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연재 45]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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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04 18:2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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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45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2015-08-04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45) 대민족회의소집제안과 실현조치>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간첩조작으로 체포 사형 집행된 인혁당 관계자들 (1974)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45)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대민족회의소집제안과 실현조치
조국통일5대방침을 관철하는데서 나선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대민족회의를 시급히 소집하여 대화의 폭을 넓히는것이였다. 대민족회의를 소집하는것은 조국통일5대방침을 실현하며 온 겨레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통일위업을 새로운 단계에로 전진시키는데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중요한 요구의 하나였다.
북과 남의 대화의 전과정은 북남조절위원회와 같은 쌍방의 당국자들이 참가하는 제한된 범위의 접촉과 협상만을 통하여서는 나라의 통일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더우기 북남조절위원회 남조선측 대표단이 외세에게 매달려 《두개 조선》조작과 민족분렬의 영구화책동을 감행하는 남조선당국자들의 리익만을 대변하고있는 조건에서 조국통일문제는 오직 대화의 폭을 전민족적범위에로 넓혀 북과 남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에서 광범히 협의함으로써만 성과적으로 해결될수 있었다.
이로부터 공화국정부는 조국통일5대방침에 밝혀진 대민족회의소집을 위한 투쟁을 통일문제해결의 중요한 고리로 틀어쥐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1973년 7월 24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제59차확대회의는 나라에 조성된 엄중한 정세를 신중히 토의하고 통일의 일념을 담아 대민족회의를 시급히 소집할것을 제의하면서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각계각층 인민들 그리고 해외동포단체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은 공화국정부의 모든 성의있는 노력에 애국적인민들과 민주인사들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는것으로써 대답하여나섰으며 1973년 8월 8일에는 《중앙정보부》 특무들을 파견하여 일본 도꾜에서 망명중에 있던 김대중을 랍치하여 서울로 끌어가는 범죄행위를 감행하였다.
랍치사건은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요구하는 남조선의 애국력량을 말살하기 위한 정치적음모였으며 민족분렬을 영구화하기 위한 매국배족적책동의 일환이였다.
이로부터 북남조절위원회 북측공동위원장은 1973년 8월 28일 성명을 발표하여 남조선《중앙정보부》 깡패들을 더는 대화에 참가시킬수 없다는것을 내외에 엄숙히 선언하고 북남조절위원회에 들어있던 남조선《중앙정보부》 특무들을 제거하고 민족적량심이 있고 쌍방사이의 신의를 지킬줄 알며 평화통일을 원하는 사람들로 교체할것을 제기하였다. 아울러 북남조절위원회에 당국자들뿐아니라 북과 남의 각 정당, 사회단체, 각계각층 인민의 대표들이 참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공화국정부는 그후에도 대화의 폭을 넓히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온갖 성의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은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공화국과의 대화에 성의를 보일 대신 민주와 통일을 지향하는 청년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계속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은 《유신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도, 대화와 통일도 이룩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에 또다시 떨쳐나섰으며 각계각층의 인민들과 민주인사들이 광범히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남조선청년학생들의 1973년 10월투쟁은 남조선전역에서 각계각층 광범한 인민들을 포함하여 여러달동안 계속된 전군중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공화국정부는 남조선당국자들이 대민족회의소집안을 극력 반대하면서 분렬주의책동을 계속 감행하고있는 조건에서 분렬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거족적으로 벌림으로써 그들이 민족적협상의 마당에 나오도록 하는 한편 이미 진행하던 북남대화와 협상을 성사시키며 그 대표구성의 폭을 넓히는 방법으로 대화마당에 민족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73년 10월 28일에 하신 연설 《조국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투쟁으로 쟁취하자》에서와 그후 여러 기회에 하신 연설들에서는 조국통일5대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분렬주의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을 거족적으로 벌리며 광범한 대중적투쟁으로써 남조선당국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릴데 대하여서와 남조선당국자들에게 대민족회의와 북남정치협상회의를 열것을 다시금 제기하였다.
공화국정부는 대민족회의와 북남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기 위한 투쟁을 분렬주의세력을 반대하는 투쟁과 결합시켜 진행하였다.
1974년 8월 6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제61차확대회의는 대민족회의소집방침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한 대책에 대하여 토의하고 대민족회의를 쌍방의 합의밑에 1974년안으로 판문점 또는 우리 나라의 다른 곳에서 열것을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인사들 그리고 모든 해외동포단체들과 해외동포들에게 제의하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북남조절위원회 북측공동위원장은 7. 4공동성명발표 2돐과 3돐에 즈음하여 발표한 성명들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이 우리 나라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을 반대하고 범죄적인 《두개 조선》정책을 즉시 취소하며 《반공》소동과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파쑈적탄압을 중지하고 북남공동성명의 정신으로 되돌아올것을 엄숙히 요구하면서 대화의 폭을 넓혀 북남정치협상회의나 대민족회의를 소집할것을 다시금 제의하였다.
공화국측의 성의있는 노력에 의하여 1973년 12월 5일부터 북남조절위원회 부위원장접촉이 판문점에서 시작되였다.
이 대화마당에서 공화국측은 겉으로는 대화에 나선것처럼 하면서 실은 민족분렬과 《반공》, 인민탄압에 광분하는 남조선당국자들의 죄행을 폭로규탄하고 조절위원회를 개편하는데서 폭넓은 대화마당이 되게 하자는 제의를 남측이 접수할수 없다면 그와는 별도로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자는 새로운 방안을 내놓았다.
공화국의 립장은 대화의 형식이 어떤것이든 그것이 북남 전체 인민의 의사가 론의되는 마당으로 되게 하려는것이였다.
북남조절위원회 부위원장들의 접촉은 1975년 3월까지의 기간에 10차례에 걸쳐 진행되였지만 조절위원회의 확대개편을 집요하게 반대하는 남조선측의 부당한 립장으로 하여 성과없이 결렬되고말았다.
하지만 공화국정부는 어떻게 하나 대민족회의가 소집되도록 인내성있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1976년 7월에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전국적인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며 해외동포들까지 참가하는 대민족회의를 소집할것을 다시금 제의하였다.
공화국정부의 거듭되는 제의들은 북남조선인민들과 해외동포들, 세계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의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단호한 타격을 주고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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