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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독후감 6 - 김상일 교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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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11-05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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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적도 적이 된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 사령의 선택
김상일 교수의 ´세기와 더불어´ 주체사상 둘러보기 ⑥

김상일(한신대 전 교수, Korea Project Director, Claremont Center for Process Studies)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해외 대표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우리는 미국과는 언젠가는 화평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경계해야 한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이 세상 제국주의 가운데 가장 퇴매한 제국주의입니다”(홍동근, 1997, 153)라고 했다. 일본이 9.18 만주 사변을 조작해 낸 것은 결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변 직후 일본은 두 가지 큰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 하나가 1932년 ‘만주국’ 만들기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의 간도 조선인들을 상대로 한 ‘민생단’ 꾸미기이다. 만주국과 민생단은 만주사변의 후사건과 같은 것으로 일제가 만주사변을 조작한 진정한 동기가 드러나는 행각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지구상에 역사가 생긴 이래 이 만큼 억울한 일도 있을까? 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매년 8월 초가 되면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폭피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보고 역사의 피해도 강자만이 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그것도 이젠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 지구상에는 유대인 보다 더한 학살을 당하고도 힘이 없고 돈이 없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알릴 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 여류 작가가 쓴『요꼬 이야기』는 해방 후 일본여인이 조선 사람들에 의해 강간 폭행당한 이야기가 그 줄거리이다. 이 소설이 미국 중.고등학생들의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우리 교민들이 이에 항의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일본의 원폭도 유대인들의 홀로코스도 모두 그들의 적들로부터 당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 1930년대 초 동만東滿 일대에서는 기이한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그것은 좌익이 좌익을 대량 학살하는 소위 ‘반민생단’ 사건이다. 회고록 전 8권 전체에 검색어를 치면 아마도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민생단民生團’일 것이다. 김일성 사령은 항일유격대 전 활동 과정 가운데 이 만큼 괴롭힘을 준 것도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오늘의 북조선의 인맥과 노선 그리고 주체사상의 기원을 파악하는 데도 ‘민생단’이란 말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김일성’ 그 이름을 바로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배운 것도 민생단 사건 때문임을 밝혀 둔다. 그를 아무리 가짜라고 하더라도 민생단과 그의 관계만은 부정할 수 없다. 외냐하면 그 자신도 반민생단에 연루될 뻔 하였고 그의 배우자 김정숙도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역사의 현장에서 부정하자면 우선 그 사건 자체 부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 가짜 김일성론의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1932년 경 극좌 마르크스 좌경분자들은 마안산이란 산골짜기에 앞으로 민생단으로 몰아 처형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있었다. 200-300 여명의 남여노소 그리고 거기에는 10살 전후의 어린이들도 있었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들은 살기를 포기하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에 가득 차 며칠을 굶어 피골이 상접해 있는 상태였다.

김사령 일행을 본 이 죽음을 앞 둔 인간군들은 무표정 그 자체였으며 또 하나 자기들을 해치려 온 부대로 볼 정도였다. 그런데 김사령은 도착하는 즉시 민생단 자료들을 모조리 모아 불태워 버리고 이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마치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린 것과 같다. 그리고 고향을 떠날 때에 어머니가 준 돈 20원으로 무명 광목을 사 이들에게 모두 새 옷을 해 입힌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 마저 극좌 좌익들에 의해 민생단으로 몰려 죽었다. 심지어는 김일성 사령마저 한 때 민생단으로 몰렸다. 민생단으로 죽임당한 사람들이 무려 2000 여명이나 되었으니 독립운동하다 죽은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이다. 죽임을 당한 것도 일본이라는 적으로 부터가 아니고 바로 어제까지 동지였던 같은 공산당한테 이렇게 당하다니, 이들이 눈을 감을 때 그 심경을 한번 생각해 보라.

해방 후 마안산에서 김사령에 의하여 구조된 사람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들이 오늘 북조선을 움직이는 인맥이 되었다. 그 때에 살아 난 그의 사람들이 죽을 목숨을 살려 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김사령을 ‘어버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버이 수령’이란 말이 거기서 유래 했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정도는 세뇌에 의한 억지 춘향으로 붙여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회고록 4권은 민생단 회고록이라 할 정도로 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첫 절 제목이 ‘사나운 회오리’이다. 반민생단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32년 전후해 김사령 신변 주변에 있었던 일들, 착잡했던 심경들, 그리고 고달팠던 시절을 라자구 등판에서 겪은 시련이 크다고 하지만 반민생단 사건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라자구 등판의 시련은 1930년대 말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유격활동 초기의 최대 시련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시련 보다 민생단이 더 큰 괴로움을 주었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시련의 나날들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던 중중첩첩한 설령들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피와 고뇌로 얼룩진 원정은 승리적으로 종결되었다. 병마에 지친 몸을 끌고 로야령산정에 오른 나는 대원들과 함께 왕청의 산발들을 굽어보며 환성을 올렸다. 수개월동안 초연과 혹한 속에서 겹쌓인 피곤이 순간에 다 가셔지고 고향의 뒷동산에라도 와 닿은 것 같은 희열로 마음마저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왕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며칠 동안 침상에서 고열과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원정에서 얻은 촉한의 후유증이 또 다시 나를 쓰러뜨리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숙반≫바람에 유격구가 만신창이 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의 침상에까지 날아 들어왔다. ≪간호병≫들도 유격구를 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좌경분자들의 죄상을 분노에 차서 고발하는 것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하여도 혁명을 하느라고 왕청골안이 좁다하게 뛰어다니던 당원들과 공청원들, 부녀회원들이 광란적인 살인각본의 작성자들과 그 집행자들에게 저주를 보내며 자기 자신들이 피로써 개척하고 사수해온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 같은 전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의 모든 움직임이 한순간에 죄다 정지되고 세상만물이 빙하에 짓눌려 종말을 고하는 것 같은 무서운 절망과 좌절감을 느꼈다. 16명밖에 안 되는 대오를 이끌고 촉한에 걸린 몸으로 천교령을 넘을 때의 난관 역시 모진 것 이기는 하였으나 ≪민생단≫문제 때문에 당해야 했던 고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4권-1쪽)(‘숙반’이란 지금의 숙청, 그리고 ‘촉한’은 장티프스 같은 열병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 “나는 몸도 마음도 다 고통으로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4권-3쪽).

김사령은 스스로 자신은 ‘타고난 낙천가’라고 8권에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낙천적 성격 때문에 그 시련의 시절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생단 문제에 있어서 만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사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외부의 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생긴 것이다. 적이 적이 아니고 동지가 적일 때 인간은 참을 수가 없는 데 이를 두고 베이트슨은 ‘이중 구속 double binding’이라고 했다. 바로 이런 이중 구속적 상황으로 끌려들어가 결국 김사령 자신마저 같은 동지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옥조임을 당했던 것이다. 드디어 이 사건으로 다홍왜 회의에서 결말을 짓기까지 그 전 과정을 우리는 회고록 4권을 통해 읽을 수 있다.

민생단 사건의 분수령을 이룬 것은 1931년 9월 18일에 있었던 9.18 만주 사변이다. 이는 세계 역사상 손꼽힐만한 일본이 자행한 위장 깃발 사건이다. 진주만, 통킹만 그리고 만주 사변 이 3대 사건은 미.일이 흔든 3대 위장 깃발이라고 그리핀 교수는 이미 지적한 바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위장 깃발, 그러나 그 후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으며 동만 벌에서 좌익이 좌익을 죽이는, 김사령이 말하는 “혁명이 혁명을 타도하는” 이 피해를 고스란히 조선 열혈 민족주의자들이 떠안았다.

김사령의 말에 의하면 민생단 혐의가 있는 자들은 고작 8-9명 정도였다. 그 소수의 밀정들 때문에 2000 여명을 학살하다니, 그것도 김산 같은 인물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 역사를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한다. 민생단 사건은 9.18 사변의 전후 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관시켜야 만 바로 이해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해 둔다.

당시 동만 사회는 대체로 4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조선 인민회, 자진 촉진회, 민족주의 독립운동, 중공당의 4개 부류가 그것들이다. 이들 4개 단체들을 일본, 중국, 공산당의 친 혹은 반의 관계로 다시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o는 ‘친 親’ 그리고 +은 ‘반 反’을 의미한다. 여기에 김일성 항일 유격대의 입장까지 하여 5개 단체들의 성향을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 중국 공산당
조선 인민회 o + +
자진 촉진회 + o +
민족주의 독립운동 + o +
중국공산당 + o o
김일성 항일유격대 + o o

중공당 계열의 조선인들은 중공당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반제 반봉건 혁명의 기치를 들고 자본가 우익을 타격하는 5.30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친일파는 물론 친일을 하지 않은 애국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봉건 지주들을 모조리 잡아 처단을 하였다. 김사령은 이들을 극좌 좌경 종파주의자들이라 하면서 상당한 거리를 둔다.

여기서 이상 5개 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 인민회’ 만이 친일행위를 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보인다. 조선 인민회는 일본의 적극적인 비호 하에 ‘간도한인 자치회’를 만들었으니 이는 나머지 4개 단체 외 특히 ‘중공당’(중국 공산당) 계열과는 숙명적인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조선 인민회는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에 있어서 모두 중공당 계열과는 물과 불 사이었다. 위의 표에서 보면 양자 간에 공통점은 단 하나도 없다. 양자 간에는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동시에 걸머지고 있었다. 1932년 2월 만주 간도에는 아직 봄이 올 소식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송정이 내려다 보이는 해란강은 이제 피로 내를 이루는 때만 기다리고 있다. 훈춘과 연길, 우리가 가장 자주 찾는 이 고장이 바로 민생단이란 꿈에도 그릴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곳이었다.

동만 안에 있던 조선족 200만은 9.18 사변의 최대 희생자가 될 운명이었다. 일본 군대는 조선족 한교만 보면 자기들을 피해 도망온 것이라 보고 즉, ‘부정선인不呈鮮人’이라하고 체포 총살하였다. 일본측 적구로 오지 않는 부락은 방화 약탈하였다. 반대로 중국인들은 중국인대로 조선족을 ‘소귀자小鬼子’라 하여 일본의 주구로 취급 한교 부락을 습격 방화 약탈 그리고 살상 하였다. 일본에 대한 분풀이를 조선족에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아리안 족들이 유대인들에게 퍼 부은 분풀이와 유사한 것이다. 부정선인과 소귀자 사이에 적의 적도 적인 이중 구속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주권 없고 살 영토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처한 아픔을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역시 잘 그려내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유대인, 불법 이민자, 집시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공백의 가장 자리에 있다고 했다. 아무런 법적 지위도 부여받지 못하는 처지의 공백의 상태, 그리고 그 주변머리에 거주하여 적의 적으로 부터도 적대시 당하는 역설적 위치에 있는 부류의 인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간도 지방의 조선족은 바로 이런 ‘공백의 가장 자리edge of void’에 처해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선족은 고립무원 정도가 아니라 적과 적의 적으로부터 협공을 당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함석헌의 말대로 우리는 길가에 버려진 창녀 신세인가? 몸을 아무리 능욕하여도 어디 호소할 곳조차 없게 되었다. 이러한 민생단에 대하여 김사령은 다음과 같이 지적해 말하고 있다. “민생단 조작은 조선에 대한 일제식민지 통치의 지능화의 산물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민생단을 내온 속심은 모략과 권모술수의 방법으로 조선혁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자는데 있었다. 총칼정치를 해도 안 되고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쓰고 ‘내선일체’며 ‘동조동근’을 부르짖어도 안 되니 조선사람들 끼리의 골육상쟁으로 혁명세력을 숙청 소멸함으로써 치안유지에서 당하는 고충을 해결하려는 것 이었다”(2권-10쪽)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난 민생단 읽기

(아래 글은 회고록 4권 10-11쪽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임. 아래 김사령의 증언은 최근 민생단 연구 학자들 김성호와 한홍구 교수의 글과 거의 같음.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원본 그대로 살림)

9.18사변후 만주지방에서의 혁명정세의 급격한 발전에 커다란 우려를 느낀 사이또총독은 간도시찰반 성원으로 동만지방에 파견된 박석윤과 연변자치촉진회의 거두 전성호, 연길주재 만주국군 군사고문 박두영, 수급반공특무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적인 민족주의세력을 내세워 1932년 2월에 연길에서 ≪민생단≫을 조작하게 하였다.

≪민생단≫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으로서의 생존권확보≫라든가, ≪자유락토건설≫이라든가,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허울좋은 구호를 들고 마치 조선사람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것이 최고의 경륜인것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실제상에서는 조선민족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모해하여 인민들로부터 고립시키며 조중인민사이에 쐐기를 박아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킬것을 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어낸 간첩모략단체였다.

≪민생단≫의 반동적 본질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의 ≪생활의 산업화≫를 조선민족이 나아갈 ≪유일한 활로≫라고 설교한 이 단체의 ≪조직취지≫나 ≪강령≫과 같은 문건들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적들은 조선과 만주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기간을 ≪생존권의 확보와 확충≫을 위한 가장 좋은 ≪절대적시기≫로, 식민지통치질서의 기반밑에서 암흑의 세계로 변한 조선과 만주를 ≪자유≫와 ≪자률≫의 ≪대지≫로 묘사하는 한편 간도일대에 조선인에 의한 ≪자유의 락토를 건설해야 한다.≫고 떠벌리면서 마치도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만주강점과 식민지통치를 환영하며 간도일대에 대한 령토적야심이라도 가지고있는듯한 인상을 조성함으로써 조중인민과 조중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선린관계와 혁명적뉴대를 깨뜨려버리려고 획책하였다.

≪민생단≫이 철저한 반공주구단체라는것은 그 발기인이라는 사람들과 창립후 단장, 부단장, 리사의 자리를 차지한자들의 경력만 보아도 쉽사리 가늠할수 있다. 이 조직의 발기인들로서는 그 성립을 위해 전력을 다해온 경성갑자구락부 리사 조병상이나 ≪매일신보≫부사장 박석윤, 연변자치촉진회의 전성호, 김동한 등은 다 애국애민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 혁명가로 자처하였으나 예외없이 일제가 오래전부터 손때를 묻혀 길들여온 반역아들이였다.

16살에 일본류학을 가는것으로써 친일의 첫걸음을 뗀 박석윤은 도꾜제국대학법과와 제국대학연구원, 영국케임브리지대학 등 일류급의 대학들에서 여유있는 수학생활을 하였다. 영국에서 류학을 할 때에는 매해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3,000여원에 달하는 거액의 학비까지 받았다고 한다.

해외류학후의 그의 직함은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였다. ≪동아일보≫기자, ≪매일신보≫부사장, 일본외무성촉탁 만주국 외교부 참사관, 뽈스까주재 만주국 총영사… 등 귀국후 그가 역임한 직무들과 후날 쏘일중립조약체결시 일본측 단장으로 그 조약문에 수표했던 외상 마쯔오까 요스께가 이끄는 일본대표단성원으로 1932년 제네바에서 열렸던 국제련맹총회에까지 참석한 현란한 경력은 그가 일본지배층으로부터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가 하는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박석윤의 체면을 세울수 있게 그로 하여금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비난하는 사설도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반대하여 총독과의 정면대결도 하게 하고 태평양전쟁말기 려운형이 주관한 건국동맹에도 관여하게 하였지만 ≪민생단≫과 관련된 원한도 있어 간도지방의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해방직후 박대우란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양덕에 숨어살다가 적발되여 민족반역자로서 준엄한 심판을 받은 박석윤은 재판정에서 일제통치하 조선사람의 ≪민족자치≫가 자기의 정치적리념이였다는것, 조선도 영국의 식민지들인 카나다나 남아련방과 같은 정치발전의 코스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는것, 바로 이런 정치리념으로부터 사이또총독과도 가깝게 지냈고 일본의 이름있는 세계제패론자이며 동아련맹의 정신적고취자의 한 사람인 이시하라 간지도 숭배하였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또한 ≪민생단≫의 창립취지가 공산당과 유격대의 괴멸에 있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민생단≫의 초기목적은 순수한 ≪생존권확보≫에 있었다는것과 이 조직이 일제의 지령을 받는 간첩주구단체로 전락된 것은 자기가 간도를 떠나간 후의 일이라는 것, 반≪민생단≫투쟁과정의 혹심한 피해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랐다는것, 자기는 일본인들의 조종을 받는 하나의 인형에 불과하였다는것 등을 진술하였다.

박석윤의 고백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있는가 하는 것은 력사만이 판정할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실여부는 어떠하든지 간에 그가 일제의 충견이며 심복이였다는 사실은 그 어떤 론거로써도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민생단≫창출의 산파역을 논 박석윤이 일본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라면 ≪민생단≫모략공작의 현지하수인이였던 김동한은 로씨야의 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였다. 김동한의 인생은 공산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는 10월혁명직후에 벌써 로씨야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과 장교단장직을 력임하면서 사관학교졸업생으로서의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1920년초에 연해주에서 일제에게 체포되자 인차 급전향을 하여 반공일선에 선 친일특무가 되였다.

김동한은 ≪민생단≫이 해체된후 관동군의 승인을 얻어 그 후신인 ≪간도협조회≫를 조작하였으며 100여명의 반동들로 의용자위대라는것까지 무어가지고 다니면서 혁명군≪토벌≫에 극성을 부리였다. 그는 자기를 조선에서 태여난 일본인이라고 착각할만큼 일본인으로 철저히 동화된자였으며 조선민족은 일본을 조국으로 하여 성심성의를 다하여야 한다고 고창할 정도로 매국배족근성이 골수에까지 사무친 수급역적이였다. ≪만선일보≫가 전하는 자료에 의하더라도 그가 귀순시킨 공산주의자는 자그마치 3,8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김동한이 죽은후 일제는 연길서공원에 그의 동상과 ≪간도협조회≫의 현창기념비라는것까지 세워주었다.

일제의 ≪간도치안전략≫에 따르는 사상모략시책으로 ≪간도성내의 조직의 전모를 밝히고 약 4,000명을 체포하고 그들을 지지하고있던 사회적기반을 붕괴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 이른바 ≪민생단전략≫의 실상을 잠간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민생단≫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간도민생해결을 목적으로 조직된것이 아니였다는것은 처음부터 명백한것이였지만 일제침략자들은 그 당시 그 단체에 민족주의적허울을 씌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일본사람들은 ≪민생단≫의 간판을 민생고의 해결이라는 구실로 현란하게 장식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그 단체의 우두머리들이 일본령사관의 뒤문으로 뻔질나게 드나드는것을 인차 간파했다. 적들은 만인의 예리한 시선앞에서 ≪민생단≫의 정체를 오래 숨겨둘수가 없었다. 우리는 혁명적출판물들과 구두강연을 통하여 그 정체를 제때에 발가놓는 한편 반≪민생단≫투쟁을 전군중적운동으로 벌리도록 하였다. 간판에 현혹되여 멋도 모르고 ≪민생단≫에 들었던 사람들이 조직을 인차 탈퇴하였으며 주구로 전락되여 암해공작에 나섰던자들은 군중의 손에 의해 적발처단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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