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연재 24]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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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9 19:0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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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2015-06-29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24) 북남협상제안과 그 실현조치 (1)> 기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24)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북남협상제안과 그 실현조치 (1)
1954년 김일성 주석 중국방문 시 천안문에서 마오와 함께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제네바회의가 미제와 그 추종세력의 방해책동에 의해 파탄됨으로써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정부와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성을 띠게 되였으며 이로 하여 우리 인민은 난관극복의 힘겨운 길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미제는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51일간이나 진행해오던 조선문제에 관한 제네바회의에서 조선문제의 토의를 파탄시킨 후 저들의 계획에 따라 미리 작성한 리승만역도의 미국방문계획을 실현시키였다. 이것은 이미 1953년 8월 남조선미국《호상방위협정》조작당시 작성되고 조선정치회의를 파탄시킨 다음 곧 실천에 옮기기로 약속한것이였다.
7월 28일 미국국회 상하량원합동회의에서 리승만역도는 《제네바회의가 아무런 결과도 없이 끝나게 된 오늘 정전의 종결을 선언할 시기가 도래하였다.》, 《미국이 총만 주면 싸움은 우리가 하겠다.》고 하면서 또다시 피비린내나는 전쟁열을 고취하며 긴장상태를 더욱 격화시키였다.
정세는 공화국정부로 하여금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취할것을 요구하였다.
공화국정부는 제네바회의가 파탄된 조건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보다 현실적인 길은 무엇보다도 조선사람들끼리의 합의에 도달하는데 있다고 인정하고 여러 방면에 걸쳐 북과 남사이에 협상과 실무적련계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책들을 취하였다. 북남협상에 관한 공화국정부의 구체적방책은 1954년 10월 28일부터 30일사이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에서 전면적으로 취하여졌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에서는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10월 30일 남조선《국회》와 제 정당, 사회단체, 각계각층 인사들 및 전체 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이 제안은 북남간에 조성된 긴장한 분위기를 풀고 호상 접촉과 리해에 기초하여 협상의 방법으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할수 있는 길을 명시한 현실적인 방안이였다.
하기에 공화국정부의 북남협상제안이 발표되자 그것은 전체 인민의 전적인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10월 31일 김일성광장에서 북남협상제안을 지지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진행된데 이어 공화국 각지에서 열린 군중대회들에서는 한결같이 호소문에 대한 전적인 지지와 함께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할 굳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북남협상제안은 일본을 비롯한 광범한 세계 사회계의 적극적인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공화국정부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 호소문에 대한 전체 조선인민과 세계인민들의 지지성원이 날로 강화되는 환경속에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들도 취하였다.
1954년 11월 17일 공화국정부는 내무성성명으로 조국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공화국북반부지역에 오는 사람들의 활동의 자유와 신변안전을 완전히 보장할수 있도록 준비되여있다는것을 천명하였다. 군사정전위원회 우리측 대표는 1954년 11월 22일회의에서 정전협정 제7, 8, 9항의 규정들에 의하여 비군사적목적으로 쌍방군사통제지역에 래왕할것을 요구하는 조선사람들에게 쌍방이 합의한 비무장지대안의 통로를 자유로이 래왕하도록 할것을 미국측에 주동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공화국정부의 호의적인 제의에 대하여 11월 4일 미제와 리승만역도는 남조선《국회》에서 최고인민회의 호소문을 거부하는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기자회견》을 벌려놓고 《무력으로만이 통일이 가능》하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면서 온 민족의 평화적조국통일념원에 전면 도전해나섰다.
이러한 조건에서 공화국정부는 한강토안에 살면서도 인공적인 장벽때문에 생사여부조차 알지 못하고있는 부모처자와 형제자매, 친척, 친우들이 서로 안부라도 주고받을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54년 12월 1일부터 북남조선사이에 우편련락을 재개할데 대한 내용의 서한을 공화국체신성의 이름으로 남조선 체신부 장관에게 보냈다.
미제와 남조선당국자들이 이 제의마저 무턱대고 거부해나섰지만 공화국정부는 인내성을 발휘하여 1955년 5월 26일 공화국수산성의 이름으로 북남조선 어장들의 호상리용과 관련한 문제들을 협상하기 위해 북남조선 수산당국자 또는 일반어민대표들의 예비회담을 소집할것을 제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회의 호소문을 관철하기 위한 대책은 공화국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에서도 련이어 취해졌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 실천적대책들의 강구는 평화적방법으로 조국의 통일을 하루속히 이룩하려는 공화국정부의 성의있는 노력의 뚜렷한 표시였으며 전체 인민의 한결같은 통일열망을 반영한 애국애족적인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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