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고려청자의 대가 우치선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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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5 05:5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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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고려청자의 대가 우치선 도예가
편집국
조선의 오늘 사이트는 최근 북 고려청자의 대가 우치선 도예가를 소개하였다. 우치선 도예가는 1919년에 태어나 2003년도에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북 최고의 도예가이자 ‘고려청자의 대가’로 불리는 그는 1983년 ‘공훈 예술가’ 칭호를 받고 1989년 ‘김일성상’을 수상했다. 그의 도자기 작품들은 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로부터 “국보적 가치가 있고 세계에 당당히 자랑할 만하다고 최상급의 평가를 받았다”고 신문은 전했다.
보도 전문을 소개한다.
세계적인 인재로 키워준 어머니당 (7)
고려청자의 대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려청자기는 색과 문양, 모양이 특출하여 예로부터 세상에 명성을 떨쳤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보물처럼 여겨왔습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도자기공예를 시작하여 한생을 고스란히 고려청자발전에 바친 우치선선생은 과연 어떤 운명의 길을 걸어왔던가.
20살 나던 해 일본인기업주의 짐군이 되여 일본에 갔던 그는 이역땅 나고야의 박물관에 수많이 진렬된 고려청자기를 보면서 기어이 청자기술을 터득하여 조선사람의 얼을 찾을 결심을 품게 되였고 그때부터 고생스러운 인생행로를 헤쳐왔다.
여러 도자기공장에서 일제놈들의 갖은 천대와 멸시속에서도 자기의 뜻을 굽힘없이 청자기술을 연구하였고 1930년대 중엽에는 전국 도예전에도 입상하였건만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는 초보적인 인간의 권리조차도 지켜낼수가 없었다.
송림땅에서 해방을 맞고서야 비로소 희망의 나래를 펴게 된 우치선선생은 남포도자기공장 공장장으로 있으면서 일본놈들이 마사놓고 달아난 공장을 복구하고 인민생활에 필요한 일용자기들을 구워내면서 본격적인 고려청자기연구에 달라붙었고 그 연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실패도 많았으나 그는 끝내 형태가 우아하고 문양이 아름다운 고려자기, 청자상감기법을 완성하였다.
그후 민족전통과 개성을 살린 《호로형운학상감장식주전자》, 《인장련속무늬상감장식꽃병》을 비롯한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을 많이 출품하여 세상을 놀래웠다.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에 의하여 우치선선생은 1980년대 초엽부터는 만수대창작사 도자기창작단 창작가로 일하면서 많은 청자기들을 우리 나라 국가미술전과 세계각국의 전람회들에 출품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창작적특기는 도장련속무늬를 기본으로 하고 현대적미감에 맞게 힘차면서도 정서가 풍기는 그림을 배합하여 형태와 무늬, 색갈이 잘 조화되고 또한 은근하고 더없이 고상하고 아름다와 신비스러운 감과 황홀감에 심취되게 하는것이다.
언제인가 사람들이 그에게 70여년의 창작인생행로에서 이룩한 눈부신 성과의 비결에 대하여 물은적이 있었다.
그는 도자기를 하자면 우선 미술을 알아야 하고 흙을 알아야 하며 불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다 합친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창작의 자양분을 안겨주시고 세계의 단상에 올려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과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을 심장깊이 새기고 창작실천에 구현해야 한다는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좌우명이였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렇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시고 도자기연구소를 조직하여주시였기에 가랑잎마냥 흩날리던 그가 드디여 인생의 좌표를 정할수 있었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미술의 대전당인 만수대창작사로 불러주시고 온갖 창작조건과 생활문제들을 풀어주시였기에 마음껏 나래를 펼칠수 있은것이다.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품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 인민예술가 고려청자의 대가로 자라난 우치선선생.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그의 작품을 보아주시고 우치선동무는 고려청자발전에 크게 기여한 재사라는 최상의 평가도 해주시고 그가 나이 일흔이 되여 출근하는데 불편할것을 념려하시여 은정넘친 사랑을 안겨주시였으며 그가 순직하였을때에는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해주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이 심어주고 내세워준 고려청자의 넋은 우치선선생의 자식들에 의하여 대를 이어가며 새겨지고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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