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미국에서 내년 9월 북미정상회담설이 흘러나오면서 정상회담의 상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보통 정상회담이라 하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최고 권력자, 대표자 사이에 진행된다. 북한의 헌법 제111조에 따르면 북한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러나 북한과의 정상회담에서 핵심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사회의 모든 것을 대표하고 결정하는 ‘최고 수뇌부’라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
[특별기획]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는 누구인가? ②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추대설과 세습설 사이의 진실
1. 3-3-3 가설의 파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능력을 보여준다
10월 2일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미국에서 내년 9월 북미정상회담설이 흘러나오면서 정상회담의 상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보통 정상회담이라 하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최고 권력자, 대표자 사이에 진행된다. 북한의 헌법 제111조에 따르면 북한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러나 북한과의 정상회담에서 핵심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사회의 모든 것을 대표하고 결정하는 ‘최고 수뇌부’라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현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식 직책은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등이다. 여기서 주요 직책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 1991년,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1997년, 국방위원장은 1998년(재추대) 등 대부분 90년대 들어와 군, 당, 국가의 최고 직책을 맡았다. (국방위원장의 경우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의 실질적 최고 직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결정된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인 1974년이었다.
요즘도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과연 자신의 능력으로 후계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김일성 주석의 자제이라는 이유로 이른바 ‘권력을 세습’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쟁은 최근 들어 많이 수그러들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의 정세 변화와 그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속속 드러나면서 논쟁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미 미국이 얘기한 3-3-3 가설(김일성 주석 사망 후 빠르면 3시간 이내, 혹은 3일 이내, 늦어도 3년 이내에 북한은 붕괴한다)의 허구성이 명백히 드러나고 지금은 부시 대통령조차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현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자로서 능력이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온 수많은 인사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2000년 정상회담을 하고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수용하려 했다”고 했으며, 1998년 방북하고 돌아온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논리가 정연하고 활발하다”고 했다. 미 하와이대 서대숙 정치학 석좌교수도 “그는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고, 지도력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2000년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마담 세크레테리>에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미몽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썼다. 대다수 인사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중동 등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여전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 추대 과정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2. 국가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 추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가 국가 지도자에 적합한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가 지도자에 적합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는 국가 지도자에 대한 방대한 이론을 전개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국가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간략히 소개하는 정도로 전개하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31일 CBS 개국 5주년기념 특별대담에서 “현재 우리가 지닌 문제에 대한 식견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또 남북, 민족 문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빈부의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이 정부를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무너지는 중간층 역시 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인터넷 언론인 ‘사상계’는 2006년 12월 1일부터 ‘차기 대통령이 갖춰야할 조건’을 연재하면서 대통령의 조건으로 ▲ 시대정신 ▲ 국가 비전 ▲ 리더십 ▲ 도덕성 ▲ 민족통일관 ▲ 정체성 등을 꼽고 있다.
또 지난 3월에 미국 에이피-입소스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미국 유권자들의 55%가 2008 미대선에서 정직성과 같은 후보자 개인의 성품을 가장 우선시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국가 지도자의 조건, 기준으로 첫째, 국가 철학이 있어야 하며 둘째, 통치 능력(리더십)이 있어야 하며 셋째, 올바른 성품(도덕성 등)을 가져야 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통치 능력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대통령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프린스턴 대학교의 프레드 그린슈타인 정치학 교수는 자신의 책 ‘위대한 대통령은 무엇이 다른가’를 통해 대통령이 갖춰야 할 리더십의 기준으로 ▲ 의사소통능력 ▲ 조직능력 ▲ 인식능력 ▲ 통찰력 ▲ 정치력 ▲ 감성지능 등을 꼽았다.
이런 기준들을 가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 추대 전반을 살펴보도록 한다.
3.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 추대 과정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지목된 1974년까지 어떤 활동을 통해 능력을 보여주었을까. 통일부 자료 등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공식 활동으로 고등중학교(1957~60) 시절 조선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1967년 과장, 1970년 부부장, 1973년 7월 부장, 같은 해 9월 중앙위원회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1972년 10월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공통된 부분만 취합함) 활동 부서는 주로 선전선동부, 조직지도부였다.
이처럼 학창시절 청년운동의 경험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노동당 활동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토대로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김일성 주석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일부에서는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후계자에 추대되었다고 주장하나 사실과 다르다. 6차 당대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개 행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이다.)
그렇다면 후계자는 어떤 일을 하는가. 이교덕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의 <북한의 후계자론>(통일연구원, 2003.12)에 따르면 북한에서 수령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역할은 ▲ 수령의 사상을 옹호, 고수, 계승, 발전시키고 ▲ 혁명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며 ▲ 노동계급의 당을 강화,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러한 역할을 어느 정도 해냈는지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며 일단 후계자 추대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식 직책들을 살펴보자. 1980년 까지 당 중앙위 위원,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당 중앙군사위 위원 등의 직책을 갖게 되었으며 1982년부터는 지금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1991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1992년에는 공화국 원수로, 1993년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잘 알려진 것처럼 3년상을 치렀으며 그 후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추대되고, 이듬해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되었다.
이런 과정을 종합해볼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 승계 과정은 크게 ▲ 후계자로 지목되기 전단계(~1974) ▲ 후계자로서의 활동 단계(1974~1997) ▲ 공식적인 국가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어 활동한 단계(1997~) 등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기간은 흔히 ‘유훈통치’기간으로 보기 때문에 2단계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앞서 제시한 국가 지도자의 3가지 기준이 각 단계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4.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가지 국가 지도자의 기준에 적합한가
(1) 국가 철학이 있는가
국가 철학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기간에 진행한 사상이론 연구활동을 알아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상이론 연구분야에서 진행한 활동은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과 밀접히 연관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후계자는 ‘수령의 사상을 옹호, 고수,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따라서 김일성 주석이 창시한 주체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역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후계자로 추대되기 전인 1단계에서 활동을 살펴보자.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논문, 연설, 담화 등을 모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 저작집>이 1단계 시기에만 3권이 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총 84편의 논문 등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을 널리 받아들여 김일성주의 학습에서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자’(1973.11.5)와 같은 주체사상 관련 연설, ‘정치도덕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데 대하여’(1967.6.13)와 같은 사회주의 이론 연구, ‘당일군은 높은 정치실무적 자질을 갖춘 실력가가 되어야 한다’(1971.5.18)와 같은 당사업분야 지침, ‘미제의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여 전투동원준비를 철저히 갖추자’(1968.2.2)와 같은 군사분야 지침, ‘조국통일 3대원칙을 관철하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하자’(1972.7.14)와 같은 통일분야 지침, ‘상품공급사업을 개선강화하자’(1967.4.7)와 같은 경제분야 지침, ‘4.15문학창작단을 내올데 대하여’(1967.6.20)와 같은 문학예술분야 지침, ‘교육사업을 개선하여 유능한 민족간부를 키워내자’(1966.6.17)와 같은 교육분야 지침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연구와 지침 등이 나온다. 조선노동당 초기 활동부터 다방면에서 많은 연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이론활동은 학창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2006년 12월 5일자 연합뉴스 보도 <북 “북중 역사학자 발해인들 대부분 고구려 유민 고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학창시절인 1960년 10월, 당시까지 정설이었던 신라의 삼국통일설을 부정하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신라라는 두 주권국가가 존립하였으므로 역사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주장을 ‘삼국통일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이 견해는 최근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교과서에도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상이론활동 가운데는 주체사상과 김일성주의, 특히 수령론에 대한 연구가 중심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엔케이(NK)조선 홈페이지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요활동으로 1962년 ‘어은동에서 군사야영’을 꼽고 있다.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99년 출판한 <김정일동지략전>에 따르면 1962년 9월 어은동에서 군사야영을 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세포총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여기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절대적 지위와 수령이 노는 결정적 역할, 노동계급의 당의 혁명적 본성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로부터 출발하여 당의 통일단결의 사상적 기초와 중심에 대하여” 해명하였다고 한다.
또 통일연구원의 최진욱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일 연구 : 리더쉽과 사상(I)>(통일연구원, 2001)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전국의 <당력사연구실>을 <김일성동지 혁명연구실>로 재편하고 <김일성동지 혁명연구실 도록>을 편찬하는 등 사상사업을 진두지휘’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계자 지명 전부터 사상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음으로 후계자 기간인 2단계를 살펴보자.
2단계의 두드러진 사상이론활동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이라 하겠다. 사실 북한은 이 시기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2000년 5월 30일자 문화일보 기사 ‘김정일 / 사상과 통치철학’에는 “주체사상의 체계화”는 “김정일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정일은 수령이 혁명의 뇌수라는 혁명적 수령관, 수령-당-대중은 일심동체라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을 정립하면서 주체사상을 일관된 체계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실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시기에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3.31)를 비롯하여 ‘주체철학의 이해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1974.4.2), ‘김일성주의의 독창성을 옳게 인식할데 대하여’(1976.8.11), ‘주체사상은 인류의 진보적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상이다’(1986.6.27),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1986.7.15),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1996.7.26) 등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이 가운데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중요한 논문으로 취급되는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략력>(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당역사연구소, 평양출판사, 1996)에 따르면 “주체사상을 전면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하였으며 그 원리들을 가일층 심화발전시킨 불멸의 주체사상총서”라고 한다.
또한, 1974년 2월 전국당선전일꾼 강습회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란 결론을 통해 김일성 주석의 사상을 ‘김일성주의’로 명명, 이를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의 체계’로 정식화하였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기간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것 외에도 여러 분야의 이론 연구 활동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논문으로 ‘영화예술론’(1973.4.11), ‘조선노동당은 영광스러운 <ㅌ.ㄷ>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이다’(1982.10.17), ‘현시대와 청년들의 임무’(1988.10.12), ‘무용예술론’(1990.11.30), ‘건축예술론’(1991.5.21), ‘음악예술론’(1991.7.17), ‘미술론’(1991.10.16), ‘주체문학론’(1992.1.20), ‘혁명적 당건설의 근본문제에 대하여’(1992.10.10),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 수 없다’(1993.3.1), ‘사회주의는 과학이다’(1994.11.1)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3단계를 살펴보자.
3단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되게 주체사상을 한층 심화, 발전시킨 바탕 아래 ‘선군사상’, ‘선군정치방식’을 정식화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3년 1월 29일 ‘선군혁명노선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혁명노선이며 우리 혁명의 백전백승의 기치이다’를 발표하는 등 선군사상과 선군정치방식을 정식화하였다.
일각에서 선군사상을 주체사상과 대립, 단절되는 사상이라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선군사상이 주체사상과 대립, 단절되는 사상이라면 현재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징후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의 후계자론을 보더라도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후계자는 수령의 사상을 ‘옹호, 고수, 계승, 발전’시키는 역할이 있을 뿐 선대 수령의 사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북한이 주장하는 후계자론을 북한이 스스로 거스른다면 현 정권의 정당성을 자신이 부정하는 형국이 된다. 아직까지 북한이 후계자론을 수정했다는 발표도 나오지 않았다. 결론내리자면 선군사상은 주체사상과 대립, 단절되는 사상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맞게 계승, 발전시킨 사상이다.
선군사상과 관련된 사상이론활동 외에도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할데 대하여’(1997.6.19),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1997.8.4),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자’(1998.4.18) 등 다방면의 연구 활동이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북한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상이론방면에서 적지 않은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되어있다. 통일연구원 이교덕 연구위원은 자신의 책 <북한의 후계자론>에서 김일성 주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이론활동에 대해 평가한 것을 소개하였다.
“김정일동지는 비상한 탐구력과 정력을 가지고 사상리론활동을 벌려 우리 당의 주체사상을 자주시대의 위대한 지도사상으로 빛내여 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혁명의 요구와 새로운 자주시대 인민들의 지향을 반영하여 주체사상을 내놓고 그것을 지침으로 하여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여 왔으나 주체사상의 원리를 종합체계화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김정일동지에 의하여 빛나게 실현되였습니다.“
(<북한의 후계자론>, 이교덕, 통일연구원, 2003. p. 40.)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자신의 사상이론방면 성과를 기반으로 확고한 국가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국가 철학의 내용은 당연히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으로 구체적 내용은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2) 통치능력이 있는가
통치능력은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며 사회와 시대에 따라 강조되는 부분도 다르다.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프레드 그린슈타인 교수의 기준인 ▲ 의사소통능력 ▲ 조직능력 ▲ 인식능력 ▲ 통찰력 ▲ 정치력 ▲ 감성지능 등을 중심으로 분석해본다.
① 의사소통능력
먼저 의사소통능력을 보자. 대표적인 의사소통수단은 말과 글이다. 즉, 대화 능력과 집필, 독서 능력을 의사소통능력이라 할 수 있다.
한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절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화 능력에 대한 갖은 억측이 난무하였고 심지어 일부 보수언론들은 심리학자까지 동원하여 왜곡된 선전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수용하려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 “대화하기 편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 “소탈하고 솔직하며 시원시원하게 합의하고 이끌어내는 스타일”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
결론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대화능력에 비상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집필의 경우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많은 논문 경험을 토대로 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체문학론’, ‘영화예술론’ 가운데 ‘1장 생활과 문학’ 등 집필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북한에서 외무상과 부총리 등을 역임했던 허담 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은 자신의 유고집 <김정일위인상 1>(조선노동당출판사, 1995)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문풍을 ‘명백한 주의주장과 당당한 논리, 논리전개에서의 일목요연성, 이론풀이에서의 통속성, 언어의 인민성, 자료를 안받침해주는 친절성’으로 설명하고 이 가운데 특이한 것은 ‘거대한 사상을 집약화하여 일목요연하게 표현’하는 ‘비상한 함축력’이라고 하였다. 2005년 9월 11일자 평화신문 보도 ‘북한 사회 이것이 궁금하다 - 언어생활’에 따르면 1986년 북한에서 ‘김정일 문풍 따라 배우기’가 진행되었고 그 내용은 ‘우리말 어휘와 속담 등의 적절한 사용, 짧은 형식의 문장과 전투적 표현 등’이라고 한다.
독서능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정일 연구 : 리더쉽과 사상(I)>(통일연구원, 2001)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주일에 접하는 문건의 분량은 대략 500쪽 이상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김정일위인상 1>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대한 독서량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번 책을 잡으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을 하며 한나절에 두툼한 책을 두 권이나 읽는 속독 기술이 있으며, 심지어 소설을 녹음해서 들으면서 다른 책을 읽는 식으로 동시에 두 권을 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1988년부터 13년 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다는 후지모토 겐지의 책 ‘김정일의 요리사’에도 ‘장군이 부하 참모들과 초대소에 가서 휴식을 취할 때도 엄청난 분량의 서류가 팩시밀리로 날아왔다. 장군은 참모들이 술에 곯아떨어지면 그때부터 새벽까지 집무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겐 영화를 보라고 하고는 슬쩍 빠져나와 팩스로 날아온 서류를 하나씩 확인하고 검토하는 등 새벽 3~4시까지 일을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처럼 대화나 집필, 독서능력 등 의사소통능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가 지도자로서 필요한 자질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보인다.
② 조직능력
다음으로 조직능력을 보자. 프레드 그린슈타인 교수는 조직능력을 ‘동료를 규합하고 그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욱 가까운’ 친구, 동지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행본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김영사, 2000)을 보면 북한은 1947년 혁명가유자녀학원을 만들고 이듬해 만경대혁명학원을 개설, 항일운동을 하다 숨진 사람들의 자녀들을 데려다 돌봐주고 공부를 시켰는데, 당시 취학 전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학원에 자주 가서 함께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아예 얼마간 학원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후에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과 김정일의 관계를 ‘혈연적 연계’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욱 가까운 사이”라고 밝혔다. 또한 “만경대혁명학원 1, 2기생들이 1970년대 초 당, 정, 군의 중간층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이 1970년대에 김정일과 함께 3대혁명소조운동을 주도해 세대교체를 이끌었다”고 한다.
3대혁명소조운동이란 북한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내놓은 기본 전략적 노선인 3대혁명(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하기 위해 당과 국가기관의 간부들, 과학자, 기술자, 청년인테리로 3대혁명소조를 구성, 현지에 직접 내려가 장기간 사업하면서 경제를 비롯한 북한사회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1973년 2월 1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결정한 운동이다. 애초에 3대혁명소조운동을 제기한 사람은 김일성 주석이었으나 1974년 2월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지휘하였다. 1974년 2월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추대된 시기다. 따라서 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국가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검증하는 첫 사업이라 하겠다. 3대혁명소조운동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3대혁명소조운동을 벌리기 시작한지 2년이 되었는데 그 기간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 수행에서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으며 전반적 사회주의건설에서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1975년 3월 3일 공업열성자회의에서 한 김일성 주석의 평가. <3대혁명소조운동에 관한 연구>, 탁용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4, p78)
1984년 9월 25일자 노동신문에 따르면 당시까지 소조원이 총 수는 10만 8,700명, 활동 중인 인원은 4만 1,600명, 이 가운데 조선노동당 입당자 1만 1,600명, 공화국영웅 1명, 노력영웅 23명, 국기훈장 1급 1,124명 등 많은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계자로서의 첫 사업에서 큰 성과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등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 그의 조직능력이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3대혁명소조운동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직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2단계 시기의 예라면 1단계 시기의 예로 1970년 제5차 당대회 개최 준비 과정을 들 수 있다. 앞서 참고한 단행본 <곁에서 본 김정일>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당대회 준비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중략)... 당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제출할 지난 당대회 이후의 총결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김정일은 거의 완벽하게 처리했다. ...(중략)... 통상 토론회의 경우 토론자들은 회의 개최 2개월 전에 한자리에 모여 토론준비를 했다. 이 준비과정에서 김정일은 각자의 토론 내용을 청취해 이를 수정하거나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제5차 당대회를 계기로 김정일의 당 장악력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호칭도 ‘부부장 동지’에서 ‘지도자 동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중략)... 빨치산 1세대들은 김정일의 능력과 능숙한 용인술(用人術)에 만족했다고 한다. 이들이 김정일의 등장에 반대하기보다 오히려 김일성에게 조속히 김정일을 후계자로 공식 확정할 것을 권유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김영사, 2000)
연합뉴스에서 펴낸 <김정일 100문 100답>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사스타일을 ‘친인척 배제’, ‘합리적 인사’ 등으로 표현하였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직능력은 후계자로 추대되기 전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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