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연재 33]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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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16 19:3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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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2015-07-16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33) 련방제방안을 지지하여> 기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33)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련방제방안을 지지하여
북남련방제안과 그 실현을 위한 공화국의 적극적인 노력은 남조선인민들은 물론 정계, 언론계 등 사회 각계에 영향을 주었고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의 열기를 더욱 달아오르게 하였다.
특히 남조선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은 1960년 8. 15해방 15돐 경축대회보고에서 제시된 평화적조국통일방안을 열렬히 지지찬동하면서 그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지를 가다듬었다.
보고에서는 첫째로, 력사를 창조하는 우리 인민이 곧 다름아닌 주체세력이라는것과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근로인테리, 상인, 기업가 할것없이 민족적량심을 가진 모든 사회적인사들을 총망라하여 범민족적인 강력한 조직적태세를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는것과 둘째로, 통일의 전제조건을 해결함에 있어서 북남의 정치제도상차이를 문제시할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먼저 북남인민은 모두 한조상의 피를 이은 동족이라는것과 그로부터 출발하여 정치적문제보다 민족적문제해결이 선행되여야 한다는것, 셋째로, 조국의 평화적통일 및 그의 첫걸음인 경제, 문화교류와 인사래왕의 실현은 우리 나라의 력사적필연성으로부터 제기되는 과업이다. 우리의 민족적운명의 해결은 그 어떤 외세의 개입도 용납될수 없으며 오직 민족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이렇듯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지향과 요구, 그 투쟁열기가 높아가는 가운데 남조선에서는 민족자주통일을 위한 투쟁조직들이 수많이 결성되여 통일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1960년 11월 8일 남조선의 서울대학교에서 민족통일련맹이 조직된데 이어 성균관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경희대학교 민족자주통일촉진련맹, 경북대학교 민족통일촉진학생련맹, 부산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민족통일마산대학투쟁위원회, 제주대학 통일문제연구회, 통일촉진전남고등학생련맹 등 수많은 통일조직들이 련달아 출현하였다. 1960년말에 이르러 민족통일련맹은 남조선의 모든 대학과 일부 고등학교들에 조직되였다.
이 투쟁조직들은 한결같이 《통일》이라는 이름을 뚜렷이 내걸고 투쟁목적도 통일을 위한것이라고 당당하게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들의 주최밑에 통일을 위한 여러가지 형태의 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이러한 정세의 흐름을 타고 1960년 11월 24일 사회대중당이 결성되였다.
사회대중당은 결당선언, 강령, 정책에서 남조선인민들이 한결같이 요구하는 조국통일구호를 제때에 옳게 들고 민족자주로선에 기초한 민주주의적통일국가창건을 당면과업으로 내세웠으며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을 묶어세우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벌림으로써 남조선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더욱 고조시켰다.
사회대중당의 출현은 통일운동을 강화발전시키는데서 획기적계기를 열어놓은 중요한 사변으로 되였다.
사회대중당은 선언과 강령에 밝힌대로 날로 강화되는 남조선인민들의 대중적진출을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고조시키기 위한 조직정치활동을 적극 벌렸다.
그 첫 운동이 바로 모든 애국적민주세력을 통일전선적련합체에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이였다.
사회대중당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1961년 2월 25일 사회대중당, 사회당, 혁신당 등의 여러 정당들과 4월학생혁신련맹,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족민주청년동맹, 《전국피학살유가족회》, 《한국교수협회》 등 여러 사회단체들, 여러 대학 민족통일련맹과 종교계단체들 그리고 민족통일경북련맹, 민족자주통일경상남도협의회 결성준비위원회, 민족자주통일전라남도협의회 결성준비위원회, 민족자주통일전라북도협의회 결성준비위원회 등 각 지방 결성준비위원회 대표 1 000여명이 모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대회를 열고 강령, 통일선언서, 헌장 등을 채택하고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자주적이며 평화적인 국토통일을 기하며 민족자주력량의 총집결을 기하》는 진보적정당, 사회단체들의 통일전선적련합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가 결성되였다.
《민자통》이 결성됨으로써 남조선인민들은 민족자주통일의 기치밑에 각계각층 애국적민주력량의 결속을 실현할수 있게 되였다.
사회대중당은 또한 각계각층 인민대중을 민족자주통일에로 목적지향성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한 계몽교양자적, 조직선동자적활동을 힘있게 전개하였다.
사회대중당은 조용수를 비롯한 《민자통》결성준비위원들과 일부 진보적언론인들을 중심으로 1961년 1월 25일 민족일보사를 창설하고 2월 13일에 창간호를 냈다. 《민족일보》 창간후 불과 2개월동안에 사회대중당은 남조선의 140여개 시, 군가운데서 98개의 시, 군에 그 지국을 설치하고 매일 6∼10만부의 《민족일보》를 발행하여 광범한 대중을 민족자주통일운동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사회대중당이 결성된 후 남조선인민들은 그의 영향밑에 외세를 배격하고 북남격페상태를 허물어버리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1960년 3월초부터 전개된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반미반외세진출은 남조선미국《경제 및 기술협정》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전국적범위에로 확대되였다.
투쟁은 미제가 1961년 1월 1일과 2월 1일 두차례에 걸쳐 US$에 대한 남조선화페의 환률을 엄청나게 높여 남조선경제를 완전한 파국에 몰아넣은데 이어 2월 8일에 또다시 남조선경제를 더욱 예속시키기 위한 남조선미국《경제 및 기술협정》을 체결한것을 계기로 일어났다.
사회대중당은 2월 8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협정》의 침략적 및 매국적본질을 폭로하고 이 《협정》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대중을 조직동원하였다. 서울대학교 민족통일련맹을 비롯한 7개 대학교 민족통일련맹은 2월 13일 남조선미국《경제 및 기술협정》반대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내오고 2월 14일과 20일에 남조선미국《경제 및 기술협정》반대 《전국학생성토대회》를 가진 후 《미국은 식민지경제정책을 즉시 철퇴하고 민족의 정당한 분노와 요구를 정확하게 평가하라!》는 구호를 들고 대중적시위투쟁을 벌렸다. 2월 14일부터 3월 1일까지 벌어진 남조선미국《경제 및 기술협정》을 반대하는 투쟁에는 서울, 부산, 대구, 원주 등지에서 11차에 걸쳐 약 12만명의 각계각층 군중이 참가하였다. 이 투쟁에서 남조선인민들은 《미국놈 물러가라》, 《미국놈은 제 집으로 돌아가라》,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자》는 구호를 전면에 들고 공동투쟁을 힘있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반미투쟁을 통해 남조선인민들은 외세의 간섭이 없이 과도적인 북남련방제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하려는 의지를 과시하였다.
남조선인민들속에서는 북남장벽을 허물고 평화통일에 보다 유리한 국면을 열기 위한 투쟁도 힘있게 전개되였다.
이 투쟁은 특히 북남학생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뚜렷이 발현되였다.
1961년 5월 3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련맹은 대의원총회를 열고 북남학생회담, 학생기자교류, 북남학생학술토론회, 북남학생친선체육대회 등을 가질것을 요구하여 결의문을 채택, 북남학생회담을 공식제의하였다.
공화국정부에서는 이 애국적발기를 열렬히 지지환영하면서 내무성성명, 각 정당대표들의 담화, 조선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와 조선학생위원회의 편지 등을 통하여 공화국의 립장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공화국북반부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에 고무되여 남조선의 17개 대학과 1개 고등학교의 민족통일련맹 대표들은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련맹》 결성준비대회를 열고 북남학생회담을 5월안으로 판문점에서 할것을 결정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사회대중당은 5월안으로 예정된 판문점학생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애국적민주력량의 공동투쟁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5월 13일 서울에서는 《민자통》의 주최밑에 4만 5천여명의 군중이 참가하는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자주통일촉진궐기대회》가 열리였으며 북남학생회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그를 위한 성금운동과 거족적환송을 조직할데 대한 결의가 채택되였다.
북남학생회담성취를 위하여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대전 등 주요도시들에서는 련일 수만여명의 군중들이 《통일만이 살길이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성취 만세!》, 《유엔군은 남북학생회담에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 《남북학생회담을 조속히 실현할뿐더러 남북정치협상태세를 갖추자!》 등 구호를 들고 대중적시위를 련속 벌리였다.
흥분과 기대로 끓어번지는 각계층 남조선인민들의 뜨거운 지지성원속에서 남조선청년학생들은 5월말 일대 시위행진을 벌리고 판문점을 향해 떠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대중의 앙양된 기세에 신민당을 비롯한 보수야당들까지도 북남협상에 동조해나서게 되였다.
이리하여 온 남녘땅이 그대로 통일의 도가니로 부글부글 끓어번지였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7-16 19:51:0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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