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기고문]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 10년 전 평양이 내게 가르쳐준 것 > 새 소식

본문 바로가기

본회는 동포들의 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돕고자 북녘 매체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 글들이 본회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님을 공지합니다. 

 
새 소식

재미 | [재미동포 기고문]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 10년 전 평양이 내게 가르쳐준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10-15 14:47 댓글0건

본문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 10년 전 평양이 내게 가르쳐준 것

김범(재미동포)

 

 


 

 

10월 10일, 뉴욕 출장 중 LA공항 대합실에서 손전화로 인터넷신문 연합뉴스 기사를 보았다. 조선로동당 창건 80돐 기념 열병식 보도였다. 화면에는 거대한 ICBM ‘화성-20형’의 위용이 자리했고, 곧이어 이어진 단어는 어김없이 “위협”이었다. 익숙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내게 ‘당창건 80주년’은 단순한 기사 제목으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10년 전, 바로 당창건 70돐 행사에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박사와 함께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세상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그 변화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80년’이라는 숫자가 던지는 질문 앞에 다시 섰다.

 

그날 차창으로 보이는 평양 거리의 붉은 깃발을 가리키며 노길남 박사는 내게 물었다. “저 깃발에 있는 세 가지 상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왼쪽은 망치 - 로동자, 오른쪽은 낫 - 농민, 그런데 가운데는… 촛불 아닙니까?” 내 눈에는 정말 촛불처럼 보였다. 차 안은 순간 고요해졌다. 뭔가 잘못 말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왜 잘못인지조차 몰랐다. 그때의 나는 반공교육으로 길든 머리로 세상을 보고 있었고, 조선에 대한 이해라곤 남쪽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 무지의 필터를 벗기 전까지, 나는 미국에 살면서도 절반의 세계만 보고 있었다.

 

처음 평양을 찾았을 때 나는 모든 게 낯설었다. 사진을 찍지 말아야 할 곳을 찍었다가 카메라를 빼앗기기도 했고, 동행하던 안내원에게 일본 ‘동경신문’ 보천보 전투 관련 기사를 근거로 “그 때 김일성은 사망했다는 걸로 실렸는데.. 북에서 말하는 김일성은 가짜가 맞지요?”라고 물었다가 노길남 박사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꾸짖지 않았다.

 

며칠 뒤 정기풍 교수와 취재 인터뷰 촬영을 마치고 잠깐 함께한 자리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정교수로부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말이 그말 아닌가요?” 그 둘을 같은 말이라 생각했고,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그러나 장기수 리인모 선생의 손녀 오보람 기자를 취재 촬영 하면서, 내 사고는 완전히 뒤집혔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는 조국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인간의 존엄을 되찾으셨습니다.” 그 한 문장이 내 머리를 세게 때렸다. 

 

그날 밤, 고려호텔 만장에서 평양의 밤을 내려다 보며 나는 노길남 박사에게 말했다. “박사님, 제 머리 뚜껑이 열린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세계가 이제야 보이는 것같습니다.” 그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선을 ‘대상’이 아닌 ‘하나의 세계’로 보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인용된 해설이 아니라 원문을 직접 읽고, 누군가의 해석이 아닌 조선 스스로의 언어를 보려 했다.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그리고 그 속의 논설문을 매일 비교하며 읽었다. ‘세기와더불어‘ 김현환 박사의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등 조선 관련 자료를 보았다. 그 배움의 10년이 내 사고의 기초를 완전히 바꾸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해 10월 10일 밤, 평양의 광장은 다시 붉게 물들었다. 조선은 신형 ICBM ‘화성-20형’을 공개했다. 조선의 언론은 이를 “최강의 핵전략무기”라 했고, 외신들은 “다탄두 탑재 가능성과 고체연료 추진을 갖춘 신세대 ICBM”이라 분석했다. 조선이 자위적 억제력 강화를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은 명백했다. 그러나 남측 언론은 또다시 “위협”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에서 합참의장이 국감장에서 “윤석열의 12·3 불법계엄”에 군이 가담했다고 국민 앞에 사죄했다는 사실이었다. 군이 헌정질서를 뒤흔든 내란 행위를 넘어 ‘윤석열이 북침 전쟁까지 계획했다‘는 흘러나오는 항간의 소식을 스스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 두 뉴스를 번갈아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진짜 ‘위협’인가. 조선의 열병식인가, 아니면 국민에게 총을 겨눈 군의 내란인가.

 

언론은 ‘위협’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하지만 위협이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정치적 언어다. ‘한국의 훈련은 평화수호, 조선의 열병식은 도발’이라는 익숙한 구도 속에서, 한쪽의 방어는 언제나 다른 쪽의 공격으로 번역된다. 언어의 선택이 곧 시선의 방향을 정하고, 그 시선이 오래 굳어지면 사실보다 악의적 프레임이 현실을 잘못된 방향으로 지배하게 된다.

 

내 인식의 변화는 거창한 계시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역사적 사실을 직접 읽어본 것, 그것이 전부였다. 로동신문, 조선중앙통신, 최고지도자의 연설문, 그리고 평양의 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말들 속에서 나는 ‘사람’을 먼저 보게 되었다. 

 

“인민대중제일주의”, “멸사복무”, “지방중흥 20×10 정책” 이 구호들은 공허한 선전이 아니라 일상의 행정과 건설, 사회제도의 언어로 이어져 있었다. 조선의 언어는 시적이었지만 그 시는 허공의 미사가 아니라, 자기 역사와 신념을 지키려는 몸부림의 산물이었다. 나는 조선을 생각없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악의적으로 만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합리적인 대화의 상대로’ 보려 한다. 그 차이는 작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한국 사회가 바뀌어야 할 지점은 멀리 있지 않다. 우선 서로의 호칭부터 바꾸자. ‘북한/남한’이 아니라 ‘조선/한국’(1991년 9월 17일 유엔 동시가입 시 호칭) 이라 부르자. 이름을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지만, 이름을 바꾸지 않고는 서로 존중이 시작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은 ‘조선을 알려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법이다. 생각의 자유가 금지된 사회에 평화는 없다. 헌법의 ‘영토 조항’ 또한 통일을 말하면서 대화를 차단하는 모순된 문장이다.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이 조항은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통일의 꿈을 말하면서, 동시에 대화의 문을 걸어 잠근다. 

 

군사적 예속에서 벗어나는 일도 절실하다. ‘한미일 합동 군사 훈련’이라는 이름의 무력시위를 줄이고, ‘신뢰’라는 이름의 공간을 늘려야 한다. 진짜 평화는 무력의 균형이 아니라 시선의 균형에서 시작된다.

 

그날 나는 깃발의 상징을 묻는 질문에 ‘촛불’이라 답했다. 그 무지한 대답이 나의 출발점이었다. 이제는 안다. 위협은 평화를 지키기위한 핵무력 완성의 미사일이 아니라, 진실을 가로막는 벽이다. 폭력은 총이 아니라, 사유를 금하는 국가보안법이다. 그리고 진짜 평화는 외세의 보장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미제의 속국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해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80년, 조선로동당의 역사는 이민위천, 인민의 존엄을 지키려는 시간이었다. 그 사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10년전 로동신문의 동태관 론설위원이 쓴 정론을 읽는다. “조선의 승리는 과학이다.” 그 문장을 신앙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문장이 비추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날의 ‘촛불 착각’은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그 부끄러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진짜 빛은 각자 스스로의 눈에서 나온다. 그 눈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같은 반도의 서로 다른 하늘을 하나의 새벽으로 볼 수 있다.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안다.

이 길의 끝은 결코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조선의 ICBM ‘화성-20형’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군사 기술의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 외세로부터 강요된 불신과 압박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려는 ‘존엄의 언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현실을 바라보며 해야 할 일은 그 언어를 두려움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 깃든 존엄의 의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조선과 한국, 두 국가 적대를 헤겔식 변증법 ‘대립과 정반합’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 역사는 대립의 합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우리 민족이 다시 전쟁 없는 새 아침을 맞이하려면, 먼저 한국이 스스로의 헌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속에는 아직도 조선을 반국가 단체로 보는 냉전의 잔재가 남아 있다.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이 문장은 통일을 말하면서 동시에 대화를 막는 모순이 되어왔다. 흡수와 지배의 논리를 넘어, 이제는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시작이다.

 

전쟁을 막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서로의 마음이다. 진짜 자주는 외세의 그림자 속에서 소리치는 구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다짐하는 한 사람의 각성에서 비롯된다. 그 각성이 모여야만, 민족은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나는 여전히 배움의 길 위에 서 있다.

10년 전 평양에서의 부끄러움이 내 시작이었듯, 오늘 다시 깨우치는 변화 또한 또 다른 출발일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거대한 선언보다 작은 깨달음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서로를 향할 때, 비로소 이 코리아반도는 진정한 평화의 언덕 위에 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끝)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재미동포 기고문]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 10년 전 평양이 내게 가르쳐준 것
【로동신문】서방이 판을 치던 시대는 지나갔다
[재미동포 기고문] 화전에서 시작된 불씨 - ㅌㄷ제국주의동맹
[재미동포 기고문] 조선인민의 꿈은 곧 실천이다
[재미동포 기고문] 교복증정식에서 조선교육의 품격을 본다
[재미동포 기고문] 오 필승, 코리아 - 빈 의자와 김구 선생의 인장 이야기
[로동신문] 집요한 참배놀음은 로골적인 재침야망의 발로/유럽스스로가 초래하는 안보불안
최근게시물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 11월 6일 (목)
[사진으로 보는 로동신문] 11월 8일 (토)
【로동신문】우리의 발전로정도를 따라 우리의 방식으로
【로동신문】사회주의농촌이 계속 변모된다
[로동신문] 당중앙에 충성의 보고를 드릴 그날을 앞당겨간다
【로동신문/ 조선의 소리】김정은위원장 소식모음
【로동신문】인민을 위하여 만족을 모르는 당, 일욕심이 많은 당이 되여야 한다
[조선신보] 체력교예 《그네널철봉》, 7년만에 또다시 파문
[21세기민족일보 사설] 청산은 끝까지, 징벌은 남김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광철 국방상 담화 발표
[사진으로 보는 로동신문] 11월 7일 (금)
[동영상] 고 김영남동지의 장의식 엄숙히 거행 외 3
Copyright ⓒ 2000-2025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