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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4. 배우 문예봉- 1) 《임자없는 나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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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29 15:5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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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4. 배우 문예봉-  1) 《임자없는 나루배》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4. 배우 문예봉- 1)《임자없는 나루배》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문 예 봉(배우)

 

                        • 1917년 1월 3일 출생.

                        • 1932년부터 배우생활 시작.

                        • 1948년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 1999년 3월 26일 사망.

                        • 인민배우.

                                                           

 

 

문화성혁명사적관에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문학예술부문의 오랜 로장들과 함께 찍으신 뜻깊은 기념사진이 모셔져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랜 친구들이라고 불러주신 그 6명의 행운아들속에는 문예봉도 있다. 어버이수령님의 바로 곁에 서서 무한한 행복과 긍지에 잠겨있는 그의 단아한 모습을 보느라면 부지중 예술영화 《곡절많은 운명》에 나오는 주제가의 구절구절이 떠오른다.

 

 

추억의 돛을 달고서 저 멀리 올라가보면

곡절도 많은 내 한생 굽이굽이 흘러왔네

사나운 파도를 넘어 내가 닿은 포구는 어디

장군님의 사랑의 품에 삶의 닻을 내리였네

 

 

망망대해에서 배들은 포구로 향한다.

 

사람도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깃을 들일 포구를 찾는다.

 

허나 포구는 많아도 운명을 맡기고 닻을 내릴 삶의 보금자리,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는것은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그곳에 가닿자면 사나운 풍랑을 헤쳐야 할 때도 있고 별도 없는 캄캄한 밤에 향방을 잃고 헤매일 때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곡절많은 인생항로에서 돛대도 삿대도 없이 작은 매생이를 몰아가며 끝끝내 희망의 등대불을 찾아 행복의 포구에 삶의 닻을 내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저 한다.

 

 

 

《임자없는 나루배》

 

 

1930년대초 서울의 영화관들에서는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루배》가 상영되였다.

 

이 영화는 당시 나라잃은 식민지민족이 겪고있는 비극적운명을 비교적 진실하게 그려낸것으로 하여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고싶어하는 작품으로 알려져있었다.

 

이 영화에서 녀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한 신인배우가 바로 문예봉이였다.

 

문예봉은 비판적사실주의영화창작의 대표자의 한사람이였던 라운규의 주선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그러고보면 라운규는 문예봉에게 있어서 영화를 알게 하고 예술을 알게 해준 선배였고 스승이다.

 

원래 라운규와 문예봉의 아버지 문수일은 한때 연극에 뜻을 두고 연극창작활동을 벌린것으로 하여 심복지우같이 지내는 사이였다.

 

당시 라운규는 《임자없는 나루배》를 자기의 야심작으로 여기고 이 영화의 녀주인공을 누구에게 맡길것인가를 오래동안 모색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인 문수일에게 찾아갔던 라운규는 그만 속으로 환성을 내질렀다. 금방 피여나기 시작한 한떨기 백합과도 같은 문예봉을 보았기때문이였다. (그때 문예봉은 아버지의 극단에서 연극의 단역배우로 출연하고있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라운규가 그토록 고심하며 찾던 영화의 녀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있는것이 아닌가. 예봉은 미모만이 아니라 조선녀성의 외유내강과 순후함을 체현한것으로 하여 영화를 성공에로 이끌어갈수 있는 참신한 인물이였다.

 

라운규는 제꺽 친구에게 동의를 얻고 자기가 새로 만드는 영화 《임자없는 나루배》의 녀주인공으로 문예봉을 출연시키기로 하였다. …

 

문예봉은 라운규에게서 자기가 출연할 《임자없는 나루배》의 줄거리를 감명깊게 들었다.

 

문예봉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인공이 불쌍해서 자꾸만 울었다. 임자없는 나루배를 타고 정처없이 흘러가는 녀주인공의 운명은 어떻게 될가?

 

다음날부터 영화촬영이 시작되였다. 영화의 주인공 춘삼역은 라운규, 그의 안해역은 김련실이 맡았다.

 

난생처음으로 촬영기앞에 나선 문예봉은 몹시 당황했다. 얼굴표정과 몸의 움직임 어느것 하나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만 실수를 했다.

 

문득 문예봉의 눈앞에는 자기가 일하던 제사공장으로 찾아와 뜨거운 물에 덴 자기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녀의 땀과 눈물이 슴배인 돈을 죄송스럽게 받아쥐고 공장정문을 느릿느릿 걸어가던 할아버지, 병석에 누워있는 자기를 위해 한겨울에 두터운 얼음장을 까고 물고기를 낚아오던 할아버지, 연극에 미쳐돌아가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손녀를 정성껏 돌봐주던 불쌍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쩌면 영화의 주인공들과 그리도 비슷할가? 아, 불쌍한 사람들!

 

문예봉은 자기도 모르게 자감상태에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좋다!》

 

감독의 웨침소리와 함께 촬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였다. …

 

라운규의 손에 이끌려 영화계의 문턱을 힘들게 넘어선 예봉이였건만 예상외로 첫 배역은 그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대인기와 영화계의 별이라는 명성을 가져왔다.

 

1921년 영화 《월하의 맹세》로 자기의 첫 페지를 펼친 무성영화는 1936년에 이르러 마침내 수난많던 자기의 마지막페지를 덮어버렸다.

 

무성영화들은 현실의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재현하고있었지만 운동적인 형식과 직관적인 형식의 측면에서는 아직 영화의 체모를 원만히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특히 무성영화의 제약성은 변사들의 《창조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무식성으로 하여 관객들의 불만을 야기시키는것이였다.

 

당시 무성영화는 배우들의 대사가 필림에 취입되지 못하였으므로 변사(영화해설자)들이 영화의 첫시작부터 마감까지 능란한 화술로 배우들의 대사를 구연하면서 장면들과 내용들을 해설해주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관객들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는 영화의 소개자, 대변자들이였으며 그 과정에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들도 많이 남기였다.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술을 마시고 나와 떨떨한 기분이였던 변사는 빠리의 풍경이 나오는 장면에서 그만 이런 실수를 하고말았다.

 

《여기는 독일의 파리! 세계의 문화와 류행의 도시로 이름난 파리! 오, 독일의 파리!》

 

객석에서 폭소가 터져올랐다. 그 시기는 도이췰란드를 독일이라고 하였으며 프랑스를 불란서, 빠리를 파리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펄쩍 든 그는 자기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다음과 같이 둘러쳤다.

 

《오, 독일의 파리건 불란서의 파리건 파리는 파리였다!》

 

객석에서 또 웃음이 터져올랐다.

 

《옳도다! 옳도다! 여러분의 그 웃음 옳도다! 술취한 사람 정신이 펄쩍 들고 철문같이 입이 과묵하게 닫긴 신사숙녀제씨들은 웃었나니 여기 광무대의 객석에는 봄이 왔도다!》

 

변사의 능란한 말솜씨는 온 객석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

 

이렇게 당시 변사들은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객관적립장에 서지 않고 자신의 화술기교를 시위하는데 치중하는가 하면 작품의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편향들을 발로시켰다.

 

무성영화의 이런 제약성을 극복하고 영화분야에서 예술화를 더욱 다그치려는 시도에서 우리 나라에서도 첫 유성영화가 출현하였다.

 

그 첫 유성영화가 바로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진 《춘향전》이였다. 영화의 성공여부는 춘향의 연기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문예봉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소박한 품성과 아련하면서도 인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녀배우였다. 게다가 그는 벌써 촬영기앞에서 억지스러운 연기때문에 눈물을 쥐여짜던 신인배우가 아니였다.

 

연출가와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춘향역을 맡게 된 문예봉은 수정처럼 맑고 순결한 춘향의 외유내강한 성격과 내면세계를 진실하게 형상하였다. 특히 영화의 절정을 이루는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항거장면은 동료들을 감탄시켰다.

 

촬영이 끝난 후 한 녀동료가 어떻게 되여 그렇게 진실하게 역을 수행할수 있었는가고 묻자 문예봉은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연기에 들어가니 그 변학도가 꼭 왜놈같더군요.》

 

왜놈! 그 한마디에는 나라를 빼앗고 우리 인민에게 망국노의 운명을 강요한 일본놈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응축되여있었다.

 

그는 일개 배우로서 춘향의 역을 했다기보다 자기가 체험한 쓰라린 지난날을 그대로 펼쳐보인것이였다.

 

《춘향전》을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련일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대경사나 난것처럼 들끓었다. 반면에 일본영화나 눅거리련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은 텅텅 비다싶이 하였다.

 

조선적인것에 대한 열렬한 호응!

 

당시 일제가 우리의 모든것을 없애버리려고 미쳐날뛰던 형편에서 이것은 왜놈들에 대한 은페된 형태의 반항이였다.

 

유성영화 《춘향전》의 인기와 더불어 문예봉은 은막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예술영화 《춘향전》을 관람하는 관객들은 그 은막뒤에서 펼쳐지는 녀배우의 눈물겨운 생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

 

삼라만상이 잠든 새벽 3시경, 쥐죽은듯 한 서울의 밤거리에 다급한 달음박질소리가 울렸다. 정신없이 뛰여가던 그 발자국소리가 뚝 멎은것은 안국동의 어느 한 집 대문앞에서였다.

 

녀인은 가쁜숨을 모두어쉬면서 대문가에 한쪽 귀를 조심히 가져간다. 집뜨락에는 고요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문예봉은 대문을 살그머니 밀어보았다.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왜서인지 문을 두드릴념을 않고 무너지듯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는다.

 

며칠전에도 밤새껏 영화록음을 마친 문예봉은 새벽녘에야 세방으로 돌아왔었다. 빈방에 혼자 있을 아이를 생각하며 급히 문을 두드렸다.

 

한참만에야 신을 철철 끄는 소리가 나더니 얼굴을 잔뜩 찌프린 녀주인이 대문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지금이 몇시인데 소란을 피우는거요? 늦으면 촬영소에서 자고말게지.》

 

문예봉은 기가 막혔다. 세방에는 그가 아침에 나올 때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방기둥에 띠로 매놓고 나온 사랑하는 자식이 있었던것이다. 아마 지금쯤은 엄마를 부르다가 잠들어버렸을는지도 모른다.

 

녀주인은 대문을 찌그덕 닫으며 다시금 토달거렸다.

 

《이름난 배우라는게 집세를 제때에 물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눈치가 있길 하나.》

 

문예봉은 와락 귀를 막고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세방쪽으로 뛰여갔다. …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예봉은 밤늦게 돌아오면 차마 문을 두드릴념을 못하고 한겨울에 대문앞에서 떨군 했다.

 

오늘도 문예봉은 문을 두드릴수 없어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녀주인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가려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있어야 했다.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니 시골에 내려가 병치료를 받고있는 사랑하는 남편이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남편 림선규와 문예봉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들의 결합은 순탄치 않았다. 한번은 페결핵을 앓고있던 림선규가 자기의 병때문에 처녀의 일생을 불행하게 할수 있다는 죄의식으로 문예봉과의 사랑을 포기했었고 또 한번은 딸을 밑천으로 연극단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아버지의 리기적목적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시련을 겪게 되였었다.

 

그때의 심정을 문예봉은 후날 이렇게 표현했다.

 

《온 세상이 귀치않고 몸과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캄캄한 하늘아래서 내 마음이 정처없이 흘러갈뿐이였다.》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어느날 문예봉은 신의주에서 공연하게 된 기회를 타서 몰래 극단을 빠져나가 림선규를 찾아갔으며 하여 두사람은 다시 만날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랑만적인 사랑으로 결합된 그들의 가정은 임자없는 배처럼 여기저기 표류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극단전속작가였던 림선규와 가정을 이룬 때로부터 시작된 고달픈 세방살이는 문예봉에게 어느 하루도 끊기지 않는 괴로움을 강요하고있었다.

 

제일 가슴아픈것은 남편이 결핵병자라는것을 안 주인집들에서 값눅은 세방마저 주기를 거절하는것이였다.

 

현재 살고있는 세방도 남편이 시골에 내려가 병치료를 한다는 구실을 대고 가까스로 구한 집이였는데 여름이면 빈대가 와글거리고 겨울에는 벽마다 성에가 가득 덮이는 차거운 랭방이였다.

 

문예봉의 두볼로는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였다. 돈없는 설음, 자식을 마음껏 돌볼수 없는 설음, 병에 시달리고있는 남편에 대한 설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설음은 집없는 설음이였다.

 

아, 언제면 제 집에서 남편이랑 함께 모여살수 있을가?

 

그것은 그가 바란 최대의 소원이였다.

 

하지만 한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는 이 땅에서 그 소원은 한갖 꿈에 지나지 않는것임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 동녘하늘이 푸름푸름 밝아오고 얼마후 대문이 찌그덕 열리자 문예봉은 놀라서 쳐다보는 녀주인에게 억지웃음을 던지고나서 허둥지둥 하숙방으로 뛰여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던 문예봉은 억이 막혀 그 자리에 굳어졌다. 울다가 지칠대로 지친 애기는 얼음처럼 차거운 방바닥에 쓰러져있고 그애의 허리에 매여진 긴 띠의 끝은 방기둥에 그대로 매여져있었다.

 

문예봉은 터져오는 아픔속에 너무 울어서 눈물로 얼굴이 얼룩덜룩한 어린것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죄없는 자식에게 너무도 고통을 주는 자기가 미워나서 흑- 하고 흐느꼈다. 이런 때 남편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렇다. 비록 앓기는 해도 그이가 곁에 있으면 이 모든 고통을 견디여내기 헐할것 같았다.

 

그후 몇달이 지나자 그토록 고대하던 남편이 시골에서 올라왔다. 그는 안해의 서운한 눈길도 느끼지 못한채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부터 붙들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자, 우리 종화 얼마나 컸는가 좀 보자요.》

 

그러자 캐득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붓한 가정의 달콤함이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고있는 문예봉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빨리 설겆이를 끝내고 그들과 한데 섞여 즐겁게 지내고싶었다.

 

그가 금방 부엌에서 나오려는데 공교롭게도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문예봉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문너머에 서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인차 알아차린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며칠전에 나타나 《어쩔가? 방을 빌리겠다는 사람이 나섰는데…》 하고 쌀쌀하게 말했던 주인집 녀자였다. 벌써 석달째나 방세를 물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때 《며칠만 참아주세요. 이제 새 영화가 봉절되면 다 갚겠어요.》 하고 간신히 말미를 얻은 문예봉이였던것이다. 오늘은 기어코 끝장을 보자고 할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문을 열자 아닐세라 그 녀자가 성큼 들어섰다.

 

《그래, 오늘은 방세를 주겠지?》

 

《이왕 기다리던바에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녀주인의 쌀쌀한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내 지금껏 이름난 배우라고 해서 참아왔는데 이거야 너무하지 않소. 우리 사정도 좀 봐주어야지. 안되겠어. 오늘중으로 방을 내주게.》

 

문예봉은 더는 출로가 없다는것을 깨닫자 눈앞이 아뜩했다.

 

《알겠어요.》

 

간신히 대답한 그는 녀주인이 돌아서자 문설주를 손으로 꼭 잡았다. 눈앞이 빙그르 돌아갔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어쩌나?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문예봉은 급히 눈구석을 손으로 찍고나서 방에 들어섰다. 그러던 그는 놀랐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있었던것이다.

 

《어디 가시려고 그래요?》

 

림선규가 돌아보았다. 안해에 대한 동정의 빛과 자신에 대한 환멸이 한데 엉킨 흐려진 눈동자…

 

《!》

 

남편은 이미 자기가 녀주인과 나눈 이야기를 다 들은것이다.

 

《여보!》

 

문예봉은 자기가 무엇때문에 남편을 찾는줄도 모르면서 그를 찾았다.

 

《내 좀 나갔다 오겠소.》

 

림선규는 미처 만류할새도 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문예봉은 비내리는 거리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편을 불안속에 지켜보았다.

 

한겻이 되여서야 림선규는 집에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였다. 자기의 친구인 한규설과 함께 손달구지까지 끌고 왔다.

 

《여보, 그건 어쩌자고…》

 

림선규는 아무말없이 방구석에 잔뜩 무져놓은 책궤짝들을 내가기 시작했다.

 

문예봉은 서둘러 다가서며 남편의 손을 잡았다.

 

《종화 아버지, 왜 그래요?》

 

그 순간 남편이 고개를 돌렸는데 눈굽이 벌겋게 짓물려있었다.

 

문예봉은 남편의 의도를 알았다. 그는 자기 이상으로 사랑해온 책들을 팔아 방세를 마련하려고 결심한것이다. 보잘것없는 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 세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해 사라지고있는것이다.

 

문예봉은 그를 만류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남편의 앞을 막아서며 《여보, 어쩌면 작가인 당신이 책을 팔수가 있어요?》 하고 만류했으련만 이 순간에는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책을 다 실은 림선규는 문예봉에게 부탁했다.

 

《여보, 당신이 좀 수고해주오.》

 

문예봉은 자기 손으로 차마 책들을 팔지 못하는 남편의 그 아픈 심정이 가슴에 마쳐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얼마후 남편의 친구가 앞채를 메고 문예봉이가 뒤에서 밀면서 손달구지가 굴러갔다. 그뒤에서는 어진 두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림선규가 고개를 푹 떨구고 서있었다. 울고있는 사람은 남편만이 아니였다. 손달구지를 밀고 가는 문예봉이도 울고있었다.

 

앞에서 굴러가는 손달구지가 별스레 기우뚱거리는것 같더니 급기야 책꾸레미가 쏟아졌다. 황황히 책꾸레미를 손달구지에 싣던 문예봉은 갑자기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비로소 그는 자기 운명이 노대도 없이 막막한 바다를 표류하는 임자없는 나루배의 신세와도 같다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그러나 문예봉의 앞길에는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있었다. 일본놈들이 문예봉에게 저들의 편에 서서 군국주의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하였던것이다.

 

문예봉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만약 놈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더는 영화계에 발을 붙일수조차 없게 될것이였다. 이것은 기우뚱거리는 가정의 가장노릇을 해야 하는 그에게 있어서 또 영화배우를 일생의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쉽게 결심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계가 급하다 하여도 민족적량심마저 팔아가며 목숨을 연명할수는 없었다.

며칠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들에는 문예봉이 영화계에서 은퇴했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리였다. 《조선영화의 기라성》으로 떠올랐던 문예봉이 은막에서 조용히 사라져버린것이였다. 《임자없는 나루배》는 겹쳐드는 풍랑에 정처없이 표류하고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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