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연재 71]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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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28 18:0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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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71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71) 북남최고위급회담개최를 위하여> 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1994년 김일성 주석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71)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북남최고위급회담개최를 위하여
공화국정부는 조미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조선반도에 조성된 긴장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면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의 실현을 위해 성의있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공화국정부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이 제시된 새로운 환경에서 1993년 5월 25일 조국통일을 위한 중대사들을 포괄적으로 풀어나갈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로 북남최고위급의 특사교환제안을 내놓았다.
여기에서는 나라의 통일문제해결을 위하여 쌍방 최고위급이 만나는 문제와 북남사이의 현안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고위급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아수행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김영삼역도는 공화국의 이 아량있는 제안과 온 민족의 통일념원을 외면하고 민족자주가 아니라 외세의존의 길로, 민족단합이 아니라 북남대결의 길로 나갔다. 또한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을 받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뿐아니라 남조선의 각 정당, 단체대표들,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이 담긴 공화국의 편지를 가로채여 받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지조차 않았다.
지어 김영삼역도는 《핵문제》를 구실로 그 무슨 《군사적대응》에 대하여 떠벌이면서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의 뒤통수를 치려는 비렬한 반민족적행위를 감행해나섰다. 공화국정부의 성의있고 인내성있는 노력에 의하여 북남최고위급의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이 시작되여 1994년 3월까지 8차례의 접촉이 있었으나 남측의 부당한 립장과 태도로 말미암아 결실을 보지 못한채 결렬되고말았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94년 6월 중순 전 미국대통령 카터의 평양방문이 실현되였다. 김영삼역도는 상전으로부터 소외된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였고 이러한 궁색한 처지에서 벗어나는 출로를 북과의 대화에서 찾고 평양을 찾아가는 카터에게 자기의 의사를 밝히였다.
평양에 찾아온 카터는 김영삼역도의 그동안의 행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를 만나주시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카터는 평양체류기간이 끝나갈무렵에야 위대한 수령님께 자기가 서울에 들렸을 때 김영삼이 주석님을 한번 만나뵙고싶다고 하더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씀을 올리였다.
한없이 넓은 도량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카터의 말을 너그럽게 대하시며 김영삼의 지난날 행적을 불문에 붙이고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북남최고위급회담이 일정에 올라 1994년 6월 28일 판문점에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위한 부총리급예비접촉이 진행되게 되였으며 여기에서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북남최고위급회담의 개최는 온 민족에게 조국의 평화적통일에 대한 크나큰 희망을 안겨주는 민족사적사변이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북남최고위급회담의 개최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이런 획기적인 회합의 길을 열어놓으신 위대한 수령님께 다함없는 감사와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였다.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과 언론계에서는 《김일성주석님의 대결단에 의해 민족적재난의 화근이 없어지게 되였다.》, 《앞으로 주석님께서 서울에 나오시면 아마 500만명이상의 시민들이 연도에 떨쳐나서 열렬히 환영하게 될것이며 그때 주석님께서 하시는 연설을 30분동안만 방송으로 생중계하면 몇달안으로 통일될것이다.》라는 반영이 련속 울려나왔다.
해외동포들은 《존경하는 김일성주석님의 령도에 의해 분렬의 력사를 통일의 력사로 바꾸는 민족사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것이다.》라고 격정에 넘쳐 말하였다.
세계의 크고작은 모든 나라의 통신, 방송, 신문들도 앞을 다투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용단과 세련된 령도에 의하여 평양에서 북남최고위급회담이 열리게 된 격동적인 소식을 널리 보도하였다.
참으로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와 세계 진보적인류는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이 가까운 시일에 실현되는것을 확정적인것으로 내다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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