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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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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21 21:3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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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글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12.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김 승 구 (작가)

 

                        • 1914년 7월 12일 충청남도 아산군 령인면(당시)에서 출생.

                        • 1937년 5월부터 극단 중앙무대 문예부장.

                        • 1945년 9월부터 경기도 서울시 문화통신사 주필.

                        • 1946년 8월부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예술과장.

                        •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1956년 2월부터 국립예술극장 총장.

                        • 1959년 1월부터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주필.

                        • 1981년 10월부터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원.

                        • 1994년 11월 29일 사망.                   

                                                           

 

 

누구에게나 삶의 태줄을 묻은 고향이 있지만 그 고향이 또한 누구에게나 보람찬 삶의 요람으로 되고 소중한 꿈과 재능을 꽃피워준 희망의 터전으로 되는것은 아니다.

 

하기에 나라잃은 수난의 그 세월 뼈아픈 고통과 절망만을 안겨준 고향을 등지고 참된 삶의 빛을 찾아 헤매인 재사가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의 주인공 김승구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한생은 절세의 위인들의 품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고 잃어버릴번 했던 청춘도 다시 찾아 조국과 더불어 빛나는 생의 자욱을 아로새긴 뜻깊은 인생행로였다.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언제인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찾으신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을 모신 력사적인 사진을 보아주시면서 김승구는 오랜 작가라고 감회깊이 추억해주시였다.

 

오랜 작가!

 

이 말씀은 청춘의 열정으로 한생을 작품창작에 바친 작가 김승구에 대한 최대의 평가이다.

 

하다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처럼 잊지 못해하신 김승구의 로년기는 어떻게 흘러갔는가?

그가 60을 눈앞에 두고있던 1970년 8월 5일이였다. 그날 작가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나오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의 눈앞에는 20여년전의 잊지 못할 그날 불밝은 저택의 마당가에서 자기의 손을 힘있게 잡으시고 안부를 물어주시던어버이수령님의 영상이 눈가에 생생히 어려왔다.

 

그의 가슴은 수령님과 꼭같으신 장군님의 령도의 손길을 접하게 된 행복감으로 후더워올랐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의 작업필림을 몸소 보아주시고 그들에게 영화를 훌륭히 완성하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작가는 그이의 가르치심을 자로 하여 영화를 차근차근 수정하였다.

 

1971년 2월 12일 김승구는 또다시 경애하는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그때로 말하면 예술영화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가 영화관들에서 상영된지 여러달이 흘렀을 때였다.

 

오랜만에 어버이를 찾아가는 자식마냥 한껏 부풀어오른 가슴을 안고 장군님 계시는 곳으로 달려간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우리 나라 영화예술부문에서 오래동안 함께 일해온 이름난 창작가들이 모두 와있었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격을 금치 못하는 그들에게 지난 기간 영화창작에서 성과있는 동무들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러지 않아도 크나큰 감격에 넘쳐있던 김승구에게 친히 축배잔까지 부어주시며 올해에는 꼭 두편을 받아내겠다고 이르시였다.

 

작가는 그 말씀에 그만 참고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말았다. 이제는 눈도 어두워지고 머리도 반백이 된 자기에게 안겨주시는 그 믿음!

 

그는 두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꼭 젊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삶의 목표가 없는 인간에게서는 청춘의 열정과 기백이 분출될수 없다. 청춘과 로화의 갈림길이 여기에서 시작되는것이다.

 

바로 우리 장군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그이께서 자신과 약속을 하시였다는 가슴치는 자각은 그의 심장에 청춘의 활력을 북돋아주었다.

 

그후 작가는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예술영화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1, 2부)를 완성하였다.

 

1972년 3월 25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학예술부문의 전반사업을 지도하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작가를 친히 불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창작가들의 결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영화의 구성을 회상식으로 바꿀데 대한 묘안을 찾아주시였으며 생활전개의 대안들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하여 영화는 건설부문 로동계급을 취급한 대서사시적인 예술영화로, 보통강사람들의 운명을 통하여 수도 평양의 세기적전변을 폭넓게 반영한 영화로 훌륭히 완성되게 되였다.

 

1970년대 후반기 예술영화 《춘향전》창작에 참가하였던 김승구는 또다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게 되였다.

 

영화를 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형식만 현대적일뿐이지 내용은 아직도 복고주의적으로 되였다고 하시면서 작품이 그렇게 된 원인은 창작가들이 《춘향전》을 다시 잘 만들데 대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영화문학을 쓴데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작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잘 받들지 못한 자신을 아프게 질책하며 수령님의 교시를 되새겨보았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에는 《춘향전》의 주제사상은 봉건적신분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고 명백하게 밝혀져있었다.

 

작가는 외람되게도 《춘향전》을 이미 잘 알고있는 작품이라는데로부터 수령님의 교시사상에 기초하여 원작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하지 않고 붓을 들었기때문에 조선녀성의 고결한 품성인 절개를 작품의 기본주제로 제기하고 전편은 사랑편으로, 후편은 절개편으로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문학예술작품에서의 주제의 분렬은 치명적인 결함이였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이야기거리로 어떤 생활을 가지고 형상할것인가.

 

사색에 사색을 거듭했지만 도무지 좋은 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가의 이런 고충을 헤아려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 작품의 기본이야기는 춘향과 리도령의 사랑을 통하여 봉건적신분관계를 타파하여야 한다는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진실한 인간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생활을 짓밟는 모순에 찬 신분제도를 철페해야만 참된 삶이 피여날수 있다는 투쟁의 진리를 밝혀주는데 이 영화의 철학성이 있다고 일깨워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받은 작가는 붓을 들면 단숨에 절정에 치달을것 같은 환희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사상적대가 섰으니 모든 형상의 고리들이 척척 풀리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난관에 봉착하였다. 새로운 설계에 의한 새 집을 짓자면 그에 맞는 건축술과 자재가 요구되는것처럼 새롭게 제기한 주제사상적내용은 그에 맞는 형상수법과 생활이 탐구될 때 예술적화폭으로 펼쳐질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연구해도 좋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창작에서 진통을 겪게 된 작가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다시금 받고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헤여날수가 없었다.

 

작가의 이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창작가가 되시여 작품을 살려낼 방도들을 하나하나 찾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문학은 인간학이므로 등장인물들을 전형화하고 그들의 사회계급적처지와 성격론리에 맞게 개성적으로 형상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 영화에서는 신분관계를 보여주는것이 중요하므로 춘향과 리도령의 형상에서 생활상 대조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순간에 작가의 눈을 확 틔워주고 신심을 솟구치게 하는 명철한 말씀이였다.

 

작업필림에 형상된 춘향은 옷을 곱게 차려입고 가야금을 타며 그림이나 그리는 인물로서 량반통치배의 아들인 리몽룡과 아무런 차이도 없어보였다. 이것이 주인공형상에서의 본질적인 약점이였다.

 

이처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춘향이한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얼굴과 자연풍경만을 아름답게 찍어 관중들의 인기를 끌려는 《인상파》적인 결함을 제때에 찾아주시고 창작태도를 바로잡아주시였던것이다.

 

원래 《인상파》는 19세기 후반기에 발생한 문예사조의 하나로서 사물현상의 본질보다 외적인상을 더 중요시하며 그 어떤 매력만을 노리는 부르죠아적미학관을 주장하는 반동적인 류파인것이다.

 

주체적인 미학관으로 철저히 무장하지 못했던 작가는 본의아니게 《인상파》적인 경향에 말려들어 인간의 참다운 아름다움이 외모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도덕적풍모에 있다는 진리를 외곡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였던것이다.

 

작가는 춘향의 새로운 형상방도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창작지도일군들과 경험있는 작가들, 심의원들의 집체토론이 여러날 계속되였으나 본래의 춘향이를 새롭게 형상할수 있는 신통한 안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이때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들의 막힌 생각을 또다시 틔워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춘향의 어질고 효녀다운 품성을 잘 형상하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하며 인품이 있고 어질고 례절바른 춘향의 모습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현대성의 원칙을 구현하도록 하신 이 가르치심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만이 찾아주실수 있는 새로운 형상방도로서 우리 시대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춘향의 성격을 창조할수 있게 하는 지침으로 되였다.

 

하여 오늘 우리가 영화에서 보게 되는 베틀에 앉아 삯베를 짜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동자질을 하는 춘향이, 리도령과의 리별후에는 눈물속에서가 아니라 일로써 시름깊은 마음을 달래며 생활을 개척해나가는 춘향이, 자신이 짠 무명천으로 향단이의 첫날옷과 용쇠옷도 만들자며 마음고생만 시키고 해줄것이 없다고 하는 인정미 풍부한 춘향이, 변학도의 불호령을 받고도 사령에게 끌려가는것이 아니라 소복단장하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강한 춘향이가 태여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춘향이는 리도령과 신분적차이가 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게 되였으며 안팎이 다 고운 새로운 춘향으로서 우리 인민들에게 친근감을 주게 되였다.

 

큼직한 매듭이 풀려서 거침없이 나가리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리몽룡의 형상에서 또다시 걸리고말았다.

 

새로 만든 영화에서 작가는 량반가정의 절도를 뛰여넘어 천한 기생의 딸과 백년가약을 맺는 리몽룡의 좋은 측면만을 그렸고 암행어사가 되여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인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개탄하는 장면을 설정함으로써 그가 마치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줄수 있는 선각자인듯 한 인상을 주게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리몽룡은 봉건유교사상의 신봉자로, 봉건통치제도의 옹호자로 그려야 시대상을 체현한 개성적인 인물로 된다는데 대해서도 명철하게 깨우쳐주시였다.

 

또한 변학도를 옳게 형상하는것도 《춘향전》의 교양적목적을 달성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그 형상방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작가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감사의 정이 가득차올랐다.

 

예술영화 《춘향전》을 고전물영화의 걸작으로 만드시려고 장군님께서 바쳐오신 심혈과 정력적인 지도는 실로 끝이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춘향전》작업필림을 보시고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또다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사랑선을 기본으로 끌고가는 《춘향전》을 보다 특색있는 영화로 만들자면 주인공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대목에서 시를 읊어 서로 의사를 주고받도록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형상수법도 가르쳐주시였다.

 

 

오늘 광한루에서 봄향기에 취했으니

잠도 절로 꿈도 절로 단잠잘줄 알았건만

저 달이 기울도록 어이하여 잠 못 드나

그대 이름 춘향이라 내가 맡은 봄향기도

모조리 안고 가서 이밤을 못 자는듯

원컨대 한줄의 시에라도 돌려주면 내 잠들리

 

라고 써보낸 리몽룡의 시에 대답하여 춘향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보낸다.

 

잠 못드는 그 사연이 어이하여 내탓이랴

이밤엔 가야금도 잠 못 들어 설레이노니

아마도 봄바람이 얄궂은듯 하여라

 

 

이 장면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새 형상수법에 의하여 마련된것이였다.

 

이렇듯 경애하는 장군님의 천재적인 예지로 예술영화 《춘향전》은 훌륭히 완성될수 있었다.

 

이처럼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고도 장군님께서는 그를 국가적인 큰 대회들과 어버이수령님 탄생 60돐, 70돐 경축연회를 비롯한 영광의 자리에 빠짐없이 불러주시였다.

 

또한 그의 건강을 념려하여 여러가지 보약재들과 귀중한 선물들, 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진 시계와 생일 70돐상, 80돐상을 안겨주시였다.

 

작가 김승구에게 돌려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을 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

 

친어버이의 그 사랑속에, 늙었다고 물러설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께서 책임지고 끝까지 데려가겠으니 힘을 내야 한다고 고무해주신 그 믿음속에 떠받들려 김승구의 여생은 사시장철 푸른 소나무처럼 싱싱하게 흘러갔다.

 

붓은 무겁지 않았고 열정은 젊은이들도 부러워할만큼 끝없이 솟구쳐올랐다.

 

언제인가 우산장창작실에서 김승구가 영화문학 《그는 우리와 함께 있다》의 마지막 창작전투를 벌릴 때 있은 일이다. 그는 창작도중 뜻하지 않은 병에 걸리였다. 구급차곁으로 떠미는 작가들에게 그는 괴로움을 참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한두시간 참느라면 아픔이 멎겠지요. 자, 그러지 말고 어서 창작실로 갑시다.》

 

이렇게 그는 참기 어려운 고통속에서도 펜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원고지와 마주앉았다. 동통을 참아가며 한자두자 작품을 써나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불비쏟아지는 전화의 그날 결전장을 누벼가던 1950년대 종군작가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 불같은 열정에 의하여 마침내 작품이 제기일내에 완성되였고 경애하는 장군님께 영화로 올릴수 있었던것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창작의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했던 1970년대의 나날들에 있었던 한가지 사실에 불과하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안겨주신 청춘의 열정과 지혜로 시대와 력사를 폭넓게 그려낸 무게있는 작품들을 련이어 탈고하였다.

 

진정 력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한 스승, 자애로운 어버이를 모심으로써 작가 김승구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로쇠를 모르는 청춘작가로 되였던것이다.

 

우리는 작가 김승구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림종 순간까지 잊지 못해한 생일 80돐상에 깃든 가슴뜨거운 사연으로 맺으려고 한다.

 

1994년 8월, 력사가 일찌기 알지 못하는 슬픔과 비애의 피눈물로 자자구구 젖어오던 우리의 신문들에 재미교포 손원태가 생일상을 받은 소식이 실려 세상을 놀래우던 때를 사람들은 기억하고있을것이다.

 

바로 그 8월의 어느날이였다.

 

이날 작가 김승구도 뜻밖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시는 생일상을 받아안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10년전에 그의 생일 70돐상을 보내주시였는데 또다시 80돐생일상을 안겨주신것이였다.

 

작가의 주름진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 그 누구보다도 상실의 아픔이 크실 장군님께서 이 불민한 전사의 생일날까지 잊지 않고계신단 말입니까.

 

그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펜과 종이를 찾았다. 80고령에 운신이 어렵던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기적이였다. 역시 작가는 괴로워도 글이요, 기뻐도 글이다.

 

그는 자신의 심신을 깡그리 모아 장군님께 삼가 편지를 올렸다.

 

《… 온 나라 만백성이 어버이를 잃은 비감에 잠겨있고 장군님께서 겪으실 상실의 아픔에 눈물짓고있는 때에 이름없는 작가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몸소 생일상을 보내주실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작가는 수없이 많고 그가운데 뛰여난 재능가를 꼽으라면 이 사람이 설자리는 아마 없겠지만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과 맺은 인연, 받아안은 사랑에서 아마 제일일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은 터질듯 부풀어오릅니다. …》

 

얼마후 붓을 놓은 그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맹세다졌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 저는 여생을 로쇠를 모르는 청춘작가로 빛내이겠습니다.)

 

청춘작가!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 진정한 고향, 조국을 찾은 때로부터 경애하는 장군님의 손길아래 봄날처럼 싱싱한 열정과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 빛내온 김승구의 례사롭지 않은 80평생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남긴 심장의 글에서 찾아볼수 있다.

 

《수령을 잘 만나고 수령을 잘 모셔야 나라가 흥하고 인생의 꽃이 핀다. 이것이 내 한생의 총화이고 내 한생의 문학적탐구로 얻은 진리이다.》

 

김승구의 한생은 작가의 청춘기는 위인의 품속에서 살 때 온갖 풍파에도 끄떡없이 푸르싱싱해진다는 진리를 남기고있다.

 

그렇다. 하늘에 찬란한 태양이 있어 만물이 소생하듯이 백두산3대장군의 따뜻한 손길이 있어 김승구는 오늘도 《내 고향》과 더불어 영원한 청춘작가로 우리의 심장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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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2) 《내 고향》을 찾은 류민

►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12.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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