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 [연재 43]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43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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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31 16:4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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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43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2015-07-31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43) 7. 4공동성명을 휴지화하려는 책동을 짓부시며>기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10월 유신을 반대하는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 연행하는 군인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43)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7. 4공동성명을 휴지화하려는 책동을 짓부시며
1970년대에 이르러 우리 공화국의 위력이 더욱 불패로 다져지고 대외적권위가 날로 높아지게 되자 미국은 이를 악용하여 서방의 자본주의나라들이 공화국정부를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사회주의나라들이 남조선《정부》를 인정하게 하여 조선반도에 북, 남 두 정부의 공존체제를 국제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한 《교차승인》책동에 매여달렸다.
일본의 반동지배층도 이에 편승하여 남조선당국자들을 영구분렬에로 더욱 부추기였다.
이에 추종하여 남조선당국자들은 민족적신의와 도덕도 없이 파렴치하게도 7. 4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공공연히 유린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들은 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야당세력에 대하여서도 정치적압력을 가하였고 남조선인민들의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계속 억압하였으며 어용선전수단들을 동원하여 공화국북반부를 비방중상하는 선전깜빠니야를 련일 벌리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남조선당국자들이 7. 4공동성명을 합의발표하였으나 말과 행동이 다른 량면전술을 쓰고있으며 계속 민족분렬정책과 매국배족행동을 일삼고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공화국정부는 적십자회담과 함께 북남간의 고위급대표들의 접촉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72년 9월 17일 일본 《마이니찌신붕》 기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북남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여 공동성명에 지적된 사항들을 추진시키며 나라의 통일을 위한 근본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더욱 폭넓고 다방면적인 접촉과 협상인 북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의 련석회의나 북남당국자들의 회의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 남조선《국회의원》들의 련합회의 같은 정치협상을 시급히 진행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와 함께 평화적조국통일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하여 당면하게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방도들을 제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공화국정부는 조성된 정세하에서 북과 남사이의 대화를 성공에로 이끌며 공동성명의 합의사항들을 하루빨리 리행하기 위하여 조절위원회가 구성되기 전이라도 쌍방공동위원장들의 회의를 소집할것을 남측에 루차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 10월 12일 북남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의 첫 회의가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였다.
이 회의에서 공화국측은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그를 위반한 남조선측의 행동에 대하여 강하게 추궁하였으며 남조선측은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쌍방의 《합의정신을 성실히 리행해나가겠다.》고 확약하였다.
그러나 남조선측은 말과 행동을 달리하였다. 그들은 10월 17일 북남대화와 평화통일을 《뒤받침한다》는 구실밑에 남조선전역에 이미 선포되여있던 《비상사태》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10월유신》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공화국측은 그들이 민족적립장에 돌아설것을 기대하면서 대화를 계속하기로 하였으며 북남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의 제2차회의를 평양에서 열것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 11월 2일 평양에서 공동위원장들의 제2차회의가 열리게 되였다.
제2차회의가 진행되던 1972년 11월 3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남측대표들을 만나주시고 남조선측이 조국통일의 3대원칙을 통일의 기둥으로 삼아나가겠다고 서약한 조건에서 북과 남사이에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다방면적인 합작을 실현할데 대하여 천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과 남은 대화를 하는데 머무를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합작을 실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경제적합작실현을 위한 방도로서 남조선농촌의 관개공사를 북에서 도와주는 문제, 북의 령해에서 북과 남이 공동으로 어로작업을 하는 문제, 북의 무진장한 쇠돌을 남에서 캐갈데 대한 문제 등을 중요하게 제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문화분야에서의 합작을 위해서 민족어를 통일적으로 발전시키는 문제, 과학분야에서 북과 남의 학자들이 힘과 지혜를 합쳐 공동으로 과학연구사업을 진행하는 문제, 체육분야에서 북과 남이 단일팀을 구성하여 국제경기들에 공동으로 출전하는 문제 등을 중요방도로 제기하시였다.
뿐만아니라 경제, 문화적합작은 마땅히 정치적합작으로 발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정치적합작을 실현하는데서 북남련방제를 실시하는것이 합리적이라고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 남조선측 대표들과 하신 담화에서 내놓으신 방침들은 공동위원장들의 제2차회의에서의 문제토의의 기초로 되였으며 성과의 확고한 담보로 되였다.
북남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의 제2차회의에서는 북남조절위원회를 구성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고 상설적인 민족의 공동기구로서의 북남조절위원회의 목적과 구성, 기능 및 운영문제에 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특히 회의는 조국통일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북과 남사이에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각 분야에 걸쳐 힘을 합쳐 같이 사업할데 대한 문제를 북남조절위원회의 기능으로 규정하였다.
1972년 11월 30일부터 12월 1일사이에 서울에서 열린 북남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의 제3차회의에서는 제2차회의의 합의에 따라 북남조절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절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자기 사업에 착수하게 된것은 북남관계발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전진으로 되였다.
7. 4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세차례의 북남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와 세차례의 조절위원회 본회의에서 공화국측이 내놓은 제안들은 조선에서 평화를 공고히 하고 통일에 앞서 북과 남사이의 확고한 신임의 전제를 마련함으로써 합작과 단결을 진실로 도모하며 평화통일에로의 길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들이였다.
그러나 남조선측은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북측에서 제시한 정당한 제의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조절위원회안에 경제 및 문화의 두개 분과위원회만 내올것을 고집하면서 정치, 군사, 외교분과위원회들을 내올데 대한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부분적인 교류만 실시하려 하고 긴장상태의 완화에는 관심이 없다는것을 드러내놓았다. 결국 대화가 아니라 대결을, 통일이 아니라 분렬을 추구하는것이 그들의 진짜속심이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공화국정부는 북남적십자회담과 북남조절위원회사업의 성과를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더욱 폭넓고 다방면적인 접촉과 협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다하였다.
1972년 8월 19일 조선로동당, 조선사회민주당, 천도교청우당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들에서는 북남조선의 애국적인 각당, 각파와 각계각층 인민들의 거족적인 힘을 동원함으로써 내외반동세력들의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조국통일을 최대한으로 앞당기기 위하여 북남 제 정당, 사회단체련석회의를 가질것을 남조선의 여러 정당, 사회단체들에 제의하는 련합성명을 발표하였다.
공화국정부는 또한 북남조절위원회를 통한 북남대화가 잘 진척되지 않게 되자 북남조절위원회사업에 북과 남의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각계각층 인사들을 참가시켜 그 폭을 넓히든지 또는 조절위원회사업은 조절위원회사업대로 두고 북과 남의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가하는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할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은 북과 남의 폭넓은 정치협상회의의 진행도 반대하였다.
남조선당국자들의 배신행위로 하여 모처럼 마련되였던 북남대화는 더 전진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였으며 력사적인 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였을 때 우리 민족앞에 열렸던 조국통일의 밝은 전망은 흐려져갔다.
북과 남사이의 대화와 협상과정을 통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정부의 공명정대한 립장과 남조선당국자들의 반통일적모략책동을 보면서 세계는 과연 누가 통일을 바라고 누가 분렬을 획책하는지를 더욱 똑똑히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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