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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독도는 조선민족의 고유령토이다 (5)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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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8-07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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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민족끼리> 웹사이트에서 독도에 대하여 문답 형식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였습니다. 이에 기획 연재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웹사이트

독도는 조선민족의 고유령토이다 (5)

일본인과 일본정부의 증언을 통해 본 조선의 섬 독도 (ㄱ)

-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후보원사 교수 박사 김유철선생과 한 기자의 문답 -

물음: 지금까지 독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령토였다는 력사적근거에 대하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시간에는 독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 신성한 령토라는데 대해 일본에서 인정한 사실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대답: 예. 앞에서도 어느정도 이야기가 있었지만 독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도 신성한 령토라는데 대해서는 일본인들과 일본정부에서도 인정한바 있습니다.

1660년 9월 5일 일본의 어업가인 오다니는 《송도(독도)도해면허》를 신청하기에 앞서 동료인 무라가와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도지내송도》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울릉도안의 독도》라는 뜻으로서 당시 울릉도가 조선의 땅인 조건에서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인정한것이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1667년 이즈모지방의 관리 사이또가 번주의 명령으로 일본의 서북경계를 현지답사하고 제출한 보고서인 《은주시청합기》라는 고문헌에도 나오고있습니다. 이 고문헌은 독도가 나오는 일본의 최초문헌으로서 여기에는 《두섬(울릉도와 독도)은 무인도인데 고려(조선)를 보는것이 마치 은주(이즈모)에서 오끼도를 보는것과 같다. 그런즉 일본의 서북경계는 이 주(은주, 오끼도)로써 그 한계를 삼는다.》라고 서술되여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밝은 사이또자신이 일본의 서북경계가 오끼도이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령토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쓴 글이였습니다.

1878년 12월 당시 일본외무성 기록국장이였던 다나베역시 《명치》정부가 요구한 독도에 대한 의견서 《송도의지》에서 《송도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명명한 섬이름으로서 실은 조선 울릉도에 속한 우산도이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명치》정부의 《권위》있는 외무성 관리까지도 독도를 분명한 조선의 령토로 생각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됩니다.

독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령토라는데 대해서는 20세기초 일본인들의 진술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시마네현의 물개잡이 어업가인 나까이 요사부로는 독도주변에서 물개잡이독점권을 얻기 위해 1904년 9월 일본농상무성에 《리양꼬섬(독도)차용에 관한 청원》을 제출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독도를 10년기한으로 차용하여 물개잡이독점권을 얻을수 있도록 리조봉건국가와 교섭해줄것을 제기하였는데 그가 독도를 차용 즉 빌려달라고 제기한것은 자기 땅이 아니라 조선땅이라는것을 전제로 하였기때문이였습니다.

나까이자신은 후에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한국의 령유라고 생각했다.》고 명백히 밝히고 그때문에 리조봉건국가에 차용을 하려고 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나까이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후에 일본의 여러 책들에서는 긍정을 표시하였습니다.

우에서 본바와 같이 독도문제에 관여한 일본의 대표적인 관리들과 어업가들의 진술과 증언을 통해서도 당시 일본인들이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음: 그러니까 일본인들속에서는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명백한 인식을 가지고있었구만요. 그렇다면 일본정부에서는 어떤 립장을 가지고있었습니까.

대답: 옛 일본인들과 함께 일본의 력대정부들도 독도가 일본의것이 아니라 조선의 신성한 령토임을 인정하고 확인하였습니다.

실례로 17세기에 일본정부가 발급한 《죽도(울릉도)도해면허》와 《송도(독도)도해면허》라는 《확인서》를 들수 있습니다.

일본의 도꾸가와막부는 1618년과 1661년에 각기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와 《송도도해면허》라는 다른 나라 바다로 넘어갈수 있는 《확인서》를 해주었습니다. 《도해》란 해상월경을 의미하는것으로써 자기 령해내의 고기잡이에는 이런 허가가 전혀 필요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국경을 넘어 외국의 령토인 조선인 울릉도와 독도에로의 항행을 허용한다는 증서로 되며 일본정부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인정하였다는것을 반증해주는 공식확인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위력한 증거는 중세시기 이 이상 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일본이 인정한 또 하나의 력사적사례로서는 1696년 결정과 1699년 문서교환을 들수 있습니다.

1693년 열혈청년 안룡복을 비롯한 애국적인 조선어민들의 완강한 투쟁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에 침입했던 일본인들이 쫓겨나고 오끼섬의 도주와 호끼번주도 궁지에 빠져 독도가 조선령토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 문제는 결국 일본의 당시 실권자인 관백에게 제기되였습니다.

이리하여 도꾸가와막부는 1696년 1월 《죽도(울릉도)와 그밖의 한섬(독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내용은 《그 땅의 지리를 헤아려보건데》 죽도는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가까우니 《일찌기 그 나라 땅이라는것이 의심할바 없다》, 《요나꼬의 어민들이 그 섬에 고기잡이를 가겠다고 청원하기에 허락된것》이지 《당초에 이 섬을 저 나라에서 빼앗은것이 아니다》라고 되여있으며 이 결정에 대해 조선정부에 알려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결정서에서 보이는 《죽도(울릉도)와 한섬》은 명백히 독도로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결정서에 《죽도(울릉도)다음의 한섬이 있는데 송도(독도)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된것을 보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도꾸가와막부도 17세기말에 울릉도와 독도 두섬이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최종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종전에 비법적으로 발급했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도해면허》를 철회하고 울릉도수역에서의 일본인들의 어업과 목재채벌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1698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1도 2명》 즉 한섬에 두 이름이라는데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17세기말 일본의 막부정부가 독도가 저들의 령토가 아니라 조선의 령토임을 명백히 인정하고 조선정부에 확약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됩니다.

기자: 예.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세일본에서는 언제한번 독도를 자기의 령토로 생각한적이 없고 오직 조선의 령토로만 확고히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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