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연재 57]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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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02 13:3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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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57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57) 해외동포인사들을 통일애국의 길로> 기사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김일성 주석이 김성락 재미기독교목사를 접견하고 있다(1981)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57)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해외동포인사들을 통일애국의 길로
공화국북반부의 위력과 대외적권위가 날로 높아지고 공화국정부의 정당한 조국통일방침들과 투쟁의 정당성이 내외에 널리 과시되는 속에 북에 대한 해외동포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의 평양행은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이 제시된 후 해외동포들속에서는 민족단합의 기운이 전례없이 높아지고 민족의 기상이 약동하는 공화국북반부를 찾는 인사들이 늘어났다.
그러한 환경속에서 1981년 6월말 미국에 있는 《조국통일촉진회》 회장이며 《한국인교회련합회》 고문이였던 김성락목사가 평양에 왔다.
목사가정에서 태여나 숭실중학교를 다닌 그는 미국인선교사의 알선으로 미국류학을 한 후 평양에 돌아와서 교회목사를 하다가 1936년에 다시 미국으로 간 후로는 미국과 남조선에서 학계, 종교계에 관여하고있었다.
그는 로스안젤스련합장로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미국정부로부터 년봉을 타는 유일한 조선사람이였다.
그는 오래동안 미국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과정에 《반공》사상에 물젖었으며 고향과 친척들이 있는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하는 시각에도 북에 대한 의혹과 경계심이 적지 않게 지배하고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의혹과 경계심은 우리 공화국의 실상앞에서 충격과 매혹, 사상전환의 기적으로 바뀌여갔다.
특히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만나뵙고 그는 80고령에 인생전환의 새봄을 맞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접견해주시면서 목사의 부친의 반일운동경력과 목사의 미국에서의 애국활동을 평가하시고 공화국의 건국력사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숭미사대주의의 해독성에 대하여 일깨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국통일은 반드시 조선인민자체의 힘으로 실현하여야 합니다. 조선인민이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면 사대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민족적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여야 합니다.》
계속하시여 그이께서는 북남조선 전체 인민들이 자주적인 사상을 가지고 굳게 단결하여 투쟁한다면 남조선에서 미국군대를 철거시키고 조국을 통일할수 있다고, 한피줄을 이어받으며 몇천년동안 한강토우에서 살아온 우리 겨레를 미국은 결코 둘로 갈라놓지 못한다고, 우리는 북과 남이 련합하여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하는 방법으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려고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목사는 전적인 공감을 표시하며 나라의 통일문제와 관련한 주석님의 가르치심을 돌아가서 미국국회 의원들과 부대통령에게 전달하며 해외에 있는 동포인사들과 조국통일문제를 가지고 협의하겠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그를 고무해주시면서 앞으로 자주 조국을 방문하는것이 좋겠다고 따뜻이 말씀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목사를 위하여 오찬을 마련하신 자리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어서 기도를 드리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하였던 일이였다.
후일 김성락목사는 미국에 돌아가 그리스도교신자들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참으로 위대한 주석님의 도량이야말로 하느님의 품보다 몇배나 더 넓고넓다라고 말하였다.
하기에 그는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비행장에서 스스로 기자회견을 가지고 출발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에서 그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북의 현실을 직접 보고 모든 오해를 깨끗이 풀었다고 하면서 《민족도 강산도 그 민족, 그 강산이되 오늘과 같이 놀라운 현실을 국토우에 가꾸어놓게 된것은 위대한 령도자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김일성주석은 하늘이 내신 위인이십니다.》라고 절절히 말하였다. 자기의 인생전환을 피력하는 진정어린 고백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그후 평양을 다시 찾아온 김성락목사부부를 크나큰 은정과 믿음으로 대해주시고 그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통일위업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평가하시여 조국통일상수상자대렬에 세워주시였다.
《배달민족회》 회장이였던 최덕신선생도 평양행을 하면서 비로소 통일애국의 길에 자신을 세웠다.
그가 평양에 간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동포사회에 알려진것은 1981년 7월이였다.
평안북도 의주가 고향인 그는 8. 15전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당군대의 독립대대장(대령),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남조선군 사단장, 군단장, 정전담판 《국군대표》, 전후에는 군단장, 《외무부》 장관, 이전 서부도이췰란드대사, 1970년대초 북남대화시기에는 《반공련맹》 리사장 등 《반공》일선에서 물러난적이 없는 철저한 《반공》분자였다.
1976년 《유신정권》과 결별한 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남조선사회의 자주화,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투쟁에 적극 나서기 시작하였으며 해외동포들의 공화국북반부방문흐름을 타고 평양을 방문하였다.
평양시교외에 안치된 선친의 묘소를 찾은 최덕신은 민족주의자로서 파란곡절을 걸어온 자기 부친에게 각별한 대우를 해주시고 사후에는 애국지사의 고귀한 영예까지 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머금었다. 그는 재북인사들이였던 장인 류동열과 안재홍, 김규식의 묘소들도 훌륭히 꾸려져있는것을 보고 크게 감동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늦게나마 통일애국의 옳바른 길을 찾아 평양을 방문한 그를 몸소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를 만나주시는 자리에서 의산 최동오선생에 대하여 뜨거운 회억의 말씀도 하시고 민족앞에 머리를 들수 없고 선친을 위해 온갖 은정을 다 부어주신 주석님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말씀을 올리는 그에게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이고 지금나라가 분렬이냐 통일이냐 하는 기로에 선 이때에 우리와 손을 잡고 통일을 위하여 한몫하여야 하겠다고 뜨겁게 고무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큰 나라들이 우리 나라를 노리고있는 조건에서 우리 나라가 큰 나라들의 희생물이 되여서는 안되며 어떻게 해서든지 통일을 해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오찬도 마련해주시고 우리모두 힘을 합쳐 하루빨리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고 통일된 조국강토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자고 하시면서 다음번에 올 때에는 부인과 함께 오라고 당부하시였다.
참으로 최덕신선생에게 베푸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크나큰 사랑은 《반공》으로 얼룩졌던 곡절많은 그의 운명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고 새봄을 안겨준 재생의 빛발이였다.
하기에 1986년 9월 공화국에 영주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회를 피력하였다.
《김일성주석은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에게 참다운 복음을 주는 민중중심, 민중위주의 철리에 바탕을 둔 위대한 정치경륜과 뛰여난 품격, 비범한 선견지명과 해박한 지성, 넓은 도량과 인자한 덕망을 지니신 위인중의 위인이시며 성인중의 성인이십니다. 한번만 만나뵈오면 먼 과거에 품었던 소망과 오늘과 래일의 념원까지 다 헤아려보시고 일순에 가슴이 확 트이고 눈앞이 환하게 앞길을 명시해주시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김일성주석은 참으로 저와 같이 반공을 하던 사람까지도 탓하지 아니하시고 민족의 일원으로 꼭같이 포옹해주시는 자애로운분이십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이런 사랑과 은정속에서 그는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공화국의 품에 안겨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종교인협회 회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불치의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조국통일위업에 헌신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곡절을 겪어온 《배달신보》발행인이며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였던 최홍희선생의 삶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참된 삶으로 되게 해주시고 조국통일상수상자로 빛내여주시였다. 재능있고 명망높은 음악가이면서도 참다운 삶의 길을 찾지 못한탓으로 해외에서 방황하던 윤이상선생도 그 품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길을 걸으며 값높은 삶을 누릴수 있었다.
이밖에 이전 남조선유엔대사였던 림창영과 차상달, 선우학원, 배동호를 비롯한 수많은 해외인사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은정을 한몸에 받아안고 북과 해외의 련대실현과 민족대통일전선의 형성에서 선구자적역할을 하였으며 조국통일위업에 특색있는 기여를 하며 자기들의 삶을 빛내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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