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연재 65]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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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18 17:1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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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65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65) 통일의 디딤돌, 범민족대회 개최> 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주체104(2015)년 9월 16일 《우리 민족끼리》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65)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통일의 디딤돌, 범민족대회 개최
공화국정부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좋게 발전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게 범민족대회를 성사시켜 북과 남, 해외의 3자련대를 성과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범민족대회를 소집하려는 기운은 이미 1980년대말에 움터나오기 시작하였다. 남조선의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대표적인물들은 1988년 8월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추진본부》를 발족시키고 범민족대회소집운동을 벌리였다.
이 추진본부에는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대중운동의 련합조직들인 《민주통일민중운동련합》(민통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20여개의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공화국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범민족대회소집제안에 지지를 표명하고 그를 성사시키기 위한 실무대표접촉을 제의하였으며 이에 해외동포들이 적극적으로 합세함으로써 범민족대회가 일정에 오르게 되였다.
1989년 1월에 남조선의 《전국민족민주운동련합》(전민련)은 자기의 결성과 함께 범민족대회의 소집을 위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실무대표접촉제의에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였다. 그후 2월 15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전민련》사이에 범민족대회를 위한 실무대표접촉을 3월 1일 판문점에서 가질데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였다.
그러나 판문점실무대표접촉은 남조선당국자들의 방해책동으로 말미암아 진행되지 못하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범민족대회문제가 론의되자 폭력에 의한 《원천봉쇄》를 선포하고 《전민련》 대표들을 판문점에 나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아나섰으며 지어 범민족대회를 발기하고 추진하는 《전민련》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책동하였다.
남조선당국의 거듭되는 탄압,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전민련》, 《전대협》, 《전로협》을 비롯한 통일민주단체들은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한 투쟁을 계속 힘있게 벌리였다.
한편 공화국북반부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은 1989년 3월 27일에 진행한 련합회의에서 《북남대화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킬데 대하여》를 토의하고 련합성명을 발표하였다.
련합성명에서는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속에서 벌어지고있는 활발한 대화노력을 받아들여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앞당기려는 념원으로부터 북남사이의 민간급대화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공동립장을 천명하였다.
또한 1989년 7월 9일 평양에서 재일동포들과 중국, 미국, 오스트랄리아 등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온 각계층 해외동포 3 000여명과 수천명의 공화국인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 조국통일촉진대회에서는 조국통일에 관한 선언과 해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조국해방 50돐이 되는 1995년을 조국통일의 력사적인 해로 맞이할데 대하여서와 이를 위해 1990년 8. 15범민족대회를 소집하여 온 민족의 통일의지를 과시하고 통일위업을 촉진하는 력사적인 전환의 계기로 되게 할데 대하여 호소하였다.
그후 해외에 있는 통일애국단체들은 범민족대회 해외추진본부, 범민족대회준비위원회 등을 결성하고 1990년 6월 베를린에서 제1차 예비접촉을 가질것을 제의하면서 여기에 북의 대표들과 남측 《전민련》 대표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의 방해책동으로 말미암아 남측추진본부대표단은 제1차 예비접촉에 참가할수 없었으므로 접촉은 북과 해외측의 2자접촉으로 되였다.
남측추진본부대표들은 여기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기어이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려는 일념으로 제2차 예비접촉을 7월 26일 서울에서 가질것을 발기하고 북과 해외측추진본부대표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이 제2차 예비접촉에 참가하려는 북측대표단의 남행길을 가로막아나섬으로써 접촉은 남과 해외측의 2자접촉으로 되였다.
공화국은 이러한 실정에서 범민족대회를 북과 남, 해외의 3자공동의 노력으로 치르기 위하여 제3차 접촉을 8월 6일에 평양에서 가질것을 제의하고 여기에 남과 해외측대표들을 초청하였다.
남조선의 《전민련》은 《전대협》, 《전로협》을 비롯한 통일민주단체들과 함께 8월 3일에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를 정식 결성하고 제3차 예비접촉에 참가할 대표들을 선출하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은 이번에도 남측추진본부대표단의 북행길을 막아나섰다. 그리하여 제3차 접촉도 북과 해외측대표들의 2자접촉으로 되게 되였다.
하지만 범민족대회준비사업이 남조선당국의 온갖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북과 남, 해외측의 공동의 노력으로 힘있게 추진되고범민족대회의 소집이 일정에 오르게 되자 분렬주의자들은 대회개최를 어떻게 하나 파탄시켜보려고 더욱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은 대회날자가 다가오자 8. 15를 전후한 5일간을 이른바 《민족대교류》기간으로 한다는 《특별발표》를 하고 《방북신청자접수》요, 《명단교환》이요 하면서 6만명의 《방북신청자》명단을 넘겨주겠다고 하였지만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판문점에 갈것을 신청한 남측대표들을 한사람도 들여보내지 않았으며 북측에서 이미 초청한바 있고 《민족대교류》기간에 평양을 방문할 의사를 밝힌 민주인사 백기완의 북행길도 가로막았다. 단 5일동안에 판문점을 통하여 6만명의 사람들이 북에 왔다간다는것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남조선당국자들에게는 애당초 《방북신청자》들을 북에 들여보낼 의사는 조금도 없었다.
분렬주의자들의 이러한 책동속에서도 범민족대회준비가 착실히 추진되고 범민족대회분위기가 높아가는 가운데 남조선의 《전민련》 대표가 사선을 헤치고 평양에 도착하였으며 일본, 아메리카주, 유럽, 이전 쏘련, 중국 등 여러 나라와 지역의 해외동포들과 대표단들이 평양에 왔다.
그리하여 1990년 8월 13일 마침내 조선의 기상이며 민족의 넋이 깃든 백두산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의 개막과 《조국통일촉진 백두-한나대행진》출정식이 성대히 거행되였다.
▲1990년 8월 14일 범민족대회 기간 중 평양에서 열린 환영군중대회
백두에서 한나에로의 대행진의 발걸음을 뗀 대오는 평양에 도착하여 조국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연구토론회, 평양시환영군중대회 등을 치르며 15일 범민족대회장인 판문점에 도착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조국해방 45돐이고 민족분렬 45돐이 되는 이날에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기 위한 력사적인 회합인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가 온 겨레의 커다란 관심속에 대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대회에서는 대표들의 일치한 의사에 따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며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를 대회의정으로 채택하고 북과 남, 해외추진본부대표들의 기조보고가 있은데 이어 각계층 대표들의 토론들이 진행되였다.
대회에서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범민족대회 결의문과 해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북남당국과 유엔사무총장,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회문건으로 각각 채택하였다. 대회에서는 남측추진본부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의 방해책동으로 판문점 범민족대회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는 조건에서 대회에 보내여온 5개 문건초안을 본대회의 이름으로 지지찬동하였다.
결의문에서는 이번 대회가 《사상과 리념, 지역과 소속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대단결을 내외에 과시하고 1990년대에 기어이 조국통일을 성취하려는 겨레의 굳은 의지를 확인하였다.》고 지적하고 조국통일의 평화적환경 마련, 북과 남사이의 자유래왕과 전면개방의 실현, 련방제통일의 실현, 통일대화의 적극 참가, 자주통일을 위한 련대공동투쟁, 통일애국세력련합의 확대 등 6가지 사항의 실현을 위하여 투쟁할것을 지적하였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서울에서 열린 범민족대회는 남조선당국이 전투경찰들을 동원하여 《원천봉쇄》를 하고 수백명을 체포해가는 살벌한 폭압을 물리치는 치렬한 투쟁속에서 진행되였다.
1990년대의 첫해에 성과적으로 진행된 범민족대회는 북과 남, 해외의 각계각층 동포들의 한결같은 통일념원을 반영한 력사적인 대화의 마당이였으며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민족대단결마당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8월 18일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대표들을 만나주시고 온 겨레가 광범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굳게 뭉쳐나가는데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듯 력사적인 8. 15범민족대회는 조선민족의 통일운동사에 민족주체, 민간주체의 통일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뜻깊은 경사였으며 조국통일위업을 전민족적위업으로 전환시키는데 기여한 특기할 사변이였다. 이것은 조국통일을 위한 간고한 투쟁의 길에서 북, 남, 해외의 통일애국세력이 공동으로 쟁취한 귀중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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