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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독후감 21 - 김상일 교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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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3-13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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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체 게바라, 혁명은 진정성은?

김상일 교수의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21)

김상일(한신대 전 교수, Korea Project Director,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감자꽃

체 게바라의 ‘달빛’은 그가 적에게 포위당해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며 쓴 시 같다. 달빛 비친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감자밭은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피바다’ 초연 공연을 하고 백두산 아래 첫 동네 무송현 남단 만강을 김일성 유격대원들이 지나 갈 때 달빛 아래 때늦은 자주빛 감자꽃이 들을 가득 메워 피어 있었다. 때는 1936년 8월. 체 게바라가 생의 마지막 순간 바라보던 감자밭, 1967년 10월. 이 두 영상이 하나로 포개어 지면서 나는 이 지구의 양극단에 있는 두 감자밭을 ‘민중’이란 이름으로 아로새기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달빛>

이른 저녁
희미한 달빛 아래
숲속 은신처에 포위된
우리는
이제 37명뿐이다

나무 사이로
감자밭이 보인다.

더 이상,
탈출구가 없다.

만강은 만주 어느 지역보다도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피바다 공연을 끝내고 만강을 지나가던 추억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동강에서 무송현성전투 승리를 총화하는 반일부대지휘관들과의 련합회의를 끝낸 다음 나는 주력부대를 데리고 백두산의 서쪽 위성구역인 만강으로 향하였다. 만강은 드넓은 고원우에 올라앉아있는 백두산아래의 첫 동네이며 무송현남단의 마을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되골령을 넘으면 장백땅이고 서남쪽으로 로령을 넘으면 림강땅이다.”(5권) 감자 밭 사이로 구름에 달 가듯 유격대원들의 일렬 종대로 행군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

아래 시는 한용운 ‘님의 침묵’ 서시 ‘군말’ 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철학은 칸트의 님이다/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마찌니의 님은 이태리이다/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

여기서 말하는 ‘님’은 하나로 고정된 의미가 아닌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긔룬 것’은 다 님이라는 것이다. ‘긔룬’은 ‘그리움’과 ‘길음’ 의 두 말의 의미를 합성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만해의 시는 군말의 군말을 이어갈 여지를 우리에게 남겨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긔림은 봄비와 장미 같은 자연 속에도 있고, 중생과 석가 같은 종교 속에도 있고, 칸트와 철학 같은 사상 속에도 있고, 이태리와 마찌니와 같은 역사와 혁명 속에도 있다. 더욱이 인간은 그 어느 존재 보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긔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님을 ‘긔린다’는 것은 낭만을 넘어 자기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다.

1920-30년 대 조선의 문인들은 한 결같이 님을 절규하였다. 소월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산산이 부셔진 이름이여”하면서 님을 향해 절규하다 요절하였다. 육사는 흰말 타고 광야를 달려오는 님을 긔리었다. 님이 되는 데는 조건이 있다. ‘내가 님을 긔룰 뿐만 아니라 님도 나를 긔리면’ 모두 님으로서 성립되기에 필요 충분한 조건이다. 그런데 소월의 시는 님을 절규하다 부정이 부정으로 끝나고 마는 데, 만해의 시는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그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보다 큰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로서 ‘부재(不在)’한 상태로만 존재한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존재하지 않는 ´님´은 조국이 존재함으로써만 드러난다. 일제 식민지 현실 속에 시인 자신이 추구하고 민족이 갈망하는 진정한 조국(´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부정). 그러나 현실의 관점에서는 식민지 조국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과 싸워 조국의 해방으로 ´님´을 만났다 하더라도(긍정), 그 안에 품고 있는 모순(예를 들면 분단과 같은)과 싸우기 위하여 ´님´과 다시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부정)는 논리가 이뤄진다. 이처럼 만해에게 있어서 ´님´이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하여 더 큰 긍정으로 나아가는 살아 움직이는 개념으로, 식민지 시대에만 국한된 고정불변한 개념은 아니다.

민족과 혁명이란 두 개념은 어떤 점에서 불가 상용적 개념이다. 그런 두 대립되는 님을 한 꺼번에 같이 가슴에 안고 산 혁명가가 있는가 하면, 억눌린 민중의 해방만을 님으로 사랑한 혁명가들이 있는가 하면, 민족의 해방만을 님으로 사랑한 혁명가도 있다.

마찌니는 1831년 이딸리아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청년당을 만들어 외세로부터 독립과 국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화신이다. 그의 님은 민족과 그 민족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남미의 체 게바라의 님은 민족이 아니고 민중과 계급만 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에 가 혁명을 성공시켰으나 볼리비아 혁명을 위하여 투쟁하다 죽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마찌니 같은 민족이란 님은 없었다. 그의 님은 민중이요 혁명이었다.

체 게바라가 사랑한 쿠바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6.14~1967.10.9)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문화어: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이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어들은 그가 긔린 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님을 그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림같이 전하다.

<쿠바>
나는/쿠바 사람들의/눈에 보이는/모든 것을/만져보고 싶었고,/모든 것을/느끼고 싶었고,/그리고/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사랑 >
민중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
정의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대함 없이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참된 삶>
북미의 백만장자가/되는 것보다는/차라리,/문맹의 인디언이/되는 것이 낫다

<유언>
난/지금/혁명의 불멸성을/생각하고 있다

혁명은 결코 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 줄 알고 춤출 줄 알고 자연 속에서 자기를 잃을 줄도 아는 인간만이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세상을 싫어하고 인간을 기피하는 염세주의자가 혁명가가 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젊은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의학도로서 원래 새로운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여행가였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모터사이클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기 좋아하던 바람끼마저 있던 한국의 풍류객 같은 인물이 체 게바라였다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바람끼 그것이 바로 혁명의 불씨일 것이다.

자서전 첫 장에 있는 첫 여행을 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애초에는 코르도바 지방의 두세 곳만 돌아보려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산티아고와 투쿠마, 카타마르카, 라 리오자, 산후안, 멘도자, 산 루시스, 부에노스아리에스, 미라마르까지 가보자는 충동적인 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자서전 28쪽)고 쓰고 있다. 그가 첫 여행을 떠날 시기의 나이는 23세였다. 이 여행은 그는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는 곳을 특별히 가고 싶어서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자서전 첫 장의 제목 그대로 ‘충동적인 시도’에 불과했다. 이 첫 여행은 체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넓은 세계로 향해 떠나가는 첫 충동적 여행이었다.

오도바이를 타는 재미 그리고 처음 보는 남미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처음에는 황홀했을 것이다. 그의 친구 까를로스 페레르 소리쟈(73)에게 인디오 처녀들의 아름다움으로 그가 동행하기를 유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계속될수록 단순한 여행가가 아니고 ‘목격자’가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쟈의 기차여행 회고에 의하면 당시 우리 호주머니에는 7000 페소 정도가 전 재산(당시 환율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현재 시세로 1000달러가 채 안된 금액 정도)이었고 가방에는 옷가지보다는 책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띠로 역을 떠난 우리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에 머물다 페루와 에콰도르로 들어갔다. 에콰도르에 도착한 후 나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머물게 되었고 그는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로 건너가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게 된다. 그게 그의 인생을 바꾼 여정이 된 것이다.

여행자에서 목격자로, ‘배움의 천리길’

김일성 주석이 1923년 3월에 걸은 ‘배움의 천리길’은 어떤 의미에서 성년식과 같았다. 부모가 자식을 강하게 기르기 위해 정처 없이 집을 떠나 걷게 하는 것을 ‘walkabout’ 이라 한다. 김주석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은 조국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12살 어린 아들을 천리길을 걷게 한다. 이것을 두고 배움의 천리길이라 하여 금년에는 이에 대한 기념우표까지 발행하였다.

중국 팔도구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포평에서부터 고향 만경대까지의 천리길을 걸으면서 일제식민지 통치 하에서 조선인민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생활처지에 대한 생활체험을 한다. 북의 청소년학생들은 해마다 3월이면 수천명 규모의 ‘배움의 천리길’ 답사 행군대를 조직하여 천리길 노정을 밟고 있다. 그의 진정한 배움은 목적지 고향에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천리길을 걷는 이 과정 속에 있었다. 혁명도 결국 끝없이 진행되는 과정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혁명의 결과를 늘 기대하고 실망하기도 기뻐하기도 하지 않는가?

체 게바라가 집을 떠난 모터싸이클 여행은 이에 비하며 훨씬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낭만으로 시작한 여행이 점점 현실로 변한다. 같이 여행한 그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라나도와 함께한 모터사이클 여행이 젊음을 발산하는 낭만적인 여행길이었다면 우리의 기차여행은 중남미 빈민들, 특히 토착원주민들과 호흡을 함께하며 고단한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경험이었다. 낭만적인 청년 체를 혁명가로 변신하게 만든 여행이었다는 말이다.”

체의 일생을 세 부분으로 나뉘어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유년기는 낭만적인 젊은이들의 삶의 표상이라고 한다면 그의 쿠바 투쟁은 혁명가로서 승리자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리비아 투쟁은 비록 실패했지만 20세기 저항의 상징으로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의 경우는 10대 초반의 나이부터 이와 같은 낭만은 없었다. 그 나이부터 고난의 행군은 시작되었다.

체가 처음 목격한 대상은 작은 다리 밑에서 지내는 떠돌이 남자였다. 이 남자는 차코 지방에서 면화 따는 일을 하다가 산 후안으로 가서 포도 수확 일을 할 것이라는 남자였다. 체 게바라는 여행을 계속할수록 이런 인간 군상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의 여행은 그의 인생 교육장이 되었다. 수렁 속에 빠져 사는 민중들의 바다를 지나면서 그는 드디어 26세 때에는 그로 하여금 제국주의자와 싸우기 위해 과테말라에서 총을 들고 말았다. 28세 때에는 쿠바로 떠나는 혁명가들의 배를 타게 하였다. 드디어 31세 때에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다. 마침내 39세 때에 볼리비아 밀림에서 미제와 싸우다 전사한다. 이러한 체를 사르트르는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부른다. 사르트르의 이 말도 전 세계 혁명사를 다 읽지 못한 단견의 결과가 아닐까?

김일성과 호지명

여기 마찌니와 게바라를 합성한 그래서 두 개의 님을 가지고 평생을 산 인물이 김성주 그리고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고 참다운 애국자로 보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4권-467쪽) 분명 그의 님은 둘이였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서로 불가상용적인 이 두 개의 님을 하나의 님으로 묶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밖에도 국제주의와 지역주의를 하나로 엮어내어 주체를 세워 나갔다. 김일성의 독특한 종합주의 때문이라고 믿는다. 『세기와 더불어』 전 편에 흐르고 있는 기본 틀은 이런 종합주의에 있다고 보는 데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는다. 나는 ‘마오이즘 Maoism’에 대하여 이를 ‘키미즘 Kim-i-sm’(KIm Il Sung의 initial)이라고 국제화해야 한다고 본다. 키미즘이 마오이즘 보다 우월함은 1970년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발표된 바도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 기회에 차례로 소개하려 한다.

이러한 두 개의 님을 동시에 긔룬 혁명가 김일성과 가장 닮은 혁명가는 베트남의 호지명이었다. 분명 호지명의 님은 베트남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민족의 해방과 계급의 해방이란 두 님을 동시에 긔루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김일성과는 닮은 점이 있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반제, 반식민지 투쟁에 생애를 바친 아시아의 대표적인 혁명가이다”(홍, 1997, 149).

호지명의 본명은 ‘구엔 신 군’이다. ‘김일성’과 함께 혁명이 붙여 준 이름이다. 호지명과 김일성은 일제와 미제 뿐만 아니라 같은 공산국가들인 중국과 소련으로부터도 자기 민족과 국가의 존엄성과 자주를 지키려 했었다. 호지명은 39년 동안 외국군대의 남부 베트남 침입을 반대하고 베트남 문제는 베트남인 스스로 결정 해결해야 한다고 투쟁했다. 김일성에게 “조선 사람은 조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반성위이며, 그는 늘 김주석에게 조선의 호지명이 되라 했다고 한다. 이들의 님은 조국과 혁명이었다.

“만고의 애국자는 누구인가를”

쿠바의 카스트로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 서로 고생한 후일담을 나눈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카스트로가 김주석에게 유격 활동 기간 중 식량 문제와 피복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고 묻는다. 김주석의 고생담을 다 들은 카스트로는 탄복을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꾸바는 중국 동북지방이나 우리 나라와는 달리 기후가 매우 더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많습니다”(7-155) 김일성 부대가 항일 유격 활동을 한 북위 43도, 훨씬 윗 지역인 동만과 북만 일대는 한해의 반이 동토로 변해 버리는 곳이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만이 조국이 얼마나 귀중하고 조국에로 다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시련에 찬 길인가를 진정 뼈에 사무치게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3-책 머리) “나는 한 평생 민족의 존엄을 위하여 싸워왔다. 나의 일생은 민족의 존엄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을 해치거나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건드리는 놈들을 나는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다.”(3-115)

남미는 그리고 호지명이 싸운 월남의 경우는 자연 환경 자체가 혁명가들로 하여금 추위와 배고픔으로 시달리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카스트로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체는 미국이라는 제국과의 싸움, 그리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투쟁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의 이름도 쉽게 빠르게 국제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체를 두고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한 것도 그의 투쟁 전 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쿠바 혁명의 성공은 정글과 도시의 결합이라고 했다. 체 게바라가 뉴욕 타임즈 기자를 유격구 아지트로 불러 기자회견을 두 번이나 한 것은 쿠바 국내와 전 세계에 혁명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50년 말 거의 전 세계의 이목은 쿠바에 집중돼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쿠바 국내 여론을 사로잡는 데 언론이 큰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내는 데 3-4년이면 족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유격대는 외로운 투쟁을 하였다. 추위와 배고픔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같은 공산주의 나라들로부터도 아무런 지원이 없는 그리고 세계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동북아 밀림과 황야에서 16년이란 그렇게 긴 세월을 싸워 살아남은 것이다. ‘홀로코스트’ 만하더라도 유대인의 그것은 잘 포장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져 동정도 받고 있지만 우리는 고난의 역사마저 차별을 받고 있다. 위안부 문제 만 하더라도 이제야 겨우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인정을 받아가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이에 세계사의 한 장에 진실을 남겨 놓기 위해서라도 한 인간 김일성의 한 생이 장백산 줄기줄기 마다 압록강 굽이굽이 마다에 그와 그의 유격대가 흘린 피가 묻어 있는 곳을 찾아 확인하고 세계 혁명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과연 ‘만고의 애국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야 할 것이다. 지금 체 게바라는 완전히 세계 혁명사의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상품화가 되어 그의 얼굴이 있는 티-셔츠 판매 수입만 하여도 엄청날 것이다.

우리도 이념을 진정으로 초월한다면 우리의 혁명 예술의 결정판 ‘아리랑 공연’을 국제적으로 브랜드화 시켜야 할 것이다. 게바라 서거 40주기 행사는 국제적이 되었다. 체와는 너무 대조가 되는 우리 혁명가의 초상화는 상처투성이다. 아직도 가짜론에 시달리고 있고 보안법에 감싸여 그 진상조차 바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회고록을 읽으면서 ‘공비’란 말이 일제가 만들어 붙인 이름이란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김일성 항일 유격대가 눈에 가시 같더라도 일본놈들이 붙인 이름만은 사용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는 양식 있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혁명은 영원히 긔리는 것으로 남을지도?

글을 맺으며 달빛 속 볼리비아의 산골짝 어느 감자밭과 함께 왜 이렇게 만강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이 가슴을 처연하게 하는 것일까? 지금도 철이 되면 감자꽃은 피고 지건만 이 두 혁명가들이 그리던 세상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청춘도 삶도 다 버리고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혁명을 했는지? 혁명이란 영원히 긔리는 것이 아닐지? 혁명의 진정성은 혁명가가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이 혁명가를 사랑하는, 그래서 서로 긔리는 정념이 남아 있는 한 성공한 혁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체 게바라도 김일성도 성공한 혁명가들이 아닐까?

 

[출처: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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