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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창건 60돐, 력사의 현장에서 -4-〉 《조국보위》에 결집한 인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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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9-10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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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군의 조직과 해방전쟁의 수행
 
  조선인민군은 《4.25》를 자기의 창건기념일로 삼고있다. 선군정치의 로선을 추켜든 조선의 군대는 그 뿌리를 1932년 4월 25일 안도에서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에 두고있다.

로동자, 농민의 아들딸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건되였다.(사진은 기념열병식에 참가한 보병부대)
  해방후 조선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시련속에서 단련육성된 혁명투사들을 골간으로 하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아들딸로 현대적정규군이  조직되였다. 2년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필요한 인재와 물질기술적토대가 갖추어졌다. 조선인민군의 조직이 선포된것은 1948년 2월 8일, 이날 평양에서 성대한 기념열병식이 있었다.

  김석창씨(80살)는 그때 열병식에 참가하였다. 해방전 함경북도 성진에 있는 제강소에서 일하던 그는 1946년 10월 보안간부훈련소에 입대하였다. 항일투사들이 지휘관을 맡은 보안간부훈련소는 앞으로 창건될 인민군대의 핵심부대로서 총참모부와 문화부, 포병부, 후방부 등의 기관을 가지고있었다. 김석창씨는 1년간 여기서 군사복무를 하고 1947년 10월부터 정치군사간부양성기관인 평양학원에서 배웠다.

  《학원에는 나와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 있었다. 공장에서 로동을 하던 하층민이나 소작농들, 다시말하여 또다시 나라없는 굴욕적인 노예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총을 들고 싸워야 할 사람들이였다.》

  학원에서는 군사과학, 군사기술과 함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데 교육의 방점을 두었다고 한다. 김석창씨도 《혁명을 하는것은 다른데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형제들을 위해서 하며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한다는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조국의 정세가 매우 긴장하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래서 적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위하기 위하여 《인민이 요구할 때에는 어느때를 막론하고 다 동원할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되여있어야 한다.》는것을 명심하였다고 김석창씨는 회고한다.

  일제가 패망되고 광복은 이룩되였으나 조국의 절반땅은 미국이 강점하였다. 38연선에 진지가 구축되고 외세에 의해 동강난 강토에서 북반부를 향한 군사도발이 매일과 같이 감행되였다. 민족의 정규무력을 창건하는것은 조성된 정세로부터 흘러나오는 사활적요구였지만 당시 종파분자들은 《통일되기전에 무슨 군대가 필요한가.》고 하면서 이를 반대해나섰고 사대주의자들은 다른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쏘련에 의거한것처럼 외국의 원조가 없이는 정규군을 건설할수 없다고 훼방을 놀았다. 항일유격대의 전통을 계승하는 방식으로 인민의 군대를 내올데 대한 로선은 갓 해방된 조선의 형편에서 짧은 기간에 현대적정규군을 조직할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였다.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평양학원 졸업생 김석창씨

  그때 열병대오속의 한사람이였던 김석창씨는 항일의 전설적영웅의 연설을 들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2월 8일 열병식연설에서 인민군대의 성격을 밝히시였다. 항일유격대의 후신이며 로동자, 농민의 우수한 아들딸로 조직된 군대는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외래침략세력과 국내반동세력을 반대하여 싸우는 군대라는것을 뚜렷이 천명하시였다.》

  연설에 관통된 사상은 《자주독립》과 《국방》이였다. 김석창씨는 자기 나라를 지키는 혁명군대의 사상은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져있다고 말한다.

  조선인민군이 조직되였을 때 반동세력은 그것을 동족상쟁의 내란을 일으킬 위험성을 조성하는것이라고 악선전을 일삼았지만 실제로는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들은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계속되고있었다.

  1950년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가 8.15해방 5돐(1950.8.15)을 계기로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남북총선거의 실시를 제의하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300통의 《호소문》을 남반부 제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과 《유엔조선위원단》에 직접 전달하기 위하여 3명의 파견원이 38연선 려현역지점에 파견되였다. 6월 10일, 방송과 출판물을 통하여 약정한 지점에 3명의 파견원들이 도착하였지만 남측인사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대신 파견원들을 향한 집중사격이 감행되였다. 이튿날 파견원들은 철길을 따라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지만 38선을 넘은 지점에서 체포되였다. 그리고 6월 13일 남조선전역에 《준비상계엄령》이 실시되였다.

  6월 17일 미국 트루맨대통령의 특사 덜레스가 남조선을 방문하였다. 18일에는 미군사고문단을 이끌고 38선일대를 시찰, 19일에는 남조선국회에서 동족상쟁을 부추기는 연설을 하였다. 전쟁발발은 이렇게 기정사실화되여갔다.

침략에 대한 반공격전

  6월 19일 평양에서 채택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이 마지막호소로 되였다. 남측이 총선거를 두려워하고있는 사정을 고려하여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를 단일한 전조선립법기관으로 련합하는 방법으로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제의를 전쟁의 방화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석창씨는 50년대의 전쟁에 대하여 《외세가 강점한 조국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 6월 25일, 38선일대는 요란한 총포소리로 새벽이 밝았다. 조선인민군은 불의의 공격에 즉시적인 반공격으로 대응하였다. 군대에는 인민이 요구할 때에는 어느때를 막론하고 다 동원할수 있도록 준비를 갖춘 병사들이 있었다.

  김일성주석님의 력사적인 방송연설은 이튿날에 있었다.

  《리승만역도는 우리 조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며 전체 조선인민을 미제의 노예로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그 연설은 조선인민이 진행하는 전쟁의 정의적성격을 밝히고있었다. 적들의 침략전쟁에 우리는 해방전쟁으로 대답한다. 총을 들고 싸우는 로동자, 농민의 아들딸은 그 말의 뜻을 똑똑히 알았기때문에 승리를 확신할수 있었다. 그들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사의 모든 전례를 뒤집어엎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선인민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을 《전승기념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선반도에서 전쟁은 일시 중단되였을뿐 조선과 미국은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고있고 대결전의 성격 또한 변하지 않았다. 인민들은 핵문제를 둘러싼 공방전도 침략에 대한 전민항쟁의 구도로 설명한다.

  령도자의 곁에서 조선의 선군력사를 체험한 김석창씨는 정의의 편에 서있는 인민은 언제든지 이긴다며 《우리 군대는 오늘도 조국보위를 위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있다.》고 말한다.

(해설) 《유엔군》감투를 쓰고 감행한 전쟁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부대들은 총포소리 울리며 불의의 타격으로 38°선 이북으로 1~2㎞ 기여든 적군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반공격전을 전개, 그대로 남으로 진격하였다. 서울해방작전은 6월 28일, 시내에 들어간 인민군대 땅크병들이 중앙청 꼭대기에 공화국기를 휘날렸다.

  미국의 트루맨대통령은 6월 30일 이미 작성한 계획대로 해군과 공군에 이어 지상군을 조선전선에 대량 들이밀데 대하여 명령하였다. 그러나 인민군대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멈춰세울수는 없었다.

  미국은 7월 7일 조선문제를 유엔안전보장리사회에 끌고가 《결정》을 채택하였다. 여기에는 조선대표도, 쏘련이나 중국의 대표도 없었다. 《결정》에 의하여 이른바 《유엔군》이 조작되고 미군과 추종국가군대가 조선전선에 투입되는것이 《합법화》되였다.

  7월 8일에는 미군 8군사령부가 대전에 설치되고 일본 도꾜에 《유엔군사령부》가 들어앉았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을 벌리는 시점에서 미국은 태평양방면의 미륙해공군을 총동원하고 지중해함대의 일부까지 출동시켰을뿐아니라 영국, 필리핀, 뛰르끼예 등 15개 추종국가군대들을 더 끌여들여 무려 30만가까운 병력을 조선전선에 들이밀었다.

  조선정전협정의 체결은 1953년 7월 27일. 결국 미국은 3년간의 전쟁기간 자기 나라 군대의 3분의 1과 공군의 5분의 1 그리고 태평양함대의 대부분, 거기에 추종국가군대와 남조선군 합치여 무려 200여만명의 대병력과 막대한 최신전투기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을 위한 전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선 조선인민을 끝내 굴복시킬수 없었다.

[출처: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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