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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5 ] 선우학원,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 김대중 구출 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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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5-05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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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구출 운동조직

교수이민생활이 안정되어 처음으로 연구생활에 능률적인 생산의 열매를 보기 시작했었다. 한국현대정치사를 영문으로 출판코저 미국 출판사에 문의했다. 그들은 원고를 보기도 전에 그런 책은 팔릴 가망이 없다.”고 처음부터 거절했다. 그 후일본군국주의⌟⌜아메리커의 아시아 딜레마등등. 몇 권을 출판할 때도 들은 이야기지만 책이 출판되어 약 3년 내 5천 권이 팔리지 않으면 시장조사를 정확히 한 후에야 출판을 계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관한 책은 미국시장에서는 이익을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에 관한 원고는 환영했다. 그 덕분에 몇 번 출판의 기회를 얻게 됐다.

    연구생활도 좋았지만 고국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째 당선되면서 다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국민 앞에서 약속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한국에 민주주의가 오리라고 믿으면서 다시 한국에 내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일까? 내가 할 만한 사업은 무엇인가를 찾았다.

    친구들의 소개로 교육계의 인사들을 자주 만나게 됐다. 그 중에서 두 분과 이야기가 신중히 진행되었다. 한 분은 퇴역장교인 김문경씨였다. 그 분은맥아더 국제대학교를 설립하자고 제의했다. 충청도 출신으로 고향에 중∙고등학교를 경영하는 유지였다. 나는 맥아더 장군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명의로 대학을 운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김씨와 사귀는 동안 대학의 명의는 큰 문제 없고, 교육사업이 목적이란 점에 합의를 봤다. 군인출신인 만큼 박정권과 인적관계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재단으로 대학을 시작할 것인가. 재정문제에 봉착했을 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이때 아시아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학교 법인 대아학원설립위원회 이사장 주현휘씨를 만나게 됐다. 주 이사장은 나를 만난 다음날 내게 아시아대학교 총장 수여식을 제의했고 이미 증명장을 준비 해 가지고 왔었다. 하루 새 나는 아시아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됐다. 그 수여식에서 전주이씨 가문을 대표하는 이화우씨가 대학부지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소재한 땅 403만평을 기증하면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제 3동장의 인감증명서를 전달했다. 재산출연증서와 인감증명서를 받고 나는 과연 대학교 설립의 꿈이 실현된다고 믿게 됐다.

    아시아대학교(종합대학) 신축에 대해 요령으로 다음과 같은 설계에 합의를 보았다. 1차 건설을 3개년으로, 1968년부터 1970년까지로 학 신학대학, 문리과대학, 정경대학, 전자공과대학, 사범대학, 특수 중∙고교, 문화연구원, 부속건물 등으로 하고 건물 하나에 1200평으로 정했다. 부속 건물은 교수주택과 학생 기숙사가 포함됐다.

    2차 건설 3개년 계획은 1971년부터 1973년까지로 대학종류는 의과 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체육대학, 상과대학, 예술대학, 여자대학 등이었고 교수주택과 학생기숙사를 증설키로 했다.

    다음 건설계획으로는 각종 연구원 설치였다. 각종 과학방면은 물론이고 동양문화연구에 치중했다.

    학생모집에 있어서 아시아 각국에서 유학생을 모집하고 그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무료로 교육시키는 것을 강구했다.

    이런 광범위한 계획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학생들의 수업료와 입학금 정도로는 대학교를 유지할 수 없었다. 개인의 기부금에 중점을 두고 특수한 대학으로 즉, 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한 종합대학을 구상한 것이다. 전통이 없이 21세기를 바라보는 현대교육을 위한 대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김문경 이사장은 맥아더 대학 설립을 위해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내곡동 및 원지동 일대의 재산을 불하인수 확보키로 나와 약속하고 약정서에 서명까지 했다. 왜 김문경씨나 주현휘씨가 자기들이 시작한 대학설계를 내게 공동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의했던가? 그 당시 나는 한국문화협회란 사법재단의 이사장으로 피선되었다. 이 재단은 경상도 밀양에 산림과 광산을 기본재산으로 한 재단이었고, 그 당시의 시가로 미화 5백만 달러라고 하는 큰 재단이었다. 원래 럭키 재벌에 속한 재단이라 한다. 그 재단이 내 손에 들어 오게 된 이유는교포학자의 명의를 가졌기 때문이었고 60년대 중반기 한국경제발전이 시작될 때 정부도 기업체도 외자차관이 급선무였다. 누가 한국 기업체에게 차관할 것인가? 아직 한국기업체가 국제시장에 소개되지 않았을 때다. 나는신세대변호사(나의 처남)의 소개로 미국의 콘티넨탈 그룹과 관계를 가지고 차관교섭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런 연줄로 강신명 목사의 친구인 부산의 백모 장로와 지모 장로 두 분에게 5백만 달러 차관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두 장로는 약속돼 있는 커미션이 아까워서 내게 알리지 않고 미국에 와서 직접 은행으로 찾아갔다. 그 은행은 두 분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은행은 콘티넨탈 그룹과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백 장로는 황정수씨가 안내했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나는 다시는 차관문제에 대해서 관계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차관의 줄을 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국문화협회가 내게 떨어진 것이나, 아시아 대학교 총장의 직위가 내게 온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교육사업에 대해서만은 나는 깊은 관심이 있었다. 물론 한국문화협회 이사장은 선우휘씨의 교섭이 중요했었다. 휘의 동생인 염씨가 그 당시 박정권 밑에서 청와대 공보비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되는 것이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란 말이 나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었다. 하여튼 재단법인체의 이사장이 되자 많은 기업체에서 공동사업을 제의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고려대학 재단이었다.

    문협의 유일한 목적은국민의 계몽,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국내의 학술 및 문화 조사연구를 함과 동시에 이를 널리 선전, 보급하는 일편 국제문화의 교류를 도모하며 우리 국민의 문화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 하고자 함이었다.

    이런 사업을 어떻게 재정적으로 지원할 것인가? 우선문협의 기금에서 어느 정도의 수입이 될 수 있는가를 탐지해야 했다. 문협 1956년에 정부허가를 얻은 유일한 한국재단이기도 했다.

문협이사장을 비롯해서 두 개의 종합대학이 구상되고 있었고문협에게 땅을 기부하여 공동사업을 하자는 등 사방에서 크고 작은 제안이 문협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희망적이던문협사업도 아시아대학교의 총장직도 오래 계속될 수 없는 운명에 처해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 이상 대통령을 하지 않기로 국민 앞에서 약속했고 국민에게 민족통일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준 1973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그 여름 서울에서 보냈다. 뉴스를 듣고 난 후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의 부탁으로 저녁설교를 할 때 남북대화는 중앙정보부 부장에게 국한될 수 없다. 우리 크리스찬들도 남북대화에 동참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새문안교회 청년학생회에서도 학생들은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라고 권고했다. 학생들은 시가로 뛰어나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남산에 끌려갔다. 정보부에서는 북의 사진도 보여주었고, 나의 발언에 대해서 경고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오. 말 조심해요.”했다. 하루종일 감금되어 교육을 받고 석방됐다. 나는 불쾌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도대체 74남북공동성명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가 궁금했다.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가을학기를 시작해야 했다.

박정권의10월 유신성명이 발표됐다. 7.4남북공동성명을 타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다. 또 자기공약을 무시하고 대통령 출마를 선포했다. 자기의 공약을 배신하면서 대통령이 돼야 하는가?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 했다.

한국국민은 분개했었다. 그러나 시가로 뛰어나간 자들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부마사태가 증명한다.

나는 1973년 가을학기부터 2년간 뉴욕시립대학에 초빙교수로 임명됐다. 뉴욕시 맨하탄 중부인 85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장남 정민이 내외가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정민이도 뉴욕시립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다.

뉴욕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한국정계에 국제적인 사건이 발생 했다. 즉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그것이다. 뉴욕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경험을 한 몇몇 인사가 긴급히 회집하여 사건에 대해서 토론한 후 즉석에서 김대중 구출 국제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에 임창영 전 유엔대사를 선우학원 교수를 부위원장, 변호사 공부과정에 있던 임병구씨를 총무로 선출했고 이승만 목사와 임순만 목사가 중앙위원으로 각각 책임을 맡았다. 그 조직체는 김대중씨의 구출을 위해서 근 10년간 투쟁했다. 먼저 미국교회측과 앰내시티 인터내셔날 등의 인권옹호기관과 연결했고 그들을 통해서 미국 국무성에게 압력을 가했다. 우리의 선전사업은 효과를 얻게 됐다. 김대중 살리자!라는 구호는 미국 미디아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반 박정희 군사정권운동이 미국에서 활성화됐다. 과거 10년 동안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들은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면 대한민국을 반대하는반한 인사로 취급하여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박정권의 선전을 그대로 믿었고 한국신문들도 정부의 지시대로 보도할 시절이었다. 그러나 박정권의 김대중 납치는 박정권의 큰 실책이었다. 자기 자신도 그런 실책을 인정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말로를 당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김대중씨를 이휘호 여사의 소개로 알게 됐다. 서울에 내왕할 때  이여사께서 제 남편과 친구가 돼 주세요. 제 남편은 학자친구가 없어요.”하고 권해서 김대중씨의 정치활동을 도와준 바 있다. 미국대학에서 처녀강연시키고 내가 통역해 줬고 미국에서 영어공부 하시고 국제정치 연구하시면서 시기를 기다리세요.”하고 우리 집에서 환영회를 해주면서 실망하고 있는 정치가에게 힘을 주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일본 가서 납치된 것이다. 그분은 시기를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한 분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하여튼 그가 납치 되자. 우리는 구출운동을 시작했다. 내가 김대중 구출운동에 참가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문협이사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시아대학교 총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염려됐다. 그러나 인명구출 문제가 선결문제였다.

우리는 유엔광장에서 김대중 석방하라! 김대중 석방하라!란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했다. 교포의 수는 소수였다. 할 수 없이 뉴욕시립대학 학생들을 동원했다. 교포사회에서 김대중의 존재는 별로 인정되지 않았고 장사하는 교포나 유학생들은 한국영사관의 감시 때문에 그런 데모에 참여하기를 주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김대중 석방하라!데모에 80여명이 참가했었다.

10 2일 서울대학에서 누구를 위한 10월 유신인가? 국민의 노예를 위한 것인가?라고 크게 쓴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단행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뉴욕에서 서울대학교 학생데모를 지원하는 데모를 27일 뉴욕시가에서 단행했다. 서울의 결의문을 뉴욕시가에 뿌리기도 했다. 그 내용의 하나는정보파쇼통치의 원흉인 중앙정보부를 즉시 해체하고, 김대중 사건의 진상을 당장 밝혀라!였다.

서울대학교 학생데모에 관해서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문리과 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에서는 사실상 정상적인 학사운영이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국회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경찰이 215명의 학생을 연행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의 마이니찌 신문은 학생들의 선언문에 의하면 학생들의 자세가 과거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고 보도했다. 뉴욕에서 시작된 김대중 구출운동은 미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미국교포의 김대중 구출운동은 인권운동에 국한되었다. 박정권은 물러 나야 한다는 구호는 얼마 후에야 나왔다. 미국교회측의 지원을 받아야 했고, 교포사회의 의식문제로 봐서 인권운동의 원칙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시가데모에 들고 나갈 구호도 하나하나를 신중히 토론하고 검토해야 했다. 예를 들면 퇴역장교인 최석남 장군이 박독재 살인마!란 구호를 가지고 데모에 참가했다. 유엔 프라자 앞에서 그런 과격한 구호를 들고 데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최장군에게 설명했다. 최장군은 자기 고집대로 부인과 함께 개별적으로 시위한 적이 있다.

비통한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도 교포들이 어느 정도 실감을 하고 학생 운동을 동정하는가가 의심스러웠다. 해외교포가 어느 정도 국내 혁신운동을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할 것인가? 대부분의 교포는 무관심했다. 이와 같은 질식상태 속에서 우리 소수 민주인사들은 김대중 구출운동을 결사적 으로 추진시켰다. 결국 우리는 성공했다. 박정권은 김대중 사형집행을 포기 해야 했다. 결국은 박정희 자신이 죽음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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