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일성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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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일성 작성일11-03-19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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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압록강의 노래》
1923년초에 아버지는 나를 불러앉히고 이제는 소학교를 졸업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나는 상급학교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싶다고 말씀드리였다. 나를 상급학교에 보내려는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평소부터 품어온 소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장래에 대한 포부를 물으니 나로서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심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제부터는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였다. 그 말씀 역시 나한테는 뜻밖이였다.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려면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야 했다. 나는 그런 경우를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옆에서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놀라면서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데 가까운 고장에 보내면 안되겠는가고 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결심이 확고히 서있는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섭섭하고 허전하더라도 성주를 기어이 조선에 내보내야겠다고 거듭 말씀하였다. 원래 우리 아버지는 한번 내놓은 말을 리유없이 거두는 법이 없었다.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도 할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조선에 내보내자고 결심하였다,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다,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 하는걸 체험해보아라, 그러면 네가 할바를 잘 알게 될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진지하게 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리였다. 당시로 말하면 조선에서도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외국류학의 길에 오르던 때였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데 가야 개명도 하고 학문도 닦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하나의 시대적풍조로 되여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외국행을 할 때 나는 조선행을 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사고방식이 아주 독특하였다. 나는 지금에 와서도 그때 아버지가 나를 조선에 내보내준것이 옳은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열두살도 되지 않는 자식을 당시는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던 천리길에 홀로 내세운것을 보면 보통성미가 아니였다. 그 성미가 오히려 나에게는 힘으로 되고 믿음으로 되였다. 사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였다. 조국에 나가서 공부하라니 다른것은 다 좋았는데 부모동생들의 곁을 떨어지는것이 싫었다. 그렇지만 고향에 가고싶은 생각은 불같았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단란한 가정의 분위기를 떠나고싶지 않은 미련이 검질기게 교차되는 복잡한 심리의 파동속에서 나는 들뜬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날씨라도 좀 따스해진 다음에 보내면 어떻겠는가고 말씀하였다. 아직 어린 자식을 천리길에 홀몸으로 내세우자니 어머니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말씀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리길을 가야 할 내 앞길을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아버지가 계획한 날자에 나를 떠나보내려고 밤을 새우며 두루마기와 버선을 지었다. 아버지가 일단 결심한 문제였으므로 어머니도 다른 말씀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어머니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떠나갈 날이 다되자 아버지는 나에게 팔도구에서 만경대가 천리인데 혼자서 갈수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갈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목책에 로정도를 그려주었다. 후창에서 아무데, 화평에서 아무데, 어데어데까지 그리고 그 어간이 몇리라는것도 써주고 전보는 두번 치되 한번은 강계에서 치고 한번은 평양에서 치라는것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팔도구를 떠나던 날은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 16일)이였다. 아침부터 눈보라가 일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그날 팔도구에 사는 동무들이 나를 바래주느라고 압록강을 건너 후창남쪽까지 30리를 따라왔다. 길동무를 해준다고 하면서 한정없이 그냥 따라오기에 겨우 설복해서 돌려보냈다. 막상 길을 떠나고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이였다. 그 험한 산악들을 단신으로 넘는다는것이 헐치 않았다. 후창에서부터 강계에 이르는 길 량옆의 수림들에서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리였다. 그때 천리길을 걸으면서 고생을 퍼그나 했다. 직고개나 개고개(명문고개)와 같은 고개를 넘을 때는 정말 혼이 났다. 오가산령은 하루종일 넘었다. 아무리 걸어도 고개가 끝이 나지 않고 새 고개가 연방 나타나군하였다. 오가산령을 넘고나니 발이 다 부르텄다. 다행히도 그 령밑에서 어떤 로인이 나를 붙들고 앉아 발바닥에 성냥으로 딱총을 놔주었다. 월탄을 거쳐 오가산을 넘은 다음에는 화평, 흑수, 강계, 성간, 전천, 고인, 청운, 희천, 향산, 구장을 지나 개천에 이르러 거기서 기차를 타고 만경대로 나왔다. 개천에서부터 신안주까지는 협궤철도가 놓여있었는데 《니끼샤》라는 자그마한 영국제 기관차가 끄는 경편렬차가 다니였다. 신의주에서 평양까지는 지금과 같은 광궤철도가 부설되여있었다. 그 당시 개천에서 평양까지의 차표값이 1원 90전이였다. 나는 그때 천리길을 걸으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번은 발이 너무 아파서 어떤 농민의 발구를 얻어탄 일이 있었다. 헤여질 때 값을 치르려고 돈을 내놓으니 농민은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돈으로 나에게 엿을 사주는것이였다. 제일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강계객주집 주인이다. 저녁늦게 강계시내에 도착하여 객주집에 들어갔더니 그가 대문밖까지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것이였다. 하이칼라를 하고 조선바지저고리를 입은 키가 자그마한 사람이였는데 아주 사근사근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친 전보를 받고 나를 기다리고있었다는것이였다. 우리 아버지를 《김선생》, 《김선생》하면서 존경해온 이 객주집의 할머니도 나를 보자 4년전에 아버지를 따라 중강으로 들어갈 때는 조그마했는데 이렇게 컸구나 하면서 친손자라도 만난것처럼 기뻐하였다.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은 소갈비국도 끓이고 청어도 구워서 자기 집 아이들한테는 하나도 먹이지 않고 나한테만 주었다. 밤에는 새로 꾸민 이불도 내놓았다. 주인들이 그때 정말 나를 위해 있는 성의를 다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강계우편국에 가서 아버지가 일러준대로 팔도구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전보를 쳤다. 전보문 한자에 3전이였는데 여섯자가 넘으면 1전씩 더 받는다고 하여 전보용지에 《강계무사도착》이라는 여섯글자를 써넣었다. 이튿날 객주집주인은 나를 차에 태워보내려고 자동차사업소에 갔다왔다. 그는 차고장으로 열흘쯤 기다려야 할것 같다면서 신청은 해놓았으니 친척집에 온셈치고 그동안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진정이 고마왔지만 빨리 가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짚신 두컬레를 주면서 개고개쪽으로 가는 달구지군까지 한사람 물색하여 붙여주는것이였다. 개천역앞에 있던 서선려관 주인도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였다. 나는 그 려관에 들자 15전짜리 밥을 청하였다. 려관밥도 등급이 있었는데 이 려관에서는 15전짜리가 제일 눅거리였다. 주인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 50전짜리 밥을 주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50전짜리는 못먹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돈이 없어도 그냥 먹으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려관에서는 손님들에게 포단과 모포 두장씩을 내주고 50전정도 받았다. 수중에 있는 로비를 계산해보니 모포 두장씩이나 덮고 호강할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나는 모포를 한장만 달라고 하였다. 주인은 이번에도 다른 손님들이 다 포단을 깔고 모포 두장씩 덮고 자는데 너 혼자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돈을 안내도 되니 마음놓고 받으라고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가 되여 어렵게 살았지만 조상전래의 인정과 미풍량속만은 깨끗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금세기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무전려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집이나 마을에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돈을 내지 않아도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는것이 조선의 풍속이였다. 이런 풍속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도 몹시 부러워하였다. 나는 천리길을 걸으면서 조선민족이 참으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서선려관 주인도 강계객주집 주인이나 중강려인숙 주인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였다. 여덟살적에 중강으로 들어갈 때에도 느낀바이지만 아버지한테는 이처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이 어디에 가나 있었다. 나는 우리 일가를 친혈육처럼 맞이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저 많은 친구들을 언제 다 사귀였을가, 저런 동지들을 얻느라고 걸음인들 얼마나 많이 걸었을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사방에 친구들이 있으니 객지에 나서도 아버지는 이모저모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도 그들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 천리길을 걸을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4년전까지 등잔불을 켜고 살던 강계시내에 전등불이 환한것이였다. 강계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였지만 나는 왜색이 짙어가는 거리풍경을 보고 쓸쓸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조국에 나를 내보내면서 조선을 알아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한 아버지의 참뜻이 마음속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였다. 나는 그 뜻을 되새기면서 비운에 잠긴 조국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천리길이 조국을 알게 하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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