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춘추’로 ‘난신적자’들 떨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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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08 12:3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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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미강 기자 승인 201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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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교수가 민플러스와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우리 작업은 현대판 ‘춘추(春秋)’를 만드는 것이고,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떠는 기록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발족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에서 책임편집인을 맡아 사업 전반을 이끌고 있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번 편찬사업의 의의를 공자가 춘추를 남긴 데 대한 맹자의 평가에 비유했다. 불편한 진실도 당연히 남겨야 할 역사란 얘기다.
그는 최근 민플러스와 인터뷰에서 “(편찬위는)여러 과거사위원회의 성과물 위에서 출발하는 거다. 다만 당시 보고서는 주요 관련자의 이름이 ○○○으로 처리돼 있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 그들을 실명으로, 그들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는 의미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 교수는 이어 “반헌법 행위자 선정기준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잡을 것이다. 이 (편찬)작업 자체는 우리 역사에서 굉장히 진보적 의미를 가지지만 기준은 보수적으로 가져가려 한다”면서 “지배자들 스스로 세운 (헌법적)기준으로 평가하자는 거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으로 따져도 중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 반헌법행위 사례에 대해선 “내란, 학살, 고문조작, 부정선거 네 가지이다. 우리 배가 더 큰 그물을 실을 수는 없다”며 "이번 작업이 잘 끝나면 이후 경제, 환경, 노동 등 얼마든지 범위를 넓혀 작업할 수 있다. 사실 5년 안에 마무리 지으려면 300명도 많은 편이다. 대중들 입장에선 300명 중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50명도 채 안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열전 대상자수를 300명으로 정한 데 대해선 “여기 300명에 들어갈 정도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얘기다. ‘내가 왜 들어갔냐’고 입도 뻥긋 못할 정도의 사람”이라며 “대한민국의 대표 악당 300명을 대표 지식인 300명이 심판한다는 콘셉트로 가려 한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필자들을 많이 참여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또 “이번 작업은 묻혀 있는 좋은 보수를 찾아내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간첩죄 무죄를 내리거나 간첩조작 사건에 수사를 거부한 검사들의 얘기도 써줄 필요가 있다”며 편찬사업이 젊은이들에게 이른바 ‘헬조선’의 역사적 근원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업임을 강조했다.
“교실에선 떠들기만 해도 칠판에 이름이 남는데 나쁜 사람은 어떻게든 이름이 남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 생긴 거다. 독재에 부역한 세력이 ‘관피아’가 되고, 부동산 투기세력이 된 것이고 ‘금수저와 흙수저’를 나누는 근본이 된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얘기하면 ‘종북좌빨’이 되는데 그런 얘기가 나오는 근원을 알려주자는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달 21일 이뤄졌으며 아래는 그 전문.
-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사업의 현재까지 진행상황은.
“공식 출범 이후 현재까지 없어지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틀은 만들었다. 틀을 갖추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었다. 이런 기관은 자생성을 가지고 굴러가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개미’ 회원들을 굉장히 많이 모았다. 강연회 등을 통해 시민편찬위원을 3천 명 정도 모았는데, 출범 이후 6개월 사이에 2천 명 정도 모았다. 마침 교과서 국정화와 위안부 졸속 합의 이슈가 있어 회원모집에 도움이 됐다.”
- 반응이 좋은 것은 책임편집인(한 교수)에 대한 신뢰 때문인가, 아니면 박 정권에 대한 분노 때문인가.
“반반이라고 본다. 지난해 TV조선에서 저를 엄청 띄웠다(웃음). 일주일 동안 종편 틀면 어디선가 내 이름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TV조선이 나를 주제로 17분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지난해 10월12일이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국정화 선언한 날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출범식 날이었다. 그날은 1948년 제헌의회에서 반민특위를 만들고 검찰관을 임명한 날이기도 하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공교롭게 국정화가 그날 발표된 거다. 당시에는 강연을 가면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강연 듣는 사람이 60명이면 그 중 40명 정도는 (시민편찬위원회에)가입할 정도였다. 그분들도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다.
반헌법 행위자 선정기준 보수적으로 잡을 것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했던 것을 우리가 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보다 성질이 급해서 ‘(더 기다리면)안 되겠다’ 생각해 깃발을 들고 나선 거다. 아무래도 나를 보고 ‘저 사람이 이것으로 딴 짓은 안할 거다’라는 신뢰가 있었을 것이다. 평화박물관 회원도 1500여 명 있었으니 그들을 믿고 가자,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직도 재정적으로 부족하지만 돈이 없어서 만들지 못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초 조사를 중단해야 할 정도로 나쁜 상황은 아니다. 예상보다 조기에 안정화시킬 수 있어 나도 조사작업에 빨리 뛰어들 수 있었다. 솔직히 올해까지는 내가 후원회원과 재정 확보를 위해 뛰어다니기만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조사에 좀 더 빨리 들어갈 수 있었다. 제 자신이 빨리 조사에 들어가야 작업이 진척되는 측면도 있다.”
- 왜 ‘사전’이 아니고 ‘열전’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사람)이 5천명이다.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건너와 공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공직자라는 범위가 작았는데도 그 정도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공직자 숫자가 많아지고, 현재까지 기간이 일제 치하 때보다 두 배나 된다. 한 명 한 명 모든 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은 도저히 감당 못할 거 같았다. 사전이 나오면 좋지만 그 작업은 뒤로 미루고 열전으로 돌파해보자는 생각에서 범위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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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교수가 민플러스와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 반발도 적지 않았을 텐데, 신변 위협은 없었는지.
“감사하게도 그런 걱정들을 많이 해주신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은 없다. 열전 편찬사업은 아주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하고 있고 반헌법 행위자 선정기준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잡을 것이다. 이 작업 자체는 우리 역사에서 굉장히 진보적 의미를 가지지만 기준은 보수적으로 가져가려 한다.”
- 기준을 보수적으로 잡는다는 것은 이 사회에 건강한 보수를 키우기 위해서인가?
“꼭 그런 의도는 아닌데 헌법이란 게 본래 보수적인 거다. 그 안에 진보도 기대고, 약자도 숨 쉴 공간이 있는 것, 우리나라는 그 기본이 안 되니까 문제 아닌가. 인류역사상 법이 약자의 편이었던 적은 없다. 함부로 짓밟으면 사회가 무너지니까 최소한의 보호책을 마련해 주는 거고 법은 기본적으로 지배자의 것이다. 그래서 지배자들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으로 따져도 중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는 것이지만 우리는 당시의 행위 기준을 적용할 것이다. 너무 진보적인 기준을 들이대다 ‘이런 식으로 하면 세종대왕도 처벌 받아야 한다’는 식의 반론이 나오는 것을 예방하려는 거다. 유신헌법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나도 괴로운 일이고 돌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 생각에 유신은 헌법도 아니지만, 그 유신헌법만 해도 어디를 뜯어봐도 고문해도 된다, 탱크 몰고 국회 들어가도 된다는 내용은 없다. 제헌헌법 어디를 봐도 ‘전쟁통에 나라 위험하니 빨갱이들 다 잡아들여도 된다’는 기준은 없다. 역사의 법정은 현실의 법정과 다를 수 있지만 행위 당시의 법령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 그 쪽도 할 말이 없을 것 아닌가.
열전에 넣는 것은 내란, 학살, 고문조작, 부정선거
특정한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우리가 놓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렇게 악랄한 짓을 한 300명의 이름을 적는데 예컨대 150등은 빠지고 500등이 들어갈 수는 있지만 대략 1000등 안에 들어갈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을까?(웃음)
우리가 열전에 넣고자 하는 범위는 내란, 학살, 고문조작, 부정선거 네 가지이다. 우리의 배가 더 큰 그물을 실을 수는 없다. 이번 작업이 잘 끝나면 이후 경제, 환경, 노동 등 얼마든지 범위를 넓혀 작업할 수 있다. 다만 숫자는 500명 정도 늘어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 것이다. 사실 5년 안에 마무리 지으려면 300명도 많은 편이다. 대중들 입장에선 300명 중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50명도 채 안 될 거다.”
- 인물들 배열순서의 기준은 무엇인지.
“아직 그 순서는 정하지 않았다. 나도 고민되는 지점인데, 젊은 사람들은 이후락, 장세동도 잘 모른다. 젊은 세대에게 ‘헬조선’과 ‘흙수저’가 결국 이런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열전 구성방식은 사건과 기관을 섞어야 할 것 같다. 인혁당 같은 큰 사건은 독립적으로 다루고 나머지는 안기부나 검찰, 이렇게 기관별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다. 좀 전에 4가지 영역으로 구분한다고 했는데 각 영역별로 기계적으로 나누면 75명이 된다. 그런데 아마 부정선거는 숫자가 좀 적을 것이고 고문조작은 대상자가 많다.
학살이 문제인데 피해자 측에선 100만이 죽었다지만 이것은 좀 과장됐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만, 대략 5~60만 정도로 보고 있다. 학살 분야에서 (수록 대상으로)100명 잡아도 50만 명 죽은 것으로 보면 피해자 5천 명 당 1명꼴이다. 그러니까 여기 300명에 들어갈 정도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얘기다. ‘내가 왜 들어갔냐’고 입도 뻥긋 못할 정도의 사람이다. 법률상 범죄에도 수괴, 모의, 주요임무수행, 부화뇌동 등의 등급이 있다. 12.12내란만 해도 내란 성공 이후 자기들끼리 기념사진 찍은 것만 34명. 그 사진에서도 앞줄에 있는 사람만 우리 열전에 들어갈 것이다.”
- 재정이 많이 필요할 텐데.
“현재 참여하고 있는 인원은 10여 명 정도다. 연구, 행정 등의 업무가 있는데 반상근도 있고 저 빼고는 급여를 다 받고 있다. 큰 작업이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제일 좋은 것이 월 1만원 회원인 것 같다. 재정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었다. 어느 단체에서 1억을 내겠다, 2억을 내겠다고 해도 단체 안에서 의사결정도 쉽지 않고 그 단체들이 준다는 돈은 대개 재판에서 배상 받은 것을 적립해 놓은 거다. 대의에는 동의하는 데 재판이 안 끝난 분들은 ‘우리 재판 끝나고 하자’ 그러는데, 그 선배들을 탓할 수 없다. 심지어 지금 법원에서 배상금 줄이고 환수하는 판결을 내리는 판국이지 않나.”
- 그 판결들에 대해서도 다룰 의향이 있나?
“그건 5천등 밖이지 않을까(웃음). 5천원, 1만원씩 내주는 분들이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흔들림이 없다. 민플러스 독자들도 시민편찬위원으로 적극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다.”
- 처음에는 민청학련이 공식적으로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하는데.
“본래 민청학련이 배상금을 받으면 그것으로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단체들이 가입하면 복잡해진다. 각 단체별로 입장을 정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 중심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탄압을 받을 때 취약해질 수 있지만 대신 움직임이 가벼워질 수는 있다.”
- 필진 구성은?
“대한민국의 대표 악당 300명을 대표 지식인 300명이 심판한다는 콘셉트로 가려 한다. 예를 들어 조국 교수가 어느 단체 대표자는 아니지만 필진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100명 정도 모았는데 필진 참여 부탁하면 대부분 수락을 했다. 박래군 선생이나 민주노총의 활동가가 필진으로 참여하면 단체성도 가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필자들을 많이 참여시키고 싶다. 문제는 젊은 필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 많아 그들이 이런 사건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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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교수가 민플러스와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대한민국 대표악당 300명을 대표지식인 300명이 심판
그래서 우리가 파일을 만드는 거다. 김기춘을 예로 들면 태어나서부터 현재까지 자잘한 부분까지 모두 모으는 것이다. 신문자료에서 재판 기록, 회고록, 피해자들 증언까지 다 모으는 거다. 마트에서 다 조리된 음식을 팔기도 하지만 재료를 모아 놓고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해서 파는 것도 있지 않나? 아마 500명 정도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서 그 중에 자료가 풍부한 300명을 추리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아마 많이 들킨 사람이 주로 (대상이)될 것이다(웃음). 정말 나쁜 사람인데 기록이 없어 이름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누군가가 기록하고 증언해주지 않으면 빠질 수도 있어, 그런 부분에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 과거사위 활동 경험이 이 작업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됐는지.
“우리 과거사의 특징이 죽은 사람은 있지만 죽인 놈은 없다는 것 아닌가? 죽인 놈들 이름 적는 작업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과거사위 조사에서 가해자들이 많이 밝혀졌다. 다만 보고서에 실명 대신 ○○○으로 처리했을 뿐이다. 이번 작업은 그들의 실명을 밝히고 그 자들이 이런 짓을 한 대가로 어떻게 잘 먹고 잘 살았는지 밝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국정원 과거사위 활동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작업한 셈이니까. 민간인 조사관 10여 명이 3년 안에 작업을 끝내야 하는데 가면 갈수록 국정원이 비협조적으로 나와 싸워가면서 작업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조사팀이 잘한 것이 영역별 보고서를 만든 거다. 간첩부문의 경우 처음에는 16건의 사건을 조사대상으로 잡았는데 국정원 보고서에는 4건만 들어갔다. 당시 50일 밤샘 작업하고 쓰러졌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문당한 사람을 조사하는 게 아주 못된 짓이다. 고문 당시를 세세하게 물어봐야 하는데 그게 못할 짓이다. 고문 당시가 계속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기억을 못할 수가 있냐고 했더니 책상을 쾅 치면서 ‘내가 잊어버려서 지금 살고 있는 거다’라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고문당한 사람 반응이 대개 똑같다. 10~15분 지나면 감정이 격앙돼 펑펑 운다. 그 조사가 끝나고 2년간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이번 사업은 그런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책임의식 때문에 시작한 점도 있다.
본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나 진실화해위원회 등이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단체도 내부적으로 많은 사정이 있다 보니 민간에서 하자, 그렇게 된 거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덕분에 1~2년 정도 작업이 빨리 진행된 점이 있다. 분량은 한 사람당 적으면 (원고지)6~70매, 많으면 100매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 10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5년 정도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아니라고 본다. 목표는 얻어맞을 때 얻어맞더라도 준비하는 동안에는 되도록 튀지 않고 할 생각이다.
전직 대통령 포함여부는 회원수 100만 달성여부가 관건
이번 작업은 묻혀 있는 좋은 보수를 찾아내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간첩죄 무죄를 내리거나 간첩조작 사건에 수사를 거부한 검사들의 얘기도 써줄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사법부 관련 책을 쓰면서 깜짝 놀란 것이 정권에 불리한 판결 내렸다고 현직 판사를 안기부가 잡아간 적이 없다는 거다. 거부해서 특별히 불이익을 받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뭐냐? 민주투사들의 기준이 아니라, 독재에 항거하지 않은 죄가 아니라, ‘바짓가랑이의 양심’을 묻는 거다. 고문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상처가 남았는지 ‘바짓가랑이 한 번 들춰보시오’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책임을 묻는 거다.
교실에서 떠들기만 해도 칠판에 이름이 남는데 나쁜 사람은 어떻게든 이름이 남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 생긴 것이다. 독재에 부역한 그 세력이 ‘관피아’가 되고, 부동산 투기세력이 된 것이고 ‘금수저와 흙수저’를 나누는 근본이 된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얘기하면 ‘종북좌빨’이 되는데 그런 얘기가 나오는 근원을 알려주자는 것이다."
- 전직 대통령들도 열전에 들어갈 수 있나?
"그런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 회원이 백만 명이 넘으면 전직 대통령이 들어가는 거고 안 되면 못 들어가는 거다. 전직 대통령은 너무 명백한 것도 있고 그들이 들어가면 우리에 대한 압력이 100배 정도 강해질 거다. 그래서 답은 정해지지 않았고 넣어도 맨 마지막에 넣을 것이다. 하지만 300명에 대한 정리 작업이 잘 되면 그 수괴인 전두환, 박정희 등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을 다하지는 못해도 이 300명에 대해서만은 내가 확실히 책임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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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교수가 민플러스와 인터뷰에서 웃고 있다. |
- 내년 대선에서 만약 정권이 교체돼 국가예산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래도 일단 현재의 틀대로 시민편찬위원들을 중심으로 작업할 거다. 범위를 함부로 넓히지도 않고 처음 목표한 300명에 대한 작업부터 확실히 할 것이다. 정부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정책 결정이나 예산 편성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 작업을 시작으로 독재부역사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정부의 도움이 된다면 좀 더 과감해질 수 있고, 작업이 좀 더 빨리 진행될 수는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을 봐도 우리가 뭘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교훈이 있었다. 너무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다 보니 민간의 자생력이 약해지고 정부 지원이 끊어지면 쉽게 무기력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 증언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작업도 계획하고 있는지.
“그것도 한 번은 해야겠지만 지금 인력으로 새로운 조사를 하기는 어렵다. 여러 과거사위원회의 성과물 위에서 출발하는 거다. 다만 당시 보고서는 주요 관련자의 이름이 ○○○으로 처리돼 있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 그들을 실명으로, 그들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는 의미가 있다. 우리 작업은 현대판 ‘춘추’를 만드는 것이고 ‘난신적자’들이 두려워 떠는 기록을 만드는 것이다.”
- 국정교과서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이처럼 역사왜곡에 앞장서는 사람들도 포함되는지.
“앞서 말했지만 모든 나쁜 놈을 기록하는 것으로 보지 말아 달라. 4대강 찬동 인사들을 다른 분들이 정리해 주셨듯이 우리 작업은 분명히 ‘반헌법 행위자’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나쁜 사람 다 넣자면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 작업을 근거로 각자의 분야에서 나쁜 놈들을 찾아내는 추격전이 벌어지는 그런 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 청년들이 역사에 대한 무지로 인해 보수화되는 측면이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말단 승무원은 책임을 다하고 죽었는데 선장은 제일 먼저 도망쳤다. 그게 이승만이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리 끊고 도망간 놈이 도망가면서 보도연맹 20만 죽이고, 돌아와서 부역자 55만을 죽였는데 그 때 대한민국 진보세력 다 죽은 것이다. 김창룡이,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죽인 뒤에 한 말이 ‘안 의사 수고했소’이다. 안두희를 안 의사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국정교과서를 주장하는 것이다.
청년들에겐 먼저 미안하다 해야 ‘앞장서라’ 할 자격 생겨
국립묘지에 김창룡과 백범 선생의 어머니가 근처에 묻혀 있다. 백범을 낳아주신 분과 백범을 죽이라고 지시한 사람을 한 묘지에 묻는 정신분열증을 겪는 사회다. 김원봉 열사가 노덕술에게 잡혀 고문당했다. 일제 강점기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는 사람이 수모를 당하니 북으로 간 것이다. 나라는 있는데 ‘가오’가 없는 것이 지금의 20대다. 그 나라가 헬조선, 지옥불반도이기 때문이다. 김약산, 김약수, 이여성 등 산 같이, 물 같이, 별 같이 살려던 사람들이 다 북으로 갔다.”
- 4.13총선에서 북풍몰이가 예전 같지 않았는데, 과거 공안탄압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의 결과가 드러난 것이라고 보나?
“아직 드러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가 현실을 설명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드라마 ‘시그널’을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 그것은 정말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등장인물들이 과거가 바뀌니까 현재가 바뀌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재가 바뀌면 과거에 일어난 사실 자체를 바꿀 수는 없어도 그 사실의 의미가 바뀔 수 있다. 팩트를 바꿀 수는 없지 않나.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의 시민군과 무전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형들이 ‘지금 대통령 누구에요?’라고 물으면 ‘박정희 딸 박근혜요’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라. 전남도청에 남았던 선배들은 집에 가야 맞는 거다.
내가 강연한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꿈을 물었는데 10여 명 중 2명이 ‘정규직’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때 도청에 남은 형들이 3~40년 후 이런 나라 되라고 목숨 바친 건 아니지 않는가? 20대가 잘못해서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너희는 왜 앞장서지 않느냐고 야단만 치면 그건 ‘꼰대’ 되는 거고, 먼저 미안하다고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받쳐줄 테니 너희가 앞장서라,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 최초로 일어난 시민혁명이 바로 4.19다. 내가 4.19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 31살 때다. 20살 많은 백인 노동자에게서 들은 것이다. 당시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먹고 본국으로 도망친 미국인 사장을 규탄하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전단지를 돌리는데 멸시하듯 보는 시선이 너무 싫어 전단지를 제대로 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함께 도와준 백인 노동운동가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너무 전단지를 잘 돌리는 것이다. 나중에 식사를 하면서 비결을 물어보니 그 백인 노동자는 크게 웃으며 ‘나는 4.19의 힘으로 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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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홍구 교수가 민플러스와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20대 총선 결과, 유신 한창인 78년 10대 총선과 상황
그는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려 군대를 갔고 그래서 주한미군 영등포기지에 배치됐다. 그가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4.19가 터졌다. 당시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이 혁명에 나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세상에 관심을 갖고 노동운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아 4.19가 이런 것이구나’ 깨달음이 있었다. 이 때 4.19혁명에 나선 세대는 한글 수업을 처음 들은 세대이다.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지 않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처음 배운 세대다.
이번 20대 총선을 두고 의외의 결과라고들 한다. 근데 유신이 한창인 78년 10대 총선도 상황이 비슷했다. 당시 선거 사흘 전 신문 보도를 보면 공화당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득표율에서 신민당이 이겼다. 그리고 그것이 유신이 무너지는 시작이 됐다. 당시에도 야당 신민당이 그렇게 잘못했음에도 이긴 것이다. 당시 승리 이후 신민당은 제대로 정권과 (한판)붙어보자는 자신감이 늘어 유화파인 이철승 대신 김영삼을 총재로 내세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김정렴이 10년 가까이 했는데 그때 선거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 사람이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차지철이 꼼짝을 못했다. 후임 비서실장 김계원은 차지철에게 휘둘렸다. 79년은 지금보다 탄압이 워낙 심해서 바닥에서 민심이 들끓고 있었음에도 데모가 한 건도 없었다.
그러다가 YH사건이 터졌다. 여공들은 단 며칠이라도 버티면서 자신들(의 사정)을 알릴 수 있는 장소를 고민하다가 신민당사로 갔다. 이철승이 총재였으면 그들을 받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아마 여공들도 애초에 신민당사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YH사태가 있고 80여일 뒤에 박정희가 총에 맞았다. (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의)1.1% 승리라는 작은 날갯짓이 만들어낸 변화다. 그런 세부적인 흐름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 1978년 총선이나 2016년 총선 결과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지, 그 자체가 역사의 변화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런 변화의 조짐이 있을 때 준비된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끝으로 민플러스 독자들에게 당부할 게 있다면.
“싸우다 보면 사람이 피폐해진다. 그렇게 안 되도록 하는 것이 바깥의 관심이다. 강정싸움이 왜 졌다고 생각하나? 강정에서만 싸워서 진 거다. 강정 싸움은 서울에서 싸웠어야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전 세계의 가슴 뜨거운 이들이 스페인으로 가서 많이 죽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자기가 선 자리에서 스페인을 위해 싸웠어야 했다. 역사적인 투쟁 과정을 보면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간 싸움이 몇 되지 않는다. 역사문제나 노동개혁 등 이슈가 있을 때 군중들은 한 군데에만 확 쏠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중심을 굳건히 세우고 싸울 필요가 있다. 민플러스를 읽는 사람들이 민플러스에 소개되는 투쟁들을 보고 그것을 내 삶의 현장으로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민플러스 독자들도 시민편찬위 적극 참여해주시길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이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김원봉의 얼굴을 몰랐을 리 없다. 내 생각에 감독의 의도는 바로 밀양 송전탑 싸움에 대한 연대였다고 확신한다. 실제 밀양에서 싸운 할머님들이 그 장면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바쁘고, 그러다보니 중요한 현장들이 너무 많이 묻힌다. 먼지가 날리는 와중에도 그들이 힘을 잃지 않도록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체 게바라가 왜 위대하냐면 새로운 연대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왜 쿠바혁명 이후 계속 쿠바에 남지 않고 전 세계를 돌았는가. 그는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들자고 연설했다.
90년대 이후에 ‘시민’과 ‘민중’을 의식적으로 구분했고 그럴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민중과 참신한 시민이라는 구도는 한두 번 정도는 써먹을 수 있지만 그것이 대세가 되면 안 된다. ‘노동자’ 10만이 여의도에 모여서 팔뚝질을 해도 기사화가 안 된다. ‘시민’들이 뭔가 새로운 걸 하면 언론에 실린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시민의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가 배제되고 결국 시민이 빠진 시민운동이 돼 버렸다. 노동운동을 노동자만 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과거 동일방직사건 같은 게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온 국민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도 사건을 사건 자체로 다뤄야 하는데 무리하게 정권교체 구호로 연결시키려다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다. ‘워낭소리’ 같은 영화의 경우 소 한 마리가 죽는 걸 보며 300만이 눈물을 흘렸는데 같은 시기에 생사람 몇 명이나 죽는 문제에는 3천명이 모이지를 않았다. 현장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산층이 있을 것이다. 민플러스는 이들을 주 독자층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독자들의 어떤 감정선을 건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현장과 일반 독자가 어느 지점에서 만날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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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허수영 기자 heoswim@naver.com
권미강 기자 kang-momo@hanmail.net
[출처: 민플러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05-08 12:34:02 새 소식에서 복사 됨]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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