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연재 23] 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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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28 22:1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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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알면 조국통일이 보인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를 연재하며
편집국
2015-06-28
북은 해방 후부터 통일에 역행하는 남쪽의 친일친미 사대매국노 집권무리들과 반대로 지금까지 조국의 자주평화 통일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지금 <우리민족끼리>에서 연재하고 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 기사도 있다. 이 기사를 읽다보면 북의 전쟁없이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후 지금까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줄기차게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촉구한 북의 참모습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감춰지거나 왜곡되게 남쪽에 전해진 사실도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 연재기사를 통해 독자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온 북의 진실된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일관되게 노력해온 북의 참모습을 알면 조국통일이 더 쉽게 더 빨리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누가 매국노인지 누가 애국자인지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민족끼리 단결 단합하여 반통일세력을 짓부수고 조국통일 이룩하여 민족번영을 맞이하자.
우리민족끼리에 소개된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역사(23)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조치> 기사를 원문그대로 소개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 (23)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쳐온 우리 공화국의 력사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대한 력사적책임감을 다한 성스러운 로정이였으며 온 겨레에게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과 락관을 심어준 숭고한 통일의 년대기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날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였으며 그 길에서 불멸의 업적을 이룩하시였다.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평생업적을 토대로 하여 존엄높고 부흥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시려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령도밑에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선 온 겨레는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의 투쟁의 력사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조치
공화국정부는 예비회담의 결렬로 정치회의소집이 기약할수 없게 되였으나 조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며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을 위한 국제회의소집발기에 따라 공화국정부는 1954년 1월 10일과 30일 외무성성명을 통해 이전 쏘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의 외무상회의를 시급히 소집하여 조선문제를 비롯한 국제적긴장상태를 완화할데 대한 문제들을 토의하며 조선에서 한급 높은 정치회의의 소집을 촉구할것을 주장하였다.
1954년 2월 베를린에서 열린 이전 쏘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 외무상회의에서는 4월 26일부터 제네바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유관국가들의 참가밑에 조선문제를 비롯한 긴장한 국제적문제들을 토의할데 대하여 합의하였다.
▲1954년 제네바 코리아반도 통일 회담 당시 사진
제네바회의는 유엔무대밖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의 참가밑에 조선문제를 토의하게 될 첫 국제회의로서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을 위한 공화국정부의 투쟁에서의 전진을 의미하였다.
공화국정부는 회의에서 우리의 공명정대한 조국통일방침과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제안들을 전세계인민들에게 널리 인식시켜 미제를 고립시키고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의 넓은 길을 마련하는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웠다.
공화국대표단은 회의가 열린 다음날인 1954년 4월 27일 《조선의 민족적통일회복과 전조선적자유선거실시에 관하여》라는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이 방안은 조선의 통일문제를 자주적원칙에서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할데 대한 우리 공화국정부의 시종일관한 립장과 전조선인민의 념원을 그대로 반영한 그리고 세계평화애호인민들의 관심과 주목속에 체결된 정전협정의 요구에도 전적으로 부합되는 가장 정당하고도 공명정대한 제안이였다. 또한 조국통일의 앞길에 절박하게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을 세계평화의 리익에 부합되게 실질적으로 풀어나갈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제안이였다.
이 방안이 발표되자 세계 진보적인민들은 물론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던 나라 대표들속에서도 긍정적반응을 일으켰다. 제네바회의에 참가하였던 영국대표 이든은 《우리들은 평화를 또다시 위태롭게 함이 없이 우리 군대를 철수시킬수 있다면 곧 조선으로부터 우리 군대를 철수시킬 공통적인 념원을 가지고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미국측은 이에 극구 반기를 들고나왔다.
미국대표 덜레스는 《우리가 조선에 와서 몇십만명의 희생을 내였는데 어찌 조선을 거저 내놓겠는가. 우리는 조선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공화국측의 제의를 반대해나섰다. 그리고는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고집하였다.
공화국정부는 제네바회의의 성과적보장을 위하여 성의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1954년 5월 2일 호소문을 채택하고 제네바회의에 편지를 보내였으며 평양시민들은 1954년 5월 5일 군중대회를 열고 제네바회의에서 우리 대표단이 내놓은 방안을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을 위한 협의의 기초》로 채택할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제네바회의진전을 위한 공화국정부의 성의있는 노력과 우리 인민의 드높은 열의는 제네바회의참가자들로 하여금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미제는 우리 대표단의 제안을 반대하고 회의를 파탄에로 이끌어가기 위한 저들의 소기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되자 덜레스를 소환하고 대표를 갈아치웠을뿐만아니라 5월 13일부터 8일간이나 회의를 고의적으로 중단시켰다. 그후 미제는 5월 22일 남조선측을 시켜 이른바 《14개 항목방안》을 내놓게 하였다.
이른바 《14개 항목방안》이란 조선에서의 선거를 유엔의 감시밑에서 하되 전조선적으로 동시에 실시할것이 아니라 북조선에서만 하고 남조선에서는 그것을 이미 총칼의 위협밑에 강압실시된 반인민적독재《선거》가 대신한다는것이였다. 외국군대의 철거도 중국인민지원군만 북조선에서 철거하고 《유엔군》은 남조선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이것은 결국 유엔의 간판밑에 남조선에 세워진 미제의 식민지통치제도를 공화국북반부에까지 확대하려는 음흉한 기도였으며 우리측의 공명정대한 방안을 거부하고 제네바회의를 파탄시키려는 모략이였다.
이러한 사태하에서 우리 공화국대표단은 어떻게 하나 회의에서 조선문제토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5월 22일 또다시 새로운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에서 우리 대표단은 조선에 대한 외국의 불간섭원칙을 위반하지 않는 전제밑에서 전조선선거를 관찰할 중립국위원회를 조직하는것을 고려할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유엔감시》를 고창하는 미제와 《국제적감시》의 필요성에 대해 운운하던 미제의 추종자들까지도 접수하지 않을수 없는 아량있고 공명정대한 방안이였다.
그러나 미제는 이 합리적인 제안마저 거부해나섰다. 그리고는 6월 11일 《유엔의 권위》와 《유엔감시하의 선거》실시를 승인하지 않는 한 회의를 계속할수 없다고 공공연히 도전해나섰다. 미제의 이러한 행위야말로 어떻게 하든지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을 파탄시키려는데 그 진의도가 있었다.
미제의 이러한 책동에 대처하여 공화국정부대표단은 6월 15일 회의에서 《조선에서 평화조건을 보장할데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6개 항목의 새로운 방안을 내놓았다.
공화국정부대표단이 내놓은 제안은 조선문제의 평화적조정과 조선의 민족적통일실현을 위한 보다 유리한 전제를 마련할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였다.
하지만 미제와 그 추종분자들은 공화국의 이 정당한 제안을 거부하고 《평화》의 위선적인 구호마저 집어던진채 6월 15일 미리 만들어두었던 《16개국 공동선언서》라는것을 급급히 내리읽고 퇴장해버리는 무례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미제의 이러한 파렴치한 책동으로 하여 제네바회의는 조선문제의 해결을 위한 그 어떤 결정도 채택하지 못하고 파탄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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