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연재 4]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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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09 15:5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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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4)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결성과 그 강화발전 기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4)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걸어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영원한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결성과 그 강화발전
해방후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주권문제는 통일적자주독립국가건설의 강위력한 무기를 해결하는 초미의 당면과업이였다.
주권은 국가의 권력 곧 정치의 지배권이며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는 기본요인의 하나이다. 지난날 일제에게 나라를 통채로 강탈당한탓에 주권이 없는 민족적설음과 고통을 뼈에 사무치게 체험한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주권문제야말로 민족운명개척을 위한 기본문제, 그 승패를 좌우하는 사활적문제였다.
하지만 해방후 미제에 의한 국토량단과 민족분렬,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의 강행실시로 하여 전국적범위에서 주권문제의 해결은 난관에 직면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걸음을 멈추고 통일정부가 서기를 기다린다는것도 말이 안되였다.
당시의 정세를 예리하게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여있는 북에서 먼저 그 준비사업을 다그치며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적민주력량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하여 인민의 리익을 대표할수 있는 림시적인 중앙주권기관을 창설할데 대한 현명한 방침을 내놓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각 지방에 조직된 각급 지방인민위원회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중앙기관을 창설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고 그 실현에로 대중을 불러일으키시였다. 이것은 당시의 정세적요구와 인민의 의사를 가장 정확히 반영한 현명한 방책이였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이리하여 1946년 2월초 공산당을 비롯한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들로서 중앙주권기관창설을 위한 발기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준비사업을 진행한데 기초하여 2월 8일 평양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참석밑에 북조선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들의 협의회가 열리였다. 협의회에서는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들의 대표들로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에서는 전민의 의사와 념원을 담아 절세의 애국자,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동지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민주주의 새 조선건설의 기초를 닦으며 통일적민주주의정부의 수립을 촉진하는 동시에 북조선의 당면한 행정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것을 근본사명으로 내세운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지방인민위원회들을 튼튼히 꾸리며 친일파와 반동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제반 민주개혁들을 실시하며 산업과 운수를 복구하고 교육제도를 혁신하며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것을 중요한 내용으로 하는 11개조 당면과업을 내세웠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수립, 이것은 당시의 조성된 정세하에서 북조선에서 민족통일전선을 공고히 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전조선적인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앞당기고 앞으로 수립될 통일적민주주의정부의 토대를 마련할수 있게 한 튼튼한 기초로 되였다.
력사적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은 전체 조선민족의 절대적이며 한결같은 지지와 환영을 불러일으키였다.
1946년 2월 10일 평양에서는 10만의 시민들의 참가밑에 력사적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을 환영하는 성대한 군중대회와 군중시위가 진행되였으며 이러한 각계각층 인민들의 경축대회는 그밖의 도시들과 전국 이르는 곳마다에서도 열리였다.
환영대회장들에서 군중들은 한결같이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장군 만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수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동지에 대한 존경과 흠모, 새 정권-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당시 청진에서 발행되던 한 신문은 《감격에 넘치는 전시민 건국에 일층분투를 맹세-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수립 경축행사》라는 제목밑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였다는 쾌보(본사호외)가 서리찬 초순 13일 새벽 청진거리에 산포되자 시민은 감격일색으로 이구석저구석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수립 만세를 부르는 동시에 건국에 한층 분투할것을 속삭이며 시내는 종일 환희의 거리로 화하였다. 청진에서는 이 력사적성과를 경축하기 위해 이날 오후 7시반부터 지역별로 각층, 각 계급이 일당에 모여 경축대회를 일제히 개최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새길신문》 1946. 2. 15)
또한 당시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던 영국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릉은 《뉴 스테이츠맨 앤드 네이슈》지에 발표한 북조선인상기에 《북조선인민들은 그들자신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였다. 토지개혁의 실시와 산업국유화 및 민주주의적학원의 설립 등에 있어서 북조선의 민주주의정권의 혁혁한 성과를 찬양하지 않을수 없다. …수년래 처음으로 북조선은 식량을 자급하고있다. 일본군은 투항전에 모든 공장들을 파괴하였으나 지금 공업생산은 거대한 발전을 보이고있다. 많은 부문에 있어서 생산은 배가되였다.》고 민주개혁의 성과를 찬양하면서 《미군지대(남조선)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경찰의 박해로 말미암아 북조선으로 이주하고있다.》고 서술하였다. (《북조선통신》 1948. 1. 17)
이렇듯 갓 창설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자기앞에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46년 3월 5일에 실시한 토지개혁법령을 비롯하여 로동법령, 농업현물세에 관한 법령, 남녀평등권법령, 산업국유화법령, 민주선거에 관한 법령 그리고 사법과 교육문화의 민주화 등 제반 민주개혁의 과업을 1946년말까지 짧은 기간에 성과적으로 완수하였다. 이것은 대중의 총의에 의하여 수립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위력에 대한 뚜렷한 증시였으며 우리 민족사에 일찌기 찾아볼수 없는 일대 사변이였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앞에는 이미 달성한 민주개혁의 성과들을 공고히 하며 정치, 군사, 경제적력량을 더욱 강화해나가야 할 과업이 나섰다.
이로부터 1946년말과 1947년초에 북조선에서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원칙에서 비밀투표로 도, 시, 군, 면, 리인민위원회선거가 진행되였다.
1946년 11월 3일 도,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에는 총유권자의 99. 6%가 투표에 참가하였는데 그중 도인민위원선거에는 97%, 시인민위원선거에는 95. 4%, 군인민위원선거에는 96. 9%가 찬성투표하였다. 이것은 우리 인민자신의 손으로 통일적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갈수 있다는 일대 과시로 되였다.
선거결과 1947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강화발전하게 되였다.
이것은 통일적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을 향한 우리 인민의 투쟁에서의 커다란 전진이였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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