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김일성 주석 알면 통일의 대문 열린다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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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9-04-18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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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 내외동포들은 통일을 하여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그 사회를 이끌어 온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편견 없이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자주통일을 갈망하며 통일조국을 뜨겁게 염원하여 온 동포들은 《김일성 주석을 알면
통일의 문이 열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해 왔다. 그리하여 《민족통신》은 김일성 주석 탄신 97주년을 맞아
특집을 계획하여 『김일성 주석, 그는 누구인가』에 대해 연재기획을 꾸며 보았다. 일곱번째 필진은 민족통신의
편집인이며 대표인 노길남 박사의 글 ⑦김일성 주석은 《민족대단결》의 지도자를 여기에 소개한다.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자주통일을 갈망하며 통일조국을 뜨겁게 염원하여 온 동포들은 《김일성 주석을 알면
통일의 문이 열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해 왔다. 그리하여 《민족통신》은 김일성 주석 탄신 97주년을 맞아
특집을 계획하여 『김일성 주석, 그는 누구인가』에 대해 연재기획을 꾸며 보았다. 일곱번째 필진은 민족통신의
편집인이며 대표인 노길남 박사의 글 ⑦김일성 주석은 《민족대단결》의 지도자를 여기에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⑦김일성 주석은 《민족대단결》의 지도자
노길남 편집인 |
첫째 유형은 자기 나라 구성원들 전체의 이익과 이해를 대변하는 지도자가 있고, 둘째 유형은 극소수의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복무하는 지도자가 있고, 셋째는 자기 나라 구성원들은 안중에 없이 소수 기득권 세력과 함께 외세의 이익과 이해를 돕는 소위 사대매국적 지도자가 있다.
여기에서 첫째 유형의 지도자는 인류역사에서는 물론 우리 민족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이 유형에 속하는 지도자는 이 나라의 구성원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언제나 나라의 자주권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나가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신뢰와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둘째 유형이나 셋째 유형은 소수 기득권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기 국민들로부터도 불신을 받는다.
그 사회나 그 나라의 지도자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는가 못 받는가에 대한 문제는 첫째로 그 지도자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민족자주성을 실현하며 그 구성원의 이익과 이해를 위한 정책을 펼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지도자와 구성원들이 일체감을 갖고 있는가 없는가, 즉 그 지도자와 구성원들이 <일심단결>을 이루고 있는가 없는 가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된다. 서방국가들에서는 이런 문제를 여론조사라는 수단으로 지도자의 인기도, 혹은 신뢰도를 측정하기도 한다. 이런 여론조사는 경우에 따라 조작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그리고 서방국가들의 지도자 선거는 그 지도자가 얼마나 구성원들의 이익과 이해를 대변하는 가에 대한 기준이나 수준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흔히 돈 선거나 여론조작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지도자의 유형을 살펴본 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의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그리고 그 지도자의 철학과 실천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기 때문에 지도자의 문제는 지구촌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우리민족사에서도 지도자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몫으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우리 조국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가장 중요한 명제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성취하느냐 못하느냐는 문제는 그 지도자가 자주적인 철학과 그런 의식을 갖고 외세의 편이 아니라 자기 구성원, 또는 자기 민족의 편에서 정책을 펼쳐 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평가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그 지도자가 <민족대단결>사상과 이에 대한 실천을 국사에 반영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애국적 지도자인가 매국적 지도자인가가 구별된다.
《민족통신》이 이번 특집을 통해 그 주제를 <김일성 주석을 알면 통일의 대문이 열린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여러 필진들이 연구한 내용들을 소개하게 된 것도 김일성 주석의 정치사상과 철학, 그리고 그 분의 평생업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터득하여 남북 해외동포들이 모두 손잡고 실천하면 우리 민족의 통일문제는 반드시 해결된다는 뜻에서 계획한 것이다.
북부조국의 역사가 인구와 땅의 규모가 크지 못하지만 오늘처럼 지구의 중심에 서게 된 것도 지도자들의 영도력에 비롯되었다. 북의 지도자들은 혁명1세대 지도자나 혁명2세대 지도자 모두 뜨거운 민심을 얻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북의 지도자들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공장으로, 전선으로, 농장으로, 기업소로, 교육기관과 예술공연장 등 각계 각층의 활동장소들을 현지 지도하여 왔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나날들은 그야 말로 강행군이었다. 북녘 지도자들은 그 동안 주먹밥(줴기밥)과 새우잠(쪽잠)을 자면서 강행군으로 현지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는 소식은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제 와서는 서방나라들 시민들이나 남녘의 동포들과 해외동포들도 그러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북의 지도자들처럼 그토록 뜨겁게 인민들을 신뢰하고 믿으며 내 세워주는 지도자는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리고 자기 지도자들을 그렇게 열광적으로 흠모하며 지지하는 인민들로 꽉 차 있는 나라는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래서 이북의 언론들은 《일심단결은 핵무기보다 강하다.》고 자부한다. 이것은 곧 지도자와 인민들이 한 식솔일 뿐만 아니라 서로가 동지적 의리로 똘똘 뭉쳐져 왔기 때문이다. 이런 바탕에서 성장해 온 조선이 지금과 같이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문화예술강국, 그리고 첨단과학기술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북 지도자들의 위대한 영도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진단할 수 있다.
최근에 두 번째로 100% 자체기술로 위성을 쏘아 올려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이북의 지도자들의 영도력의 결과라고 지적할 수 있다. 조선은 10년 전 인공지구위성 <광명성1호>에 이어 지난 4월5일 또 다시 <광명성2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여 지구 촌 세계 나라들의 경탄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해 내외 민족민주진영은 이번에 쏘아 올린 <광명성2호>가 자체의 지혜와 기술로 만들었다는 점과 세계 몇 안 되는 나라들의 첨단과학기술의 수준과 맞먹는 실력으로 부상 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것은 우리민족의 자랑이라고 피력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묘사한다면 이북 지도자들과 이북동포들의 <일심단결>이 창조해 낸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적과 같은 역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미국의 지배세력은 이것을 폄하하고 깎아 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 외세들은 그렇다고 하지만 한국의 이명박 정권이 보여 준 태도는 같은 민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세를 보였다. 이성희 국방장관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위성발사가 실패>라고 공공연하게 발언했다가 그 뒤에 <성공적인 발사, 성공적인 궤도진입>이 러시아를 포함하여 우주개발국에 의하여 확인되자 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광명성2호>가 발사 된지 열흘도 되지 않아 그 동안 난무했던 허위사실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북이 쏘아 올린 시험통신위성 <광명서2호>는 10년 전에 쏘아 성공한 <광명성1호>처럼 성공적으로 발사되었고, 성공적으로 우주궤도에 진입했다는 것이 우주과학의 나라들로부터 명백하게 확인되었다.
그 동안 이북사회는 우리 민족의 분단역사를 통하여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일부 자본주의 나라들에 의해 극심하게 왜곡되어 왔고, 이러한 영향 때문에 이남 동포들과 해외 동포들 상당 수는 이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굴절된 역사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이북사회의 최고 지도자에 대한 위상이나 영상이 일부 서방세계와 이남 사회에 사실대로 반영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역사적인 업적과 이분들의 발자취는 있는 그대로 조명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상과 모략적인 허위사실들이 난무하여 이분들의 위대성이 감추어져 왔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 주석의 생애는 대외적으로는 생전에 두 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투쟁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제국주의자들의 분열책동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심단결>과 <민족대단결>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이분은 민족분단 이전 시기에는 항일투쟁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제와 맞서 싸웠고, 조국해방을 맞고서는 미 제국주주의자들의 간섭과 지배를 분쇄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민족분단 시기에는 안으로는 주체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면서 동시에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1994년 7월8일 서거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인류 진보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 받아 왔다.
김일성 주석에 얽힌 이야기들은 무수하게 많다. 김 주석은 항일빨치산 투쟁시기에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여 축지법을 사용하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압도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이분에 대한 일화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회자하여 왔다.
이분은 시와 노래도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 때 동북인민혁명군에 의해 불러진 것을 1993년에 <보천보 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분이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 여사의 애창가였다. 김정일 위원장도 어린 시절에 이 여사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 광명성 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량강도 삼지연군에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김일성 주석은 또한 서예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선의 곳곳에는 김일성 주석의 친필이 자주 눈에 띈다. 서거 하루 전에 쓴 친필도 판문점 통일각 부근에 세워졌고, 황해북도 개성 시에도 있고,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보관된 곳들이 발견된다. 그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 사범대학>, 그리고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은 평소 그 바쁜 중에도 집무실에서 틈틈이 독서를 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남에서 발간된 책들도 읽었다고 할 정도로 독서 열에 불탄 지도자였다. 1989년 남녘의 소설가 황석영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 했을 때, 그는 황석영 작가가 쓴 대 장편 소설 <장길산>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담화를 나눈 일화도 있다.
김 주석은 1990년 8월18일 조국통일범민족대회가 성과 리에 열린 뒤 해외동포 지도자들과 함께 황석영 작가를 초청, 함경도 경성(구 주을)에서 접견했을 때에도 <장길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필자도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었다. 처음 뵙는 분인데 낮 설지 않았다. 오랜 만에 친척 어르신네를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분은 아주 소박하고 텁텁한 시골의 할아버지 같았다. 김 주석은 해외동포들을 초대 소 문 앞까지 나와서 맞이하면서 일일이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고 반갑다는 환영인사를 해 주었다. 그는 오찬 중에 나온 음식들 중 어떤 것은 자신이 직접 요리사에게 주문하여 대접한다고 설명하기까지 하면서 모든 사안들에 대해 소학교 학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말로 이야기 했지만 김 주석의 대화 내용은 깊이가 있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무엇 때문에 김일성 주석에게 매혹되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김일성 주석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1894년 7월10일~1926년) 선생과 어머니 강반석(1892년~1932년) 여사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 주석은 가난한 농가 집안의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부친 김형직 선생의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다고 한다. 이분의 가정은 친가 쪽이나 외가 쪽 모두 애국자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강반석 여사는 기독교 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 선생은 칠골교회의 장로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 선생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 선생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 주석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 팔도구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 그 뒤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평안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 창덕학교는 1907년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 주석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 선생도 설립자 가운데 한 분이며 한때 교장을 맡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면서도 시, 문학, 음악 등 예술세계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특별히 애민, 애족, 애국 사상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그의 나라사랑은 또 철저하게 자주적 입장이었고,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자세에서도 사대주의적 입장을 완강하게 배격하면서 언제나 자력갱생에 의한 주체적 입장을 중심에 놓고 애국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그리고 그는 애국활동의 힘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 자체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언제나 인민을 믿고,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나라를 건설하여야 된다는 정치철학을 펼쳐왔다. 그래서 <이민위천>사상이 그의 좌우명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인민을 하늘처럼 생각하고 신뢰하고 믿으며 인민의 힘으로 나라를 건설하여야 된다는 철학을 갖고 항일투쟁을 전개해 왔고 조국광복 후에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사실상 자기 인민이나 국민을 믿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자체의 힘을 의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런 자세는 곧 사대주의로 빠지게 된다. 사대주의로 빠지게 되면 그 나라 구성원들은 불가피하게 민족허무주의의 수렁에서 허덕이게 되고, 종국에는 망하고 만다. 그렇다고 하여 자기 처지나 사정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정립한 고전이론의 틀에 맞추어 억지로 활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조주의에 빠진다는 것이 김일성 주석의 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의 좌우명인 《이민위천》사상이 대단히 중요한 철학으로 이북사회에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사상은 그 나라 구성원들이 자체의 힘을 믿고 나라를 자기의 지혜로 그리고 자체의 힘으로 건설하여 나가는 정신적 힘이 된다. 사대주의는 큰 나라들을 받들고 부러워하고 숭배하는 굴종사상이며 동시에 자기 민족, 자기 나라를 스스로 멸시하고 비하하는 민족허무주의 사상이다. 이렇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성 주석은 일찍이 《사람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민족이 사대주의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언제나 강조해 왔다.
김 주석은 항일투쟁시기에도 그러한 민족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오로지 민족자주의식에 기초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투쟁의 주체역량을 육성시켜 왔다. 그는 이미 10대의 청소년 시절이었던 1926년 10월17일 타도제국주의 동맹(ㅌ ㄷ)을 결성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힘을 길러왔다.
그는 청년기 초반인 1920년대 하반기에 어떻게 혁명을 하여야 되겠는가를 고민하였다. 그는 특히 초기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투쟁행태에서 나타난 종파, 분파현상들을 뼈저리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하여서는 일제탄압을 이겨 낼 수도 그리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을 수도 없다고 그는 뼈저리게 생각한 나머지 새로운 운동노선에 대하여 고심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1930년 6월 카륜회의를 통해 역사적인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게 된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359쪽)에서 고민의 한 부분을 피력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자체로 당을 꾸리고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감자도장까지 만들어 가지고 국제당의 승인을 받으러 돌아 다니였다.”고 돌이켜 보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1930년 6월30일부터 7월2일까지 조선의 진보주의 청년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운동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카륜회의>를 개최하고 심층적인 토론과 토론을 거쳐 여기에서 종합한 내용을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카륜회의>가 오늘의 주체사회주의를 건설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보적 청년들은 이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이 첫날 발표한 강연을 들으며 새 방향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청년들은 이 회의를 통해 (1)국 내외 정세를 진단했고, (2)조선혁명 과정에서 견지해야 할 입장과 태도, (3)조선혁명에 관한 주체적 노선과 전략전술적 방침 등을 정리할 수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진보적 청년들과 함께 이 기회를 통하여 조선의 사회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이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방도는 <반일민족통신전선>이라고 정리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원래 혁명은 인민대중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인 것 만큼 평범한 인민대중이 참가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조선사람 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타승하고 전 민족을 해방하려고 하는 것 만큼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굳게 결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 농민은 물론 종교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에 이르기까지 반일적인 사상을 가진 모든 세력을 반일의 기치하에 굳게 결속하여야 합니다.》(김일성 저작집 제1권 9~10쪽)
이와 같은 노선은 우리 역사에서 <민족대단결 사상>의 효시라고 본다. 물론 <신간회>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전선 노선에 의해 조직되었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방해파괴책동과 이에 매수이용 당한 개량주의자들의 분파분해 작용으로 내부의 일체감이 이뤄지지 않아 창립한지 4년만인 1931년에 해체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주석은 한편으로는 1932년 4월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전민항쟁을 선포하여 투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일민족통일전선>사상을 고수했다. 이에 반해 일제는 이러한 <민족대단결>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간첩모략단체인 소위 <민생단>을 조직하여 같은 해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동포들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그리고 조-중 인민들 사이를 이간하기 위하여 조작하였는데 좌경분자들이 소위 반민생단 극좌운동을 펼치면서 멀쩡한 사람들을 첩자라고 몰아 분열현상을 일으켜 한 때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김 주석은 그 후에 광범위한 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를 1936년 5월1일부터 보름 동안 장기적 회의를 갖고 범민족반일통일전선체를 조직하면서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를 바쳐 2천만 민중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총 동원 된다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모두가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어 싸울 것을 호소하여 회의 참석자들을 무한히 격동시켰다.
김일성 주석은 <조국광복회>를 견인할 기관차로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조직하여 백두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이곳에 사령부를 건설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 이듬해인 1937년 6월의 보천보 전투의 승리는 바로 이 백두산 근거지를 거점으로 전개된 투쟁이었다. 그는 또 1943년 7월 함북 은덕군 록야리 곰산에서 진행한 곰산회의에서 방침을 정하고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전국도처에서 반일전면무장항쟁을 개시했다.
김일성 주석은 1945년 6월 간백산 밀영 군정간부회의에서 8월8일 조선인민혁명군의 대일작전을 개시하고, 다음 날 최후 공격명령을 발동하여 일제를 혼비백산시켰다. 이러한 전면적 공격으로 일제를 타승한 것으로 진단된다. 그런데 이런 승리를 연합군의 조국반도 진주로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족허무주의적이고 동시에 사대주의적인 역사인식으로 지적 받고 있다.
조국광복을 맞은 우리 동포들은 감격의 기쁨도 채 맛보기 전에 일제는 떠났지만 또 다시 미국의 지배세력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 40년도 따지고 보면 1905년의 가쯔라-태프트 비밀협약에 의해 미국과 일본이 짜고서 한쪽은 필리핀을 그리고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물러간 세상이 왔는데 유엔의 모자를 쓰고 들어 온 미국은 전쟁범죄자인 일제의 허리를 자르지 않고 식민지 피해국인 우리 나라의 허리를 잘라놓고, 그것도 모자라 남녘 땅에 주한미군을 들여와 반세기가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절반을 준 식민지로 간섭하며 지배해 왔다. 미국은 그러면서 남과 북을 적으로 만들어 자기의 이익을 챙겨 온 것이 우리 민족의 분단사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조국해방을 맞았으나 미국의 주도적인 방해 책동으로 해방정국이 혼란상을 갖게 되자 어떻게 해서든지 분단을 막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1945년 10월14일 평양서 열린 환영군중대회 연설을 통해서도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외치며 <민족대단결>을 간절히 호소했다.
《각계 각층 인민들은 누구나 다 애국적 열성을 발휘하여 새 조선 건설에 떨쳐 나서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은 1946년 7월22일 민주주의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에는 공산당을 포함한 4개 정당과 13개 대중단체 대표들과 6백여 만 명의 조직군중들이 참여했다. 이때 김 주석은 남녘에 있는 인사들에게 친히 편지를 보내어 <민족대단결>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미국과 이에 편승한 분열세력은 우리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민족대단결 사상으로 분열과 분단을 막아 보려고 몸부림치던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19일 서울 한 복판에서 미제와 그 앞잡이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미 제국주의자들은 1947년 9월 코리아 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끌고가 부당한 결정을 내리게 하였고, 1948년 2월에 ‘유엔소총회’를 열고 남녘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할 데 대한 결정을 강압적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미국에 의한 분열책동이 노골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김일성 주석은 또 다시 외세에 의한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19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역사적인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남북 각계 각층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그 결과 이북의 3개 정당, 12개 단체들과 이남의 민주한독당, 근로대중당, 청우당, 신진당, 근로인민당, 남로당 등 31개 정당, 사회단체를 포함한 56개 정당 사회단체 성원들 1천만여 명을 대표하는 695명의 대표들이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여 민족대단결의 결의를 다졌다. 당시 이 회의에 불참하며 이 모임을 반대하였던 세력은 오로지 미군정과 이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소수의 이승만 세력뿐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4월21일 속개된 제2차 회의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연설했다. 그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조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망국적 단독선거를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이 거족적 투쟁에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파와 종교의 소속, 정치적 견해를 가리지 말고 반드시 단결하여야 하겠습니다. 단결만이 우리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회합에서 전 민족적 역량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며 민주주의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어떻게 투쟁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대책들을 반드시 세워야 하겠습니다.》(김일성 저작집 제4권, 286쪽)
이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는 4월23일 성과 리에 폐막되었다. 그 결과는 (1)정치적으로 상반되는 두 지역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동의 요구와 이익을 위해 회합을 이뤄냈다는 점, (2)민족공동의 이념에 기초하여 북의 공산주의자와 남의 민족주의자 사이의 단합을 이루어 낸 점, (3)민족분열이냐, 통일이냐의 엄중한 시기에 민족운명 개척의 주체로서의 온 겨레의 거족적인 단합을 이뤄 낸 점 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회합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과 반공주의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상호 만남은 <민족대단결>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두 분은 마음을 합쳤다. 김구 선생은 연공 연북 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백범은 남녘으로 돌아와 독립당을 포함하여 민족자주연맹 등 80여 개 단체로 이루어 진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분쇄하고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투쟁을 벌이던 중 1949년 6월26일 미제국주의 세력과 야합한 이승만 정권 세력에 의하여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애국애족의 정신과 연북연공 이념은 남녘 동포들의 가슴 속에 끊임없이부활하여 왔다.
조선은 사실상 남과 북의 총선을 통하여 세워졌다. 남녘 유권자의 77% 이상이 참여했고, 북녘 유권자 99%가 참여한 총선에 의해 건설되었다. 남녘동포들과 상당수 해외동포들은 이 사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그러한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시켰고, 그런 사실을 알려고 하는 자체를 범죄시하여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우리 민족을 분단시키려는 정책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건설하기 위하여 1948년 6월29일부터 7월5일까지 제 정당, 사회단체들 지도자협의회를 발기하여 대책을 숙의하고 남과 북 전 지역에서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한 다음 북녘에서는 8월25일, 남녘에서는 미국에 편승한 이승만 세력의 파쇼탄압 정책으로 이들의 눈을 피해 7월20일까지 서명형식의 선거가 이뤄졌다.
이 같은 남녘의 이승만 세력의 탄압 속에서도 범민족 연합정권을 위한 선거가 실시 되었던 것은 기적과 같았다. 그 결과 남녘에서는 총유권자의 77.52%(6,732,407명)가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참가하여 1,080명의 대의원(지금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이들 대의원들(1,002명)이 8월21일 황해도 해주에 모여 대표자 회의를 열고 이 중 360명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하였다. 북녘에서는 총유권자의 99.97%가 총선에 참가했다. 이에 기초하여 1948년 9월2일 남북 대의원들이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 소집되었고, 그리고 일주일 후인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조선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 이후 세대들인 남녘 동포대중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비롯하여 그 이후 역대 집권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런 사실을 밝혀주지 않았고 이남의 그 어느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 같은 사실들을 전혀 다루지 않고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다.
남북 총선이 실시되어 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미국 지배세력과 이에 편승한 이승만 세력은 남녘 동포들을 극심하게 탄압했다. 여운형 선생은 서울 한 복판에서 흉탄에 쓰러졌다. 민족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정부를 바라는 일반 동포들은 무참하게 탄압 받아왔다.
한편 미국 지배세력에 편승한 이승만 세력은 군 통수권을 포함하여 모든 주권을 미국에 넘겨주고 허수아비 정권으로 존재하며 철저하게 사대주의 정책을 일관해 왔다. 군사주권을 장악한 미국은 분계선 주위에서 모종의 움직임을 보여왔다. 1949년 한 해에 황해도 벽산지역으로부터 강원도 양양지역에 이르는 분계선상 이북 지역으로 침습해 들어 간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이 한 해에 무려 1,860차례 크고 작은 침습사건들이 발생했다.그 연장 선상에서 다음해 코리아 전쟁이 터졌다.
김일성 주석은 이 같은 상황에서도 외세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심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대단결의 장을 마련하려고 불철주야 움직였다. 1949년 5월 초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체 결성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를 개최할 것을 남녘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에게 호소하여 5월25일 1차 회의를 갖고 6월26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반대하던 미국은 1949년 10월 또 다시 코리아 문제를 유엔 제4차 총회에 상정시켜서 이른바 <유엔코리아위원단>의 권한을 군사분쟁과 관련된 감시, 보고의 책임을 지게 하는 데까지 확대하는 한편 일본기지에 있는 미 극동 군의 역량을 강화하고 남한 군대를 급격히 강화하여 8개 사단 중 5개 사단을 3.8도선에 배치하고 모종의 북진태세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김일성 주석은 그러한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1950년 6월7일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여기에서 <평화적 조국통일방책 추진에 관한 호소문>을 통하여 8월5일부터 8일사이에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적 최고 입법기관을 창설하며 8.15해방 5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제1차 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일선 주석은 이어서 1950년 6월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결정을 거쳐 <평화적 조국통일 추진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남북입법기관의 단일기구화를 제언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미 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세력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평화적 통일 대신에 전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시점 이후인 1954년 10월30일 김일성 주석은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 회의에서 평화통일문제를 위해 정당, 단체 및 각계 각층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기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최고입법기구의 합동회의 소집을 위한 호소문을 채택하도록 했고, 그 다음 해인 1955년 3월 다시금 각종 군사조약의 철폐와 남북무력축소, 평화통일 문제를 위한 토의에 대한 협상을 제기했고, 이후 1956년 4월에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보고에서 이승만 파쇼정권을 반대하는 한편 전체 애국역량을 망라한 통일전선 실현을 위한 남북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제기했다.
한편 남녘에는 1956년 11월10일 조봉암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보당이 출현하여 처음으로 외세의존적인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거부하고 자주적인 입장과 자세를 보였다. 이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 후보를 위협하며 2백만 표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남녘의 민심을 반영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6년 1월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당수를 사형에 처했다. 이승만 정권은 드디어 1960년 3.15부정선거를 자행하였고, 이에 분노한 남녘 시민과 학생들은 4.19의거를 일으키고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은 1960년 8.15광복 15주년을 맞아 시종일관하여 자주적 평화통일의 기본방침을 재천명하며 과도기적 대책으로 남과 북의 연방제를 실시할 데 대하여 제안하면서 주로 경제와 문화적인 공동개발 사업을 논의하자고 제안했고,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서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민족대단결>노선을 보다 구체화한 방안을 제시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 남녘 상황과 주변정세는 다소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1971년 남녘 대선기간 <평화통일에 대한 구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후보와의 대결에서 540만 표를 얻어 90만 표 차이로 육박하며 위협했다. 이 당시 김대중 선생은 비정치적 문화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의 실현 등을 내용으로 하는 <3단계 통일방안>을 내 놓았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시기인 1971년 4월13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5차회의에서 <현 시기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촉진시킬 데 대하여>를 토의하고 8개 항목의 구국방안을 제기했다. 이 때 중국은 미국과 화해 움직임을 보였고, 1971년 7월15일 닉슨의 중국방문 계획이 발표되었다. 중-미간의 탁구외교가 전개되었고,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문화교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한 때 김일성 주석은 남녘 당국을 향해 일련의 협상을 제안했다.
《우리는 남조선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습니다.》(김일성 저작집 제26권, 232쪽)
김일성 주석은 1971년 8월6일 연설을 통하여 과거불문하고 남북 당국자들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 결과 협상의 새로운 장이 마련되었다. 남녘에서 8월12일 적십자회담 제의형식으로 응답했고, 그 이듬해인 1972년 5월3일 남북당국자간의 비밀접촉이 이뤄졌다. 이 접촉에서 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이 합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하여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거대한 통일운동의 움직임이 물결쳤다. 이를 방해하는 미국의 각본이 또 다시 등장했다. 미국 당국은 1973년 6월23일 남녘의 하수인 정권을 움직여 워싱턴 디씨에서 모종의 공작을 토의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과 북을 유엔에 동시가입 시키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성명이 나오자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 5대 방침>이 천명되었다.
《우리가 내 놓은 조국통일 5대 방침은 북과 남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의 완화, 북과 남 사이의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의 실현, 북과 남의 각계 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 민족회의 소집, 고려연방공화국의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연방제의 실시, 단일한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김일성 저작집 제28권, 398쪽)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에 대한 염원은 언제나 뜨거웠다. 이것을 위한 방도로서 그의 <민족대단결>사상은 그의 전 생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자주적 입장과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힘은 항상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남북관계 문제는 무엇이든지 <민족대단결>로 풀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해 왔다. 1980년대도,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심지어는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그 찰나까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민족대단결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김일성 주석은 1980년 로동당 제6차 대회를 통해 <고려민주연방 공화국창립 방안)을 내 놓았다.
핵심적인 내용은 "북과 남이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세우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며,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하자"는 것이다. 이 방안은 남북한이 취해야 할 통일의 원칙, 통일의 조건, 연방국가에서의 정부 형태와 역할, 통일국가의 명칭과 성격, 통일정부의 시정방침 등을 담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통일의 원칙과 조건에 대해 "통일은 반드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의 군사 통치 청산과 사회민주화 실현, 남북한 긴장상태 완화와 전쟁위험 제거, 미국의 ´2개 조선´ 책동 저지와 조선에 대한 미국의 간섭종식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방국가에서 통일정부라고 할 수 있는 최고민족연방회의는 북과 남이 파견한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구성하고, 거기에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남북한 지역정부들의 지도와 연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들을 관할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최고민족연방회의와 그 상임기구인 연방상설위원회는 전 민족의 단결•합작•통일의 염원에 맞는 공정한 원칙을 가지고 정치•조국방위•대외관계 문제를 비롯하여 나라와 민족의 전반적 이익과 관계되는 공동의 문제들을 토의, 결정한다는 것이고, 남북한의 통일적 발전을 위한 사업 추진과 모든 분야에서 남북한 사이의 단결과 합작을 실현하는 것도 통일정부의 주요한 기능이라고 해설했다. 그리고 통일정부의 하위정부인 남북한의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지도하에 전 민족의 근본이익과 요구에 맞는 범위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모든 분야에서 남북한 사이의 차이를 줄이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한 연방국가의 국호는 남북한의 공통적인 정치이념을 반영해 ´고려민주연방공화국´으로 하고, 이 공화국은 어떠한 정치적•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통일국가로서 시행해야 할 기본정책으로 북은 다음과 같은 10대 시정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①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성의 견지와 자주적인 정책 실시, ② 나라의 전 지역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 실시와 민족의 대단결 도모, ③ 남북한의 경제적 합작•교류 실시와 민족경제의 자립적 발전 보장, ④ 과학•문화•교육 분야에서 남북한 사이의 교류•협조 실시와 과학기술과 민족문화예술•민족교육의 통일적 발전, ⑤ 남북한 교통•체신의 연결과 자유로운 이용 보장, ⑥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과 전체 인민들의 생활 안정과 복리증진, ⑦ 남북한 사이의 군사대치상태 해소와 민족연합군 조직을 통한 민족보위, ⑧ 해외동포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 옹호, ⑨ 남북이 통일 이전에 다른 나라들과 맺은 대외관계의 올바른 처리, ⑩ 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 실시 등이다.
김일성 주석은 남녘이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통 큰 자세를 보였다. 1984년 8월말부터 9월초에 들이 닥친 남녘의 대홍수 사태는 그 피해가 막심했었다. 그 당시 이북 당국은 5만석의 쌀, 50만 미터의 천, 10만 톤의 세멘트, 기타 의약품 등을 빠른 시간에 지원했다. 그 때 미국은 2만 달러 상당의 구제 금을 지원했고, 일본은 10만 달러 상당의 구호품을 보냈다. 이 때 북녘에서 지원한 물품들은 1천8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구호품으로 집계되었다.
이북 당국은 조국통일문제와 관련하여 3대헌장을 중요하게 다뤄왔다. 조국통일 3대헌장이라고 하면 《7•4남북공동성명》,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설방안》과 함께 《전 민족대단결10대 강령》을 말한다.
핵심은 남북이 상호존중과 양보의 정신으로 모든 문제를 민족적 견지에서 해결해 전 민족의 폭넓은 단합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전 민족대단결10대 강령》은 북이 통일방안으로 상정한 것인데 이것은 곧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 형태의 연방제 통일방안의 기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전 민족대단결 10대강령은 1993년 4월7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을 위한 전 민족대단결10대 강령》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전 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2)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하여야 한다.
(3)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4)동족 사이에 분열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 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야 한다.
(5)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6)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
(7)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이롭게 이용하는 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8)접촉, 내왕, 대화를 통하여 전 민족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하여야 한다.
(9)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남, 해외의 전 민족이 서로 연대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서거(1994.7.8) 이후 국정 전반을 선군 정치의 구도아래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조국통일 문제에 관련하여서는 1997년 8월4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고 강조하면서 (1)조국통일의 3대원칙(1972.7.4), (2)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1980.10.10), (3)전 민족대단결 10대강령(1993.4.7)을 한데 묶어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정립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철저하게 관철(1997.8.4)하는 통일정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왔다. 1998년 4월18일에는 역사적인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1948.4.19~23) 제50주년을 맞아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을 중앙연구토론회에 보낸 서한을 통하여 포괄적으로 천명했다.
우선 (1)민족자주의 원칙을 견지하고, (2)애국 애족의 기치 밑에 단결하며, (3)북남 관계를 개선하고, (4)외세의 지배와 반통일 세력을 반대해 투쟁하며, (5)전 민족의 접촉과 대화, 연대연합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 5대 방침을 주체사상에 의하여 풀이하며 <민족대단결>을 역설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청년시절부터 사대주의를 배격하면서 주체적 입장에서 민족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4월5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한 담화를 통해서도 《사대와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사대주의의 위험성과 해독성을 똑똑히 알고 앞으로도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주체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계속 힘있게 밀고 나가야 하며 사대주의의 자그만 한 표현도 반대하며 비타협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통일을 위한 입장과 자세도 김일성 주석의 통일철학을 일관적으로 추진하고 체현하여 왔다.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1972년 7월14일)를 통해 《조국통일 3대원칙을 관철하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하자》고 힘주어 말했고, 그 이후 우리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우리 민족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 앞에서 한 연설(1989년 12월28일)을 통해 《조선민족 제일주의 정신을 높이 발양시키자》고 하면서 “조선민족 제일주의 정신은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민족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조선민족의 위대성을 더욱 빛내여 나가려는 높은 자각과 의지로 발현되는 숭고한 사상감정이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 생명은 자주성이 담보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정치사상 철학이었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풍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온 것도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지켜 외세의 간섭이나 지배를 타파하고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역량을 담보하려는 것이 그의 주요 목적이라고 분석된다. 이것은 김일성 주석의 정치철학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특히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찰하자는 입장으로 일관해 온 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통일정책이다.
그 연장 선상에서 이뤄진 것이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2000년 6월15일)이었고, 그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하여 이뤄 낸 평화번영을 위한 10.4선언(2007년 10월4일)이었다. 이 같은 선언들도 모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민족대단결>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된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민족대단결 사상>은 지금 비록 미국과 이명박 정권의 방해책동으로 도전 받고 있지만 역사적인 6.15선언과 10.4선언의 정신과 그 실현은 반드시 이뤄질 것으로 확신된다. 해 내외 민심은 허위와 진실을 가리며 <민족대단결>의 장으로 쏠리고 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민족대단결 사상>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북녘 지도자들의 정치철학과 그 발자취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터득하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의 대문을 열어 제 끼는 열쇠가 된다.(끝)
김일성 주석 탄신일 97돌이 되는 2009년 4.15. 이북동포들은 이날을 최대의 명절로 기념한다. 사진은 이날 평양시내 인민대학습당 앞 광장서 한 시간 정도의 폭죽을 터뜨리며 축하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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