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 가문을 통일애국의 길에 세워주시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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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리민족끼리사 기자 작성일11-03-22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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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하도록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사에는 북남경제협력의 선구자로 불리우고있는 남조선의 이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선생도 있다.
대자본가에 속하던 정주영선생, 한생을 자본의 축적과 기업의 확대, 치부를 위한데 바쳤다고도 할수 있는 그가 오늘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리 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과 뜻깊은 인연을 맺고 인생말년에 민족을 위한 일, 북남경제협력의 길을 걸었기때문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광폭의 도량으로 정주영선생을 여려차례나 만나주시고 통일애국의 길로 이끌어주시며 베풀어주신 믿음과 은정은 오늘도 온 겨레를 끝없이 감동시키며 길이 전해지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는 남조선의 집권상층이나 여당과 야당인사들, 대자본가, 군장성들도 민족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그들과도 민족대단결의 기치밑에 단합할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가난의 설음을 털어버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를 판 돈을 품고 고향을 떠난 정주영선생이였다.
8. 15해방후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그는 큰돈을 벌수만 있다면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끌어들이는 군수품거래에도 뛰여들었고 미국과 일본 등 외래독점체들과 협력하는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1969년에 현대건설 회장, 1971년에 현대그룹 회장, 1987년에는 현대그룹의 명예회장으로, 남조선에서 첫째가는 재벌로 되였으며 한때는 《대통령》후보로까지 나섰었다.
재벌로서는 성공했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였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과 정든 고향이 못견디게 그리웠고 고향사람들앞에 떳떳치 못한 허전한 마음도 풀길이 없었다.
착취배들을 용납하지 않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인 공화국으로 가기에는 과거가 떳떳치 못했다. 설사 찾아간들 좋게 대해줄리 없고 반겨맞을 고향도 아닐것만 같았다.
그러한 정주영선생의 마음속생각을 헤아리시고 그가 평양을 방문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신분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나서려는 사람모두를 한품에 안아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을 그대로 이어가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생의 평양방문을 실현시켜주시고 고향에도 찾아가보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지난날의 잘못도 관용으로 대해주시며 체류기간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넓은 도량에 선생은 감복을 금치 못하였다. 더우기 고향의 수많은 형제, 친척들이 당, 행정, 군대 등 주요한 부문에서 사업하고있는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더 컸다.
방문기간 공화국의 눈부신 전변을 직접 목격한 정주영선생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펼치시는 정치의 위대함과 령도의 탁월함을 보았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뵈옵는것은 정주영선생의 최대의 소망으로 되였다. 민족적존엄과 긍지로 충만된 공화국과 협력하여 조국통일을 이루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싶은 결심을 직접 말씀드리고 그 실현에 남은 여생을 바치고싶었다.
1998년 10월 30일은 정주영선생에게 있어서 가장 뜻깊고 영광스러운 날이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정주영선생일행을 만나주시려 몸소 숙소를 찾아주신것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는 정주영선생에게 고령에 있는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가서 만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현지지도도중에 평양에 오다나니 이렇게 밤이 늦어서야 정주영선생을 만나게 되였다고, 미안하다고 겸허하게 말씀하시였다.
민족의 존엄과 안녕을 지키시며 조국통일을 위하여 온갖 로고를 바쳐가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머나먼 현지시찰의 길에서 쌓이신 자신의 피곤은 뒤로 미루신채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시니 정주영선생은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북과 남, 해외의 공동의 관심사로 되고있는 금강산관광개발문제를 비롯하여 정주영 명예회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시였다.
남조선에서 대기업체에 남아있는것은 명예회장뿐이라고 하시며 회장은 시작만 하면 빨리 끝내는 기질을 가지고있으니 금강산관광사업을 다그치라고 고무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민족이 화해하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라는 값높은 칭호도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잘 되고 잘살게 하자는 사람과는 언제나 손잡고나갈것이라는 크나큰 믿음도 안겨주시였다.
기념촬영을 할 때의 정주영의 감격은 더욱 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나이많은분이 가운데 서야 한다고 따뜻히 말씀하시며 선생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영광의 사진을 찍어주셨던것이다.
대재벌로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며 적지 않은 사람들도 만나보았으나 경애하는 장군님처럼 례의에 밝으시고 고결한 풍모를 지니신 출중한 덕망의 위인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은 과시 위인중의 위인이시고 인간중의 인간이시였다. 공화국의 남녀로소모두가 장군님을 진심으로 우러러모시고 따르는것이 과연 무엇때문인가 하는것이 정주영선생의 가슴속깊이 안겨들었다.
서울에 돌아간 정주영선생은 기자회견을 열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찍은 여러장의 사진을 펼쳐보이며 《장군께서 례의를 갖춰 깍듯이 대해줘 무척 고마웠고 옆에서 보니 김일성주석과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을 모든 사람들이 장군으로 부르는데 나도 장군이라 부른다》고 하면서 장군님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숨김없이 표시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물론 미국의 소리방송까지도 《자본주의기업가인 정주영이 김정일국방위원장의 풍모에 완전히 매혹되여 그분을 모든것에 박식하고 친절하고 례절바른 지도자라고 진심으로 칭송했다》고 보도하면서 놀라워하였다.
남조선언론들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접견해주심으로써 정주영선생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여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련공련북의 길을 걸은 김구와 같은 련북합작의 선구자로 되였다고 하면서 선생의 인생전환을 하나의 《대사건》으로 평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 그것은 정주영선생에게 돈보다도 민족이 1차라는 애국의 일념을 심어주고 선생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커다란 전환점이였다.
하기에 정주영선생은 인생의 은인이신 장군님을 뵈오며 다진 마음속결의대로 북남경제협력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통일애국의 길에서 인생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찾았다. 돈이 어떻게 쓰여질 때 빛이 나며 돈가진 사람의 진가가 무엇인가 하는것도 새삼스럽게 느끼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주영선생을 민족과 통일을 위한 참다운 길에 세워주시였을뿐아니라 그의 새 출발이 빛을 볼수 있도록 끊임없는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1999년 10월과 2000년 6월 정주영선생일행을 또다시 만나주신 장군님께서는 방북의 길은 정주영 명예회장선생이 선참으로 개척하였다고, 명예회장선생의 공적은 앞으로 력사에 큰 장을 차지하게 될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리고 숭고한 동포사랑으로 남조선사람들이 군사분계선을 통해 금강산을 볼수 있도록 해주실것을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소원도 풀어주시였으며 개성공업지구건설을 현대가 주동이 되여 진행하도록 상상밖의 특별배려도 돌려주시였다.
북과 남이 갈라져 수십년, 미군이 분계선지역에 막대한 병력을 배치하고 호시탐탐 전쟁의 불을 지를 기회만 노리는 때에 분계선의 서쪽과 동쪽을 현대의 경제협력사업을 위해 다 열어주신것은 온 겨레에게 하루빨리 조국통일을 선물하시려는 장군님께서만이 내리실수 있는 대용단인 동시에 선생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은정의 표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80고령으로 북남경제협력에 애쓰는 정주영선생의 건강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면서 선생이 로당익장하도록 산삼을 비롯한 보약들도 보내주시였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이후에는 남조선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선생을 잊지 않으시고 민족의 향취어린 송이버섯선물도 보내주시였다.
참으로 정주영선생에게 돌려주신 장군님의 은정과 배려는 끝이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주영선생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통일애국의 길에서 영생하도록 뜨거운 사랑과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2001년 3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정주영선생의 사망에 즈음하여 조전을 보내주시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가진 조문단도 서울에 파견해주시였다.
고인의 유가족들은 감동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다.
전체 남조선인민들, 지어는 북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던 우익보수정치인들까지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북남화해협력의 물고를 튼 정주영선생을 높이 평가해주시고 그의 사망에 《정상급의 례우를 하여 조문대표단을 파하신 각별하고 성의있는 은정》에 깊이 머리숙이며 감복을 금치 못해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선생에게 영생의 삶을 안겨주시기 위하여 기울이신 배려는 이뿐이 아니였다.
2003년 10월, 평양의 경치좋은 보통강기슭에서 류경정주영체육관개관식이 진행되였다.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적발전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애국애족의 사상과 한번 맺은 우의를 끝까지 귀중히 여기시는 장군님의 믿음에 받들려 북남경제협력의 상징의 하나로 일떠선 체육관, 장군님께서는 새로 건설된 체육관에 선생의 이름을 붙여 《류경정주영체육관》으로 부르도록 하시고 개관식도 잘 진행하도록 해주시였다.
하기에 개관식에 참가한 남측인사들은 체육관은 존경하는 장군님께 드리는 정주영회장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북남화해와 협력사업에 헌신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이름을 체육관에 붙여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였던것이다.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온 민족을 한품에 안아주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뜻을 따랐기에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한평생을 통일에 바친 애국인사도 아닌 정주영선생은 6. 15자주통일시대 북남경제협력개척의 선구자로 불리우며 죽어서도 그처럼 빛나는 영생의 언덕에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우리민족끼리사 기자
우리민족끼리 3월 21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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