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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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22 03:0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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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 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김 세 영(영화배우)
• 1923년 9월 17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출생.
•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예술극장 배우.
• 1950년 10월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 1989년 10월 23일 사망.
• 인민배우.
18세기말 프랑스의 희곡작가 보마르쇄의 유명한 희곡 《쎄빌랴의 리발사》에서 주인공 피가로의 대사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그 불운한 운명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웃으며 사는가고 묻는 물음에
나는 입만 떼면 눈물이 나오기때문에
먼저 웃군 한답니다
인간의 운명에는 눈물과 웃음이 동반되는 법이다. 그러나 눈물과 웃음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고… 말그대로 천층만층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 인민에게 밝은 웃음을 보여준 인민배우 김세영의 운명길에는 어떤 눈물, 어떤 웃음이 비꼈던가. 피가로처럼 울지 않기 위한 웃음이였던가? 아니면…
족쇄를 찬 희망
김세영은 1923년 9월 충청북도 청주시 가덕면 두산리의 가난한 빈농가에서 태여났다.
충청북도는 다른 도에 비하여 특별히 량반이 많은 고장이였는데 그들은 저저마다 권세를 쓰면서 돈과 재물을 긁어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량반성화에 등가죽이 벗겨진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량반들의 착취행위나 세도 같은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일제침략자들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농민들은 말그대로 뼈를 깎고 피를 말리우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량반부자들의 권력은 땀으로 빚은 낟알을 린색하게 긁어갔다면 일제침략자들의 동척(동양척식회사)은 농민들의 생명인 땅을 통채로 집어삼키여 평민들은 물론 량반들까지도 거지로 전락시키였다.
원래부터 빈농가에서 태여나 굶주림속에 허덕이던 김세영의 가정에는 극심한 기아와 함께 죽음의 세파가 덮쳐들었다.
태여난지 두해만에 그에게 젖조차 변변히 먹여주지 못하고 간간히 목숨을 부지하던 어머니는 뼈만 앙상한 손에 고사리같은 아들의 손을 꼭 그러쥔채 굶어서 숨지고말았다.
김세영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눈물속에 자기를 키우며 한숨속에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속에서 불우한 어머니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보군 하였다.
하지만 그 아버지마저 안해를 잃은 다음 어린 세영을 키우면서 손끝이 모지라지도록 아글타글하다나니 몸이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데다가 심화병까지 겹쳐들어 그가 여섯살 잡히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김세영은 하는수없이 삼촌네 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 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새로운 식구가 하나 더 불어나게 된것이 큰 부담으로 될수밖에 없었다.
여섯살때부터 부모없이 삼촌네 집에서 눈치밥을 먹다보니 김세영의 배는 늘 곯아있었고 영양상태는 말이 아니였다.
어린 마음에도 숨막힐듯 답답한 이 처지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싶은것이 김세영의 마음이였다.
그러던중 어느날 읍거리에서 순회극단공연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세영은 아침밥도 먹지 못한채 배고픈줄도 모르고 동네아이들과 함께 그리로 달음질쳐갔다.
악사들과 배우들이 뒤섞여 돌아가며 타령도 하고 피대줄을 돋구며 소리도 쳤는데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몹시 흥미가 동해 그는 순간이나마 고독감을 잃고 마음껏 웃어대였다. 극단이라는것이 이렇게 즐거움을 주는줄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무대우에 나와서 악기도 타고 타령도 하고 뭐라고 우스개소리를 엮어대기도 하는 그 일에 대단히 흥미를 느낀 김세영은 공연이 끝난 후 무대뒤에 쳐놓은 차일을 헤치고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배우들이며 무대복, 장식품들을 하나하나 희한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어린 김세영의 생활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군 하였는데 아이들과 함께 순회극단공연을 본딴 극놀이를 벌려놓군 했던것이다.
김세영의 말과 행동은 순회극단배우들을 릉가할 정도로 아주 신통하였으므로 동네애들은 물론 어른들도 구경하군 하였다.
《세영이, 너 배우노릇 하지 않겠니?》
같은또래 아이가 롱삼아 물었을 때 김세영은 한창 극놀이에 사기가 난 때여서 《하면 하지 못할건 뭐가?》하고 장담하였다.
대답해놓고보니 불쑥 정말로 배우가 되고싶은 욕망이 굴뚝처럼 일어났다.
김세영의 어린 가슴에 배우가 되고싶은 희망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가 배우가 되려는 희망을 품게 된것은 배우가 되면 공연하러 어디로든지 돌아다닐수 있다는, 답답하고 가난한 생활세태에서 벗어날수 있다는데서부터였다.
배불리 먹지도 못할바에는 좁은데 갇히워서 답답하게 살지 말고 여기저기 좀 돌아다니며 살아보자는것이 당시 어린 김세영의 생활적인 요구였던것이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싶어도 배워줄 사람이 없었던 촌구석에서 김세영은 자기의 이 소박한 희망이나마 실현할 가능성이 거의나 없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여도 혈육의 정은 따뜻하고 진심스러운것이여서 삼촌과 친척들은 돈을 모아 김세영을 보통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해주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였을 때 배우가 되고싶던 김세영의 희망은 더욱 크게 자라났다.
어떻게 해서든지 배우가 되는데 필요한것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있었는데 마침 이웃동네에 얼마전부터 무슨 연고에서인지 예술을 하다가 포기하고 집에 들어와 농사일을 하면서 청년들에게 기타를 배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두루 알아보니 그는 기타를 배워주면서 수강료를 받고있었는데 그리 많은것은 아니였지만 김세영의 생활조건에서 볼 때에는 결코 눅거리가 아니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타를 배우리라 마음먹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업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를 하면서 집일을 도와주는 한편 나무를 해다 팔며 수강료를 마련하느라 애썼다.
어려운 생활고를 헤치면서 공부도 하고 기타수강을 받는것이 조련치 않아 삼촌은 공부하는 돈도 대기 어려운데 그따위 쓸데없는 기타수강은 왜 받느냐고 나무랐지만 김세영은 한번 결심한것을 포기할수가 없었다.
일제놈들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조리 긁어모아 전쟁판으로 가져가다나니 김세영이 사는 동네는 령세화되여 삼촌네 집살림도 가난에 쪼들려갔다. 하여 김세영은 상업학교를 도중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기타수강도 집어치우고 수강료로 쓰는 돈을 살림살이에 보태볼가 동요도 하였으나 그때까지 배운 재간이 아까워 그것만은 멈추고싶지 않았다.
어느날 기타수강을 받으러 선생을 찾아가니 그는 술을 마시고 방안벽에 기대여앉아 눈물이 그렁하여 스러져가는 저녁해를 바라보고있었다.
김세영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지는해를 보니까 기울어져버린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걱정스럽고 슬퍼서 그런다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리고는 기타를 당겨 젖은 눈을 지그시 감고 《봉선화》를 탔다.
수난받는 겨레의 흐느낌인양 기타의 선률이 김세영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기타의 선률과 같이 호흡하고 따라부르면서 예술이란 결코 그 어떤 오락이나 흥미거리가 아니라 정신을 흔들어깨우고 앙양시키는 매우 숭고한것임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되였다.
또한 자기의 운명이 불행속에 시들고 삼촌네 집안과 온 마을이 가난에 우는것이 결코 팔자탓이나 재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지주와 같은 착취자들에게 착취를 당하는데 있다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김세영에게 있어서 이것은 커다란 정신적발전이였다. 더구나 기타를 배워주는 선생의 과거사를 듣고나서 그는 왜서인지 자기가 철부지처럼 제 취미를 쫓거나 생활유지만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간이 되여서는 안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 선생은 예술을 해보고싶어 어느 극단에 들어갔다가 일제놈들이 연극을 해도 일본말로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그렇게 못할바에는 당장 해산하라고 탄압을 가하는 바람에 뛰쳐나오고말았다는것이였다.
그는 김세영에게 일제침략자들이 실시하고있는 조선어말살정책과 진보적문인들에 대한 탄압책동, 민족문학예술의 실태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면서 분노의 치를 떠는것이였다.
김세영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겁을 먹은것이 아니라 기어이 예술로 성공하여 조선사람으로서의 구실을 바로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점차 김세영의 이러한 각오와 결심을 알게 된 기타선생은 처음에는 고생길을 일부러 찾아 걷겠는가고 만류하다가 그가 완강하게 나오자 감동되여 자기와 인연이 있는 작가, 예술인들과 련결시켜주기도 하였다.
그 선생은 카프성원들인 송영, 박세영선생에게 보내는 김세영에 대한 소개신을 써주면서 서울에 가서 그들을 만나보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들을 찾아 서울에 간 김세영은 무릎뼈에 물이 고이도록 뛰여다니였지만 요시찰대상자인 그들을 좀처럼 만날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헤매이던 김세영은 무척 오랜 나날이 흘러서야 겨우 송영, 박세영을 비롯한 카프출신 작가들과 손을 잡게 되였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문학예술사조에 접하게 되였다. 더구나 송영과는 인간적으로 매우 자별한 사이가 되여 사제간의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김세영의 예술적성장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준것은 당시 서울장안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계속되던 최승희의 독무회였다.
온 세상에 조선민족무용의 우아함을 시위하며 민족정신을 휘날리는 최승희처럼 그는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빛내이는 사람이 되고싶었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그는 화술훈련, 성악훈련 등 배우로 될수 있는 일반적기초를 부지런히 닦았고 1938년 여름에는 드디여 충청북도 청주시 문화공단에 들어갔다.
바로 이때부터 곡절많고 사연많은 그의 예술활동이 시작되였던것이다.
김세영이 예술활동의 첫발을 들여놓은 청주문화공단의 존재는 1930년대 당시로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보잘것없는 예술단체였다.
그때에 예술의 중심은 서울이였는데 이곳에는 라운규가 있던 신무대며 황금좌, 예원좌, 청춘좌, 고형극단, 호화선 등 제노라 하는 극단들과 예술단체들이 저저마다 기세를 돋구고있었다.
간단히 살펴본다면 청춘좌에는 우리 나라 예술계의 이름있는 배우들인 황철, 황영일이 있었고 고형극단에는 심영, 박학, 남궁련, 유경애, 리재덕 등이 집결되여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초학도나 다름없는 김세영이 적을 둔 청주문화공단이 제 모습을 드러내며 관중을 끈다는것은 거의나 불가능한 일이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주저하지 않고 완강한 노력을 기울여 공연종목들을 개편해나가면서 공단의 지위를 뚜렷이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매 공연에서 자기 몸에 익을대로 익은 노래 《봉선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절대로 빼놓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작품들에 당시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이 맥박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식민지노예의 불우한 운명과 몸부림, 착취와 압박이 강요되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과 반항심, 이것을 떠나서는 인민들의 심장을 걷어쥘수 없었다.
또 그것은 사실상 김세영자신의 피할수 없는 사상이였고 생활감정이였다.
이것을 빼던진다면 아무런 의의도 없는것이 예술활동이 아닌가고 그는 주장하였다.
하기에 청주문화공단의 공연은 차츰 관중들의 절찬을 받으며 자기의 존재를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김세영이 지정곡목으로 들고나오던 《봉선화》는 일제가 가창금지령을 내린 노래들중의 하나였는데 그때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던 청주문화공단에까지는 일제의 눈길이 채 미치지 못하여 그럭저럭 풍파를 모르고 공연의 나날이 흘러갔다.
기악과 성악, 화술훈련을 피타게 진행한 결과 공단안에서 중심인물의 하나로 되였던 김세영은 공단에 들어간지 4년만인 1942년에 이 공단의 단장으로 되였다. 이때부터 공단의 운명이 김세영의 두어깨에 놓이게 되였다.
그는 자기네 예술단체를 부흥시키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에 대해 늘 사색하고 또 사색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도달한 결론은 공단을 이끌고 대담하게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연활동을 해보자는것이였다.
서울에 가서 유명짜한 대가들의 인정을 받느라 오랜 기간 땀을 뺄것없이 단번에 일본에 가서 공연하여 이름을 내게 되면 자연히 그 소문이 서울에도 날아갈것이고 전국에도 알려질것이니 그러면 누구든지 자연히 청주문화공단을 인정하게 될것이라는것이 김세영의 타산이였다.
김세영은 공단을 이끌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니이가다항에 도착하였다.
공연승인을 받는데만도 며칠이 잘 걸리였다. 어느 자그마한 극장을 세내여 공연의 막을 올리게 되였는데 김세영은 공연직전에 관중들의 구성상태를 료해하여보았다.
태반이 조선사람들이였다. 강제로 끌려오기도 하고 살 길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 한겨레라는 생각에 김세영은 반가움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국땅에 와서도 고국산천을 잊지 못해, 고향의 향기를 호흡하고싶어 극장으로 밀려든 그들의 가슴속에 무엇인가 정답고 뜨겁고 힘있는것을 안겨주고싶었다.
그리하여 김세영은 급기야 공연종목에 노래 《봉선화》를 넣도록 하였다.
그런데 공단성원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노래를 넣었다가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수 있다는것이 그들의 의견이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뜨겁게 호소하듯 말하였다.
《우리의 공연대상은 일본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겨레, 우리의 동포들이요. 그들이 가지고싶어하는것은 조국의 넋이며 향기요. 그들의 소원을 담아 노래도 부르고 극도 하는것이 바로 예술인이 아니겠소.》
김세영의 절절하면서도 명백한 립장에 공단성원들은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주장이 백번 옳았기때문이였다.
그는 직접 자기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나섰다. 무대에 나서서 얼핏 관람석장내를 둘러보니 왼쪽의 맨 앞자리에 일본당국이 파견한 고등계형사가 제빠듬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하지만 김세영의 눈에는 그놈의 존재보다도 조국의 향기, 민족의 정을 나누고싶어하는 동포들의 간절함에 끓는 모습들이 목메이도록 크게 안겨왔다.
김세영은 곡상의 정서를 충분히 살려 힘차게 기타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정숙한 극장안에 그의 노래소리가 흐느낌소리처럼 울리였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설한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관람석은 흐느낌소리로 가득찼다.
관중들을 바라보는 김세영의 두볼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였다.
고등계형사놈은 이들이 왜 그러는지 영문을 알수 없어 두눈을 껌벅이며 김세영과 관중들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결국 일본에서의 첫날 공연은 중지를 당하지 않고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그들의 공연을 본 동포들의 반향은 대단히 컸다. 저저마다 김세영을 비롯한 배우들을 찾아와 두손을 부여잡고 흔들기도 하고 그리운 조국사람들이라고 부둥켜안고 두볼을 비비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무대우에서 울리던 《봉선화》를 다시 불러보며 일제를 저주했고 망국노의 운명이 끝장나기를 갈망하였다.
다음날 드디여 일이 터지였다. 당장 공연을 중지하고 출국하라는 일본당국의 공문서가 공단에 날아왔던것이다.
김세영이 공단을 대표하여 항소했으나 단번에 부결되였다.
그가 무대에서 부른 《봉선화》가 종시 문제로 되여 이런 참경이 벌어지게 된것이였다. 어디 가서 하소할데도, 도움을 받을데도 없었다.
나라잃은 망국노의 처지가 더더욱 사무쳐왔다.
할수없이 공단을 이끌고 귀국은 하였으나 예술로 조선사람의 기개를 떨쳐보리라던 김세영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되여버리였다. 공단은 점차 생기를 잃고 시들기 시작하다가 서리맞은 봉선화마냥 그 존재를 끝마쳐버리고말았다.
꺼져버리였던 그의 희망은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을 맞이한 후 다시 움터나게 되였다.
조국해방은 비운에 울던 예술인들에게 활력을 주었다. 살길을 찾아 뿔뿔이 헤여졌던 예술인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김세영도 해방후 5일만에 예술환생의 꿈을 안고 서울로 들어가 예술극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박학, 유경애 등 해방전 예술계에서 중추를 이루고있던 많은 배우들이 모여서 새로운 기분으로 창조활동의 발걸음을 떼고있었다.
그 창조집단에 뛰여든 김세영은 서울장안을 휩쓸고있는 김일성장군환영준비분위기에 심장을 달구며 연극 《장백산》창조에 달라붙었다.
피눈물에 젖은 걸음을 옮기던 해방전 그 세월에도 백두산에서 일제놈들과 맞서싸우시며 조국해방을 위한 성전을 벌리시던 위대한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으면서 힘을 얻군 하던 김세영과 모든 연극배우들은 자기들이 창조하는 연극으로 서울에 나오시는 장군님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고싶었다.
민족의 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무대에 직접 모시는 연극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니 김세영의 마음은 마냥 하늘을 나는듯 하였다.
연극대본이 만들어졌고 무대형상작업이 전투적으로 벌어졌다.
김세영, 박학을 중심으로 한 배우집단의 성의있는 노력으로 연극 《장백산》은 짧은 시일안에 완성되여 공연의 막을 올리게 되였다.
극단은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서울입성을 기다리며 련일 대성황리에 공연을 계속하였다.
어버이수령님을 흠모하여 공연되는 《장백산》의 내용은 흥미있고 혁명적이였으며 교양적의의가 컸다.
그들은 한주일나마 낮에는 환영군중들앞에서 공연하고 밤에는 극장무대에서 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연극 《장백산》공연이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무대우로 수류탄이 날아와 터지였던것이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던 몇명의 배우들이 중상을 당하였고 관객들도 적지 않게 부상을 입었다. 무대장치물들은 박산이 났으며 무대막들이 갈기갈기 찢어져나갔다.
이것은 미제의 사촉을 받은 리승만주구들이 저지른 천추에 용서 못할 만행이였다.
일제를 대신하여 남녘땅을 강점한 미제는 제놈들이 키워낸 리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발광하고있었는데 서울장안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흠모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극공연을 성황리에 진행하고있는 극단이 그들에게는 눈에 든 가시였던것이다.
김세영은 이 처절한 극적현실을 체험하면서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에서는 결코 인민의 예술이 꽃펴날수 없으며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겨야만 배우로서의 자기 삶을 꽃피울수 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가자 북으로, 김일성장군님 품으로 가자!》
서울에 있던 예술인들은 이렇게 부르짖으며 페허로 된 서울극장을 버리고 북행길에 올랐다.
해방전에 일제의 탄압과 박해를 받았고 감옥살이, 류랑살이로 고생이 많았던 그들은 미군강점하의 남조선땅이 일제때 못지 않은 캄캄한 지옥임을 깨닫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였던것이다.
하지만 김세영은 그들과 함께 북으로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당시 그는 조직으로부터 충청북도에서 사업할데 대한 과업을 받았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버이수령님께로 향하는 자기의 열렬한 마음을 북으로 가는 동료배우들에게 얹어보내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을 걷게 되였다.
1949년 김세영은 가정을 이루었다. 그의 안해는 서울에서 자그마한 려인숙을 경영하는 소자산가의 딸이였는데 김세영의 공연을 보고 감동되여 축하의 꽃송이를 들고 무대우에 올라왔던것이 인연이 되여 한가정을 이루는데까지 이르게 되였다.
복경이라고 부르는 그 처녀의 부모들은 김세영과 짝을 뭇는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사람은 잘나고 똑똑하지만 정치활동에 나섰기때문에 안된다고 출입을 엄금시키였던것이다.
어느날 밤 김세영은 처녀의 립장을 정확히 알아보려고 그 집의 담을 넘어 복경의 방으로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복경의 립장이 애매하니 김세영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사랑을 위하여 자기의 신념을 버리느냐, 아니면 사랑을 버리고 신념을 지키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던것이다.
망설이던 그는 복경에게 단호히 결별을 선언하고 청주시로 내려오고말았다.
그런데 그후 복경이 부모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청주시로 김세영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 누구의 축복도 없이 누빈돗자리 여섯장을 놓은 방에 곤로 하나를 놓고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한달도 가지 못하였다.
이해 3월에 김세영은 불의에 집으로 달려든 경찰들에게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되였다.
후에 알고보니 연극 《장백산》에 대한 수류탄폭발을 조작하여 그 극단을 해산시킨 경찰은 연극창조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검질기게 추적하고있었는데 변절자가 생겨 김세영을 밀고하였던것이다.
경찰들은 김세영에게서 지하조직의 비밀을 뽑아보려고 갖은 악형을 가하였으며 회유술책도 써보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기의 흔들림없는 지조를 보여주었다.
악에 받친 경찰들은 김세영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세영은 죽음 같은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북으로 간 예술인동료들이 어떤 생활을하고있을것인가를 그려보면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공화국북반부로 가고싶은 충동을 누를길 없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것이 원통하였다. 그럴수록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이 더 세차게 끓어번졌다.
사형선고를 받고보니 어린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예술창조의 나래를 마음껏 펴보지도 못한채 족쇄를 차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진것이 한스러워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북받치는 마음 같아서는 자기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족쇄와 감방벽을 들부시고 뛰쳐나가 북으로 달려가고싶었다.
감옥에 갇히워 오도가도 못하는 몸이 되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예술을 한답시고 떠돌며 흘러보낸 나날들이 허망하게 여겨지기도 하였고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련민의 정으로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듯 하였다.
그토록 진정한 예술을 갈망해온 김세영이였기에 감옥에 면회를 오군 하는 안해 복경이 이제 얼마 안 있어 아기를 낳을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앞으로 예술을 해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라는 의미를 담아 애이름을 민희라고 지으라고 당부하였던것이다.
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이제 태여날 아기의 이름을 짓던 그때에 김세영은 자기의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수가 없었다.
그때 그도 모르게 은혜로운 태양의 빛발은 눈부시게 비쳐오고있었다.
환생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적들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끌어내여 어디론가 양떼 몰듯 몰아가고있었다.
김세영도 이들속에 섞이여 끌려가게 되였는데 놈들이 허둥대며 서두르는것을 보아 분명 어떤 사변이 터진것 같았다.
두루 알아보니 인민군대가 남쪽으로 쏜살같이 진격해 나오고있는데 오늘래일 서울에 들어서게 되리라는것, 그래서 혼비백산한 놈들이 수감자들을 대전형무소로 이감시키려고 끌어냈는데 미국놈들의 지시에 따라 도중에서 모조리 죽여버린다는것이였다.
김세영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당장 죽게 된다는 공포감은 사라지고 인민군대에 의하여 남녘땅이 해방된다는 격동된 심정으로 하여 온몸에서는 힘이 솟구치였다.
벌판을 지나 수림이 우거진 산옆에 이르렀을 때에 김세영은 주먹을 부르쥐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뛰자! 우릴 몽땅 죽이려고 한다!》
이렇게 웨치며 그는 나는듯이 산속으로 뛰여들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리였고 귀뿌리를 스치며 총알이 날아갔다.
산중턱에 거의 다달았을 때 뒤에서 《매부! 매부!》하고 부르는 소리에 얼핏 돌아보니 어디 있다가 알아보고 좇아왔는지 처남이 손짓을 하며 찾는것이였다.
그들은 인사도 나누지 못한채 끌어당겨주면서 정신없이 냅다 뛰였다.
총소리가 없어지고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그들은 숲속에 맥없이 벌렁 나가누워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매부! 빨리 집으로 가자요. 누이가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요.》
김세영은 그제야 처남이 자기를 좇아온 사연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처남의 말대로 집으로 갈수가 없었다.
그는 처남의 손을 잡으며 도리질을 하였다.
《난 갈수가 없어. 우선 조직을 찾아야 하구 또 미국놈들이 통치하는 이 남쪽땅에서는 살아있어도 죽은 몸이고 밖에 있어도 감옥에 갇힌 몸이나 같다는걸 처남도 알겠지? 누이한테 잘 이야기해달라구. 일이 원만히 풀리면 내 꼭 데리러 갈게!》
처남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처남과도, 안해와도 갈라졌다. 후날 처남은 개성으로 들어와 예술단 연출가로 일하였지만 안해는 끝내 들어오지 못하였다.
처남과 헤여진 김세영은 다시 충청북도 청주로 들어가 조직을 찾았으며 공개적으로 전시에 맞게 이동예술대를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중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그는 대오를 이끌고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공화국북반부를 향하여 험하고 시련에 찬 길을 헤치였다.
추위와 굶주림이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으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간다는 기쁨이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게 하였다.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몇번씩 넘기며 김세영이네가 자강도 만포땅에 이른것은 충주를 떠난지 꼭 30일만이였다.
그때 만포에서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일군들이 후퇴하여 들어오는 문학예술인들을 맞이하여 대오에 집결시키고있었다.
김세영은 여기서 작가, 예술인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들이 추워할세라 두툼한 솜동복과 솜신발을 보내주시며 각별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시는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김세영은 자기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애로운 삶의 품에 안기였는가를 절감하였다.
공화국북반부에서 김세영의 배우생활은 1951년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에서 박기훈역을 맡아 수행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근 20년가까이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비행기사냥군조》, 《백두산이 보인다》, 《어랑천》, 《흥부전》, 《명랑한 무대》 등 수십편의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주로 정극적인 역인물을 담당하였다.
이 기간 그의 연기는 원만하고 크게 흠잡을데는 없었으나 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형상을 창조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이러한 약점에 대하여 본인에게 말한적이 없었지만 그자신은 자기의 연기가 가지고있는 약점을 스스로 느끼고 오랜 기간 고민하였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심리적타격이라고 할 때 그것은 두가지였습니다.
첫번째 타격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때였고 두번째 타격은 희극배우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예술가로서의 나의 재능에 대한 불만족이였습니다.
다른 동무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1960년대 말 나는 배우생활을 그만두려고 결심했댔습니다.》
김세영은 이렇듯 자기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소질과 능력이 없는 둔재라고 실망하게 되였다. 어린시절부터 애초에 예술에 대한 지향과 욕망을 꿈꾸지 말았어야 했을것이라고 후회하기까지 하였다.
20대나 30대의 젊은 나이에 깨달았다면 방향전환을 하기도 쉬웠으련만 40대 후반기에 와서야 예술에 대한 자기의 무능을 깨달았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그는 늦게나마 로동생활에 뛰여들어 로동의 땀으로 조국에 이바지하는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고도 생각하였다.
그가 말한것처럼 김세영은 정말 자기 생의 근본문제를 두고 낭떠러지에 선것처럼 눈앞이 아뜩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바로 이러한 김세영의 고민을 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김세영자신도 알지 못하는 창작적개성을 꿰뚫어보시고 그에게 풍자극 《보충병》의 주역을 맡겨주시였으며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걸음걸음 이끌어 세계적인 희극배우로 이름떨치게 하여주시였던것이다.
김세영은 위대한 장군님의 빛나는 예지와 따뜻한 손길에 이끌리여 남모르게 잠재해있던 희극배우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였으며 훌륭한 역형상으로 관중들에게 시대와 생활을 뜨겁게 받아안게 하고 락천적으로 살며 일해나가도록 하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놀았다.
영화배우 40년 경력중에서 후반부에 속하는 희극배우 20년간에 김세영은 말그대로 인기의 절정에 올랐다.
김세영이 희극배우로서 첫걸음을 뗀 풍자극 《보충병》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1969년 1월 영화배우들의 무대공연을 위해 직접 선정해주신 작품이다.
그이께서는 그 작품의 주인공역을 뜻밖에도 김세영에게 맡겨주시였다.
사실상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지난날 설음과 슬픔만을 당하며 살아온 자기의 처지와 경력으로 보아 예술영화 《흥부전》에서 흥부와 《다시는 그렇게 살수 없다》의 학수와 같이 착취사회에서 학대와 멸시를 받으며 괴로움과 슬픔속에 모대기는 역을 담당하는것이 적당한것이라고만 생각하고있었다.
더구나 거의 생면부지라고 할수 있는 풍자극의 주역을 수행해야 하는것은 김세영으로서는 정말 아름찬 과제였다.
하지만 자기의 연기에서 희극적형상의 싹을 발견하시고 과업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신임과 기대에 기어이 보답할 일념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풍자극 《보충병》의 주인공인 면장의 역형상을 훌륭히 수행하기 위하여 모지름을 썼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세영이 련습하는것을 여러차례 분석적으로 보아주시면서 그에게 웃기려는 생각이 너무 앞서기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사건전체가 웃음을 낳아야 하며 배우들의 진실한 체험과 형상을 통하여 웃음을 낳아야 한다고 웃음의 본거지를 차근차근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면장을 우리의 원쑤로 보았다면 웃기려고 생각하기 전에 면장의 반동적본질을 먼저 찾으려고 생각하였을것이라고 일깨워주심으로써 김세영으로 하여금 계급적원쑤의 본질을 파고들어 웃음을 낳게 하지 못하고 외형이나 가지고 값싼 웃음을 짜내려고 한 자신을 깊이 뉘우치게 하여주시였다.
특히 남조선인민무장유격대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사병들을 다 죽여버린 면장의 아들이 구사일생으로 제 집에 돌아왔을 때 면장이 어떻게 행동할것인가를 가르쳐주신데 대하여 김세영은 두고두고 잊지 못해 하였다.
그이께서는 면장이 녀편네와 딸을 데리고 싸움에 나간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순간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지옥에서 오지 않았는가 하여 한순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장승처럼 굳어졌다가 와락 달려들고 아들은 아들대로 기겁하여 애비를 뿌리치는 행동을 만들어보라고 하시였다.
실로 생각만 하여도 원쑤들의 패망상이 그대로 그려져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이께서는 차츰 몰라보게 발전하는 김세영의 희극적인 연기를 두고 그를 몹시 대견하게 여기시면서 이 작품의 마지막장면에서 면장과 녀편네, 그의 딸이 어떻게 울어야 한다는것까지 세세히 일깨워주시면서 그를 희극배우로 성장하도록 하나하나 이끌어주시였다.
희극배우로서의 김세영의 새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이것은 미제강점하의 남녘땅을 떠나 어버이수령님 품을 찾아왔고 앞날이 내다보이지 않던 배우생활의 새롭고 광명에 찬 길을 열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자애로운 사랑속에서 이루어진 전변이였고 운명의 환생이였다.
김세영의 생활과 성장은 그자체가 심각한 극성을 안고있는 하나의 큰 작품이였다.
웃음의 철학
간단한 풍자극 《보충병》의 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한것으로부터 희극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세영은 그후 《안해의 일터》, 《사과딸 때》, 《공중무대》, 《재단사》, 《두 선장》, 《안녕하십니까》, 《북은 내가 치겠소》 등 여러편의 경희극적인 영화들에서 주요역을 맡아 수행하면서 희극배우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더 원만히 갖추어나갔다. 이 과정에 그는 세상에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희극배우들이 가지고있는 웃음의 바탕과는 대비도 안되는 숭고한 철학, 웃음의 철학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내내 그 철학에 충실하였다.
그러면 그가 생활을 통하여 터득한 웃음의 철학은 무엇이였는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희극은 웃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교양하는 사색적인 예술이라고 하시면서 희극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한바탕 웃고나서 그 웃음속에 깔린 사회적문제성을 두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여야 한다고, 단순히 웃음으로만 그치는 희극은 본래의 의미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명철하게 가르쳐주시였다.
희극이 웃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교양하는 사색적인 예술이라면 희극배우는 마땅히 자기의 연기형상을 통하여 사람들이 그 형상속에 체현된 깊은 뜻을 음미해보도록 웃음을 창조하여야 한다.
이것이 희극배우연기의 핵인데 김세영은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야 그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체질화하게 되였다.
억눌리고 짓밟혔던 과거에 대한 쓰라린 체험과 원쑤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 모든 행복과 영광을 안겨준 고마운 제도에 대한 매혹과 옹호는 바로 그 웃음의 원천을 낳았다.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일화가 그것을 잘 말하여주고있다.
김세영은 전쟁시기 어쩔수없이 갈라진 안해가 낳은 제 딸의 얼굴을 모르는채 예순을 넘기였다.
1985년 고향방문단성원으로 남반부에 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중년기에 들어선 딸 민희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인재가 되여줄것을 바라며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민희라고 지으라고 감옥에 찾아온 안해에게 당부했던 바로 그 자식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주선 녀인이 자기의 딸이라는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내 딸이 분명한가?)
민희의 목걸이에 걸린 브로치에는 김세영이 온넋을 기울여 그리도 사랑하였던 안해 복경이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결혼식도 못하고 부모들의 축복도 받지 못한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구차한 생활의 첫걸음을 떼였던 그들이 아니였던가.
안해의 그리운 모습이 세영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안해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딸에 대한 어성버성한 감정이 서로 얽혀도는데 민희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북에 가서 아마 큰사람이 됐을거라구, 아버지가 예술을 무척도 사랑했기때문에 꼭 성공했을거라구 하셨어요. 그리고 후날 아버지를 만나거든 처녀, 총각시절에 만나군 하던 그 세번째 전주대를 상기시키라 하셨습니다.》
김세영은 세번째 전주대란 말에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그것은 안해 복경이와 자기만이 알고있는 비밀이였다.
(네가 내 딸이구나. 네가 이렇게 중년이 되여서야 만나게 되다니…)
뭐라고 형언할수 없는 애모쁜 감정이 김세영의 가슴을 모질게 비틀었다.
딸의 말에 의하면 안해는 전후에 심화병으로 앓으며 매일 남편을 보고싶다고 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는것이였다.
미제침략자들이, 민족의 원쑤들이 강요한 분렬로 인하여 김세영은 본의아니게 안해 복경에게 죄를 진셈이였다.
분렬이 저주로웠고 안해가 불쌍했으며 딸 보기가 죄스러웠다.
《민희야, 이렇게 헤여져 살아서는 안될 우리 집안이 아니냐. 미국놈들이 원쑤다!》
김세영의 목소리는 비분에 떨리였다.
그의 눈앞에는 안해와 처음 만나던 그날로부터 대전감옥으로 가던 길에 도망을 치다가 처남과 헤여지던 광경이 어제일처럼 떠올랐다.
이 순간 그는 비록 자신이 안해와 헤여지고 지금은 딸과도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자기가 그때 어버이수령님 계시는 북으로의 길을 선택한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옳았는가를 다시금 절감하였다.
만약 그때 북행길을 하지 않았더라면 원쑤들 손에 잡혀 살아나지도 못했을것이고 만약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조국과 인민앞에, 가깝게는 저세상으로 간 안해와 딸앞에 오늘처럼 떳떳하지 못했을것이다.
얼마나 큰 사랑, 얼마나 큰 믿음을 받아안고 내가 지금 살고있는가 하는 자부가 지난날의 아픔을 매질하며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이처럼 딸과의 반갑고도 가슴아픈 상봉과 리별이 있은 후 김세영은 불타는 념원을 안고 희극양상의 작품에서 관중들에게 보다 더 유쾌하고 즐거운 웃음을 주었다.
그의 가슴속에 박힌 커다란 아픔이 어떻게 그런 웃음을 불러내는지 아마 사람들은 다는 모를것이다.
김세영이 간직한 웃음의 철학이 어떤것인가를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도 있다.
김세영에게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본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김세영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희극배우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배우생활을 하고있는 다른 아버지들은 혁명영화나 정극적인 무게있는 영화의 주인공, 주요배우가 되여 존경을 받으며 사는데 아버지에게는 《자전거반장》과 같은 천박한 별명이 붙어있었던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도 김세영의 자식들을 보고는 웃어대군 하여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엄한 가풍을 세운 무뚝뚝한 아버지여서 세영의 자식들은 어려워 한마디의 불만도 표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김세영의 가정에서는 뜻하지 않게 불상사가 생기였다. 김세영의 둘째아들이 그만 잘못되였던것이다.
그날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세영은 그만 심장이 멎어버리는것 같았다.
그는 터지는듯 한 가슴을 부여안고 온밤 잠들지 못하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껴울었다. 하지만 날이 밝자 그는 밥 한술 입에 대지도 않고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둔채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당시 주요과제로 제기되였던 예술영화의 속편들에 대한 촬영을 잠시도 중단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자각이 그를 일으켜세웠던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많은 군중과 기재들이 동원되여 집중적으로 촬영하게 되여있었으므로 주역을 맡은 자기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김세영은 안해와 자식들이 매달려 사정했으나 여느때와 같이 촬영장에 나타나 아주 태연자약한 자세로 연기를 하면서 그날 촬영을 성과적으로 끝내였다.
촬영이 끝나자 창작가들과 배우들은 김세영에게 정말 주인공역을 저절로 웃음도 나고 생각도 깊어지게 아주 잘했다고 인사를 하려다가 한쪽구석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그를 보게 되였다.
사연을 알게 되자 그들은 모두 놀랐다.
(아, 그런 슬픔을 안고도 촬영기앞에서 어쩌면 그리도 밝게 웃을수 있단 말인가!)
그의 정신세계는 창작집단을 감동시켰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김세영은 자식들에게 낮으나 심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 마음을 다는 모른다. 난 1950년에 벌써 지옥속에 던져졌던 사람이다. 어버이수령님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몸이고 또 요행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있을게다.
어버이수령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시고 위대한 장군님은 내 운명의 보호자이시다. 덕을 입었으면 조금이라도 보답하는게 인간의 의리가 아니냐.
제 가정일때문에 나라일을 뒤전으로 밀어놓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구실을 할수 있겠니?
그래서는 안되겠기에 둘째를 그냥 놔둔채로 촬영장으로 나갔으니 너희들이 나의 이 진심을 알아주기 바란다.》
가족들앞에서 한 김세영의 이 말의 밑바탕에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생체험이 깔려있었다.
남쪽땅에서 정치범으로 체포되여 1년내내 손목에 족쇄를 차고있다나니 그의 손목에는 그때 생긴 상처가 깊은 허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몸소 김세영을 만나주시고 그의 지난 과거사도 다 들어주시고나서 그 족쇄자리를 여러번 어루만져보시다가 그 허물진 손목에 몸소 금시계를 채워주시였다.
그리고 그후에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고급손목시계를 또다시 수여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족쇄와 금시계!
한사람의 손목에 얽힌 이 대조적인 사연은 구태여 설명없이도 너무나 커다란 의미를 깨닫게 하고있으며 김세영이 창조한 형상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김세영이 가슴에 안고 산 웃음의 철학, 그것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펼쳐주신 우리 식 사회주의의 생활의 본색을 꾸밈없는 연기로 긍정하면서 부정적인 요소들을 타매하고 불살라버려야 한다는것이였다.
하기에 그는 언제인가 바다에서 배가 조난당하여 북반부에 들어와 치료도 받고 커다란 은덕을 입게 된 남조선어민들에게 자기의 체험을 들려주면서 두손을 높이 들고 《남조선은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지만 북조선은 이 손목에 금시계를 채워주었습니다. 나처럼 이런 위인들께 삶을 맡겨야 남조선인민들도 사람답게 살수 있습니다!》라고 뜨겁게 웨치였다.
김세영은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의 품속에서 1972년 4월 12일에는 공훈배우칭호를, 1975년에는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게 되였다.
사람들에게 그리도 밝고 깨끗한, 교훈적인 웃음으로 기쁨을 주던 인민배우 김세영은 1989년 10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고 신문 《민주조선》과 《평양신문》 그리고 평양방송으로 김세영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도 내게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정말 아까운 동무, 재능있는 배우를 잃었다고 거듭거듭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91년 4월에 인민배우 김세영의 공적을 다시금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돌이켜보면 사실상 김세영은 인생을 두세번 고쳐산 사람이였다.
감옥에서 빠져나와 어버이수령님품에 안기여 재생하였고 1985년에는 뜻밖의 사고로 사경에 처했다가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직승기로 어느 중앙병원에 후송되여 구급처치를 받고 보람찬 삶을 누리다가 웃음속에 생을 마쳤으니 그만큼 행복을 누린 사람은 이 세상에 많지 못할것이다.
오늘도 《자전거반장》, 《우편국장》으로 불리우며 영화화면과 더불어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인민배우 김세영!
그의 삶의 종착점은 우리모두에게 운명의 선택을 잘해야 옳은 삶, 참된 삶을 누릴수 있다는 귀중한 진리를 깊이 새겨주고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10-22 03:15:08 새 소식에서 복사 됨]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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