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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류태영 목사의 삶 ‘반공에서 통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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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4-26 12:0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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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시보가 류태영 목사님과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였다. 류태영 목사님은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이시고 정력적인 저작 활동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금껏 여러 언론 매체에 "제3세계의 눈으로 식민지 한국을 파헤친다"의 기사를 165회까지 연재하셨다. 류태영 고문님은 격동의 시기에 조국의 자주와 통일의 길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하신 후 오직 그 길 만을 달려오셨다. 고문님의 귀한 삶을 돌아보는 좋은 인텨뷰 기사이기에 이를 소개한다. - 편집국

 


 

류태영 목사의 삶 ‘반공에서 통일로’

 
“우리민족의 살길은 통일입니다”
 
이정섭 기자 
 
 
 

 

▲ 류태영 박사는 해방 후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만을 인정한 반공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재미원로 류태영 박사는 제 3세계에 대한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의 본질을 폭로하고 조국 한반도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류태영 박사가 보수 교단인 통합측 장로교 출신으로 반공 사상을 가졌으며 미국을 동경한 소위 보수주의였다는 사실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 부흥하는 미국을 동경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의 대형교회 목사로 성공한 류태영 목사는 왜 조국 한반도의 자주와 통일을 위한 길에 삶을 바치고 있을까? 그 궁금증을 류태영 박사의 집(뉴욕)을 직접 찾아 대담을 통해 알아보았다.(편집자 주)
  
류태영 박사집을 방문하다
  
미국 뉴욕 근교에 자리 잡은 류태영 박사의 집은 만개한 개나리 울타리에 둘러쌓인 아담한 붉은 벽돌 주택으로 집 앞에는 10층 높이의 2그루의 상수리나무가 서있고 주변에는 각종 나무들이 푸른 잔디 주단위에 자라고 있었으며 맑은 하늘아래에서는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지난 20일(뉴욕 현지시간) 저녁에 류태영 박사 집에 도착하자 사모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한창 미국 양키즈의 야구 경기 중계가 한창이었고 사모님은 양키즈를 응원하고 있었는데 결국 2:1로 패하자 아쉬워했다.

 

80이 넘은 나이에 야구를 즐긴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한국에서도 야구가 흥행하고 있지만 야구의 규칙이 너무 까다로워 야구를 즐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류박사님 부부께 인사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근면 성실이 몸에 베인 류태영 박사
  
이른 아침 갈퀴질과 삽 소리 쇠스랑 소리에 잠을 깨어 밖을 보니 류태영 박사님이 뒤 텃밭에서 땅을 고르고 고추와 오이를 심은 밭을 손질하고 있었다.
금년 한국나이로 85세인 연세에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정원 가꾸기와 풀 뽑기 등을 하시는 것을 보며 근면 성실함이 몸에 배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류태영 박사님의 이런 생활은 책장과 응접실 가구정리, 화장실 등이 깔끔하게 정리된 부분에서도 나타났다.
  
아침식사 중 삶의 이야기를 듣다
  
일을 마친 류 박사님은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기자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식사를 하며 슬슬 직업병(기자로서 궁금증)이 발동했다. 선생의 삶이 궁금해진 것이다. 류 박사님에 대한 일화는 남한에서도 종종 회자되고 있기에 궁금증이 더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선생에게 삶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 하자 스스럼없이 자신의 삶을 털어 놓았다.

 

성장기와 청년기, 미국에 대한 동경에서 본질을 알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조국인 한반도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일하게 된 사연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완고한 보수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다.
  
류태영 박사는 1931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보수 교단인 통합 장로교를 믿었던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당시 집안은 보수 교단인 장로교 통합 측으로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았으며 해방 후 김일성 주석을 인정하지 않고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류태영 박사의 아버지는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나팔수였다고 한다. 류 박사 아버지의 나팔 소리의 울림에 따라 학생들은 만세를 외치며 자주독립을 외쳤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1년 6개월의 감옥생활을 한 후 퇴학 처분되었다, 퇴학 후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를 졸업 하고 사립학교 교원으로 활동했다.

 

교원생활을 하면서 평양신학교 들어가 신학을 전공한 다음 목사가 되어 시무하던 중 장티푸스가 창궐한 동네에서 봉사 활동을 하다 숨졌다고 한다.
류태영 박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3대가 목사가 된 보기 드문 기독교 집안인 것이다.
  
가족사에 대한 잘 못 된 진실 ‘형님 신천 학살과 관련 없어’
  
한국에서 류태영 박사의 형이 신천 학살과 연관이 있다는 설이 종종 있다. 즉 황석영의 장편 소설 ‘손님’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신천학살이 일어난 지역과 류태영 박사의 고향은 같은 군이었지만 다른 곳이었다.

 

다만 형님이 당시 교회 청년회활동을 열심히 하며 반공 사상을 가진 것이 와전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류태영 목사 마을에는 약 140여가구가 모여 살았는데 해방 이후부터 좌우로 갈라졌다고 한다. 당시 조선을 따르던 주민들은 일시적 후퇴시기 미군과 한국군이 진격하자 14가구 정도가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왔는데 우익 주민들이 새끼줄로 묶어 과수원 지하 저장고에 넣고 휘발유를 뿌려 죽인 사건으로 신천학살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소설가 황석영씨와 미국 여행 중에 털어 놓았는데 황석영씨가 이를 소재로하여 ‘손님’을 펴냈고 소설 전개 과정에서 잘 못 전달 된 부분이라는 것이라고 류 박사는 증언했다. 류박사는 손님에 나오는 최요섭 형제는 바로 류태영 박사와 형의 소설속 인물이라고도 말했다.
신천에서는 이 사건 뿐만 아니라 후방 부대에서 퇴각하는 인민군들 다수가 치안대에 의해 학살 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류태영 박사는 한 실례를 전해 주었다. 어느 날 두명의 인민군 여병사가 바이올린을 들고 지났는데 이를 목격한 류 박사는 집으로 불러들여 밥을 주고 자신의 집은 위험 할 것 같아 집에서 떨어진 할머니 홀로 사는 오두막에 숨게 했으나 몇일 지나지 않아 치안대에 잡혀 희생 되었다고 당시를 회고 하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또한 류태영 박사 아버지가 지주 출신이라는 말도 잘 못 전해진 것이었다. 가난한 목사이며 민족주의자였던 아버지에게 땅이 있을리 없었다. 아버지와 동력자였던 목사 한 분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땅 2천4백평을 류 박사의 형에게 소작으로 주어 농사를 지었으나 해방 후 무상 몰수 되었다고 밝혔다. 
  
월남 피난 도중 부산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에 다시 밀려 남으로 퇴주하게 되는 시기 류 박사와 형은 남쪽으로 피난길을 택했다. 부산에 도착한 류박사는 성화신학교의 수료증을 가지고 신학대학에 입학 숙식을 해결하며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군에 입대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군목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미국행을 꿈꾼 류태영 박사는 열심히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영어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미국으로 6개월 동안 유학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류박사는 시험에 합격했으나 그 같은 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미국행은 좌절 되었다.

 

이후 동두천 미 7사단 군목으로 배치를 받게 된 류태영 박사는 초교파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류박사의 초교파적 활동은 종교적 진보성을 읽게하는 대목이어서 소개한다. 당시 대위로 진급한 류 목사는 미 7사단 카츄사 군목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사단 안에는 개신교 교회는 있었으나 천주교 성당은 없었다.

 

가끔 천주교 신자 병사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보는 것을 목격한 류 목사는 서울 미아리에 있는 신부를 찾아가 군 교회로 와 천주교 미사를 집전하는 것과 함께 신앙강좌를 열어달라고 부탁하자 서울 교구에서는 너무 좋아했다.

 

개신교 목사가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신앙강좌를 열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반목만을 일삼던 개신교 일반목사들과는 달리 류목사의 제안은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서울 교구에서는 민간인 신부를 파견하여 군부대 신앙 강좌를 열었고 가톨릭 병사들이 100여명이 참여하는 대성공을 이루었다. 당시 미군 군종 부장이었던 카톨릭 미국인 신부는 이 사실을 알고 류 목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고 물었고 류목사는 군목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하다고 하자 즉각 짚차를 내주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사례는 안동 36예비사단 군목 시절이었다. 안동으로 내려가니 불교신자들이 많았는데 사찰이 없었다. 류목사는 사단장을 찾아 가 안동지역에 오니 불교신자들이 많은데 사찰이 없어 법회를 갖지 못하니 스님을 데려다 법회를 열고 인격교육을 시켜야 되겠다고 하자 사단장(신진식. 박정희 정권하에서 서울시장역임)은 적극 호응했다. 알고 보니 사단장 부인이 불교 신도였다.

 

스님을 교회 예배당에 초빙하여 법회를 열었고 불교 병사들이 모여 들었다. 교회 안에는 목탁소리와 불경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사건으로 류 목사는 신임을 얻었고 그로 인해 많은 혜택을 얻었다. 입대 전 결혼했던 류 박사는 서울 용산에 있는 집을 자주 다니며 미국 입학 허가서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 류태영 박사는 위를 절개하는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조국통일 그날을 희망하며 해외동포로서 모든 것을 다 바쳐가고 있다.     © 자주시보 이정섭



5.16 쿠데타 그리고 미국행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의 문호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유학 장려책을 썼다. 즉 문교부 시험에 합격만하면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시험과목은 영어와 역사 두 과목이었는데 미국 전문분야에서 5년 동안 근무한 사람은 역사 과목을 면제해 주는 특전을 주었다. 류 목사는 영어시험에 합격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미국행 길이 열린 것이다.
류 목사는 미국행을 앞당기기 위해 조기 전역이 필요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육군본부와 국방부 인사과에 로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류 박사는 조기전역을 하고 출세하려면 미국 가야한다는 지배적 인식과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속에 세워진 나라라는 기독교적 사상에 휩쓸려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토로했다. 류 박사는 1964년 팬암 비행기를 타고 동경 거쳐 꿈에 그리던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 신학교에 입학하여 숙식은 해결 할 수 있었고 주말이면 소위 파출부(하우스 케어)일을 해 얻은 돈은 한국에 있는 부인에게 송금했다. 당시 하루 수입은 20불에서 40불이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꽤 큰돈이어서 송금을 받은 부인은 역시 미국이 좋은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집 생각이 난 류태영 박사는 부인을 미국에 오게 할 목적으로 학감을 찾아가 부부가함께 신학을 공부해 고국에 들어가 부부사역을 해야겠는데 그렇게 하려면 부인이 미국으로 유학을 와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학감은 좋은 생각이라며 초청장을 기꺼이 써줘 미국에 왔다. 미국에 온 부인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몬테소리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보조교사로 일하던 부인이 유치원에서 피아노를 치자 원장은 놀랐다. 보조교사가 피아노를 치는 일은 미국사회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임 속에 일을 잘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미국 이민국에 유학생으로 허가를 받아 온 사람이 유치원에서 일만하고 있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이민국에서는 6개월 후 추방 결정을 내려 암담했으나 당시 영주권 제도가 실시되어 영주권을 얻게 되었고 이후 미국 생활은 안정을 찾게 되었으나 가정 경제는 어려움에 빠졌다.
  
영주권 취득과 함께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혈액검사학원에 다녔고 이후 뉴욕혈액은행에 취업이 되었다. 즉 유효기한이 지난 세계의 피를 모아 알부민을 만드는 회사였다. 류 목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세배로 일했고 그에 따라 1만 불을 저축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숭의학교 이신덕 교장이 목사가 교회를 해야지 돈만 벌고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해서 브롱스 교회를 열게 되었다. 당시 한인교회로는 4번째 교회가 선 것이다. 교회를 하면서 10일조나 헌금을 강요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베드포드 교회를 현지인들로부터 인수를 받았다. 그 교회는 백인들이 주로 다니는 교회였는데 점차 교인들 숫자가 줄어 교회 운영조차 어려운 실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국인들에게 교회를 넘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인교인들은 미국인들의 교회 인도에 대해 감사하고 있지만 류 목사는 그 부분에 대해 오히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백인들이 교회를 운영할 수 없게 되면서 누구에게 교회를 인도해야 할 것인가를 토론했는데 흑인들과 스페니쉬에게는 넘기지 않겠다면서 한국인에게 교회를 넘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겉으로 보면 아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내막은 인종 차별적 결정이라는 것이다.
어찌 됐건 류태영 목사의 선교는 성공적이어서 최고 500명의 신도를 가진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류 목사가 은퇴한지 15년이 지난 현재는 70명 정도의 교인이 남아 있다고 한다.
  
류태영 박사의 인식변화 조국통일 한길로
  
완고한 반공 사상을 가진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인민군 입대를 피하기 위해 토굴 생활을 했고 이후 월남하여 한국군 장교로 미군 카츄사 군종으로 복무하였으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은 땅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 미국 땅에 발을 디딘 류태영 목사가 조국통일과 민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류 목사는 사실 민주적 의식의 변화는 함석헌 선생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신학교 시절에도 부흥을 위한 설교집을 동료들이 탐독할 때 류 목사는 함석헌 선생이 발행한 사상계를 보며 민족의식을 키웠다고 한다.

 

민족의식에 대한 인식은 미군 부대에 근무할 당시였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미군들이 축하연을 열었고 축하연이 벌어지는 미8군부대에 서울의 유명 여자대학교 학생들은 버스에 태워져 미군들에게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창피한 것은 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생들이었다. 그런 여자 대학생들을 보며 류태영 목사는 민족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군들이 동두천, 운천 등지로 성 매수를 위해 떠나는 것을 보면서 민족적 의식을 깨우치긴 했지만 보수신앙으로 뼈가 굵은 류 박사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제일의 가치관으로 되어 민족을 위한 특별한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1980년대 중국과 쿠바를 방문했다가 북에 있는 가족을 찾기 위해 가족 상황을 조선 대사관에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신청 여러해가 지나도 연락이 없어 미국 유엔대표부에 신청하게 되었고 가족 일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1990년 범민족연합 미주본부 부의장이 된 류 태영 박사는 부인과 함께 고향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북부 조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통일이 이루어 져야한다는 지향점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통일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류태영 박사는 이후 북을 32번 방문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85세가 된 류태영 박사는 한반도가 외세 의존의 사대를 벗어나 우리민족끼리 자주 평화통일을 이루어야한다고 강조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통일 주체는 남북 쌍방, 외세 의지는 시대 착오적 사대주의 잔재
  
류태영 박사의 통일의지는 1994년 중앙일보와의 대담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1994년 조문을 다녀오자 교포사회는 찬반 논리로 들끓었다 당시 미국 중앙일보는 류태영 박사와 대담을 가졌다.

 

류태영 박사는 대담 마지막 부분에서 “6.25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반공 반북 사상을 널리 이해하고 있다”며 “그들의 분노에 대하여 나도 6.25로 인해 어머님과 형님을 잃은 사람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이산가족의 슬픔은 바로 나 자신의 슬픔”이라고 말했다.

 

류 박사는 “그러나 나는 6.25의 한을 품고 끌어안는 동시에 또한 오늘 우리 한국민족공동체의 이익이 무엇이며 어떤 길을 선택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눈물로 호소한다.”면서 “냉전과 분단의 사고방식에서 떨쳐 나기를 바란다. 전쟁과 분단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도록 6.25 1세대들의 폐쇄성을 청산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특히 “남북화해를 위해서는 정치와 군사는 물론 민간외교와 종교 차원의 대화의 길을 가능한 넓혀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류태영 박사는 같은 신문 대담에서 통일의 주체세력은 남과북 쌍방이라며 “어느 한쪽을 굴복시킴으로써 통일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냉전 체제의 잔재는 속히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항상 외세에만 의지하고 이끌리는 것은 시대착오에서 나오는 사대주의 사상의 잔재.”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용기이며 지혜이며 또한 애국 애족의 길이다. 현실을 현실대로 인정하면서 남북화해의 길을 찾아 나아가야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길만이 자주적 평화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통일론을 피력했다.

 

류 박사의 대담내용을 정리하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7.4남북공동성명을 존중해야 하며 이의 실행을 위해 남북 화해와 협력, 교류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류 박사의 바람대로 지난 국민의정부와 참여 정부에서는 남북 최고 수뇌자들의 합의에 따라6.15와 10.4공동선언이 선포 되었고 남북관계는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로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파탄에 빠졌고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민족은 광복 70년과 분단 70년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 일제 36년의 역사가 길게만 느껴졌으나 어느 덧 분단 고통은 그 배에 해당하는 70년이 되었다. 이 암울하고 비극적인 분단 상황을 보수와 진보, 정견과 정파, 신앙을 초월하여 우리민족끼리 힘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류태영 박사를 만나면서 이러한 민족적 염원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 함을 가슴 깊이 되 새기며 그 날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류태영 박사의 절절한 통일시 한편을 독자들과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한다.
  
판문점의 낙엽(1992년 10월)
지은이 류태영 
 
바람이 분다
우수수
판문점에 가을 바람이 분다.
바람 못 막는 판문점
어두운 가을밤에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져 
이리저리 뒹구는데
  
너는 무슨 잎
너는 어디서
어째서 
어디로 가니
묻지 마소
어딘들 가을 단풍잎 가지 못하리
어디면 우리 땅 나뭇잎 아니랴
누구면 맘의 노래 못 부르리
어딜까요?
다 누구나 가는 길, 통일의 길 가지
판문점에 
떨어진 낙엽에 
두 맘 있겠는가
크고 작음 있을소냐
곱고 미움있을소냐
무슨 잘못이 있을소냐
이르고 늦음이 있을소냐
북으로 가도 좋아
남으로 가도 좋아
  
바람한번 불어오면 
못 갈길 없고 
못 넘어갈 담 없으니 
낙엽아 너는 남으로 달리고
북으로 달리는 
통일의 사신되어라
 

 

[출처: 자주시보]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4-26 16:50:32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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