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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창건 60돐, 력사의 현장에서 -3-〉 모란봉에 메아리친 《3,000만의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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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9-05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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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련석회의와 전조선정부수립
 
  현재 국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가 열리는 모란봉극장은 민족사에 통일전선의 빛나는 장으로 아로새겨진 중요회의가 개최된 곳이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의 《단선단정》조작기도로 말미암아 조국분렬의 위기가 조성된 시기에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해방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앉아 구국대책을 협의하였다.

김구가 누른 도장

남조선의 민족주의자 김구를 만나시고 귀중한 말씀을 주시는 김일성주석님(1948년 4년)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는 《반공》을 필생의 신념으로 한다던 김구, 김규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들도 참가하였다. 비전향장기수 김용규씨는 해방전 《상해림시정부》의 요직을 맡고 해방후 남조선에서 우익정객의 거두로 지목되던 김구가 평양에서 련공의 길에 들어서는 장면들을 목격한 인물이다. 그는 남북련석회의에 서기로 참가하여 그 전과정을 기록하는 분공을 맡았다.

  《인민공화국이 어느날 돌연히 하늘에서 떨어져나온것은 아니다. 통일적인 중앙정부의 수립은 김일성주석님의 령도의 결실이다.》

  김용규씨는 4월련석회의부터 9월의 공화국창건까지를 하나로 이어진 줄거리로 이야기한다.

  《주석님께서는 회의소집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내적으로 각 방면에 걸쳐 여러가지 사업을 면밀하게 추진시켜오셨는데 회의기간의 주되는 고리는 김구와의 사업이였다.》

  완고한 민족주의자를 사상과 리념으로 설복한것이 아니라 우선 인간적으로 친숙해졌다고 한다. 자기를 례절있게 존대하며 겸손하고 도리있게 진심으로 내세워주는 《30대 청년장군》의 인품에 김구는 매혹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시기 민족주의무장부대의 두목들과 종교교직자들, 각계 인사들을 조국광복전선에 묶어세우셨다. 그리고 해방후의 복잡한 정세하에서도 북조선의 각당, 각파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우셨다. 그 풍부한 경험이 《70고령의 반공주의자》의 정의감을 불러일으켰다.

  《김구가 평양에 도착한 날, 주석님께서 그를 접견해주신것으로 하여 회의성공은 담보되게 되였다.》

  남조선인사들속에는 회의의 귀추에 대한 반신반의가 없지 않았다고 하는데 주요고리가 풀리자 다른 고리도 순조롭게 풀려갔다. 남북련석회의는 민족의 단결을 과시한 회합으로 장식되였다. 회의결정서가 단 한사람의 반대나 기권도 없이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채택되였다.

  4월 30일 모란봉극장 별관에서는 련석회의에 참가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에 의한 협의회가 진행되고 4개 항목의 구국대책을 담은 《공동성명서》가 채택되였다. 성명서는 《천만여명을 망라한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만큼… 남조선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고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실현하지 못할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로 될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붓을 들어 성명서에 서명한 김구는 두루마기앞섶을 추켜올리고 품속깊이 간직한 자기의 도장을 꺼내여 힘있게 내리눌렀다. 남조선에 단독선거로 세우려는 정권은 그가 3.1운동의 결실로 여기며 30년동안 고수하여온 《상해림시정부》의 《법통》을 절대로 계승할수 없음을 선포하는 장면이였다.

외적의 분렬기도

1948년당시를 회고하는 김용규선생(모란봉극장앞에서, 문광선기자촬영)

  이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이 선포된 곳도 같은 모란봉극장이다. 당초 남북련석회의는 남조선대표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극장을 쓰자는 안이 제기되였었다. 김일성주석님의 발기에 의해 그때 지은지 얼마 안되는 모란봉극장의 새 건물이 회의장으로 선정되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일군들에게 설명한 《선정리유》는 련석회의의 성격을 나타내고있다. 모란봉은 오랜 옛적부터 슬기로운 민족의 넋이 어려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선조들은 임진조국전쟁때 이곳에서 피흘려 싸워 왜적들을 물리쳤다, 모란봉극장에서 회의를 하면 남조선에서 오는 대표들은 외적에 굽히지 않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존엄을 안고 회의에 적극 참가하게 될것이다…

  모란봉에 모인 대표들은 외적과 그 주구들이 벌리는 민족분렬책동에 대항하고있었다.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련합도 그래서 이루어졌다.

  남북련석회의이후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5월 10일 남조선에서 《단독선거》가 강행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선거》를 거부해나섰지만 미국은 《선거》에 따라 구성되는 《국회》가 《정부》를 세우면 그것을 《전조선정부》로 승인할 술책을 꾸미고있었다. 이제는 성명서나 발표하여 남조선《국회》를 부인하는것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였다.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전조선정부를 세우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게 된다.

  6월 29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가 또다시 소집되였다. 여기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의 발포와 헌법에 따르는 자유선거, 전조선립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의 창설과 북남조선대표들로 전조선중앙정부를 세울데 대한 결정이 채택되였다. 이날 협의회에서 토의된 공화국헌법은 북조선에서 단독으로 만들어진것은 아니였다. 이해 2월부터 4월까지 헌법초안에 대한 전인민적토의가 조선반도 전역에서 이미 진행되고있었다.

  헌법이 발포됨에 따라 각지 선거구들에서는 대의원립후보자추천사업이 진행되였다. 그러나 남조선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공개적인 방법으로 할수가 없어 《비합법적인 간접선거의 방법》을 취했다. 먼저 유권자들이 비밀리에 서명의 방법으로 인민대표를 선거한 다음 그 인민대표들이 북반부에 들어와 대표자대회를 열고 대의원립후보자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8월 20일까지 673만 2,400여명의 서명(유권자의 77.52%)으로 1,080명의 인민대표를 선거하였다. 그중 38선을 넘어온 1,002명의 인민대표들이 8월 21일 해주에 모여 360여명의 대의원립후보자를 추천하였다. 8월 25일 남북총선거가 실시되여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소집되였다.

백두에서 제주까지

  모란봉극장에 대의원들이 모였다. 북은 신의주, 온성으로부터 남은 목포, 부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각지에서 선거된 대의원들이다.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 제6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이 선포되였다.

  통일이냐, 분렬이냐-모란봉은 민족사의 기로를 지켜보고있었다. 그 현장에 섰던 김용규씨는 60년전, 북과 남에서 각기 정부가 수립되여 조선이 분단국가로 되였다고 말하는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북과 남의 인민들은 전조선정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벌렸다. 그래서 공화국이 창건되였다. 남조선만이라도 자기 손아귀에 넣어보려고 <단독정부>수립을 강행한 미국이 분단을 초래한것이다.》

백두산천지에서 제주도끝까지 /새 기발 높이여 삼천만은 나섰다
산천도 노래하라 이날의 감격을/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나라다…

  오늘도 사람들속에서 애창되는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는 1948년의 사변을 그대로 가사로 옮겼다. 그 어디에도 《북》, 《남》을 가르는 표현은 없다. 그때 인민들은 외적에게 굴할줄 모르는 우리 3,000만 인민의 기개를 노래하였다.

(해설) 미국이 주도한 《단선단정》

  해방후 남조선에서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1947년 9월 조선문제를 유엔총회에 끌고갔다. 총회에서는 많은 민주주의나라들이 조선에서 쏘미 량국군대가 동시에 철거하고 민주주의적통일정부를 세울데 대한 문제를 조선인민자신에게 맡기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미국은 추종국가 대표들의 거수기를 발동하여 조선에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보낼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유엔림시조선위원단》감시하의 전조선《선거》라는 미명하에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포석이였다.

  1947년 10월 3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는 미국의 민족분렬책동을 파탄시키고 통일적인 민주주의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북남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합을 가질데 대한 방침을 제시한다.

  1948년 2월 《유엔소총회》에서 미국은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또 하나의 비법적결정을 꾸며내였다.

  이해 5월 10일에 진행된 《단독선거》를 남조선인민들은 견결히 반대해나섰다. 경찰과 테로단이 동원되여 인민들을 강제로 선거장으로 내몰았지만 인민들은 파업과 시위, 폭동으로 맞섰다.

  제주도를 비롯한 일련의 지역에서는 《선거》가 전혀 실시되지 못하였고 《선거위원회》가 과장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경상남북도에서는 유권자의 겨우 10~20%가 《선거》에 참가했을뿐이였다.

  한편 8월 25일에 실시된 남북총선거에서는 총 572명의 립후보자전원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였다. 그 내역은 인구비례에 의하여 북반부 212명, 남반부 360명이였다.

[출처: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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