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1 ] 선우학원,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 조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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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0-12-30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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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찾아서
파산문제가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됐다. 내가 계획한 조국방문의 날은 다가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국에 입국하는 문제가 뜻밖에 지연됐다. 나는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 미군에 입대했었기 때문에 시민권을 얻게 됐다. 1944년 이었다. 그 당시 동양인으로서는 미국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없을 때다. 그것이 미국법이었다. 유럽 이민은 문제없이 미국의 시민이 됐으나 유색인종에게는 허락치 않았다. 미국시민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미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내게 시민권을 준다고 할 때 나는 거절했다. 나는 전쟁 후 독립된 한국에 갈 사람인데 왜 미국시민이 되겠는가고 반발 했다. 그러나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시민이 된 것이다. 군대에서는 개인의 의견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거기에는 개인의 자유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모든 것이 명령제이다. 자는 것, 먹는 것, 일하는 것, 노는 것, 훈련받는 것, 안받는 것 등등 하나에서 열까지 명령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은 미국 육군이 시민권있는 한국이 필요 했기 대문이다. 나를 위해서 시민권을 준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이용가치 때문 이었다. 나도 짐작을 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하여튼 그런 사정으로 미국시민이 된것이다. 그런데 미국여권을 가지고 한국에 가야할 형편이었다. 내가 미국에 올 때는 일본여권을 가지고 왔었고 그 여권은 이미 불태워 없어 진지 오래다. 미국여권을 가지고 조국에 가는데 한국의 비자가 요구됐다. 나는 총영사관에 찾아가서 비자신청서에 쓰라는 대로 기록했다. 한국에 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기재하라는 것이다. 반감이 생겼다. 22년만에 내나라에 가는데 목적이 무엇이고 구구한 설명이 왜 필요한가 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담당영사인 박 영사에게 말했다. “목적을 꼭 기록해야 됩니까?”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요? 나는 한국에 가서 살 생각이야요.”라고 쉽게 말했다. “선생님같은 분은 목적이 분명해야 비자가 쉽게 나옵니다.”하고 박 영사 는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오. 비자는 당신이 도장찍으면 발급된다고 하는데요. 미국상 인들은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준다고 하던데요.” 하면서 박 영사에게 기분 나쁘다는 뜻을 표시했다. 사실 박 영사는 주영한 총영사 밑에서 여러해 근무 한 이승만 정권의 관리였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고 주영한 총영사는 숨어 살던 때다. 왜 박 영사만이 남았을까 하고 의심까지 했다. 그런데 목적이 분명 하기 전에는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다가 조선일보의 홍종인(그당시 조선일보사 회장)씨에게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홍종인씨도 미국 방문시 여러번 만나서 알게된 선배 였다. 편지회답이 왔다. 홍종인씨의 제의는 한국방문 목적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라고 하면 어떤가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비자신청서에 그대로 썼다. 한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박 영사에게 독촉했다. “본부에서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매번 대답을 반복했다. “왜 본부까지 가야합니까? 당신 이 도장을 찍으면 되지 않소.”하고 항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난처해져서 또다시 서울에 연락했다. 홍종인씨는 나의 선배 친구인 서울 새문안 장로교회의 강신명 목사와 함게 외무부 정일형 장관을 찾아갔다. 그후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도 책임지고 내 비자신청서에 도장을 찍지않고 장관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거기서 홍종인씨와 강신명 목사가 나의 신원보증을 했고 정일형 장관이 비자를 발급케 했다. 내나라에 방문하는 것이 공산국에 가기보다 몇배 어려웠던 것을 생각하면서 한국관료제됴의 문제점을 우려케됐다. 하여튼 그 어려운 비자를 받아가지고 서울에 도착했다. 이승만 독재를 반대한 이유로 부산대학의 초빙을 거절한 독재정권을 반대한 나에게 비자발급을 거절한 장면 정권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한지 이틀 후였다. 홍종인씨는 나를 데리고 외무부 정일형 장관을 방문했다. 인사를 교환하고 홍종인씨는 정장관에게 “글쎄 말이야, 일을 제대로 해. 반독재인사에게 민주정권이 비자를 발급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거요. 상식적으로 판단해요.” 하면서 홍종인 스타일로 말했다. 나는 좀 거북한 감이 있었다. 상대방은 장관인데 아무리 친지라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그후 알게됐지만, 홍종인씨는 솔직한 분으로 누구에게나 ⌜내 쏘는⌟스타일로 알려진 분이었다. 정일형 장관은 미안하게 됐다면서 “자, 내가 냉면 살테니 선우박사 모시고 함께 나갑시다.”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우리 셋이⌜강서냉면옥⌟이란 국수집으로 찾아갔다. 이렇게 사귀기 시작한 정일형 박사와의 관계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얼마후에 정 박사는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정박사의 아들 대철군을 미국에 유학시켜서 사람 구실하게 “아들처럼 키워주시요.”하고 부탁했다. 대철군은 내가 있는 미조리 ⌜센트런메스디스트⌟대학에서 잠시 공부했고, 미조리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고 귀국하여 국회의원으로 애국사업을 훌륭히 하면서 부친의 대를 잇고있다. 물론 모친되시는 이태영 박사가 결사적으로 돕기도 했지만 정대철 의원의 업적은 자기의 실력과 성실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내가 서울에 가서 명목으로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있었으나 나는 논설위원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때 조선일보의 주필은 부환역씨였다. 홍종인씨와 부주필의 관계가 미묘했고, 홍종인씨가 데려온 내가 부주필의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한국사회의 구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 무엇을 해서 생활을 할 것인가가 시급한 문제였다. 우선 거처문제 를 해결해야 했다. 남대문 앞에 있는 아파트를 마련하고 마산을 방문중인 장모님을 청했다. 김재준 목사의 소개로 한양대학교 김연준 총장을 찾아갔다. 김총장은 인터뷰가 끝나자 한양대학 정치학과장으로 오라고 권했다. 내게는 과분한 위치였다. 그 이야기를 홍종인씨에게 전했다. “가만 좀 기다리세요. 그런 학교에 가서 그런 자와 관계를 시작하면 장래 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면서 한양대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나의 마음은 조급했다. 당장에 수입이 있어야겠는데 이것저것 선택하다가 시간만 보냈을 뿐 하나도 잡지 못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이때 강신명 목사는 연대와 교섭했다. 강목사는 연대 이사장이었다. 연대에서는 정외고에 교섭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김명회, 서석순, 이극찬 세 교수가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선생님은 하도 유명하신 분이 되서 우리과에 모시기가 어려운데요.”하고 냉조섞인 말을 했다.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교수회에서 반대하면 총장도 교무처장도 할 도리가 없던 때이다. 그런 사실을 철학부의 정석회 교수와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우리 철학부에 오십시요.” 하고 권했다. “철학부에 자리가 있습니까?” “내 과목을 드리죠. 선우박사가 원하시는대로 가르치세요. 사회∙정치∙철학 또는 플라톤원서 등 마음대로.”라 고 하셨다. “플라톤 원서는 제가 자신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과에서 영어강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정도로 시작만해도 다행이죠.”하면서 감사했다. 정기적인 월수입이 결정되고 월남한 친척들을 만났고 동창생들을 하나씩 둘씩 찾아보면서 서울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중학시절의 동창인 김화용, 김 성환(한은총재), 정규장, 김길선, 박윤용 등을 반갑게 해후했다. 김길선이는 신문을 보고 이리에서 서울로 달려왔다. 중앙대학에서 법과를 졸업한 영리한 친구인데 한국전쟁시 인민군과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분단된 민족의 비극이었다. 박윤옥은 동경에서 독립운동하던 동지들은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모두 체포감금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석방되지 못하고 고생한 이야기를 전했다. 나도 일본에 남아 있었으면 감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그중에는 석방을 기다리지 못하고 옥사한 동지들도 있었다. 22년전 이야기였으나 방금 일어난 기분 이었다. 항일투쟁전선에서 희생은 너무 많았다. 서울거리에 나다니는 친일파 인사들의 꼴을 볼 때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인가 이승만 독재 정권은 그들과 연대관계를 맺고 애국자들을 제거하지 않았는가? 가슴아픈 사연이었다. 서울생활에서 자유롭게 의사교환하면서 사귈 수 있는 친구를 찾지 못한 것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옛날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동창생들과 만나서 즐기는 정도는 좋았지만 그 이상 진전이 없었고 새로 사귀는 친구와의 관계는 서로 마음을 주기가 어렵고 인간관계가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연대에서 사귄 한교수와는 어느정도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그가 중국에서 교육을 받은 관계때문인 듯싶었다. 하루는 연대 뒷산을 산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교수는 내게 충고했다. “선우 박사, 한국사정을 너무나 모르시는 것 같아. 미국에서 왔으면 출근하실때 자가용을 타고 와야된다고. 누가 교수용 버스타고 출근해요. 우리같이 없는 교수들이 타는 것인데.” 했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교수, 그게 무슨 이야기요. 내가 조국에 온 것은 여기서 한국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봉사하겠다는 결심인데 나혼자 호화롭게 자가용을 몰고다니면 나는 이 사회에서 소외될 겁니다.”라고 반박했다. “그것이 문제요. 선우 박사가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 한국교수들은 선우 교수를 더 높이 대우하는 거요. 소외가 아니고 모두 벌떼같이 붙게 되는거요. 이 사회의 성격을 바로 인식해야 선우 교수가 능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거요. 미국식 평민사고방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사회인 걸 아셔야 되요. 한국사회는 아직도 봉건적이요. 봉건적 사회는 계급이 있는거요. 상하가 구별되는 거요. 미국식으로 민주적으로 해 보시겠다 고 하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정외과에서 왜 선우박사를 채용 하지 않는지 알아요? 김명희, 서석순, 이국찬이란 자들이 반대하기 때문이오. 선우교수는 실력가이신데 자기과에 들어오면 눌리기 때문이오. 불안하겠지요. 그러니 그들이 있는 한 선우 교수는 연대 정외과에 취직될 수 없어요. 그것은 꼭 그대로입니다. 기대를 걸 필요가 없어요. 안됩니다.”라고 강조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교수자리 하나뿐이요. 그러면 나는 만족할거요. 내가 원하는 것은 젊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거요.”했다. “교수자리도 얻는 방법이 있어요. 우선 선우박사는 교수보다도 연대의 부총장 자리가 좋음직해요. 얼마전에 김명선 부총장이 은퇴하고 공석중입니 다. 내가 책임지고 그 자리를 이야기해 드리죠. 더군다나 연대 이사장 강신명 목사와 친근하시니까 더 좋구요. 내가 아는 이사들과 교섭할 수 있어요. 부 총장자리에 오르면 선우 교수가 하고 싶은 교수직도 생길 것입니다. 그 길이 빠른 길입니다. “라고 의외의 제의를 했다. 나는 당황했다. “나는 무슨 장이란 감투를 쓰고 싶지도 않고 한 교수 말씀대로 이 사회를 알지도 못하면서 중대한 자리를 가진다면 사람들이 웃을거요. 한 교수가 내게 말했듯이 백낙준 총장이 김하태 박사를 후계자로 내세웠다가 4∙19가 일어 나면서 학생들이 두분의 집에 가서 데모했다고 했지않아요. 그런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아요.”했다. 사실은 백낙준 박사 집에 초대를 받고 점심식사를 할 때에 갑자기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집의 일꾼보고에 의하면 변소를 청소하는 구루마가 그 집 앞에다 더러운 것을 쏟아놓았기 때문이라 했다. 좋은 주택을 가지고 호화롭게 사는 것이 미웠던 모양이다. 그러니깐 손님들을 대접할 때 냄새를 피웠던 것이다. 미국에서 온지가 1년도 되기전에 연대 부총장이 됐다하면 나를 미워하고 반대할 사람이 좋아하고 축하할 사람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한 교수, 내 걱정을 해주니 고마워요. 그러나 나는 부총장의 자격도 없고 원하지도 안하요. 교수자리 하나만 부탁해요.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과 지내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젊은 학생들은 우리 민족의 희망입니다. 그들이 배우고 자라서 이 민족을 바로 이끌도록 지도하는 것 그 이상 더 중요한 사업이 없어 요.”했다. “나도 동감이요. 그런데 선우 박사는 그 좋은 공부를 해가지고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워요. 전날 예배당에서 선우 박사가 말씀하실 때, 그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조용하게 말을 잘 들은 적이 없어요. 왜 그랬겠 습니까. 선우 박사가 하시는 말씀이 그들 귀에 새롭기 때문이오. 보통 지나가는 목사들의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요. 학생들은 새로운 지식을 갈망해요. 그들에게 주어야할 지식이 보통교수들과 목사들에게는 없어요. 나도 늘 괴로워요. 마음이 답답해요. 이 나라의 지성인들이 왜 이렇게 침체속에 빠졌는가 말이오. 새 것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새 것을 가진 선생님 같은 분은 배척 하고, 이 사회의 앞날이 어두워요. 장면정권도 한심하지요. 어디 지도자들이 있습니까? 두고보세요. 멀지않아 큰 변고가 일어납니다. 이 상태가 오래갈 수 없어요.”하고 근심스러워했다. 나도 한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걱정스러웠다. 과연 병든 한국사회인가? 한국에서 무엇을 해야할까? 하는 생각은 잠시도 잊을 수 없었다. 정동 교회에서 예장감리교연합으로 ⌜공산주의와 기독교⌟란 제목으로 대중강연을 일주간 진행할 때 예장측의 대표강사로 누가 나를 보내기로 했다. 조국에서의 처녀 강연인만큼 조심스러웠다. 기장측의 강원용 목사가 이틀 저녁 열변을 토했고 감리교측의 손명걸 목사 그리고 내가 말을 하게 됐다. 나의 제목은⌜변증법유물론과 기독교 유심론⌟이란 제목이었다. 대중강연의 제목 으로는 너무 학술적인 편이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사상과 기독교정신의 공통정신에 대한 두시간 동안의 지루한 강연이었다. 다시는 그런 제목으로 대중강연을 하지 않기로 했다. 강연이 끝난 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인사했다. 그러나 강연의 내용이 좋았다고 치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오랫동안 미국에 사신 분이 한국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한다는 치하였다. 강신명 목사부인께서는 “선우 박사님은 애국자이십니다. 우리 말을 그대로 하시니 놀랬습니다.”하고 치하했다. 그 의미를 이해했다.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 강연회가 있은 후였다. 젊은 목사 10여명이 매 월요일 오후 두시부터 두시간 동안 공산주의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교계의 젊은 일꾼들과 알게 될 수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10여명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40여 명으로 증가했다. 목사 외 일반평신도들도 오고싶다고 해서 주최측에서 개방했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서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내게는 고마웠다. 이 세미나는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중단됐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뉴스를 조선일보사에서 듣고 편집국장인 선우 휘씨에게 물었다. “누가 주동자요?” 주동자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신문사에서 그정도의 정보도 없는가 하고 비난했다. 편집장은 “박정희란 자가 배후세력인 듯싶지만 알 수 없고 만일 박정희가 배후세력이라면 문제가 심각 하다.”고 했다. 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우 휘는 “박정희는 여순 반란에 관련된 사건에 인물이니까요.” 했다. 여순 바난사건에 관련됐었으면 사회 주의자일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군사쿠데타는 진보적인 소망이 있음직했다. 물론 박정희가 여순 반란사건에서 배신자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정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장면총리의 거취 문제에 있었다. 나는 선우 종원에게 장면총리가 무서워서 숨어있다면 정신병자다. 비상시에 자기만 살겠다고 처신을 그렇게 하면 됩니까?”하고 비난했다. “나도 장 총리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선우 종원은 난처해 했다. 군사쿠데타 배후에 미국의 박정희가 구데타의 주동세력이고 진보적 군인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 후 나는 정부의 기관지 ⌜코리아 헤럴드⌟(대한공론사)의 주필로 군사정권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한공론사 사장인 선우 지이는 “내가 이 신문의 책임자이지만 선우 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하면서 부탁했다. 영자 신문의 역할은 미국과 외국을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비롯해서 정책방침이 민중을 위한데 있다란 사설을 쓰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설이 서울 외교촌에 물의를 빚게됐다. 영국 대사관측에서 나를 찾아왔다. 목적은 분명하지 않았으나 사설의 내용에 불만을 가진 듯 싶었다. 미국 대사관에서는 연대 교수 원한경 박사(Underwood 선교사)가 나에게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의심스러웠던가? 분명치 않았다.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않는 주필인 모양이었다. 미국대사관은 미국에 조회했다. 미국에서는 FBI의 조사보고서 한뭉치를 서울 미국대사관으로 보냈다. 미국대사관은 군사정권을⌜두고보자⌟란 태도를 가지고 당분간 관망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장도영씨가 군사위원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실권을 박정희씨가 쥐고 있다는 언론계에서는 알고 있었다. 박정희의 초대로 언론인들은 매주 정기적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종필 부장도 늘 동참했었다. 박정희가 제1인자로 등장하면서 내부에는 인사변동이 있었다. 대한 공론사 사장으로 이후락씨가 임명됐다. 이후락씨는 주미한국대사관에서 해군 촉탁으로 근무했다. 그당시 내가 미국에서 반 이승만 독재운동에 주력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후락 사장에게 사표를 냈다. 그때 군정에서는 ⌜문공부 고문⌟으로 근무할 것을 건의했고 나는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대한공론사에서 주필을 하면서도 연대에의 강의는 계속했다. 주필직은 임시로 교수직은 영구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 출근할떼 연대 버스를 계속 이용했다. 주필직이 신문에 보도된 후부터는 젊은 교수들이 좌석을 양보해 줬다. 그중에는 함병춘이도 있었다. 고맙다기보다 불쾌했다. 주필이 되자 일반적으로 내게 대하는 예우가 많이 바꿔진 것을 느꼈다. 한태동 교수의 말이 기억났다. 관료주의 사상이 뿌리가 너무 깊다고 생각했다. 수세기를 두고 자라난 봉건주의사상이 빨리 변화될리는 없으나 지루한 감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박정희 군정에 대해서 실망했고, 진보적이란 생각은 큰 착오였다. 그러면서도 박정희씨가 대통령을 두번하고 제3선을 발표할 때까지는 나는 박정권을 반대하지 않았다. 1965년의 한일조약은 반대했지만, 처음 경제발전에 대한 의욕에 관해서 비난하기보다는 해야할 건설에 착수했다고 믿고 한국에 자주 내왕했었다. 경제발전의 내용을 검토한 후에야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을 깨닫게 됐다. 주필로 있을 때이다. 군정측에서 미국에 친선단을 보내야겠다며 인선을 부탁했다. 그때 나는 미국에 가면 우선 영어가 통해야겠고 미국정부측에서 신임하는 인사라야겠다고 생각하고 세분을 추천했다. 백낙준 박사, 한경직 목사, 동아일보사의 최두선 사장이었다. 백 박사는 군인들이 거절했다. 백 박사가 참의원 의장때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중인 자기 아들을 빼꼈다고 불평했다. 한경직 목사는 나의 중학교 은사였다. 처음 서울에 가자 한 목사는 나를 우이동 식아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그자리에는 김재준 목사와 김성락 박사도 동참했었다. 장로교가 분리된 후 한 목사와 김재준 목사가 한자리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중간에서 두 목사의 옛 정을 다시 느끼게 해준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수년 후 김재준 목사가 미국에서 인권운동에 참여했을 때 한경직 목사가 뉴욕 브랑즈 장로교회(현재 유태영 목사)에서 설교를 했다. 그 기회에 김재준 목사, 이승만 목사 등 7,8명이 백의상제 두루마기를 걸치고 설교하고 있는데 앞줄에서 기립하여 한 목사를 당황케 한일도 했다. 한 목사가 김재준 목사를 배신했다는 생각은 계속했었다. 사석에서 식사를 대접 하면서도, 영락교회의 청년회에서 나를 강사로 초빙했을때 한 목사는 교회 사용을 허락치 않았다. 결국은 교육관에서 집회를 가진 것이다. 나를 제일 먼저 학생들에게 소개한 분은 김정준 박사였다. 그가 한국신학 대학 학장으로 봉직할 때 예배당에 초대해 주었다. 평양중학 시절부터 친구였고 구약성서의 권위자이며 문학에 취미가 대단했다. 서울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분이 있었다. 양학만씨 였다. 그분은 내가 도쿄에서 미국유학 떠날 때 황재경 목사의 소개로 나의 재정보증인이 되주었다. 그때 양씨는 와세다대학 재학중이었고 광산에 취미를 가진 분이었다. 그분이 일본에 살지만 광산관계로 서울에 자주 내왕한다고 했고 반갑게 만났다. 그후 일본에 들러서 그분 댁에 여러 번 머무르면서 가정의 고민을 듣게 됐다. 아들 빌리가 UCLA에서 공부하는데 수업료 보낼 돈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후 아들의 수업료를 내가 보내주었다. 양씨와 그의 부인 송인애씨가 도쿄에서 한국식당을 경영하게 되면서 생활문제는 해결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들을 돕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일본 증권을 팔기로 했다. 증권의 시세가 불황이어서 반이상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팔기로 했다. 미화 4만2천달러가 됐다. 그 돈으로 식당을 시작할 수 있었고 삼척철광도 개발할 수 있었다. 철광은 장기적 으로 투자해야함으로 얼마 후 팔게 됐다. 하지만 식당은 가정을 꾸려나가는데 도움이 됐다. 나도 그 식당에서 냉면을 여러 번 먹었다. 부인의 요리 솜씨가 좋았다. 그런데 내가 빌려준 돈은 받지못했다. 나의 총재산이었다.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할 수 없이 그돈을 내게 돌려주기 싫으면 공동기부하자고 하면서 이태영 박사가 시작한 서울여성법률센터에 기부할 생각으로 이태영 박사에게 말했다. 이 박사가 도쿄에 들러서⌜선우박사의 부탁⌟이라면서 기부하라고 말했다. 양학만 내외는 거절했다. 내가 지원한 자본으로 아들과 딸을 가르 치고 생활이 윤택해졌는데도 말이다. 참으로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었다. 나의 어리석고 무지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감은 물론,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야했다. 아내가 입원했다. 외무성에 가서 출국허가를 요구했다. 웬일인가? 책임 영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입국사증을 내주지 않고 애먹인 박 영사가 아닌가?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이야기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소릴 것이다. 출국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2주 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가고 싶던 조국! 파산을 선포하면서도 가야했던 조국이었다. 나는 조국을 위해서, 내 몸을 바치면서 봉사하기로 이미 작정했었다. 그러나 조국에는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홍종인씨, 강신명 목사는 나를 위해서 많이 노력했었다. 친척들은 기대가 컸다. 동창생들은 나의 행동을 주목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고 실망만 안겨주고 조국을 떠나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내 가족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애들과 아내를 위해서 미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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