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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4 ] 선우학원,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 이민생활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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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1-05-05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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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고민

60년대 이후에 미국으로 이민한 교포들과 이야기 해 보면 그들의 이민 생활에 대한 태도가 초기이민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미국에 도착할 때 흥분되는 점은 누구나 비슷하지만 60년대 이후 이민한 교포들은 2, 3년 지나면 이민생활에 대해서 좌절감을 가지게 되는 듯싶다. 초기이민인 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여 최소한 2년은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좌절감을 가졌다기 보다는 이민 온 것을 후회했고, 돌아가는 문제도 쉽지 않고, 생활 타개를 위해서 고심하면서도 미국에 정착해야 하는데 대해서 결정적 자세를 가졌던 것이다. 물론 참을 수 없어 한국으로 돌아간 교포들도 적지 않았다. 60년대 이후 이민 온 교포들은 대부분이 개인기업에 종사하면서 2, 3년내 성패를 판가름 내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언어문제를 비롯해서 이질 문화의 충격이 심하여 고국이 그립고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3년을 참고 견디면 대체로 이민생활이 안정되는 모양이다. 미국에 이민하면 일확천금 한다는 오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싶다. 그것이 가능치 않다고 판단될 때 좌절감을 맛보게 마련이다. 3년이 지나고5년이 지나서 10년을 바라볼 때는 모든 문제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여 이민생활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듯싶다.

이민생활 10년쯤 지나서 기업체도 제대로 성장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국아이들과 경쟁도 하게 되고 희망의 빛이 보일 듯 할 때는 미국 사회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는 그런 여유도 없었고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관계로 무심히 지나친 것이다. 미국 사회구조의 특색은 인종 차별이다. 초기이민인 들은 이미 일제의 차별대우를 받은 체험을 겪고 미국에 왔기 때문에 백인이 유색인종을 차별할 때 새로운 경험이라기보다 옛날 것이 반복된다고 생각했다. 왜 미국까지 와서 인종차별을 당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새로운 자아인식의 혼란을 갖게 된다. 더구나 자녀들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좋은 곳에 취직이 안될 때 그런 인식이 강해진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다.

초기이민인들에게 왜 주택을 사지 않는가? 하고 물으면 독립되면 한국 에 돌아가야지, 집은 사서 뭐해.”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실은 집을 살 수 있는 재력이 없었던 것이다. 내 조부님도 그 중의 한 분이었고, 내 장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이민생활은 나그네 생활이었다. 그러나 60년대 후의 이민인 들은 집부터 사려는 경향이 많다. 교포들 사이에 어디서 어떤 집을 사는가가 중요한 화제인 듯싶다. 그런 인상은 교포 의사들 중에서 더 강한 듯싶다. 그들은 수입이 좋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수입이 충분한 직장을 가진 교포들의 생활은 윤택하다. 그런데 의사나 변호사 같은 직을 가지고 상류계급 수입을 가진 인사들이 한인교포사회에 별로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뉴저지주에서 교포 정신과 의사 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정신병이 들어서 백인 의사를 찾아갔다. 백인 의사가 박 모란 교포의사를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의 제일 단계로 너는 코리안이다 라는 자아인식으로 시작 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박 모 의사는 자기가 의사로 성공하면서 한인교포 사회를 떠나서 백인사회에만 참여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박 모 의사를 동등 취급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박 의사의 고민이 시작되어 정신병 환자가 됐다. 박 모 의사가나는 코리안이다 라고 자아인식이 확실해 지면서 병은 급속도로 회복됐다. 우리가 미국생활을 한다고 자기의 위치를 떠나서 자기는 딴 사회에 속했다고 자기를 속일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인식이다. , 너는 코리안이다 란 인식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자아인식이 수립돼야 훌륭한아메리칸 시민이 될 수 있고, 다른 인종들과 사귀면서나는 누군가하는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나는 코리안이다라는 인식은 결코 민족주의를 인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뿌리를 인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자기민족에 대한 자존심이 없으면 자기가 복합사회인 미국땅 에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하고 묻게 된다. 더구나 자기들의 동창이 한국내에서 출세하고 기업체에서 중역이 됐다던지 국회의원으로 유명해진 것을 볼 때 자기의 이민생활의 처량함을 느끼기도 한다. 미국 이민생활의 긴장은 계속 된다. 문화의 충격도 계속된다. 자녀들과의 갈등이 발생된다. 사회 적응도와 생활에 대한 만족도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때는 왜 이민을 왔는가? 후회까지 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이민 올 때 이미 결정해야 했고 이민생활이 자기 땅에서 사는 것과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했다. 이민생활 하면서 조국에 대한 꿈만 꾸게 되면 이민생활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을 했고 실패를 반복했다.

교포 지성인들 중에는 조국에 가서 취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대학에서 교수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료들과의 관계, 학생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에서 경험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미국학생들은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라든가, 졸업 후 엽서 한 장이라도 보내는 적이 별로 없다. 내가 주립대학에서 경험한 것과 교회에 속한 사립학교 학생들의 관계를 봐서 후자의 경우가 더 만족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근 30년을 봉사했음 직도 하다. 내 친구 교수는 대학교수를 20년 하면서도 한국에 돌아갈 생각만 했고, 결국은 그렇게 했다. 그이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20년간의 미국학자 생활은 손실이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중진시대를 꿈에서 지내고 노년시대의 만족을 보기 위한 준비는 됐으나 많은 시간이 허무하게 흘렀다.

우리들의 이민생활을 좀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중히 고려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남의 땅이 아니고 내 땅이란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우리의 이민생활이 나그네 생활이 아니고 주인이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최근 LA폭동 이후 미국 각 지역에서 한인교회와 기업인들이 흑인들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상호 부조하는 방향으로 생활패턴을 바꾸고 있는 것을 전적으로 환영한다.

10년 전에 이민 온 50세 정도인 치과의사를 만났다. 그 분은 미국에 와서 치과의사 시험에 패스할 수 없어 취직도 못하고 개업도 못하였다. 결국은 부인이 재봉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다.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 이다.

이민인구의 3분의 2가 대학을 졸업했는데 대부분은 자기의 전공직에 취직하지 못한다. 결국은 자영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나도 대학교수직을 구할 수 없어서 자영사업을 했다. 자영사업을 준비할 때도 미국의 사업상황과 재정 정세 등에 대해서 철저한 연구도 없이 복덕방을 믿고 상점을 사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수년 전 뉴욕에서 생긴 일이다. 뉴욕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빨리 사업에 착수해서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복덕방에 게 위탁했다. 몇 달씩 놀고만 있을 수 없다는 심정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너무 급하게 움직였다. 복덕방의 소개로 식료품 상점을 사게 됐다. 사는 사람은 상대자가 한인인 만큼 거래에 대해선 신임했고 상점을 인계했다. 한 달이 지났다. 매상고가 살 때 본 장부의 수입의 반도 안 됐다. 그 정도의 매상고로는 경비도 추스려나갈 수 없었다. 복덕방에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했다. 복덕방에서는 매매가 끝났기 때문에 이상 더 논의되지 않는다고 충고를 했다.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교포는 자기의 앞날이 어두워졌다. 가지고 온 총재산을 투자한 상점인데 몇 달 지나면 본전도 없어질 형편에 봉착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다. 그분이 미국사정을 알았고 지혜롭게 처리 했더라면 사기죄로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 매매가 사기인 것이 증명될 수 있고, 자기의 자본을 찾을 수 도 있다.

그러나신도한이란 이민인은 그런 것을 알 수도 없었고 탐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으로 결정했다.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복덕방 주인과 상점을 판 전 주인은 피살되었다. 또 살인죄로 교포는 체포됐다. 이 얼마나 딱한 사정인가? 나는 뉴욕에서 교수로 있을 때 한인들의 브로드웨이 채소 과일점을 항상 찾아 다녔다. 나는 고기보다도 채소와 과일을 좋아한다. 한 노인은 자기가 채소과일상점을 세 곳이나 경영한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세 아들이 하나씩 경영한다고 하면서 자기 성공의 비결을 말했다.

새 상점을 사가지고 약 6개월간 물건을 헐값에 팔면 손님이 사방에서 몰리게 됩니다. 매상고가 엄청나게 오르게 되죠. 이익을 보지 못합니다. 박리 다매 주의니까요. 그때 상점을 팔아야 해요. 매상고를 보면 누구나 사니까요.” 하고 미소를 띠었다. 나도 채소과일장사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된다. 보통 평균을 잡아서 30내지 35% 이익을 보는 것이 채소과일 장사였다. 사는 사람은 그것을 계산하고 사게 된다. 그러나 이 교포노인은 30% 이익보다도 매상고 올리는데 주력했고 이익은 없어도 좋았다. 사는 사람은 그런 배후의 전략을 모르고 사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이 케이스는 사기라고 할 수 없다. 사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것이다. 본시 채소장사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도매상에 나가야 하는 사업이다. 매우 피곤한 사업이다. 그러나 위치만 좋으면 잘 되는 장사의 하나다. 우리 교포들은 초기에 이 사업에 많이 종사했다. 기술이 필요치 않고 자본도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그러서리리커는 시간은 짧으나 자본이 많아야 한다.

또 하나 다른 점은 근래 이민 온 교포들은 대부분 부부가 맞벌이 전선에 나가게 되는데 초기이민의 경우는 보통 남자 혼자서 작업하게 되고 부인은 집안에서 살림을 했다. 그 까닭은 초기에는 여자들이 직장에 나서거나 상점에서 일하는 관습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지금은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여자들도 남자와 함께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 생각하게 됐고, 또 생존경쟁이 강화되면서 필요해진 것이다. 물론 농장의 경우는 달랐다. 부부가 함께 일할 뿐만 아니라 부녀들이 더 어려운 노동을 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요즘 교포들의 가족수입은 미국의 평균수입을 능가하고 고소득 계층에 속할 정도인데 초기이민들의 수입은 언제나 밑바닥에 속했었다. 더구나 의사, 변호사, 교사, 은행원, 관리 등화이트칼라 직업 은 초기 이민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김용선 의사와 한영대 의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업했고, 김창순 의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업한 사실은 예외라 하겠다. 그들의 고객은 전부가 유색인종 그룹이었고. 백인고객은 없었다. 백인이 동양인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병 치료를 받는다는 생각은 그 시절에는 있을 수 없었다.

파사데나 대학 재학시절에 피부병에 걸려서 한영대 의사를 찾은 적이 있다. 그분의 진단에 의하면 영양부족으로 발병된 것이니까 우유를 마시라고 권했다. 고학생의 처지에서 우유를 마실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그때 자취하면서 3일간 노동하고 3일간 등교하던 스케줄을 바꾸어 아침에 등교 하고 오후에 일하는스쿨 보이직으로 옮기었다. 스쿨 보이직의 월급은 한 달에 15달러였으나 방하나를 주고 세 끼니를 먹여줬다. 그때 우유도 한 잔씩 얻어먹으면서 영양부족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에 유학한 한국학생은 너와 나를 막론하고 누구나 스쿨 보이를 했다. 취학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직장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장에서 번 돈으로 다음 학년 수업료를 지불했다. 스쿨 보이만은 이민국에서 허락해줬다. 다른 직업은 불법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초기유학생들은 공부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러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마음이 변해진 것이다. 그 때는 돌아가되 독립된 조국으로 가게 될 것을 기대했었다. 우리 중에는 요즘 이민가정에서 자녀들을 명문대학으로 보내서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에 취직해야 한다는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또 그것만이 이민생활을 만족케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최고 학부를 끝내고 자녀들이 적당한 직업을 얻어가지고 자기들보다 더 바람직한 생활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민생활에서 진저리 나게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상점을 시작할 때 나의 조부님께서는 실망하셨었다. “공부한 것이 아깝다.”고 여러 번 반복했다. 나도 조부님께서 만족하시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조부님은 모두가 이승만이 때문이다.”라고 불평한 적도 있다. 그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 때문이었기에. 그러나 한국에 가서 기대하던 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누구의 탓인가? 박정희 독재 때문이라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되어 졌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나도 어려운 시대에 워싱톤대학, UC버크리, 스탠포드대학 등 명문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쉽지 않은 박사학위도 따게 됐다. 그러나 나는 좋은 지위에 취직하기 보다는 나의 신념에 따라 나의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데 더 집중했다. 그것이 애국사업이요, 민중을 위한 진리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국도 미국도 나를 환영해 주지 않았다. 사실상 나는 고독한 생활을 하게 됐다. 나의 이민생활은 망명생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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