 때 동아리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연기를 택한 것입니다. 이 길은 빨리, 늦게의 차이는 있어도 노력한 만큼 효과가 나 보람됩니다.”
그는 이제 소위 뜬 연예인이다. 한류의 영향으로 외국 관광객들이 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연극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달려와 매번 보고 가는 팬이 있을 정도이다. 늘 시간에 쫒기는 그가 돈도 되지 않으면서 시간만 많이 허비하는 연극에 꼬박꼬박 출연하는 것이 다소의외다. 그러나 그는 연극판은 자신의 고향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연극은 내가 살아온 기본으로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하려고 합니다. 집을 떠났다가도 언젠가는 돌아오게 마련인 것처럼 제게 고향은 연극판인 것입니다. 돈으로 따지면 일 년에 1억 원 이상 손해나는 것이고(인터뷰 중간에도 여기저기서 출연 섭외 전화가 많이 왔지만 연극공연 일정에 맞지 않는다며 수차례 사양을 했다.) 스타가 돼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살지 않으면 변할 것 같아서요. 연기자가 변하는 것은 캐릭터를 통해서이지 근본이 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는 배우일도 열심히 하지만 겨레하나의 홍보대사, 아름다운재단의 홍보이사 등 각종 사회단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실, 연예인이 자신의 활동 외에 사회문제까지 관심을 갖기 어려운데 어떻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냐고 묻자 그는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 연외인”이라고 답한다. 연기자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따뜻함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안 씨는 각종 사회 활동도 따뜻함을 나누는 작업의 일환으로 나를 위해 덕을 쌓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겨레가 하나가 된다면 한 방향으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따뜻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겨레하나의 사업에 동참을 한다면 스스로도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연기자의 입장에서도 따뜻함이 많은 것이 좋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제가 오히려 많이 배우고 얻습니다.”
‘순안공항에서 나던 고향 냄새’
겨레하나 홍보대사 자격으로 2005년 가을과 2007년 봄, 두 차례 평양에 방문한 그는 평양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고향이며 한 덩어리로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저도 외국을 한 스무 번 이상 나간 사람으로 공항마다 문화적으로 풍겨지는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순안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고향냄새’가 풍겨지면서 한 덩어리라는 것을 느꼈어요. 일정 중 묘향산을 내려오면서 볼이 빨갛게 얼어있는 소풍을 다녀오는 어린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너무 귀엽고 티 하나 없더라구요. 우리 애랑 똑같던데 때 안 묻었을 때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 차이는 20년이면 극복할 수 있지만 문화적 차이는 500년이 지나도 힘들 것입니다. 떨어질수록 유전자 차이가 커 완벽한 동질성 갖기 위해서는 1000년은 갈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한 평양에서는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건물의 색이 칠해지는 등 한결 밝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남쪽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신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영도자만을 칭송하는 것은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울러 우리 정부도 대북정책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인도적인 지원까지 막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남과 북이 경쟁하는 모습이 사실 애들 싸움 같습니다. 정책이 맞지 않는다면 정부차원에서만 제재를 하면 되지 민간단체까지 좌지우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북지원단체들이 20여개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들 단체가 국가 정책에 따라 사업 목적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정책이 달라진다고 밥을 적게 먹거나 안 먹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ς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인륜적인 일은 정책보다 위에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그러지 않으면서 말이죠. 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두 별을 잃고 슬픔에 잠기다’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후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안석환 씨가 아주 유명했다. 봉화마을에 직접 가서 조문을 했고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조문행렬 뒤에서 묵묵히 순서를 지켜 조용히 조문을 한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또 연예인이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은 일을 한 이유는 새치기를 한다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르침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나는 노사모도 아니었고 노무현 전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투표했고 당선된 대통령이었죠. 노무현 대통령의 삶 자체를 존경했기에 서거 소식을 듣고는 돌아가신 날부터 너무 울어 힘들 정도였습니다. 때문에 봉화마을에 꼭 한 번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무작정 봉화마을로 갔는데 많은 인파를 본 것입니다. 조문을 위한 행렬은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나 열외가 없는 상황으로 연예인이라고 새치기를 하고 인사를 드린다면 그분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이후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도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김대중 전대통령을 민족을 위한 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지만 그는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저 일반 시민의 하나로 정치적인 참여를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인 소견은 시민의 하나로 표를 통해 입장 표명을 할 뿐이지 결코 직업을 통해서 내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출세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술행위를 하는 사람은 정치에 나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친구가 있으면 조언자 역할을 할지언정 저는 절대 정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적인 일을 하는 것은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신을 버려야 좋은 정치가인데 저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현재 청운대학교에서 후배양성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현재하고 있는 연기지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카데미나 워크샵장을 세워 함께 연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문화의 목적 중 하나가 따뜻함으로 인간 자체를 정화되도록 하는 것이라는데 따뜻함으로 인간 뿐 아니라 세상을 정화시키는 안석환, 그의 바람대로 연구 공간을 세워 연기는 물론 세상을 보듬는 따뜻함까지 후배들에게 길이길이 전달되길 바래본다.
[출처: 민추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