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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21(마지막 편)- 김현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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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5-14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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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이 집필한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책을 입수하였습니다. 이에 책 전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책은 지금부터 10년 전1998년 2월에 발행한 책입니다. 재미자주사상연구소 김현환 소장은 지난 20년간 이북을 방문하여 주체사상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하였습니다. 이 대화내용은 이미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란 책으로 출판되어 국내외에서 널리 읽혀졌습니다. 여기서 <나>는 김현환 소장이고 <주>는 이북의 주체사상 학자들입니다. 이북을 바로 알기 위하여서는 이북의 사회변혁이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합니다.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 - 21>입니다. 21번째 연재가 끝입니다. 그동안 연재에 도움주신 김현환 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웹사이트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한 주체적 견해

3)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

나: 최근 이남에서는 반변혁적 지배층이 반주사 선전 캠페인을 더욱 강하게 벌이는 한편 우익 개량주의적 사조인 포스트 맑스주의를 사회에 널리 유포시키고 있습니다. 포스트 맑스주의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이남 민중의 투쟁에 주는 해독적 영향도 자못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의 유포 배경과 그 요인, 이남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먼저 이남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유포 배경과 그 요인에 대하여 논의해 보겠습니다.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때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관련하여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급속히 유포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ㅡ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던 ´이론가´, ´운동가´들이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사상적 동요를 일으킨 것과 관련됩니다. 동유럽 사태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 일부 지식인들과 ´이론가´, ´운동가´들 속에서는 사상적 동요가 일어났으며 앞으로의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사상논쟁을 하며 갑론을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논쟁은 크게 보면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는 붕괴되었지만 맑스ㅡ레닌주의 혁명이론은 유효하며 그것이 가리키는 대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통파´(잡지 [우리의 사상] 그룹에 의해 대표되는 자들), 둘째 맑스ㅡ레닌주의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이른바 ´청산파´(잡지 [현실과 과학] 그룹에 의해 대표되는 자들), 셋째 사회민주주의 길이 운동의 진로라고 주장하는 파들(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대안´을 안출해낸 ´민중주체 민주주의론´의 제창자들), 넷째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적중한 ´한국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이론가들 간의 논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론가´, ´운동가´들의 사상적 동요와 교조, 사대의 흐름을 타고 포스트 맑스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 사조들이 이남사회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변혁운동의 주체적 신념이 투철한 민중전위들은 주체사상만이 이남사회변혁의 유일한 지침이며 그 기치 따라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여 민중이 국가와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 되는 참된 민중사회의 건설이 이남사회의 대안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일부 ´사상가´, ´운동가´들은 맑스ㅡ레닌주의에 대한 의혹과 회의에서 벗어나 완성된 노동자계급의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따를 대신 저들의 ´명분´을 개량주의적 사조인 포스트 맑스주의를 제창하는 것으로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좌절이 ´한국 사회변혁운동의 전반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하면서 이 ´위기´를 초극하기 위한 ´방도´가 포스트 맑스주의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원인이 ´맑스주의 위기´, ´맑스주의의 한계성´에 있다고 하면서 그 ´대안´이 사회민주주의냐, 유러코뮤니즘이냐, 자유민주주의냐, 포스트 맑스주의냐 하는 백해무익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일부 ´사상가´, ´운동가´들이 찾았다고 하는 ´대안´이 다름 아닌 포스트 맑스주의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실패한 사회민주주의와 유러코뮤니즘을 이남사회의 ´대안´으로 들고 나오기는 거북한 것이었고 자유민주주의도 극단한 개인 이기주의에 기초한 반동적 이념으로서의 본색이 드러나 이미 민중 속에서 외면받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트 맑스주의가 ´새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투항주의적 입장의 반영이었고 자기들의 변절을 가리고 ´사상가´로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좌절된 것은 현대 수정주의와 그 뒤를 이어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현대 사회민주주의입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좌절은 30여 년간의 기회주의적 정책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적 공산주의의 붕괴는 지금까지의 세계 맑스주의 운동을 결산하고 포스트 맑스주의로 전환하는 결정적 분수령으로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동유럽 사태와 관련하여 이남 사회에 포스트 맑스주의가 급파된 것은 다음으로 민중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식민지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미제와 반변혁적 지배층의 책동과 관련됩니다. 최근시기 세계적 판도에서 동서 양극체계가 무너짐에 따라 이남에서 반미자주화와 반파쇼민주화 투쟁이 강화되는 데 불안을 느낀 미제는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한 편으로는 주체사상의 보급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 편으로 투항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 사조의 최고 변종인 포스트 맑스주의를 널리 부식시키기 위한 ´사상공세´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남에서는 반변혁적 지배층의 두둔 하에 1980년대 중엽부터 90년대 초까지 [맑스주의를 개작한다, 헤게모니와 새로운 정치운동],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비롯하여 10여권의 포스트 맑스주의의 원전들이 대대적으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이남의 ´학술단체 협의회´가 주최한 ´현 단계 맑스주의 위기와 진보적 운동´이라는 주제 하에 3차례에 걸쳐 포스트 맑스주의와 관련한 논쟁토론을 잡지 [사회평론](1992. 9/10)에 장황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남에서는 그 외에 [사회경제평론](1991. 4), [전망](1991. 10호), [철학과 현실](1991. 11), [경제와 사회](1992. 여름, 14호), [동향과 전망](1992. 가을), [말](1992. 1호) 등 모든 사회과학 도서들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학계는 물론 민중운동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었습니다.

최근 반변혁적 지배층은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승격´시키고 비상임의 명목으로 고용한 수많은 ´고급 지능인력´가운데 적지 않은 인력을 주체사상을 왜곡말살하기 위한 사상모략책동과 함께 포스트 맑스주의를 유포시키기 위한 책동에 투입하였습니다. 맑스ㅡ레닌주의의 신봉자로 자처하던 PD계열의 일부 비주사파들은 이러한 모략책동에 말려들어 동유럽 사태이후 10여개 분파로 분열 와해되어 오늘은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21세기 진보학생연합´과 같은 일부 잔존세력들은 포스트 맑스주의의 영향 밑에 ´자유´와 ´성개방´을 부르짖으며 색정음악을 듣거나 반사회적 책동을 하는 ´구락부´로 전락되었습니다. 국정원은 학생운동권 내에 포스트 맑스주의를 적극 설교하도록 하는 것과 함께 ´한총련 씨말리기 작전´의 일환으로 일부 불순세력들을 학생 운동권에 잠입시켜 ´과격투쟁 반대구호´를 들고 ´한총련회비 불입금´운동과 ´한총련 탈퇴소동´까지 벌이도록 적극 부추겼습니다.

그러므로 이남사회에 퍼진 포스트 맑스주의의 반변혁성과 해독성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철저히 분쇄해버리기 위한 사상전을 힘있게 벌이는 것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나: 이남 사회에서 포스트 맑스주의의 유포배경과 그 요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남 사회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반변혁적인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분석 비판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 추종자들은 구미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특히 그들은 ´두 가지 차원 극복론´, ´급진적 민주주의론´, ´복합 주체론´, ´신사회 운동론´, ´시민사회론´, ´시장경제론´, ´개방론´ 등을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자주의식,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사회변혁을 위한 민중운동을 개량화에로 유도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 그러한 주장들을 하나씩 비판하고 그 해독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두 가지 차원 극복론´에 대하여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강원대 교수 이병천을 필두로 하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지난 시기에는 맑스ㅡ레닌주의를 곧잘 옹호하던 사람들이었지만 동유럽 사태가 발생하자 돌변하여 맑스ㅡ레닌주의의 ´패배´를 운운하면서 그 ´청산´과 ´재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청산주의적, 개량주의적 ´근거´를 요약해 보면 맑스ㅡ레닌주의적 유물사관과 정치경제학은 ´시효´가 지난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것´이므로 ´폐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두 가지 차원 극복론´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를 소급하여 ´검토´하여 보면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고 하면서 그 하나는 ´주의로서 맑스주의 핵심을 구성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의 차원´이며 ´전자에 대하여서는 비판적 극복이, 후자에 대하여서는 비판적 보존과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에는 맑스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도 교활하게 ´맑스주의의 모자´를 쓰려는 술책이 숨어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비판극복´한다고 하면서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정치경제학은 ´비판, 보존, 전환´한다고 하면서 그 핵인 <잉여가치학설>은 부정하고 다만 상품, 가치와 같은 몇 가지 경제학적 개념들과 ´자본주의 경제의 질적 구조´는 ´보존,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차원 극복론´의 반변혁성은 첫째로 사변적인 ´근거´들로써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의 완전한 ´폐기´를 역설하면서 결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 계급투쟁과 사회변혁에 관한 혁명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인류역사를 생산양식의 교체에 따르는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 맑스주의적 이론에는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특징을 보지 못하고 사회역사적 운동을 주체의 주동적 작용으로 보지 못한 근본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ㅡ레닌주의에 미숙성과 한계성이 있다고 하여 그 혁명적 원칙과 과학적인 이론까지 부정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 자체를 부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 사상가, 이론가라면 마땅히 그 한계성을 초극하면서 그 혁명적 원칙과 원리들을 전제로 하여 현실이 새롭게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독창적인 원리와 원칙들을 명시하여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체철학은 맑스ㅡ레닌주의의 미숙성과 한계성을 명백히 하면서 그 혁명적 입장과 과학적인 이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사람중심의 독창적인 원리들을 새롭게 밝히고 이론을 전개하고 체계화하면서 맑스주의의 혁명적 원칙과 과학적인 이론들을 자체 속에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남 사회변혁운동이 ´쇠퇴´되게 된 것은 ´맑스주의의 사회구성체론의 오류´와 그에 근거한 변혁운동의 ´비현실성´에 있다고 하면서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의 ´청산´을 운운하며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의 ´청산근거´를 ´합리주의´, ´목적론´, ´진화주의´, ´경제주의´, ´기술결정론´이라는 사변적인 논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발전의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순수 논리적´으로 해석한 ´합리주의´이며 공산주의라는 ´가상적인 이상사회를 목적´으로 전개한 ´목적론´이며 인류사회를 5개 생산양식을 거쳐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진화주의´이며 사회발전의 규정적 요인을 ´생산력 발전, 기술 발전´에서 찾는 ´경제주의, 기술결정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남의 한 필자는 그들을 ´속류 맑스주의에 대한 속류 비판과 이병천식 포스트주의의 딜레마´에서 ´포스트 맑스주의, 신노선, 신사회 운동 등 겉모습만 달리한 채 급속히 확산되고 세력화되고 있는 투항주의자들´이라고 낙인하였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차원 극복론´의 반동성은 둘째로 <잉여가치학설>을 전면 부정하는 자본주의 미화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에 기초하여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발견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따라 한 편으로는 극소수 자본가들의 수중에 부가 무제한하게 축적되고 다른 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절대적 및 상대적 빈궁화가 촉진되어 자본주의 체제의 고유한 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점유의 자본주의적 성격간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멸망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바로 여기에 잉여가치학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며 인류사에 특기할 발견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구미자본주의의 이른바 ´현실´에서 잉여가치학설 부정의 ´실천적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미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확대, 심화´와 ´생산력의 발전 및 구조변화의 귀결´로써 두 번에 걸친 큰 ´전환´을 겪었는데 하나는 1960년대 말ㅡ70년대 초까지 ´자유민주주의적,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에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 포드주의, 포스트 산업자본주의에로의 새로운 전환´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1차 전환´의 결과 구미자본주의는 각종 ´위기´와 ´동요´를 수습하고 ´황금기´의 포드주의적 복지국가자본주의(´대량생산과 고임금´이라고 하는 마이크로적 기업관리 방법을 초월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고생산성과 고임금´이라는 미크로적 기업관리 방법)로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차원에서는 공산당까지 시민권을 얻음으로써 ´대중적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사회경제차원에서는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 ´완전 고용적 경기조정정책´ 등에 의해 ´노동력의 탈 상품화´가 크게 진전되고 ´대중적 부유화´가 실현되어 일차적인 물질적 욕구는 보장되고 생활의 질에 대한 요구가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전환´의 결과 ´포스트 산업자본주의화´ 즉 서비스 부문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따르는 ´서비스 노동자, 지식 노동자의 대중화´, ´전통적 노동자계급의 상대적, 절대적 축소´, ´주변노동자의 증대´, 자동제어기구의 도입에 의한 노동과정의 ´포스트 포드주의에로의 전환´, ´중앙집권적 단체교섭 형태의 약화, 해체´, 자본의 국제화와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의 심화에 따르는 ´국민국가 토착기업의 통제력 약화´, ´노동운동의 약화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 등이 중요 내용으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미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두 번에 걸친 ´전환´의 ´현실´은 <잉여가치학설>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현 시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적 실업과 빈궁화의 격증, 자본가들의 사치와 부화방탕,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적 반동화, 정신문화 생활에서의 빈궁화가 완전히 외면 내지 묵살되고 있으며 오직 자본주의적 착취와 약탈의 합리화, 자본주의의 반민중성과 부패성의 정당화, 자본주의의 ´영원성´에 대한 설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구미자본주의의 ´현실´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반민중성과 부패성을 보여주는 기본적 특징인 물질생활에서의 기형화, 정신문화 생활에서의 빈궁화, 정치생활에서의 반동화를 소거해버린 현실이 아닌 ´현실´이며 그들이 조작해낸 허구적 ´현실´일 뿐입니다. 바로 자본주의의 변호, 미화를 위해 이러한 현실 아닌 ´현실´의 조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 ´두 가지 차원 극복론´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논리´들의 허황성과 그 반변혁성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급진적 민주주의론]은 한마디로 말하여 국가 활동의 기본방식을 왜곡하여 사회변혁의 목표를 부인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이남의 한 포스트 맑스주의자는 "포스트 맑스주의는 포스트 근본주의적인 급진 민주주의이다. ……포스트 맑스주의는 근대정치의 두개의 원리인 자유와 평등간의 환원 불가능한 모순과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 새로운 접합을 추구하는 ……다원적 급진 민주주의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저들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주의 실현에 있다´느니, ´총체적 민주화를 변혁의 목표로 삼는다.´느니 하면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남사회의 ´대안´으로까지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반동성은 첫째로 부르조아지의 의사를 실현하기 위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위장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 준다는 이른바 ´만인에 대한 민주주의´, ´초계급적 민주주의´입니다. 그들은 ´급진적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아니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도 아닌 ´새로운 민주주의´, ´다원화되고 확장된 민주주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맑스주의가 계급적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상이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협소한 인식´이며 이러한 이해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의 확장´에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는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며 독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계급사회에서 <제3의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아닌 그 어떤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로 밖에 달리는 될 수 없습니다. 근로민중의 의사를 반영하고 그를 실현하는 정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근로민중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정치는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로 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에 존재한 착취계급의 ´민주주의´는 실제상 근로민중을 기만하고 우롱하기 위한 허위의 민주주의이며 착취계급의 계급적 지배를 가리기 위한 병풍에 불과하였습니다.

오늘 자본주의 나라들과 이남의 기본법에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것이 명문화되어 있지만 그것은 <국가 보안법>과 같은 여러 가지 악법에 의해 사실상 묵살되고 있으며 ´문구상 민주주의´일 뿐입니다. 민중이 정권과 생산수단을 장악하지 못한 사회에서 민중의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란 허황한 것이며 민중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기만적 구호에 불과합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반변혁성은 둘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중민주주의 독재를 부정하기 위한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데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중민주주의 독재는 사회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의 무기로서 민중에 대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실제적으로 담보하는 최고 형태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소수 착취계급, 반동계급과 그 잔여 분자들의 반항을 진압함으로써 광범위한 민중에게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장합니다. 소수 착취계급, 반변혁적 계급에 대한 독재는 국가와 사회의 참다운 주인으로 된 민중의 지위와 역할, 민중민주주의를 담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의 과도기의 ´정치적 독재´로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로 ´근거´를 상실했으며 ´공상적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프랑스 부르조아혁명 시기 쟈코벵파의 ´혁명적 독재´에서 그 무슨 ´독재를 정당화하는 사고´를 물려받은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부르조아혁명 시기 로베스 피에르를 두목으로 하는 쟈코벵파가 중소 부르조아지와 수공업자, 농민들의 이익을 대표하여 초기에는 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정권을 장악한 후 그 부르조아적 계급적 본질로 하여 반민중적 사회경제 시책을 실시함으로써 도시 주민들과 농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으며 1794년 7월 27일 반변혁세력의 정변에 의해 2년도 못되어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이것이 프랑스 부르조아혁명의 마지막을 장식한 ´테르미돌 정변´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오늘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부르조아 독재인 ´쟈코벵적 독재´와 결부시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책동의 일환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급진적 민주주의론´의 반변혁성은 셋째로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이남 민중에게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주입시키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 제국주의자들과 독점 자본가들은 생존의 권리와 자주성을 위한 민중의 투쟁기운이 고양되자 통치수법에서 보다 교활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미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러 명목의 이른바 ´복지정책´, ´연금자정책´ 등 ´민주주의 확장 정책´이 그것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정책´에 현혹되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계급적 본질과 자본주의 체제의 반민중적 성격을 가려보지 못하고 그것을 극구 찬양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고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미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부르조아지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발전한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 노동조합권을 비롯한 결사의 자유 등 시민적 정치적 기본권이 일반화되고 심지어는 반체제적인 공산당까지 시민권을 얻음으로써 정치적 차원에서 대중적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외면하고 ´절차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극구 찬양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기 위한 책동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현대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복귀한 나라들에서 민중이 정치적 무권리와 ´폭력´의 희생물로 되고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는 현실은 시장경제와 참다운 민주주의가 부합될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참다운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남사회는 ´민주주의 문턱 이전에 있다´는 식의 ´비판´을 가하면서 구미의 ´확장된 민주주의´를 이남사회의 ´대안´, ´목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구미식 민주주의를 예찬하여도 그 반민중적, 계급적 본질을 가릴 수 없으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민중이 참다운 민주주의적 권리를 향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중시하는 교훈이며 진리입니다.

나: 그러면 이번에는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합주체론´의 반변혁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 ´복합주체론´은 사회적 운동의 주체의 문제를 왜곡하여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과 그 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 계급투쟁을 거부하는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에서 탈피하여 후기 자본주의에서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적 주체와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중적 지형 속에서 이들 상호간에 유기적인 민주적 연대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사회적 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을 위주로 하는 ´계급주체´ 대신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저들의 ´요구´를 내세우는 ´다양한 주체´를 내세워야 하며 그것도 ´동격연대´, ´민주적 연대´에 기초한 ´복합주체´를 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 노동자계급과 그 전위당의 영도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 ´다양한 중심들’ 간의 ´입체적이고 탄력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남의 학계와 운동권의 일부 사람들은 ´복합주체론´에 오염되어 이남사회변혁의 주체를 ´다원적 주체´, ´집단적 주체´, ´복합적 주체´ 등으로 표현하면서 ´사회적 주체´들의 ´독자성´과 그들 상호간의 ´민주적 동격연대´를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과 그 영도적 역할을 거부하며 사회변혁의 주체적 역량의 강화와 변혁운동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사회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주체´는 사회역사적 운동을 주동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떠밀고 나가는 담당자, 민중을 의미한다는 것을 독창적으로 명시하였습니다. 민중을 떠나서는 사회역사적 운동 그 자체가 있을 수 없으며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구성내용은 각이한 사회발전 단계에서 변화되지만 모든 역사적 단계에서 일관하게 기본을 이루는 것은 근로민중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민중은 노동자계급을 위주로 하여 농민과 근로하는 각계각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민중개념에서 계급적 내용을 삭제해 버리고 ´주체´를 단순히 담당자라는 의미로, 민중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매 계급, 계층 그리고 구락부를 비롯한 소집단 등 예컨대 육체노동자, 지식노동자, 주변 노동자, 실업자, 종교 집단, 심지어는 동성연애자 집단, 성, 인종, 민족 등도 불가결한 주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복합주체´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계급과 계층, 사이비 소집단들의 기계적 결합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복합주체´에 상응한 사회적 운동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신사회 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복합주체론´의 반동성은 첫째로 그것이 이남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을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후기 산업사회에서 ´기술혁명의 지속과 노동과정의 변화´로 ´지식 노동자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비중이 높아지고 그들에 의한 사회적 실천의 의의와 역할이 더욱 더 커졌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핵심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느니, 지식인들이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었으므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론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의 운동과정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사무, 감독, 행정 관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증대되고 상품시장의 ´성장´에 따라 판매, 회계,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증대되고 과학기술의 생산적 적용에 따라 기술직, 기능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증대되고 육체적 노동자가 감소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화이트칼라나 블루칼라도 육체노동과 노동조건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자본가에게 고용된 <임금 노동자>라는 데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육체 노동자수는 줄어들어도 총체적으로 자본가에게 고용된 임금 노동자수는 증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영도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지위와 역할을 더욱 높일 수 있는 전제로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결코 노동자계급의 영도적 지위를 부정할 ´근거´로는 될 수 없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복합주체론´의 반동성은 둘째로 이남 사회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론을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변혁운동에서 향도적 역량인 전위당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지 않고서는 사회변혁운동의 승리적 결속에 대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완성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변혁운동과 건설 사업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의 영도를 생명선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복합주체론´의 제창자들은 전위당이론을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전면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근거´의 하나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맑스주의 이론과 현실 노동운동 간의 배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노동자계급만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복합주체´를 영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맑스주의 이론과 현실 노동운동 간의 ´배리´란 맑스주의가 공산주의 운동을 주장하는 반면에 현실적인 ´일상적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운동´, ´신사회 운동´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 ´현실´은 사회적 운동의 주체가 ´다원화´되었으므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 ´복합주체´의 운동을 영도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운동의 기본은 여전히 노동운동이며 ´시민운동´, ´신사회 운동´은 결코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운동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사회 운동´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그 체제에서의 ´개혁운동’이라는 사정과 관련됩니다. ´신사회 운동´에서 ´사적 소유의 철폐´구호를 드는 예도 있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영화´, ´공영화´의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남의 ´복합주체론´자들은 또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의 영도가 인텔리를 비롯한 여러 계급, 계층의 ´특수이해´를 노동자계급에게 ´복종´시킬 것만 요구하기 때문에 전위당이론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당이라고 하여 순수 노동자계급의 이익만을 대표한다고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본성과 역사적 사명에 대한 완전한 왜곡입니다. 노동자계급은 온갖 착취와 압박을 청산하고 모든 피착취 근로대중의 해방을 이룩함으로써만 자기의 계급적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급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요구는 사회적 진보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계급, 계층의 요구와 일치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은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하는 변혁운동의 참모부로서 변혁의 주체에서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복합주체론´의 반동성은 셋째로 ´신사회 운동´ 운운하면서 이남 사회변혁운동에서 계급투쟁을 공공연히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체´가 ´다원화´되어있는 ´다원적 사회´에서 사회적 운동의 ´기본형식´이 ´신사회 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사회 운동´, ´시민운동´은 근원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독점체계의 위기관리를 위한 자본주의 개량운동이며 계급적으로는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표한 체제내 개혁운동입니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회의 혁명적 개조보다 이른바 ´안정적 발전´과 ´점진적 개조´를 지향하며 2중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운동이 국가에 의하여 좌절되면 변혁운동에 편승하며 수용되면 변혁운동에 등을 돌려대기도 합니다.

부르조아 국가가 위기국면에 처할 때마다 중간층을 끌어당기고 ´신사회 운동´을 장려하는 ´유화정책´을 실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이 운동이 자본주의 ´위기관리 정책´에 항거와 협력의 두 입장 사이를 오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신사회 운동´을 경계하면서도 통일전선에 합류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신사회 운동´이 어디까지나 체제내 개혁운동인 것만큼 그것으로써는 이남 사회변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신사회 운동´이 "자율적인 사회적 집단의 정치적 결합에 입각한 생활세계의 민주화와 정치적 권위주의로부터 시민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운동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이남 사회변혁의 ´전략´으로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급투쟁 대신에 ´신사회 운동´을 내세우기 위하여 "노동운동은 하나의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부분운동에 국한되기 때문에 보편적 운동으로서는 가치를 상실했거나 의의가 없어졌다"고 하며 지난 시기 ´노동자계급운동 이외의 다양한 비계급운동에 대하여 과소평가´된 결과 ´사회적 운동이 위축´되고 ´좌절´해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신사회 운동´만을 절대시하면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계급투쟁, 변혁투쟁을 부정하는 것은 이남민중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변혁운동을 전면에서 도전하고 방해하는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나: ´복합주체론´의 반변혁성을 구체적으로 분석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민 사회론´의 반변혁성에 대하여 요약해 주었으면 합니다.

주: 일반적으로 ´시민 사회론´은 국가형태에 관한 문제를 왜곡하는 것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반변혁적 이론입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른바 ´시민 사회론´을 들고 나오면서 이남사회변혁의 목표와 수단, 방법을 모호하게 선전하고 자본주의를 찬양,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에 의하면 ´시민사회´란 ´법적으로 보장되고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된´ 다양한 제도와 집단들로 구성되는 ´비국가 영역´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 교회, 학교, 언론기관, 정보전달 기관, 문화 기관,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기구들의 총체가 ´시민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대독점가들과 극소수 지배층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가를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고 시민권을 보장하며 독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민주적 기구로 전환´시켜 ´시민사회´에 ´해소´, ´통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대적으로 부르조아지들은 민중투쟁에 의하여 저들의 정권안보에 자그마한 위험이 조성되어도 그를 가차 없이 진압하는 폭압정책을 일삼아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남 민중이 매일 매 시각 당하는 고통입니다. 부르조아국가에 대한 민중의 자그마한 환상도 사회변혁운동에서 금물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시민사회론´을 현 시기 이남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초극´하고 ´시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남사회에는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구상된 ´자유민주주의적 시민사회론´, ´민중주도의 시민사회론´, ´비판적 시민사회론´ 등 잡다한 ´시민사회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계급투쟁, 자주성을 위한 투쟁을 거부하고 체제내 개혁만을 주장한다는 개량주의적 성격에서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반변혁적 이론들입니다.

나: 형식만 달리하는 각종 ´시민사회론´의 중심적 내용은 무엇인지요?

주: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은 ´중산층´이 이남사회의 기본적 역량이라고 하면서 이남사회의 민주적 개혁의 방향은 ´중산층´을 중심세력으로 하는 시민운동마당을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남사회의 성격과 계급관계를 왜곡하고 변혁의 목표를 ´부르조아 민주주의적 변혁´으로 설정한 반변혁적 견해입니다. ´민중주도의 시민사회론´은 이남사회 구조 내에 ´정치시민사회´를 만들어놓고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상호결합을 중매´하여 ´민주주의적 변혁´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을 벌여 ´선거´와 ´의회´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의 망상입니다. 그것은 현 시기 이남의 식민지 파쇼독재체제의 본질을 간과하고 정치개혁의 기본목표와 수단, 방법을 왜곡하는 개량주의적 견해입니다.

´비판적 시민사회론´은 ´다원주의적 민주변혁´을 목표로 삼고 노동운동과 ´신사회 운동´을 포괄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운동들의 ´동격적 연대´를 실현하는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기 부르조아 정치학에서 내세운 ´다원주의론´의 재판에 불과합니다.

나: 그러면 그러한 ´시민사회론´의 반변혁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지요?

주: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민사회론´의 반변혁성은 첫째로, 이남사회의 성격을 왜곡함으로써 변혁운동의 목표와 혁명역량의 편성을 모호하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남사회가 식민지적 성격과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남 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이며 불구 자본주의, 반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남 사회를 ´시민사회´ 또는 ´시민사회가 무르익는 사회´인 것처럼 미화하면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으로서의 이남 사회변혁운동의 성격과 임무를 왜곡하고 ´중산층´을 ´혁명역량´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변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변혁운동의 주력군의 편성을 저해하고 이남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반대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책동으로 밖에 달리 볼 수 없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제창하는 ´시민사회론´의 반동성은 둘째로, ´의회민주주의´를 제창함으로써 이남사회의 변혁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민대중의 광범위한 조직화를 통해 ´선거 사회주의 길´을 열어놓는 데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개량주의적 주장입니다. 이남의 식민지독재통치 하에서는 광범위한 민중이 초보적인 언론, 집회, 결사 등 정치활동의 자유가 말살되고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조직들의 결성과 활동이 가혹한 탄압의 대상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남의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그리고 최근의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행되고 있는 청년학생들의 전위조직인 ´한총련´에 대한 탄압, 말살 정책이 그것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시민사회론´의 반변혁성은 셋째로,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미화 분식하고 변호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오늘 부르조아지들과 그 사상적 대변자들에 의하여 ´인간을 위한 정치´, ´인격의 존중´과 ´자유´, ´평등´을 원리로 하는 정치로 분석되고 있는 정치이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변혁적 지배층을 제외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적 권리가 유린되고 있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 정치하에서의 ´인격의 존중´, ´자유´, ´평등´ 구호의 기만성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이남의 ´시민사회론´의 제창자들은 인간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기초하여 사회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시민´이란 ´이기적´이며 ´본능적 욕구´에 의하여 움직이는 ´개인´이며 ´시민사회´는 이러한 ´시민´들의 ´자연 경제적 조직´, ´개인´들의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곧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근본적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반민중적 성격을 가리고 합리화하기 위한 견해입니다. 극단한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가 이남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남민중 누구나가 체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이남의 한 지식인은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이 사실상 더이상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과 인간운동을 생명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정당화하며 오직 법제적 자유의 빈껍데기만으로 온 국민에게 허구적 행복을 느끼도록 장려하고 있을 뿐이다"고 자유민주주의의 반변혁적 본질을 폭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시장경제론´, ´개방론´을 주장하면서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확장의 전제´라고 하면서 자본주의를 미화 분식하며 자본의 국제화와 ´국민국가 상호간의 의존성의 심화´에 의하여 "새로운 민주사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개방모델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북을 ´폐쇄사회´라고 하며 "현재 북한 앞에는……자본주의적 민주변혁 이외의 다른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북을 자본주의적 ´개방´에로 유도해야 한다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남의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론의 반변혁성을 요약 분석하였습니다. 민중중심의 과학적인 주체의 변혁론이 명시되고 그에 기초한 사회변혁운동의 승리와 생활력이 과시되고 자주성을 위한 민중투쟁의 위력한 지침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조건에서 온갖 반변혁적이며 기회주의적 이론이 전면적으로 분쇄되고 배격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끝)

[작성: 김현환 재미자주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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