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김일성 주석 알면 통일의 대문 열린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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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9-04-14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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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추억한다
1990년도에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면서 여러 가지를 문의했었다. 먼저 칠골교회 창립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김 주석께서 강희원 부총리에게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님을 따라 다니던 교회당이 칠골에 있었는데 찾아보시라”고 했다. 김주석의 어머니는 강반석 여사로 칠골교회에 나가셨는데 그 곳은 김성락 목사의 어버지가 시무하던 교회였다. 그 곳을 찾아가서 노인들에게 위치를 찾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 동리에 살던 노인들이 그 교회의 위치를 발견했다. 그 자리에 지금 칠골교회당이 건설되어 있다. 김주석은 강반석 어머니를 따라 주일학교에 나가신 것이다. 그분이 평양을 떠나 만주로 가서는 한인교회에 참석했었고 교회청년회 회장직을 했었다. 당시는 17세였다. 중국 경찰에 의해 공산주의자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되었을 때 그 교회 담임목사인 손정도 목사의 주선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어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그 때부터 반일투쟁이 시작되었다.
“반일투쟁이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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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단결의 지도자, 김일성 주석 |
일본 자민당의 우쯔노미야가 우리를 찾아와서 일본의 죄를 사과하고 친교를 원했어요. 그 후 자민당에서 탈퇴했지요. 일본이 다시 강대국이 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선문제요. 그래서 조선의 통일을 적극 반대해요. 그들이 솔직히 내놓고 말해요. 남조선에서 반미감정 뿐만 아니라 반일감정이 나타나야 해요. <피바다>가 반일감정을 표시했지요. 일본사람들이 우리의 성까지 고치면서 우리 민족을 멸시했어요.
내가 왜 이광수와 최남선을 반대하는가 하면 그들이 일본의 동족화운동에 앞장선 반역자들이야요. 우리 인테리들이 반역자가 된 겁니다. 우리가 해방 후 제일 큰 문제가 인테리였지요. 평양에는 대학교, 전문학교가 없었어요. 자연과학 계통의 인테리가 12명 뿐이었어요. 해방 후 기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었어요. 김회일 등 네 사람 뿐이었어요. 그분을 교통위원장으로 세웠지요. 기관사는 없고 화부 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로동당을 창설하고 당기를 만들 때 노동자와 농민을 대표하고 인테리를 상징하는 붓대를 가운데 넣었지요. 인테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요. 그 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나는 우리식대로 해야 된다고 고집했지요. 쏘련이나 남의 본을 따르지 않고 우리식대로 한 것이 매우 다행이었지요. 남의 것을 배우되 우리가 입에 넣고 먼저 씹어보고 우리 구미에 맞는 것이면 먹고 아니면 뱉아 버려야 해요. 해방 후 인테리는 대부분 서울에서 넘어왔어요.
이승만은 미국을 위했지만 김일성은 자주적이지요. 지금은 우리나라에 인테리가 145만명이고 매해 늘어나고 있어요. 인테리는 우리의 큰 자원입니다. 로동당 깃발에 붓대를 포함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동구의 변화, 중국의 내란소동, 러시아의 내정문제 등등.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제없습니다.
조국은 튼튼합니다. 수령, 당, 인민이 하나로 뭉쳐 있어요. 우리 사회에는 미국 모양으로 빈부차이가 없고요. 미국에는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들, 강도, 아편쟁이들, 에이즈 등등 못된 것이 다 모인 곳입니다. 왜 미국이 남의 나라에 가서 간섭을 해요? 중동나라에 가서 왜 간섭을 해요? 쏘련이 약해지기 때문에 전세계를 통치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위험한 행세입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미국은 독점자본주의자들이 지배하지요. 우리는 주체사회주의입니다. 여러분도 주체사상을 배우세요.
남조선은 미국의 속국 노릇해요. 나라의 군대는 그 나라를 통솔하는데 남조선의 군대는 미국이 통치해요. 그것은 독립국이 아니요. 남조선 인민들은 모두 민족통일을 원하지만 미국의 지배 밑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요. 대중은 반파쇼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원해요. 전대협의 구호는 정당해요.”
“문익환 목사와 회담하시면서 중요한 요건이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자, 김주석 말씀이 “우리는 고려연방제 통일을 원한다고 하니깐 문목사도 동감이라고 했어요. 그래 악수했지요.”
김주석은 쌍방의 제도를 그냥 두고 두 제도 밑에서 연방제통일을 주장했다. 남조선의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외국의 투자도 인정했고. 김주석의 주장은 “돈 있는 사람은 돈,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서 통일건국하자”는 것이었다. 연방제를 해서 남과 북의 수상이 순회식으로 바꾸어가면서 하자는 것이다. 위성국가가 되지 말고 자주적, 중립국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주변에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이 있는데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단결을 원칙으로 할 것을 역설했다.
김주석 말씀이, “이후락이 왔을 때 이후락도 이런 원칙에 찬동하여 결국 7.4남북공동성명이 됐다. 문익환 목사도 7.4남북공동성명을 찬성했다. 그런데 왜 노태우가 잔인하게도 늙은 목사를 10년이나 감옥에 잡아두는가? 그것은 통일을 반대하고 영구히 분단상태를 계속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은 하나다>란 구호를 가지고 누구와도 손잡고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하시었다.
계속해서 김주석은 “우리는 조선의 넋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여운형 선생과의 관계를 알리었다. “려운형 선생이 세 번이나 방북했었는데 특히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서 딸과 아들을 평양에 보내겠다고. 딸이 먼저 와서 그 애를 쏘련에 보내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우게 했고 돌아와서 좋은 일을 담당하고 있지요.”
다시 1972년 이후락, 장기영, 최규하가 방북했을 때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들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김주석께서는 “새마을운동은 본격적으로는 농민을 잘살게 해야 하지 않겠소? 농장을 수리화해야 하는데 우리가 경험이 있으니까 도와줄 수 있지요. 그 뿐만이 아니고 우리 해안에 물고기가 많은데 남조선에서 잡아가도록 할 수 있고요. 또 우리에게는 광산이 많은데 공동개발할 수도 있지요.”하고 여러가지를 제안했다. 김주석의 <합작>이란 말을 <협조>하자고 장기영이 제안해서 김주석은 좋다고 했다.
이처럼 김주석께서는 민족통일에 대해서 상대와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을 언제나 실천했다. 내게 충고한 말씀은 “미국에서 통일운동하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의 친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요. 우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적대시할 필요가 없어요. 일본과는 달라요. 우리는 평화적이고 친선관계를 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노력해야 합니다.”라는 것이었다.
미국을 적대시할 필요가 없고 친선적이고 우호관계가 필요하다는 북의 입장은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왔다. 그 후 우리들의 통일운동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요즘 북미관계가 평화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은 매우 다행으로 생각된다. 이 길은 북에서 원하는 평화의 길이 될 것이다. 이 길은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믿는다.
김일성 주석은 한평생을 애족애국으로 헌신했고 자기 생활의 괴로움과 고통을 망각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주화,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해서 희생하며 봉사해 오셨다. 김일성 주석의 넋은 영원히 우리 민족과 함께 부활하여 존재할 것이다.
[출처: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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