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세계적인 과학자 비날론 발명가 이승기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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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03 03:0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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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과학자 비날론 발명가 이승기 박사
편집국
조선의 오늘 사이트는 최근 조선로동당의 품 속에 자신의 재능을 활짝 피운 세계적인 과학자 이승기 박사를 소개하였다.
이승기 박사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원사 교수 박사를 지냈으며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발명한 과학자로 세계적인 이름을 떨쳤다. 이승기 박사는 1905년 10월 1일 태어나 1996년 2월 8일사망하였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기사 전문을 소개한다.
세계적인 인재로 키워준 어머니당 (1)
우리 당이 창건된 때로부터 70년, 승리와 영광으로 아로새겨진 이 나날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던가.
위대한 당의 품속에서 자기의 소원, 자기의 희망을 활짝 꽃피워 조국앞에, 력사앞에 이름을 남긴 영웅들, 박사들, 문호들, 재사들…
우리는 그 하많은 사람들가운데서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세계과학계가 인정하는 조선의 과학자
우리 공화국에서 천리마대고조시기에 태여난 비날론공장은 오늘 첨단수준에서 현대화되여 비날론삼천리로 위대한 선군시대를 노래하고있다.
1960년대초부터 장장 50여년세월을 흘러온 우리 나라 비날론공업의 력사에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원사 교수 박사인 리승기선생의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비날론을 발명한 과학자는 리승기박사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던 1905년 전라남도 담양군 리씨가문의 10대 장손으로 태여난 리승기선생은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리 강하였다. 서당에서 구식공부를 하며 자란 선생은 16살때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가서 중학과정을 마치였다. 그후 선생은 민족을 위한 학문을 연구할 지향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어느 한 대학의 공업화학과에 입학하였다.
리승기선생은 무서운 병마와 생활난으로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학문을 탐구하여 단연 1등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허나 조선사람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로 하여 언제나 뒤자리로 밀려났고 연구소에 입직은 하였으나 겨우 조수나 강사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머무르고말았다.
1937년부터 합성섬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2년후에는 마침내 돌에서 새로운 솜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일제는 그의 연구성과를 일본과학계의 성과로 광고하였고 그 발명가가 조선사람 리승기라는것을 내비치지도 못하게 하였다.
대륙침략에 미쳐날뛰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가 군수생산과 관련된 연구사업을 하지 않는다 하여 《연구비》마저 잘라버렸고 나중에는 체포구금하였다. 해방후 고국에 돌아온 리승기선생이 처음 짐을 풀어놓은 곳은 서울이였다. 그러나 미제의 구두발에 짓밟힌 남녘땅에서는 민족을 위한 과학연구사업을 도저히 진행할수가 없었다. 과학탐구의 길은 또다시 막혀버리고말았다.
끝없이 방황하는 넋을 안고 몸부림치며 한숨과 절망속에 속절없는 나날을 보내던 리승기선생은 비로소 1950년 공화국의 품, 우리 당의 품에 안겨서야 그토록 숙망해오던 비날론연구를 다시 할수 있었다.
생사존망을 판가리하는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서울에 파견하시여 그를 데려오도록 하시였고 전쟁의 불길속에서 마음놓고 연구사업을 할수 있도록 갱도속에 실험실도 꾸려주시였으며 많은 실험기구들과 화학시약들까지보내주시였다.
당의 은정속에 전후 첫 비날론공장이 생겨 조업을 선포하던 그날 조업식장에 나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리승기선생에게 오늘은 리선생의 소원이 풀리는 날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후 선생은 우리 당의 뜻을 받들어 비날론공업의 주체화를 위한 연구사업에 박차를 가하여 비날론으로 모를 대신할수 있는혼합방사비날론, 자연솜을 대신할수 있는 모비론, 공업용섬유로쓸수 있는 비날론강력사를 련속 연구해냄으로써 인민생활향상과 인민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리승기선생은 우리 당의 각별한 사랑속에 제2기부터 제9기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김일성상, 인민상계관인으로,로력영웅, 원사, 교수, 박사, 인민과학자로 되였다.
생의 마지막까지 과학원(당시) 함흥분원 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수많은 과학연구성과들을 이룩하였고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여 나라의 과학기술발전과 국력강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당에서는 리승기선생이 91살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조의행사를 국장으로 크게 진행하며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할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었고 생일 100돐이 될 때에는 기념행사를 크게 가지도록 해주었다.
진정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 어머니당의 따뜻한 품은 리승기선생을 조국과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혁명적인 지식인으로, 온 민족이 자랑하는 애국자, 세계과학계가 인정하는 조선의 과학자로 내세워준 영원한 사랑의 해발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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