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동물학계가 인정하는 원홍구 조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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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7 05:2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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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동물학계가 인정하는 원홍구 조류학자
편집국
조선의 오늘 사이트는 최근 세계 동물학계가 인정하는 원홍구 조류학자를 소개하였다. 원홍구 조류학자는 1888년에 태어나 1970년 10월 3일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원홍구 조류학자는 동물자원을 처음 분류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조선동물자원의 분포도도 만들었다. 그리고 클락새도 찾아내여 당의 자연보호정책의 정당성을 실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김일서 주석과 당의 높은 신임과 각별한 사랑속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당시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였으며 후보원사 교수 박사의 학위학직을 지니였다.
한편 그의 아들 원병오 박사는 남쪽 조류학자로 코리아전쟁때 헤어졌다. 이후 15년만에 새를 통해 생사를 확인한 유명한 실화가 있다. 이 실화를 토대로 1992년에는 일본과 북한이 합작하여 만든 '버드(Bird)'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최초의 남북합작 단편만화영화 '새'가 제작되기도 했다.
보도 전문을 소개한다.
세계적인 인재로 키워준 어머니당 (8)
세계동물학계가 인정하는 조선의 조류학자
우리 당의 품에 안겨 희망과 재능의 나래를 한껏 펴고 나라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값높은 한생을 빛내인 과학자들가운데는 우리 인민들속에 새박사로 널리 알려진 생물학자 원홍구선생도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새에 대하여서는 원홍구박사가 잘 아는데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그가 키운 제자들이 새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있습니다.》
1888년 삭주군의 산골마을에서 나서자란 원홍구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연을 사랑하였고 온갖 새들과 여러가지 동물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였다. 그는 개천, 안주, 덕천, 강서 등 여러 지방의 농업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새와 곤충을 비롯한 여러 동물들의 생태와 분포 등 우리 나라의 동물자원을 조사하였으며 짬짬이 그것들을 채집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군 하였다.
우리 나라 새들을 수집정리하여 분류체계화하였으며 우리 나라 조류연구의 기초문헌이라고 할수 있는 저서 《조선조류목록》을 완성하여 내놓았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동물자원을 연구선전한다는 죄아닌 《죄》를 들씌워 선생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나라없던 그 세월 동물학탐구의 꿈을 실현할수 없어 보금자리를 잃은 새마냥 방황하며 한숨과 절망속에 몸부림치던 원홍구선생은 위대한수령님의 품, 어머니당의 품에 안겨서야 그토록 숙망해오던 동물연구사업을 다시 할수 있었다.
해방후 김일성종합대학이 창립될 때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대학의 첫 교단에 서게 된 선생은 남다른 희망과 포부를 안고 과학연구와 후대교육을 위한 보람찬 삶의 새 출발을 하였다.
그는 창립 1돐을 맞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300종에 1 500점에 달하는 동물표본들을 보여드려 기쁨을 드리였으며 생물학발전을 위한 귀중한 교시와 크나큰 사랑, 믿음을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였다.
원홍구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장 겸 동물학강좌장, 대학생물과학관 관장, 과학원(당시) 동물학연구소 소장으로 사업하면서 인재육성사업에 전심전력하였으며 동물채집사업과 동물자원조사장악사업에 지혜와 열정을 다 바치였다.
미제가 일으킨 전쟁으로 모든것이 불타던 준엄한 전시조건에서도 선생은 180여종의 동물표본을 만들어 동물학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전후에는 우리 나라 동물을 새류, 량서류, 곤충류, 포유류로 분류체계화하기 위한 연구사업을 심화시키는 한편 동물채집사업을 중단없이 밀고나갔다.
이러한 선생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동물자원을 조사하고 박제품들을 수집하는데 쓰라고 좋은 사냥총들과 사냥개를 보내주시였으며 칠순을 가까이하였을 때에는 이전처럼 자주 채집터에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자동차를 보내주시였다.
그 사랑, 그 믿음속에 원홍구선생은 여든이 넘도록 동물학연구에 전심전력하여 우리 나라 동물자원을 처음 분류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조선동물자원의 분포도도 만들었다. 이 나날에 세계의 그 어디에도 없는 조선고유특산종인 클락새도 찾아내여 나라의 동물종수를 보다 풍부히 하였으며 우리 당의 자연보호정책의 정당성을 실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수십년간 진행해온 연구사업과 현지답사과정에 얻은 풍부한 자료에 기초하여 《조선조류원색도설》, 《조선포유류도설》을 비롯한 도해집들과 《조선조류지》, 《조선조류의 분포와 그 경제적의의》, 《조선짐승류지》, 《조선량서파충류지》 등 70여권의 과학기술도서들을 집필하였다. 그가 집필한 책들은 나라의 동물학 특히 조류학연구에서 기초적인 문헌자료로, 원전적인 도서로서 학술적의의가 매우 큰 국보적인 도서들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홍구선생은 이름있는 새박사라고, 그만한 새박사는 없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며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과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원홍구선생은 당의 높은 신임과 각별한 사랑속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당시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였으며 후보원사 교수 박사의 학위학직을 지니였다.
당에서는 나라의 생물학발전과 인재육성을 위한 사업에서 커다란 공적을 쌓은 원홍구선생이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조의행사를 국장으로 크게 진행하도록 하고 유해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여 영생의 삶을 누리도록 하여주었다.
정녕 대양과 같이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어머니 우리 당의 품은 평범한 생물학자를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참된 과학자로,세계동물학계가 인정하는 조선의 조류학자로 내세워준 위대한 사랑의 품, 삶의 보금자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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