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보] “어릴 적 내 꿈은요” 박근혜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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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8-18 10:0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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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어릴 적 내 꿈은요” 박근혜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선생님
수배생활 중인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
“제 책상 옆에는 화분이 많아요. 저를 보러 오는 분들이 가장 많이 갖고 오는 게 화분이에요. 공통점이 수감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는 점인데, 다들 수감생활 중 가장 그리웠던 것이 ‘생명’이었다면서 화분을 들고 오세요.”
책상 위에 파릇한 화분이 보였다. 행복나무, 탁상야자, 구문초, 그리고 분홍 장미 한 송이도 물병에 담겼다. 화분의 주인은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이다. 그의 사무실 곳곳에는 지인들에게서 받은 화분이 놓여 있다. 이 화분들은 그에게 매우 애틋한 존재다. 그에게 화분에 담긴 식물들이 남다른 이유는 그가 자유롭지 못한 몸이기 때문이다. 8일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수배생활 중인 이 사무총장을 만났다.

2015년 11월14일, 분노한 13만의 민중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뒤 그는 수배자가 됐다. 이날의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당시 경찰은 ‘차벽 설치는 위헌’이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로 많은 경찰버스를 선제적으로 투입해 집회 참가자들을 자극했다. 200톤이 넘는 물대포와 캡사이신으로 폭력진압 했다. 다음 날, 정부는 공권력의 폭력진압 사실은 지워버리고 민중총궐기 집행부를 IS 테러단체에 비유하는 등 불법 폭력집단으로 매도해 갔다. 총궐기를 기획하고 집행한 민주노총 집행부에 대한 수배가 내려졌다. 민주노총 집행부를 마비시키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조치였다. 조계사에서 25일 동안 피신했던 한상균 위원장은 자진 출두했다. 이영주 사무총장은 민주노총 집행부의 남은 사업을 마저 추진하기 위해 서울 중구 민주노총 사무실에 남았다.
이영주 사무총장 수배에는 ‘1계급 특진’이 걸렸다. 진급에 욕심을 내는 경찰이라면 군침을 흘릴만한 사안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경찰들로부터 포위됐다. 집과 민주노총 사무실 인근에는 이 사무총장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가 달렸다.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를 민주노총 사무실에 가둔 것이다. 사실상 수감이었다.
간간이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진행되는 기자회견에는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있으나, 수배생활로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그를 처음으로 가까운 자리에서 대면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이 사무총장의 모습에 안심이 됐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두려움’이 있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함께 박근혜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던 그였다. 내게 그는 삭발한 머리에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붉은 머리띠를 매고 있는 가장 강력한 투사였다. 하지만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톤과 선해 보이는 큰 눈망울에 긴장감은 무장해제 됐다.

“어릴 적 내 꿈은요”
그는 민주노총 첫 직선제로 탄생한 한상균 집행부 사무총장이자 민주노총 최초 여성 사무총장이다. 학부모들이 아이의 행복한 학교생활을 기대하며 맡긴다는 전교조 선생님이기도 하다.
이영주 사무총장은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던 1987년 교사가 됐다. 학생들에 이어 직장인들도 항쟁에 합류하자, 당시 학교는 퇴근시간이면 교사회의를 소집하고 내용도 없는 회의를 이어갔다. 교사들이 항쟁에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사가 된 이 사무총장의 가슴에는 학교교육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한 줄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여중생의 이야기는 이 사무총장뿐만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어릴 적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로 시작해 “이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로 끝나는 도종환의 시 ‘어릴 때 내 꿈은’은 당시 선생님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소리였다.
어릴 적 내 꿈은 – 도종환의 시
어릴 적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에게/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중략…)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생략…)
“교사로서의 삶이 그랬어요. 이런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서면서 그런 선생님이 되어버린 거죠. ‘조용히 해’, ‘가만히 있어’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이 말은 곧 지시에 따르란 말이고, 개별적 행동은 하지 말라는 말이죠. 자발적 사고보단 순종적 자세를, 자유와 민주주의보단 복종과 굴복을 가르쳤어요. 세월호에서 가장 분노했던 그 용어가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말이었어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죄를 지어선 안 되겠다”며 사표를 생각할 무렵, ‘전국교사협의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줄여서 전교협, 지금의 전교조였다. 그는 전교협 활동을 시작하면서 “학교를 뜰 게 아니라, 내가 학교를 바꾸고 학생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1989년 전교협이 전교조로 전환됐다. 이 사무총장은 전교조 발기인대회에서 투쟁선봉대에 참여했다. 이 사무총장과 선생님들은 결성식 전날 서울에 있는 수많은 대학교에 숨어 들어갔다. 경찰이 결성식을 막으면 다른 학교로 결성식 장소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최종적으로 연세대에서 결성식이 진행됐고, 당시 한양대학교에 있었던 그는 다른 교사들과 함께 ‘굴비 엮이듯’ 연행됐다. 교사가 참교육을 하겠다며 노조를 만드는 일이 노태우 정권의 눈에는 범죄였다. 이 사무총장의 전교조 활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장미꽃을 들고 찾아왔어요”
하루는 한 학부모가 그를 찾아와 “선생님, 전교조 맞았군요”라며 반겨했다. 조전혁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전교조명단을 공개한 다음 날이었다. 2010년 4월경 조 전 의원은 전교조 조합원들을 공격하기 위해 명단을 공개했지만, 막상 학부모들의 생각은 달랐다. 정치적으로 생각은 달라도 아이를 전교조 선생님에게 맡기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교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행복해하고, 이에 부모님들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때”라고 말했다.
그는 졸업생들이 장미꽃을 들고 찾아왔던 순간을 들려주기도 했다. “졸업한 지 딱 20년이 됐다며 장미꽃 20송이를 들고 졸업생들이 찾아온 적이 있어요.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애들이 노래방을 꼭 가야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갔더니, 학교 다닐 때 제게서 배웠던 노래들을 선곡해서 전체가 계속 합창을 해줬어요. 정말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어요.”
전교조 선생님으로서 졸업생들을 만났을 때, 항상 뿌듯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은 졸업한 아이들이 찾아와서 함께 술을 따라준 적이 있어요. 술 한 잔씩 먹고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한 녀석이 막 울면서 물어요. 왜 그때 때려서라도 공부시키지 않았냐고요. 노점·장사·알바 모든 걸 다 해봤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항상 적성을 살려야 한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네 행복은 네가 만드는 것이지 성적이 행복을 주진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참교육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제가 원하는 교육을 했을 뿐, 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들의 삶은 다시 그대로 이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것이었죠.”
지금의 전교조는 당시 선생님들의 문제의식과 이상적인 참교육을 행하기 위한 끊임없는 반성의 반영이었다. 이 사무총장은 “세상을 바꿔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실 안 참교육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사회를 바꾸는 일, 참교육 실천과 함께 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교조 교사들이 왜 세월호 참사 등에 분노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정치적 발언·활동에 나서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을 거쳐 간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의 큰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가득했다. 이렇게 보람 가득한 교사생활은 이제 그에게 과거의 일이 됐다.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면서 지난해 1월 그는 교사직을 잃었다. 전교조가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노조 아님을 통보 받은 후 노조 전임자들에 대한 학교 복귀 통보가 이어졌고, 복귀하지 않은 교사에 대한 해고조치가 이어졌다. 그는 본 교사직을 잃었어도 전교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박근혜 정권의 전교조 탄압에 조합원들이 굴복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었다.

박근혜와의 악연, 헌법노조의 탄생
학교민주화를 위한 돈 봉투 없애기와 학교 예산 투명화, 학생들의 정보인권을 지키기 위한 네이스(학교행정정보시스템) 투쟁, 학교를 차별화로 교육공공성을 무너뜨리는 고교선택제와 일제고사 저지투쟁 등 전교조가 그동안 펼쳐온 사회교육운동은 한국사회를 변화시켜 왔다. 전교조의 사회적 영향을 의식한 것일까, 박근혜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전교조 탄압에 나섰다.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두었다는 이유로 노조 아님을 통보한 것이다.
2013년 박근혜 정권의 집권과 동시에 전교조 제16대 집행부가 들어섰다. 박근혜와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이영주 사무총장은 16대 집행부 수석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교육을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작정하고 전교조 길들이기에 나섰다. “전교조에 조합원으로 가입돼 있는 해고 교사 9명은 교원노조법이 정한 교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노조활동을 해선 안 된다”며 노조 규약 시정명령을 내렸다. 노조 조합원에 대한 규약 한 줄만 변경하면 될 일이었다. 해고 교사들 또한 조직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먼저 탈퇴하자는 논의를 했다. 하지만 전교조는 해고자들을 내치지 않았다. 전교조 총투표에서 70%의 조합원들이 규약개정을 반대하며 9명의 해고자를 끝까지 품겠다는 결정을 했다. 조합원들은 그 결과가 법외노조 통보로 이어지리라 알고 있었다.
전교조에게 해고자는 단순 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교조 집행부에 대한 해고조치가 이어지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정권에 눈 밖에 나면 해고조치가 이어지고, 새로운 집행부를 세워야 하는 전교조의 보수화는 눈에 보듯 뻔했다. 또한 1989년 전교조 설립과도 맞닿아 있었다. 설립 당시 정권은 전교조 설립을 불법이라고 규정했고, 1500여명의 교사들을 해고시켰다. 교육을 바꾸겠다고 나선 교사들은 교직을 잃으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전교조가 해고자들을 내칠 수 없던 이유였다. 이 사무총장은 “전교조 조합원 모두를 대신해서 싸운 사람이기에 그 책임을 모두가 지겠다는 정신이었다”고 말했다.
노조 아님을 통보받은 후,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는 전교조 교사들의 집회가 열렸다. 89년 설립 이후 힘겹게 얻어낸 합법노조 신분을 잃었다. 조합원들의 심정을 상상하며 집회를 찾은 그날을 회고하던 이 사무총장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법외노조가 됐는데, 그날은 축제분위기였어요. 20년 동안 싸워 얻어낸 합법권리를 다 빼앗긴 상황인데, 그곳에 모인 조합원들이 모두 웃고 있는 거에요. 공연을 하거나 발언을 할 때도 한국의 모든 풍자문화가 살아나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눈을 마주치면, 모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어요.”


맞바꿈
사실 전교조의 합법화는 1998년 노사정위에서 정리해고와 맞바꾼 타협안이었다. 경제가 곤두박질치던 당시 민주노총은 “우리는 오늘의 밥그릇을 내일의 희망과 바꾼다”며 전교조 합법화를 받고 노동자 정리해고의 권한을 사용자 측에 넘겨줬다. 이후 수많은 사업장에서 정리해고사태가 벌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2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자동차였으며, 상징적인 인물은 한상균이었다. 이영주 사무총장은 98년 합법화의 부채를 갚고자 한상균과 함께 민주노총 첫 직선제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민주노총 내에서 소수파였던 한상균(위원장)·최종진(수석부위원장)·이영주(사무총장) 후보는 “정상의 비정상으로 회귀하는 박근혜 정권과 맞서 달라”는 요구와 바람을 안고 당선되기에 이른다. 이후 한상균 집행부는 2015년 2월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3년 사업계획을 제출했다. 2015년 ‘4.24 총파업’으로 시작해 11월 10만 ‘민중총궐기’와 2017년 “비정규직 철폐,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요구안을 담은 ‘6월 총파업’, 노조법 전면 재개정 요구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민중총궐기 이후 박근혜 정권의 탄압으로 한상균 위원장은 구속되고 이영주 사무총장은 수배생활을 이어가며 집행부의 온전한 힘을 잃었지만, 민주노총은 촛불의 마중물이 됐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서로의 분노를 확인할 수 있었던 민중총궐기는 시민들에게 광장으로 모일 수 있는 용기를 줬으며, 평화항쟁을 위한 학습기회가 됐다. “총궐기를 통해 확인했던 서로에 대한 믿음이 촛불광장으로 실현된 게 아닐까 생각해요.”

다가오는 수배생활의 끝
수배생활은 옥살이만큼이나 힘들었다. 경찰의 포위망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제한적인 사무실 공간 안에서만 생활해야 한다.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운동은 체조와 같은 반복행동 뿐이다.
안에서는 운동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식사를 엄격하게 조절해야만 한다. 이 사무총장은 오전·점심에 간단한 요기로 배를 채우고 저녁에만 식사를 한다. 매일매일 업무는 계속되지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도 제한적이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머리를 자르려고 해도 나갈 수 없다. 오후 6시 이후에는 중앙냉난방 시설이 꺼진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냉난방시설이 꺼져 있기 때문에 한여름 무더위와 한겨울 추위를 피할 길이 없다.
그나마 주말이면 면회 오 듯 민주노총 사무실을 방문하는 가족들은 이 사무총장에게 큰 힘이 된다. 이 사무총장에게는 가족과 함께 저녁산책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인 남편과 두 아들이 있다. 이 사무총장은 “주중에는 각자의 일이 바빠서 얼굴 볼 틈이 없지만, 주말이면 면회 오 듯 민주노총 사무실을 찾아온다”며 “어제는 둘째 아들이 근처를 지나면서 들려 꼭 안아줬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사무총장의 임기는 올해 말에 끝난다. 약 140일 정도 남은 셈이다. 임기가 끝나면 민주노총 3년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남아있었던 이 사무총장의 수배생활도 끝난다.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경찰에 출두하고 재판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후 전망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 사무총장은 덤덤하게 답했다. “노조사업을 범죄라고 본다면 저도 구속될 것이고, 노동조합 활동을 헌법이 보장한다고 보면 무죄가 나오겠죠. 임기를 마친 후 삶은 새 정부의 해석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여요.”
[출처: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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