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3 ] 선우학원,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 - 자녀교육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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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0-12-30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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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문제
1965년대 미국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 이민이 해마다 1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한국교포의 증가는 교포사회 구조의 변화로 시작하여 이민 생활의 전모를 변하게 했다. 옛날 초기이민 생활을 경험한 나에게는 상당한 자극이 됐다. 1940년 시애틀에 자리잡고 유일한 한인가족으로 고독하게 지내다가 해방이 되면서 한인의 수가 조금씩 증가한 때의 흐뭇했던 생각이 그리웠다. 오고 가는 한인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시애틀 시청에서는 코리안이라면 으례히 우리 집으로 보냈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60년대에 이민이 홍수같이 밀려들면서 거리에서 한국말을 듣게 되면 슬그머니 피할 때도 종종 있었다. 전 같으면 붙잡고 통사정을 했을 텐데… 1963년부터 한인이 없는 미조리의 농촌도시에서 교수생활을 고독하게 시작한 이유로 정국의 교육문제를 지적했다. 사실 지난 생활에 있어서 나 자신의 의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가족을 희생시켰다. 나는 그것을 애국적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다. 내가 가족을 떠나서 프라하에 약2년간 유학생활을 한 것이나 사업을 중단하고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 가서 약 1년을 지낸 것들이 모두 나를 위주로 한 행동이었고 가족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서 긴 토론을 벌일 수도 있다. 하여튼 내가 집을 자주 떠난 관계로 정국의 학교 성적이 문제였고 아내는 두 아이들을 혼자서 다룰 수 없을 형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셔야 한다. 서울에 있는 내게 전보가 왔던 것이다. 애국애족운동가는 가족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항상 들리 는 이야기다. 내가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내가 존경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가족을 방문한 후 나는 괴로웠다. 훌륭한 애국자 남편, 아버지에 대해서 부인은 비난했고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일체 말이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른다.”란 태도였다. 즉 아버지는 무책임한 사람이란 것이었다. 어머니를 고생시킨다는 것이었다. 요즘 장녀인 수잔이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퍽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애국운동, 사회운동에 참여해도 가족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내 조부님은 나를 만나는 자리에서 “무엇보다도 나는 네 어머니에게 감사 한다. 네 어머니가 훌륭하다.”고 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에게 네 어머니에게 고마워 한다고 말했다. 초기 이민생활 무렵에 새벽부터 밤까지 농장에서 노동하게 되니 가족들과 함께 지낼 여유가 없었다. 그 당시 이민의 직업선택은 취미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노동해야 했다. 자녀들도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불평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장서해서는 이해도 했고, 협조도 했으나 어린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60년대 이후 이민한 교포들에게 이민 목적을 물었을 때 반 이상이 자녀 교육문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현실에 부닥치면 초기에 자리잡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자녀교육은 뒤로 미뤄놓고 장시간 노동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성장하는 어린이들은 무시당했고 현재 교포사회의 청소년 문제는 급증되고 있다. 특히 약물 중독자, 그리고 깡패와 관련되는 범죄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생활의 우선권이 혼돈된 셈이다. 이런 문제를 감시하면서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 즉,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미국 중부에 정착키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정착한 곳이라 이제는 고향과 같이 사랑스러웠고, 대학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사귄 백인 친구들과의 교제가 동포와 다름없는 정든 사귐이 됐다. 그러기 때문에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농촌에서 고독한 생활을 즐기는 속사정은 말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나 자신도 모르게 잔재한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교포사회 문제를 의식적으로 연구하고 운동에 참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포들을 만나는 순간과 떠날 때의 기분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더구나 한인교회에 관련해서 그렇다. 나는 초기 이민교회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즉, 애국적이고 상호부조하고 교포들과 함께 괴로워했고 즐긴 경험이 있다. 요즘 교회에서 보게 되는 불신이 없었다. 초기 이민교회는 한인사회의 센터였다. 가서 만나면 반가웠다. 가서 위안을 받고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교회는 이민인들이 한 곳에 모여서 동고동락하는 곳으로 믿었다. 일주일 노동으로 육신이 괴롭고 밑바닥 위치에서 정신적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가 교회에 나가면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하고 대우 받게 될 때 피곤함이 풀어지던 기분은 예수가 가난한 자들에게 전도를 집중하던 정신을 체험하는 듯 싶었다. 자연히 동포들 사이에 불신이 없어지고 피해의식이 사라졌다. 요즘 한인이민교회도 그런 역할을 하는지 의심스럽다. 요즘의 장로와 집사도 미국사회의 밑바닥에서 노동하는 근로자들인지 아니면 한국에서 부정축재하고 미국으로 피신한 자들인지 묻게 된다. 60년대 후반기부터 성장한 미국교포사회가 왜 불신 사회로 변하고 있는가 말이다. 나는 초기이민 시대와 비교해서 보기 때문에 그렇다고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믿게 됐다. 그것은 내가 양학만 내외에게 일생 동안 저축한 돈을 사기 당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 사건은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미주교포사회가 불신사회로 돼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사회는 동서를 막론하고 돈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상호부조이니 사랑이니를 듣고 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교회를 예로 들기 때문이다. 옛날 로스앤젤레스시에 장로교회나 감리교회가 있을 때는 서로 시비도 없었고 교인들끼리 비난한 적이 없다. 물론 장로교의 김성락 목사나 감리교의 황사용 목사가 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의 회원인 것이 도움이 됐음직도 하다. 하여튼 두 교회가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오늘의 로스앤젤레스시에는 교회가 3백 개나 있다. 수가 많고 적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교인은 물론이고 목사들 중에서도 저마다 믿음의 정도나 그들의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종교 같은 예수를 믿고 같이 천당 갈 생각을 하지만 자기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인들을 지도하는데도 가지각색이다. 즉 연합이 가능치 않다. 분열되고 있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한인교회가 60년대 후반기나 90년대 전반기나 똑같이 이합집산이 무성 하다. 어느 지역에서나 한인회를 중심으로 싸우지 않는 곳이 없고 한인교회가 분열되지 않은 안정된 곳이 없다. 마음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생활의 스타일이 다르고 이념이 달라서 분열하는 것은 자유세계 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분열 의 정도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도 서로 갈라질 때 양쪽에서 모함과 욕지 거리를 하는 행위들이다. 그 행동이야말로 크리스찬이란 자들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세가 아닐 수 없다. 원수라고 생각해서 서로 사랑할 마음까지는 없다 해도 그 자체가 벌써 비 성서적이지만 왜 상대자를 비난 하고 자기편만이 정당하다고 우겨대는가 말이다. 때때로는 그것도 부족 해서 미국법정에 쫓아가서 선악의 판단을 묻게 되기도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교인답지 못한 행동이다. 나는 한국내의 교회사정도 미국교포 사회의 이민교회와 비슷한 지는 알 수 없다. 비교연구해 볼만하다. 또, 이런 갈등과 불만이 미국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인지 알 수 없다. 물론 미국교계에도 갈등이 많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백 수십 개의 교파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에 있는 것이다. 미국사회는 이런 것을 자유의 심볼로 보기 도 한다. 그러나 내가 미국 감리교에서 수십 년을 지내면서 전도사의 직분도 했고 여러 가지의 직분을 해봤지만 한인이민 교회 내에서 보게 되는 모함과 욕질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1965년 미국 이민 수정법안이 통과, 발효되자 인종차별 쿼터제가 폐지 되고 해마다 1만 명 이상 미국으로 이민했다. 현재 교포인구가 1백만이 초과된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 한국이민은 큰 도시 중심으로 집중됐다. 서부에는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동부에는 뉴욕과 워싱턴, 중부에는 시카고, 남부에는 달라스와 휴스턴등이다. 그외 필라델피아, 보스톤, 아틀란타, 세인트루이스, 캔사스시티, 라스베가스 시애틀 등 웬만한 도시 에는 한국교포가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이 어디보다도 가장 많이 운집한 중심이다. 올림픽가 동으로는 버몬트, 서쪽 으로는 웨스턴가를 중심으로 문자 그대로 한인촌을 이룩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상점이 한인촌에 설비돼 있다. 30년도 되기 전에 이 정도로 한인촌을 이룩했다는 것은 한인이 근면하고, 영리하고, 끈기 있게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비슷한 예는 뉴욕의 프러싱이나 보로드웨이의 야채 가게 또 시카고의 로렌스가의 한인촌의 경우도 비슷한 것이라 하겠다. 한인들이 미국이민사회에서 비교적 빨리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미국에서 널리 알려졌다. 사실은 그것이 이유가 되어 금번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피해자로 나타나고 있다. 악착스럽게 장사를 해야 지탱할 수 있는 미국상계에서 교포이민인들은 장시간 노동을 희생적으로 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복합체 사회에서 살고 장사하면서 상대방의 심리와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일에만 정신을 쏟다 보니 배워서 알아야 했던 이 나라에 대한 지식을 배우지 못했고 장사에만 몰두 했던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미국에 이민 오기 전에 한 두 달 정도 교육을 받아서 기술을 배워가지고 온 교포들도 많다. 미국에 와서 취직할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기술로는 취직이 될 수 없어 고생하게 된다. 더구나 간호원 케이스가 그렇다. 병원에서 간호원 보조로 일하는 교포들이 많고 정식간호원 수가 적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국에서 간호원 면허를 받기 위해서는 어려운 공부를 해서 시험에 패스해야 한다. 그 시험이 상당히 어려운 시험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이민 올 때 많은 자본을 가지고 와서 수백만 달러 주고 빌딩을 산다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이후락의 케이스도 그런 종류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민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서 중류 이하의 생활을 하던 가족들이다. 그들이 4, 5년간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하고, 미국연방정부의 ⌜융자 론⌟을 몇 만 달러 얻으면 적은 장사에 착수할 수 있다. 아직도 대부분의 기업은 식당, 잡화상, 떡집, 식품점, 세탁, 정유소, 인쇄소, 호텔, 이발소, 복덕방, 중고자동차 등에 국한되어 있으나 초기시대에 비교하면 상당수가 늘고 있다. 은행이나 신문사 등은 물론 한국의 지사임으로 이민사업이라 할 수 없다. 슈퍼마켓이나 큰 호텔의 경우도 대부분은 본국과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상은 대체로 노력의 대가로 성공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실패한 경우도 적지 않다. 나 자신도 사업에 실패한 사람의 하나이다. 왜 실패하는가? 자본이 부족한 경우도 많고 경험이 부족한 경우도 많지만 이민 올 때나 와서나 준비가 부족한 것이 큰 문제이다. 자본의 준비도 있어야지만 미국에서 장사하면서 말도 못하고 미국의 사업에 대한 충분한 상식도 없이 착수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간호원의 경우를 지적했지만 어떤 경우에서도 이야기는 비슷한 것이다. 준비가 없으면 이민생활의 시작부터 불안하고 괴로운 것이다. 나는 교포들의 사업과 다른 민족들의 사업을 항상 비교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한국이민의 음식점을 찾아 다니면서 알게 되는 것은 손님이 거의 100%가 한인이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한식음식점이 1960년 초기에 약60개 있었고 지금은 100개 이상이라 한다. 그런데 백인손님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은 아마⌜우래옥⌟하나 정도가 아닌가 싶다. 요즘에는 서라벌에서 외국인들의 얼굴을 종종 보게 됐지만. 우리의 고유한 음식은 세계 어느 나라 요리와도 경쟁할 수 있는 음식이 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은 언젠가 파리의 국제요리 경연 대회에서 북한이 3등한 적이 있다. 프랑스가 1등, 이태리가 2등 했다. 중국 요리보다도 한국요리가 우수했던 것이다. 우리 요리사들은 한국요리를 미국시장에서 중국사람들같이 대중화할 수는 없을까? 한국식당들이 경쟁도 심하고 따라서 사업도 발전되지 않고 희망이 없을 때 왜 새 것을 구상해서 미국손님을 상대로 할 생각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 난다. 만일 언어장벽 때문이라면 야간학교에 나가서 배울 수 있고 자녀들한테도 배울 수 있음 직 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신선희씨는 60세에 하이스쿨 졸업장을 받았다 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칼 신문에 난 적이 있다. 기자가 신선희씨에게 묻기를 “신부인께서는 60세인데 지금 하이스쿨 졸업장을 받아 뭐하실라구요? 왜 젊었을 때 공부 안 했습니까?”했을 때 신선희씨는 대답하기를 “젊었을 때 이민생활에 시간이 없었어요. 나는 4남 2녀의 자식이 있는데 우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선결문제였어요. 우리 아이들은 지금 좋은 직장에서 근무하고 가정생활을 즐깁니다.”했다. 우리의 이민생활을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한 초기이민인의 대표적인 이야기의 한 예이다. 신선희씨는 대한국민회 회원, 흥사단 단원, 대한애국부인회 회원, 샌프란시스코 감리교 교인으로 교포사회에 충실히 봉사했다. 요즘 많이 볼 수 있는 엘리트 대학에서 공부하고 백인사회에 합류해서 교포사회를 회피하는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계리사들의 사고방식과는 엄청난 차이가 보인다. 초대이민들은 집단정신이 강했다. 미국의 개인주의 사상과 싸우면서 민족정신을 간직했다. 사람이 자기의 정신과 영혼을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주말에 골프장에서 혼자 즐기고 자기 주위에 누가 무엇을 하든 잘 살건 못 살건 상관치 않는 무관심한 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구나 이민생활에서 말이다. 미국사회는 개인주의 사회이지만 나 혼자 벌어서 고독한 생활을 하기는 어려운 곳이다. 이 사회에서야말로 교포가 단합해 자기의 이권을 보장하고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사회이다. 예를 들면 일본계 미국시민 동맹이 제2차 세계대전시 서부지역에서 일본인들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강제수용소에 모아놓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포로로 취급한 데 대해서 미국헌법에 위반인 것을 지적하여 근 반세기 동안 정치적 투쟁을 하여 승리했고 일인당 2만 달러를 받고 정식사과까지 받아낸 케이스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시 시책의 잘못을 인정하고 늦게나마 수정한 셈이다. 이런 투쟁은 일본계 미국 시민들의 단합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교포는 66년도 이후부터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여 100만을 초과했고, 30년의 역사를 가지고도 한인교포 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기관 이 없다. 이번 로스앤젤레스 폭동사건의 비극을 당하면서도 우리교포들의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위한 투쟁전선에서 단일적인 대변자를 찾지 못했다. 한국의 대기업체는 미국시장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100만의 교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서울에서 지사장과 사원을 파견하여 알지 못하는 시장 사정을 새로 배워야 하는 초보단계에서 시작한다. 그 시간의 낭비를 왜 생각지 못할까? 왜 교포사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상인들과 연결을 가지지 못할까? 세계대전 후 일본상품이 다시 미국시장을 파고 들어올 때 일본기업체에서는 일본계 미국시민들을 동원하여 크게 성공했다. ⌜키꼬만 ⌟간장회사가 그 예다. 현재 미국에 있는 일본기업체의 미국지사 사원을 보면 일본계 2세와 3세들이 중요한 위치를 점한 사실을 보게 된다. 21세기는 경제적으로 태평양 시대가 온다고 말한다. 태평양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우리 교포는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 없다. 태평양 바람에 따라 일어나는 경제적 물결이 교포실업계에도 불어 닥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물결은 미국서부에서 먼저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추세와 함께 한국상품도 미국시장에서 경쟁케 될 것이다. 교포실업계에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이에 대한 한국기업주들은 미국교포 실업계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로스앤젤레스만해도 한국상품의 수입이 해마다 증가되고 있다 한다. 또 의류, 신발류, 가방, 장갑, 모자, 합판 등에서 중공업 상품인 전자제품, 금속 제품, 철강, 고무제품, 기계류, 자동차 등으로 상품의 종류가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하이텍 생산품에 있어서 일본상품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이민의 의욕과 근면성은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다 더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고, 집단적이고, 과학적으로 장사도 하고, 자녀교육도 하고, 이민생 활을 발전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이민생활에서 백인과의 관계, 흑인과의 관계, 치카노와의 관계 등에서 가지각색의 갈등과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 사실이다. 백인과의 관계는 대부분이 인종차별의 문제에서 시작하게 된다. 백인들은 아직도 미국의 주인인 것을 고집하고 백인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50년 전 내가 도미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으나 아직도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백인들의 오만한 태도는 점차적으로 줄어 들고 있다. 그와는 다르게 한인들이 흑인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흑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서도 흑인 고객을 손님으로 취급하기보다는 도둑놈으로 취급한다. 그 기분을 흑인들은 너무나 잘 인식 한다. 사실 흑인들이 한인상점에서 도둑질도 많이 했고, 많은 한인상인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흑인만이 도둑놈이고 한인상인을 살해한 것은 아니다. 나는 60년대 미국인권보장운동에 참여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지원 하면서 흑인들과 함께 투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흑인들의 투쟁 자세에 대해서 깊이 존경하고 있다. 유명한 세계적 가수였던 폴롭손과 나는 함께 투쟁한 경험이 있다. 흑인들의 결사적 투쟁으로 인해서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가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흑인은 미국의 주인이다. 한인이 미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창녀 친구로 시작됐다. 미국이 남한일대를 점령했을 때 일본군의 충고를 기초로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었다. 일제의 충고는 “한인은 압력을 가해야 순종하고 자기들끼리 당파싸움을 잘하고 실천성이 없고 일반적으로 더러운 민족이다.” 라고 했다. 미국의 통치강령에 일제가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한민족을 모욕했다. 일인들은 아직도 그런 사고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의 태도가 얼마나 변했는지도 알 수 없다.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많은 흑인이 한국에서 미군으로 종사했고, 한국사정을 보고 돌아왔다. 그들이 한국에 가서 주인 노릇한 습관을 가지고 교포상인 들을 볼 수도 있다. 그들이 한국에서 창녀와 교제하던 버릇으로 한국이민 여성을 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우리 교포사회에서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미군이 한국을 계속 점령하는 동안 이런 문제는 남게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한다. 그런데 개인이 속한 집단 즉, 우리 교포사회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고 싶다. 얼마 전 이야기다. 김성락 목사가 설립한 나성한인연합 장로교회에서 김목사의 추도식을 거절했다. 나도 그 교회에 1년 이상 나갔고 나의 장모인 신경애 권사도 그 교회 교인이었고 그 교회에서 우목사의 사회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 교회에서 거액을 투자하여 새 교회당을 신축 계획할 때, 교인들 중에서 막대한 재산을 소비해서 새 교회당을 신축하기보다는 그 돈으로 교포사회 사업하는 것이 더 기독교 정신에 맞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새 교회당 신축파가 승리했고 반대파는 밀려났다 한다. 한국과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는 일요일에 헌금이 너무 많아서 은행원이 나와서 감독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가장 성서적인 교회라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분명히 지적한 것은 교회당내에서 돈놀이하는 무리들을 예수는 책망했다. 오늘의 교회가 이 정도로 물질적으로 변했다면 종교의 사명은 이미 잃었다 하겠다.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미국에 이민 온 부모가 돈벌이의 노예가 돼서 자녀들의 공부도 행동도 살펴볼 새가 없다면 이민 온 목적은 이미 사라진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외모와 형식 꾸미기에 노예가 돼서 일요일 헌금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종교라기보다 종교를 기업화했다고 하겠다. 비극이다. 한국의 비극이요, 교포사회의 비극이다. 우리 민족의 슬픔이다. 초기이민과 달리 6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의 교육수준은 상당히 높다. 65%내지 70%가 대학을 졸업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때는 미국에 대한 연구도 했을 것이고 희망과 포부가 컸을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살 수 없어 떠난 것이 아니고 미국에 오면 보다 더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기이민은 대부분이 한국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떠났다. 미국의 사회악이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국 이민생활을 하면서 자녀교육문제와 함께 마약이니 깽이니 하는 사회 악에 자녀들이 물들게 될 때 이민 온 것을 후회케 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리고 만다. 한국사회는 가족을 중심한 집단사회이다. 미국문화의 영향이 크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집단사회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미국은 정반대인 개인주의 사회이다. 부모들이 자식을 마음대로 처벌하지 못한다. 18세가 되면 성년이라고 독립행동을 강조한다. 독립행동을 위해서는 독립적인 수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입은 없으면서도 독립을 강조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의 요구를 듣게 된다. 혹시나 자녀를 잃게 될 것을 걱정하게 된다. 한국에서 생각치 않는 새로운 문제이다. 아버지는 의사이다. 매달 월급과 다른 수입을 합하면 2만 달러가 된다. 보통 미국사람의 일년 수입에 가깝다. 18세 되는 고등학교 졸업반인 딸이 있다. 요즘 동양계 여자들이 학교에서 인기다. 코린도 학교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남자친구들이 찾아온다. 코린은 방금 자동차 운전면허를 얻었다. 집 에는 차가 두 대 있다. 아버지가 한 대 쓰고 있고, 주부인 어머니가 한 대 쓴다. 어머니는 골프도 치고 여기저기 다니는 곳이 있어 언제나 차가 필요 하다. 코린은 어머니의 차를 요구했다. 친구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오후에 차가 필요해요.”했다. “안돼 내가 필요하니까.”하고 어머니는 거절했다. 코린은 어머니의 점심 손님들 앞에서 화를 내면서 “자동차 면허는 왜 받았죠?”하는 씨니컬한 질문을 했다.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손님들 앞에서 코린을 책망하지 않았다. 코린은 문을 요란하게 닫고 딴 방으로 갔다. 약 2분 후에 코린은 다시 어머니가 계시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차를 요구했다. 어머니는 다시 거절했다. “내가 필요한데 왜 야단이지.”했다. “나는 18세예요. 나는 어린애가 아니예요. 자동차 면허를 받았는데 왜 운전을 못하게 해요.”하면서 높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아무 대답없이 손님들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애를 어떻게 해야 해요?”하면서 손님들에게 동정을 구했다. 아무도 자원해서 충고하지 않았다. “코린의 음성을 봐서 앞으로 어머니 속을 좀 썩이겠네요. 혼자서 애쓰지 마시고, 아버지와 꼭 의논해서 결정하고 끝까지 강행해야 해요. 코린이 지금 손님들 있으니까 어머니가 양보할 줄 알고 기회를 보는 겁니다.”하고 말해 주었다. 이민생활에서 우리들도 미국가정에서 당하고 있는 자녀교육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해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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