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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인터뷰> LA한인타운노동연대(KIWA) 박영준 전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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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2-20 14:2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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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LA한인타운노동연대(KIWA) 박영준 전소장

 


1992년에 설립된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 Koreatown Immigrant Workers Alliance)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직장과 지역사회를 변혁하는 진보적인 풀뿌리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민노동자와 주민의 힘을 건설하고 있다. 노동연대는 로스앤젤레스 전역에 걸쳐 매년 5,000명 이상의 노동자, 세입자 및 가족들에게 봉사해 왔다.

노동연대의 업무는 지역사회조직운동, 정책홍보, 노동자와 세입자의 권리보장, 지역사회주도 녹지확보, 접근가능한 주택개발, 교육정책, 시민정치참여와 지도력개발 등을 포함하며, 한인타운노동연대의 회원은 주로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저소득이민자들로서 한인타운과 그 주변에 거주하거나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STN사람> 네 번째 순서로 18년간 KIWA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해온 박영준 전소장을 인터뷰한 동영상을 올리고 그 내용을 녹취한 전문을 기사로 싣는다. [편집부]

 

 

<박영준>한인타운노동연대(KIWA) 전소장

 


KIWA의 활동 속에서는 당연히 굴곡이 많았고 다양한 활동들을 했고 하지만 그중에 가장 주축을 이루는 거는 그냥 노동상담이었어요. 한국인이고 외국인이고 간에…

저도 일반적인 이민가정과 똑같이 처음에 이민 와서, 어머님은 호텔에서 메이드 일을 하고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나중에는 밖에서 물건들을 파는 평상?(노점을 말하는 듯) 이런 걸 뭐라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길거리서 장사도 하시고, 아버님은 조그만 그로서리 스토어 (잡화점)를 운영하기도 하고,그런 식의 일반적인 이민생활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요. 특히 아버님은 원래 한국에서부터 기독교 가정이고 아버님은 구세군 사관이시고 결국은 그런 고생 끝에 어느 정도 정착이 된 다음에 가족들 중심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하셨고. 저는 아버님 그로서리, 어머님 상인(행상을 의미하는 듯)을 돕고 그런 속에서 중학교를 들어갔고 대학을 갔는데, 고등학교 때 공부보다는 거리서 놀고 친구 사귀느라 어울리고 이런 과외활동을 많이 했던 거 같애요.

고등학교 시절에 이철수 사건 구명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다

처음에 사회적인 문제에 의문을 갖게 된 거는 조금 그릇 속에 갖혀있는 세상을 보게 되는 계기, 우리 소수민족들이 미국사회에 뿌리내린 주류가 되고 이런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 하는 경험은 가끔가다가 일반사회에서 한인학생회에 들어가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참여를 장려하고. 기회들이 있었는데 그때가 이철수 구명운동을 하는 후원의 밤에 와서 프리젠테이션을 했어요. 저는 거기에 굉장히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로 하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구나. 거기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가담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혹시 이철수 사건(주)에 대해서 모를 수 있는 분들이 있을까봐. 이철수 사건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주 어려서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을 하면서 중고등학교서부터 한인 친구가 없는 우리가 잡(직업)을 두 개 세 개씩 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다 보니까. 중국친구 그 속에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갱들이 식당을 덮쳐가지고 튜비스를 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중국애들을,갱들을 잡는 거보다 그냥 커뮤니티도 없고 동떨어진 이철수라는 사람을 잡아서 살인자라고 가두는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도중에 KWE 라고 미국에서는 제일 먼저 주류사회에서  제일 먼저 파헤치고 한인사회에 알려서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어요. 그 와중에 Self-defence,자기방어(정당방위) 때문에 갱들이랑 감방 안에서 싸우다가 다른 갱단원을 죽이는 그런 사건입니다.그 구명운동이 그당시에는 어쩌며는 제일 큰 사회운동이고 굉장히 수년동안 끌어서 결국은 저희들이 이겨서 무죄로 석방하는 그런 운동입니다.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식당노동자권익(처우개선)투쟁

처음에는 Restaurant Workers Justice Campaign (식당노동자 권익투쟁)이라고 해서 “식당업계 한꺼번에 다 조지자, 다 바꿔보자” 해서 그 식당캠페인. 한인커뮤니티 안에서의 식당은 미국노동법에도 저촉이 안되고 한국노동법에도 저촉이 안되고. 한인타운에 고용주가 얘기하는 노동법은 막가는 그런 걸 당당히 여기던 때가 있었어요. 최저임금, 초과수당, 그외에도 여러가지 노동법에 있는 것을 무시를 하는.한국에서 우리가 얘기하는, 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이런 것도 전혀 아니고.

사실은 미국에 있는 노동법이 한국의 노동법이랑 비교를 하며는 이거는 법도 아네요. 한국의 노동법은 정권 또는 노동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유럽에 있는 굉장히 선진적인 것들을 적어도 법상으로는 수용을 해 갖고 적어놨는데. 굉장히 발전된 걸로 알고 있어요. 지켜지느냐 안 지켜지느냐 하는 문제는 크지만.미국은 그거조차도 규정이 안 되어 있어요. 법이 있다면 법 위에 서서 싸움을 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도 없다면 법을 만드는 것도 굉장히 커다란 싸움인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노동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기본법을 준수를 해라’ 하는 싸움을 하고. 식당노동자권익투쟁, 그것을 한 3,4년 하는 속에서 처음에 캠페인을 시작하기 몇 달 전에 연방노동국이 들어와서 “아! 이 지역 한번 다 까뒤집어 봐” 라고 해서 한인 커뮤니티에 있는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식당들을 수사를 했어요. 거기서 나온 결론이 한인 커뮤니티에 있는 식당들이 노동법을 준수하는 것이, 그것도 연방노동법보다 주노동법이 훨씬 앞장서 있는데도, 3%가 노동법을 준수한다 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싸움을 하면서 그것이 어느 정도 노동법을 준수하는 업체들이 숫자가 더 많아졌다는 평가를 내렸고. 그당시만 해도 식당노동자들을 조직을 해서REG이라고 Restaurant Workers Organization (식당노동자단체)라고 해서 그 조직들이 된 이후에는“아! 지렛대가 넘어왔다. 두 번째는 그것을 계속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라고 해서 생긴 게 슈퍼마켓 켐페인이었습니다.

한인타운 슈퍼마켓 캠페인으로 이어져 생활임금(Living Wage)협정 체결

“식구같이 열심히 하고 내가 잘 되면, 우리 사업이 잘 되면 내가 다 보상할께.” 라고 시작했던 게, 체인점을 이룰, 수퍼마켓 체인들이 곳곳에 다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받는 것은 똑같은 최저임금, Health Insurance (건강보험) 이런 거 아무것도 없고. 그런 속에서 두 번째 싸움은 슈퍼마켓.한인 커뮤니티 성장했다? 그런 속에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 덕에 너희들도 성장했다. 그 속에서 상환방안, 기여를 해야 되지 않느냐? 여기에다 무슨 커다란 코리안 아메리칸 뮤지움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리인벌스 하는 거죠. 여태까지 너희들이 얘기했던, 노동자에게 임금을 자진해서 높여주라 라고 하는, 처음에는 그것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차원에서 시작을 했고. 그 다음에는 최저임금이란 빈곤임금이다.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생활임금을 줘야 된다. 진짜 열심히 일하고 많은 희생들을 치루면서 결과 다섯개의 슈퍼마켓 체인들이 그것을 수용하기에 이르렀고.

접근가능한(저소득) 주택 캠페인 (Affordable Housing Campaign)

인제 여기에 살고 있는 저임금이민노동자들이랑 회원들과 함께 요구했던 게 여기서 20년, 30년 살고 여기가 내 직장인데, 내 아파트가 콘도가 되고 그게 어느 누구도, 우리들 중에서, 살 수가 없는. 쫓아내고 그럴 때, 이러한 개발이 과연 우리 주민에게 필요한 개발이냐? 굉장히 많죠.

대표적인 예가 윌셔와 버몬에 있는 완전 공지였어요. 겟토화 됐을 때는 아무도 안 사, 그 땅을. 무진장 가격이 낮어. 스나이더라는 Developer, 개발업자가 들어와서 One Bedroom에 3천불 짜리를 짓는 거예요. 우리한테 아무 소용없고 필요없다. 만약에 그거를 지을라며는 우리 지역사회에 필요한 이런 이런 이런 할애를 해라. 그래서 그걸 Community Benefit Agreement (지역개발수익협정), CBA라고 하는데,거기는 그거를 지으면서 아! 겟토화 되었으니까 여기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이러한 거대한 아파트를 짓습니다. 시청 이거 돈 지원해주세요. 그래서 1800만불인가 받았고 파킹 이거 규율 있을 거 아녜요? 이만큼한 주민들이 살면 이만큼의 파킹랏(주차장)이 할애돼야 한다, 지어야 된다. 이런 거를 줄여주고. 이런 경우였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싸우면서 원래 들어가야 될 숫자의 98 유닛(세대) 저소득층 아파트를 지어야 된다 하는 약속을 한인 커뮤니티에, 코리아나운에 공원이나 레크레이션 파크가 필요하니까 100만불을 내라. 받아내고. 자기 부지 근처에 코리아타운에 녹색부지가 부족하니까 너희들 어차피 지어야 되니까 우리가 개입해서 같이 그거를 디자인하고.. 이런 것들을 얻어내는 싸움들을 굉장히 열심히 했죠. 교회에서 저소득층아파트를 무너뜨리고 파킹랏(주차장)을 짓는다 하는 싸움이라든가.

코리아타운 녹색공간(Green Space, 녹지) 조성을 위한 시도

코리아타운이, 엘에이 지역의, 미국전역에서 녹지가 가장 없는 지역으로 판명난 도시예요. 그래서 그것을 해결할려고 주정부에서 5백만불 받아내고 2백만불 더 신청하고 도시재개발국에서 1800만불 받아내고 이래서 그런 시도를 했어요.

그런 활동들이 노동단체로서는 좀 색다른 활동이기는 하였지만 노동조합이 아닌 상태에서의 노동단체는 단순히 직장내 노동문제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노동자의 전체적인 삶, 상당히 유기적인 전체적인 삶을 거기에 이해와 요구, 이런 것들을 반영해야 된다. 그래서 여러 캠페인을 했습니다.

소수인종이민문제 해결을 위한 주류사회단체들과의 연대활동

샌서낸 브라너 라는 연방의안이 상정이 됐어요. 내용은 불체자들은, 내지는 미비서류자(서류미비자)들을 숨겨주거나 대우를 해주거나 배려를 하며는 이사람들도 다 불체자 취급을 한다. 한국에 무슨 그런 옛날법(연좌제를 말하는 듯)이 있었댔잖아요, 기억이 안 나지만. 교회 다 범죄자들이 되고, 학교 범죄자들이 되고, 사회봉사단체들 다 거기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Total(전부다). 그래갖고 LA에서만  그당시2006년도에 제가 기억하기에 그런 행진, 집회들이 있었는데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던 게 서너 번이 돼요, 서너 번이. 그거에 따라서 큰 도시들 수백만명이 나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사면문제들이 굉장히 지속되고 하나의 어떤 Platform(정책방안)으로 지금 오바마가 그것을 갖고 있고 지금 실행을 하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 산뜻한 아이디어로 시작했고 한데 굉장히 꾸준히 가고 조직화되고 이러면서 커다란 일들을 이루지 않았나 (생각돼요).

LA지역에 만연한 임금절도(Wage Theft) 근절을 위한 KIWA의 가주의회 입법활동

그 이전에 했던 활동들을 지속하는 것, 분명 역량이 달리기는 하지만. 식당캠페인, 슈퍼마켓캠페인 그리고 Gentrification(고급주택화)에 대해서 싸우고 재개발에 대해서 공정한, 주민을 위한 재개발을 요구하고 노동상담 일을 하면서  KIWA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게 한 2,3년 된 것 같애요.

어떤 부분인가 하면 노동자가 체불임금이 있어요. 못 받았어요(체불임금을). 최저임금을 못 받을 수도 있고 오버타임(초과근무수당)을 못 받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월급을 받았는데 수표가 bounce(부도)났다든가, 또 임금을 미루었다가 문을 닫고 도망갔다든가, 여러가지 이유로 점심시간을 못 챙겨먹는다든가 휴식시간을 (안 준다든가) 이런 것들이 있었을 때, 하나는 “귀찮다. 여태까지 벌어먹고 살았으니까 관두지.” 또는  할 줄을 모르니까 (포기하는 등) 이런 여러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 용기있는, “그것을 끝까지 추진해서 내 권익을 찾겠다” 라는, 말이 통하지도 않는 저임금이민노동자들이 있는 거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책임을 갖고 있는, 할당된(관련) 정부기관이 바로 주노동청(DLSE)인데, 거기 가서 소송을 하고 그것을 여러 날짜들을 지키면서 증인, 증언, 증거물들을 제출하고 업주의 변호사랑 싸워서 숭소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거예요. 이게 뭐 일년, 일년 반 이렇게 걸리는데. 여기서 문제는 판결문을 받으며는 당연히 업주로부터 돈을 받아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법적인 과정을 밟아서 받는 어려움도 분명히 있지만 일년 반, 일년이 걸려서 판결문을 받을 정도 되면 업주가 회사의 문을 닫았든가  팔아먹었든가 아니며는 파산신청을 했든가 이래서, 돈을 받아야 될, 내야 할 주체가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런 경우들이…

UCLA(로스앤젤레스주립대학) Labor Center(노동센터)에서 연구조사를 했거든요. 판결문을 받아도 그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실제로 십전이라도 받는 노동자들이 16%? 17%? 아무튼 그런 노력 속에서 임금을 받아낼 수 있는 노동자들이 17%밖에 안된다고 했을 때, 그러면 우리가 내고 있는 세금을 주가 가져가고 거기에서 운영되는 노동기관이 계속 판결문만 발급하고 아무쓸데 없는 종이조각만 발급하고 있는 이런 경운데, 노동법을 강제해야 되는데. 이런 속에서 여러가지 논리죠. 노동자들이 월급을 못 받으면 소비를 못하니까 지역경제가 악화되고,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한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니까 사회복지제도, 보장제도에 기대야 될만큼 역순환이고. 열심히 노동법을 지킬려고 노력하고 있는 업주들은 너무 불공정, 불공평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임금을 제대로 안 주는 대신 고객들을 끌기 위해서 세일들을 하고 광고를 때리고 이러니까 너무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사람들한테 어렵고. 노동자들은 이로 인해서 자기에게 받는 경제적 정신적 건강도 이런 피해들이 많고 이래서…

지금 KIWA에서 우리의 연대하고 있는 단체들- 노조도 있고- 과 함께 주의안을 입안시키고 그것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노력들을 지금 내년이 되면 3년째, 그러니까 쉽지 않은… 그래서 노동자가 일하다가 자기의 임금이 체불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노동청에 청구하는 동시에 업주의 자산에, 그것이 비지니스에 근거해서 장사를 하든, 그 업주의 Property(재산)에, 집이건 부동산이건 여기에 동시에 차압을 할 수 있는 권리. 그러니까 문을 닫고 그래도 부동된 재산에 이러한 AB2416(임금절도회수법안)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올해 들어서 하원의원의 Labor Committee(노동위원회), 그다음에 Judiciary Committee(법사위원회, Policy Committee는 착오인듯), Appropriation Committee(조세위원회, 세출위원회), 그다음에 하원전체를 통과시키고 상원에 똑같은 세 위원회를 통과시키고 마지막 상원 Floor(전체회의, 본회의)를 통과를 못 시킨. 만약에 그거를 (통과)시켰으면  주지사가 비토(거부권행사)를 하거나 서명을 하거나, 굉장히 가까운 데까지 갔다가 아무튼 실패를 한 거죠. 그런데 쉽게 성공을 했다면 그게 진정한 노동자를 위한 법일까 생각이 들고요. 내년에 또 도전할려는 마음을,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주) 이철수사건

1973년 6월7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계 갱단원 살인혐의로 종신형을 받고 복역. 당시 목격자의 허위증언으로 근처에 있던 이철수 씨가 살인혐의로 체포된. 1977년 교도소 운동장에서 시비를 걸어온 복역수 모리슨 니드햄과 싸우다 그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

사건을 접한 당시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이경원 기자가 77년 판정에 의문을 제기한 탐사기사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후 한인사회를 비롯한 범아시안 커뮤니티의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1978년 당시 법대 졸업생이던 유재건 변호사와 당시 고교교사이던 그리이스 김 전 한미연합회 회장 등이 주축이 돼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구성, 다른 아시아계 인사들과 함께 1978년 6월17일 새크라멘토 법원에 이철수 인신구속해제 신청을 했으며, 한인사회는 이를 위해 1982년 전국적으로 10만 달러 모금캠페인을 시작했다.

마침내 1982년 9월2일 샌프란시스코 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이씨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졌고, 1983년3월28일 샌호아킨 법원이 이씨에 대한 석방을 판결, 10년만에 자유의 몸으로 석방됐다.


박영준(Danny Park) 약력

2001~2010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소장, LA, CA
                   - 이사, 직원, 회원, 외부자문가들과 함께 장기전략계획 개발
                   - 저임금이민노동자 권익문제제기와 KIWA 발전모색
                   - 2005년도 Alston-Bannerman Fellow 선정. 장기간 사회정의실천에 헌신한 공로로 이 재단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음

1992~2000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노동상담 디렉터, LA, CA
                    - 단체 공동설립자
1986~1988     민중문화연구소 이사, LA, CA
                    - 설립자, 회원조직
1986~1986     고려건강재단 청소년건강교육담당, LA, CA
1982~ 1985    민족학교 간사, Oakland, CA
                    - 노인 및 청소년 대상 사회봉사
1983~1984     샌프란시스코공항 청소부노조 추진 자원봉사자 조직활동가, SF, CA
                    -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25명의 청소부 조직 및 이를 위한 아시안 커뮤니티 안의 지역사회지원단 조직

1982              한글학교(Korean Tutorial Service) 간사, SF, CA
                     - 설립자
1978~1981     이철수 구명위원회 청소년활동위원회 회원, SF, CA
                    - 기금모금활동, 교육포럼, 행진, 지역사회조직활동 참가
1988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SFSU), SF, CA
                    - 사회복지학 학사 


[인터뷰후기]

1978년 이철수란 한국계 미국인 사형수의 구명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 시작한 사회/노동운동이 올해로 36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활동을 통해 이민노동자의 권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한인타운노동연대(KIWA)를 주류사회에서 인정하는 단체로 키웠다. 박영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임금을 착취하는 고용주를 상대로 한 WAGE THEFT(임금절도) 행위를 근절하고, 임금절도를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법안을 입안하고자 애쓰고 있다.

2008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2세 및 1.5세를 중심으로 한 문화공동체인 우리문화나눔회를 설립하여 주말나눔학교, 독서패, 붓그림패, 영화패, 노래패, 소리패, 나눔농장 등의 활동들을 정력적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가 이전 36년간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이민노동자와 한인지역사회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으로 확신한다.

 

[출처: 사발통문]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2-21 02:16:08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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