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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독후감 20 - 김상일 교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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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3-13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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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사’와 조국 광복회 10대 강령

김상일 교수의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20)

김상일(한신대 전 교수, Korea Project Director,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대통령 자신의 정치 철학인 동시에 국정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조국 광복회 10대 강령은 1936년 유격 활동 기간 동안에 만들어진 것으로 북의 정치 철학인 동시에 그대로 국가의 이념이다. 그래서 여기서 양자를 비교 해 보는 것은 지금 남북의 현주소를 그 대로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첩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의 역사적 배경

회고록 전반에 걸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민생단’과 ‘조국광복회 10대 강령’(혹은 ‘10대강령’)이 아닌가 한다. 북에서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이 노래로 까지 작곡이 되어 널리 불리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시 되는 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의 정신적 그리고 국가적 건축의 정초가 되는 것이 10대 강령이다.

김일성 주석은 일제 타도와 조국 광복을 위하여 1936년 5월 길림성 무송현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창건하고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 선언’과 ‘재만 한인 조국 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북은 조국광복회 결성을 역사상 최초로 대중적 혁명 조직이 만들어 진 것이며, 10대 강령은 그 당시 조선의 현실에 나머지 숫자 하나 없이 맞아 떨어질 정도로 정당성과 적합성을 지닌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0대 강령은 조국광복회의 활동을 총화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민족해방 운동의 정치 노선, 그 전모를 말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가 받고 있다.

나아가 10대 강령이 발표된 이후 김일성 사령은 1936 말-1937년 초 사이에 최초로 백두산을 정점으로 주변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본토 진출의 획기적인 전기를 만들었다. 드디어 1937년 6월 7일 그가 이끄는 항일연군 제 6사는 국내에 조직된 조국광복회와 연계하여 최초로 국내 침투 전투를 단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보천보 전투이고, 같은 달 말(6월 30일)의 간상봉 전투였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사장의 6사는 1938년 12월 동북 항일 연군 제 1로군 제 2방면 군으로 편성되었고 김사장은 제 2 방면의 군장이 되었다.

조국광복회는 그 조직의 발판을 확대하여 결국 김 사령이 1945년 귀국했을 때에 그의 건국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10대 강령의 중요성은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취임사이든 10대 강령이든 그것이 시의 적절한 것이라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이렇게 파급 효과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미사려구가 아닌 역사와 함께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10대 강령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효하며 그대로 오늘의 북의 현실 그대로이다.

조국광복회 폄훼에 대하여

남한의 학자들이 김일성과 그의 활동을 폄훼함에 있어서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김일성 가짜론과 함께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10대 강령과 김일성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남한의 이명영과 허동찬은 김일성 가짜론에 이어 조국광복회 회장과 10대 강령 작성자가 김일성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김준엽, 김창순, 임은, 이정식, 서대숙, 와다하루끼 등의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불식 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이젠 거론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명영의 주장이 옳지 못한 것은 10대 강령과 김일성의 관계는 소위 자기들이 말하는 김일성 우상화 훨씬 이전에 나온 자료에도 나오고 있으며, 이명영 등이 허위라고 제시한 자료들이 오히려 사실임을 역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조국 광복회 결성이 김일성과 관련이 없다면 김일성과 항일연군 제 6사 사장의 관계도 관련이 없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보천보 전투도 김일성과 관계없다는, 즉 역사의 연속성을 모두 부정해야 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이러한 비연속성은 일본 측 자료와 그 당시 국내 신문들마저 대대적으로 보도한 자료가 있는 마당에 설득력을 잃고 만다. 최근에는 신진 젊은 학자들이 석사 박사 논문을 통해 이명영의 이론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연변대 조선족 학자 김성호 교수는 김일성 항일 유적지를 몇 차례 답사한 후 회고록의 기록이 거의 사실 그대로라고 말해 주었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장 비중 있게 가장 많은 회수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조국광복회 결성이다. 조국광복회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곳은 회고록 제 3권이다. 3권 제 7장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55-81쪽)에서 “이 날의 모임에서는 인민혁명 정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는 내용의 나의 연설이 있었고 10개 조항에 달하는 정부정강 내용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정강 내용은 훗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3권 76쪽)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그러면 우리의 관심의 적은 여기서 말하는 ‘이 날의 모임’(1933년 3월 18일)이란 무슨 모임이었느냐이다. ‘쏘베트’란 마르크스 이론을 원리 원칙대로 적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공동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련의 10월 혁명 이후 이를 이상화한 마르크스 교조주의자들은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개인 재산을 몰수 하고 심지어는 숟가락까지 몰수해 가 공동 분배한다는 쏘베트 집단 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동만 유격구에도 쏘베트 바람이 불어 닥쳤다. 이들 좌경들을 두고 김일성 사령은 “좌경 편향적 교조주의, 사대주의, 모험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이라고 단정한다.(3권-55쪽) 김일성 사령은 1930년 대 초반기는 대부분 이들과의 싸움으로 역량이 다 소진될 정도였다.

교조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마르크스 원리 원칙이 다시 현실에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대주의라 하는 것은 쏘련에서 분 바람을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주관이 없는 짓이란 것이다. 결국 이런 실용성이 없는 교조주의는 인민으로부터 일탈을 가져 왔으며 유격 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초래하였다. 유격구가 갑자기 쏘베트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일본인 적구로 떠나는 현상마저 생겼다. “여기서는 숨이 막혀 더 살 수가 없어서...”가 주민들의 원성이었다. 그러나 극좌 좌경들은 이런 원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르크스 원리 원칙을 고수하고 적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김일성 사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장영을 만났지만 그 역시 벽창호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김 사령은 여기서 결단을 내린다. 왕청 5구를 시범으로 쏘베트를 청산하고 ‘인민혁명정부’를 세우기로 결단을 한다. 이는 그가 민생단 사건 때 내린 결단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큰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인민혁명 정부’란 다름 아닌 조국광복회의 효시였으며 나아가 해방 후 정권 수립의 최초의 단서가 이에서 모두 비롯하기 때문이다.

1933년 3월 18일(이 날은 1923년 3월 18일 코민테른 집행위에서 희생된 유가족들을 후원하는 날) 5구 조창덕의 집에서 20여 명이 모여 ‘인민혁명정부’ 의 탄생을 선포한다. 그리고는 쏘베트가 몰수해간 개인의 재산을 모두 본인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심지어는 소비해 버린 것은 보상까지 해 주었다.

“이 날의 모임에서 인민혁명 정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는 내용의 나의 연설이 있었고 10개 조항에 달하는 정부정강 내용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정강의 내용은 훗날 조국광복회 10 개 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3권-76쪽)라고 김 사령은 회고하고 있다. 인민혁명 정부는 가야허 마을에서 사수평 마을로 급속히 확산되어 그 후 3년 후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 탄생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조국광복회는 국내로까지 조직이 확대되어 혜산과 갑산 등지의 조직원들이 김일성 항일연군과 협조하여 보천보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북의 정부 탄생은 이 조국 광복회 그리고 그 정신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10 대 강령은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대 강령

1.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 정부를 수립할 것.

2. 재만 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련합으로써 일본 및 그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영토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행할 것.

3. 일본 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싸울 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 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애 없이 발전시킬 것.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 실현과 봉건사상 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 것.

7. 량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등 차별없는 인륜적 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것.

8. 노예로동과 노예교육의 철폐, 강제적 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 로동제 실시, 로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로동법안의 확정, 국가 기관으로부터 각종 로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 있는 근로대중을 구제 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련합하여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

취임사와 10대 강령의 대차 대조

강령의 대강의 1-5항은 반제(반일본), 6-9항은 반봉건(남여 평등, 계급 평등), 10항은 국제친선에 관한 것으로 크게 분류된다. 오늘날 평등파와 자주파가 반드시 읽어야 할 대목이다. 북에서는 왜 이런 때늦은 문제가 제기되기 않는 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10개 조항들은 탁상공론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민생단과 쏘베트 사건과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생명을 내건 싸움에서 얻어진 산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극좌 좌경과 민족주의와 일제라는 삼각파도를 헤치면서 풍파 속에서 피로 먹물 삼아 쓴 것이 10대 강령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남한 사회에서 자주파와 평등파가 저렇게 피투성이가 나는 싸움을 하는 것을 이미 북의 지도자들은 1930년대 만주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10대 강령 속에 용해하여 1945년 건국을 하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생각 할 때에 동학혁명 역시 10대 강령의 정신과 과히 멀지 않다. 반제 반봉건이란 점에서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가 이 시대와 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강력한 힘과 타당성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다시는 불행해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남북은 지금 너무나 딴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느 쪽이 바른 선택을 했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차이점만 말해 놓자.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 선택의 자유에 맡겨 놓자.

8항은 “우리말과 글로서 교육하며”라고 했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영어 몰입 교육을 강조했다. 우리 어린 아이들의 혀를 더 자르라는 소리 같이 들린다. 혀를 더 자르는 경우 인간의 언어기능 자체가 말살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모국어로 시를 쓰고 모국어로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은 수치스럽게 되어 가고 있지나 않나.

일본에 대해서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일본에 대하여 물을 것도 많고 요구할 것도 많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은 깊어만 가고 있다. 대통령의 말이 이들의 한에 덧상처를 주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문화재도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분단의 궁극적인 원인은 일본 때문인데 어째서 일본에게 물을 것이 없다고 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

그리고 남북을 하나로 생각한다면 북은 아직 일본과 배상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독도를 자기들 영토라 우기고 있다. 이건 완전히 재침략의 야욕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런 일본에 과연 물을 것이 없고 요구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강령 1-5항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이념과 산업화를 넘어서 ‘선진 조국’의 시대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의 연장선상의 언어로만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은 과거 산업화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말로만 들린다. 선진국/후진국이란 이분법으로 지금 우리를 아직 후진에 있다고 보고 한 말이 아닌지. ‘오래된 미래’란 말이 있다. 아마도 앞으로 인류의 미래 사회는 티베트 라다크 같이 되는 것이 선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에너지 절약을 최소화 하고 초롱불 켜도 온 세상과 한 몸같이 되는 작으나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선진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북은 남보다 훨씬 선진사회로 가로지기기하기 쉽지 않을까. 그런데 취임사는 선진조국을 7-4-7에 연관시켰다.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아마 그 어느 지성도 선진을 그렇게 정의하지는 않을 것인데 말이다. 최소한 바라건대 강령 6-9항에 위배되지 않은 선진화가 되기 바란다.
 
[출처: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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