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 | [한찬욱의 총반격] 양심수도, 국가보안법도 없는 자주통일 시대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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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5-04-29 07:4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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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의 총반격] 양심수도, 국가보안법도 없는 자주통일 시대를 이루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존경하는 권오헌 선생님!
선생은 가셨지만 우리는 선생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반미자주통일에 대한 붉은 신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못다 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사진출처: 필자 제공]
남민전 전사 권오헌 선생이 한평생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남긴 마지막 영상 유언은 “양심수도, 국가보안법도 없는 자주통일 시대를 이루자!”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으론 부족했다. 선생은 최후까지 병상에서 집필과 메모 그리고 인터뷰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통일운동의 큰 어른답게 전사답게 싸우다 전사했다. 향년 88세.
선생은 지난 2017년 폐암 4기 판정을 받아 투병 중에도, 각종 집회나 행사에 쉬지 않고 참여해 왔다. 그러나 작년부터는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허리에 문제가 생겨 요양원에 있다가, 설상가상으로 9월 후두암이 발견되어 자택에서 병원을 오가며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척추에 전이된 암이 뇌로 전이되어,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됐다.
필자는 선생이 암 투병으로 현장에 나오지 못하신 이후부터, 매주 일요일 정기적으로 선생께 이번 주 일어난 일과 다음 한주간 주요 행사를 말씀드렸다. 최근은 내란정국 혼돈 상황과 윤석열 파면 그리고 이후 전개될 사회대개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 선생은 항상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서 통일단결을 주문하셨다.
선생은 파면 이후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을 꼭 보시길 원했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복원되는 것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틀 전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상에 갔을 때는, 이미 병마와 사투를 벌이느라 의식이 없으셨다. 너무 늦게 찾아간 것이 이렇게 후회막급(後悔莫及)할 줄은 몰랐다.
권오헌 선생의 삶은 분단 정부 수립 이후 사대 종미(從美) 친일 정권과의 반미·자주·민주·통일투쟁사였다.
대표적인 것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참가였다.
▶ 남민전은 해방공간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4월혁명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이후의 최대 전선 조직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에 맞서 1976년 2월 29일 남민전을 발기한 당시는, 미국과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전 세계가 요동쳤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패망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영구집권을 위한 결정적 구실을 주었다. 연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남침 규탄 대회를 개최하면서 이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해 민주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나갔다.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모든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가 1975년 5월 13일 공표되었다. 한마디로 제2의 유신쿠데타에 이은 제3의 쿠데타로 민주정치를 박살 내려는 초법적 조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거의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공안 탄압의 무시무시한 대기록을 세웠다.
“남민전”은 해방공간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4월혁명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이후의 최대 전선 조직이었다.
해방공간의 “민전”은 1946년 2월 15일 결성대회를 치르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1945년 11월 5일 결성),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1945년 12월 8일 결성),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이 참가한 상설 공동전선체였다.
4월혁명 공간의 “민자통”은 발기를 주도한 민족건양회와 혁신정당인 사회당·사회대중당·혁신동지총동맹 그리고 종교계 천도교·유교회뿐만 아니라 지역 조직인 경북민족통일연맹까지 참가했다. 여기에 한국전쟁전후피학살자유족회, 교원노조 그리고 청년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통일민주청년동맹 등이 참가한 명실상부한 상설 통일전선체로 1961년 2월 25일 결성됐다.
남민전 또한 발기한 세 분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선생의 걸어온 길은 인혁당, 전략당, 통혁당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졌다고 볼 수 없지만, 당시 비합 조직들을 남민전으로 통합하여 박정희 군사파쇼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세 분 선생은 비밀 유지를 위해 1976년,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 2월 29일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비록 발기인은 셋밖에 안 되지만, 과거의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이 결합하여 목표를 분명히 했다.
▶ 남민전 강령 제1조,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 수립
남민전 강령 제1조는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라고 되어있다.
필자는 몇 년 전 “남민전 동지회”의 구술사업에 참여하여, 과분하게 원로 몇 분을 구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분 중에 권오헌 선생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건강도 건강이지만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현장 투쟁이 우선이라고 미루셨다. 다행히 권오헌 선생을 제외한 몇 분은 구술을 받게 되어 남민전 재판 투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분들은 엄혹한 유신체제 속에서 비공개 활동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모두들 이야기했다. 또한 이재문 선생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후배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주요 책임을 본인이 안고 법정 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함께 재판받는 사람들은 묵비권을 한다거나, 또 한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이재문 선생은 가장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것, 특히 남민전의 정당성에 대해, 남조선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대해 분명히 말했다고 그분들은 증언했다.
끝내 권오헌 선생의 구술은 받지 못했지만, 사전 선생의 구술 자료와 필자가 구술받은 내용을 종합한 구술자들의 증언이다.
“조선이라는 개념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과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이후 조선이 침략당해서, 지금 유신헌법 반대 투쟁까지 조선 독립운동이다. 조선 시대의 항쟁인 동학 농민전쟁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조선의 반제운동이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고, 여기서 한국 이렇게 한다면, 이전의 운동은 해석이 안 된다, 그리고 남쪽에서 했기 때문에 남조선이다.”
당시 인혁당 사건으로 여덟 동지가 사형당하는 것을 남민전 관련자는 모두 보았기 때문에. 남민전 전사는 다 죽는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재문 선생이 분명하게 당당하게 법정 투쟁하면서, 모두로부터 지도자의 책임과 인격에 대해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남민전 서기였던 이재문 선생의 법정 투쟁은, 현 내란 정국에서 모든 책임을 국방부 장관에게 떠넘기고 부하마저 버리는,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줏대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행태와는 너무도 비교된다.
▶ 남민전, 성명·시위의 반유신 투쟁을 넘어 혁명으로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척결대상이고, 그다음에 제국주의 하수인인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신군사독재 정권의 말기적 상황은 박정희 일인 지배 체재가 강고해, 통상적 방법으로 도저히 박정희 파쇼독재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특히 대학의 산발적인 시위와 유인물 뿌리기 그리고 명망가 지식인 중심의 평화적 시위나 성명의 민주화 운동으로는 더욱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975년 4월 11일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의 만행에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의 할복 항거는, 일회적인 시위와 유인물 살포에 머물고 있던 학생 운동에 다시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
남민전은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을 희생하는 그야말로 해방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4월혁명 공간처럼 청년, 학생, 교사, 혁신계 등 남민전에 참여한 성원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특히, 광범위한 출신을 활용한 남민전의 활동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였다.
서울시내 전역을 대상으로 학교, 버스정류장 등에 반독재 삐라살포 그리고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대학가에 직접 돌리는 이전의 비합법조직에서는 볼 수 없는 대담한 투쟁도 불사했다. 또한 “격! 몰아내자 박정희” 제하의 ‘파라슈트 작전’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민전은 반유신 투쟁 자금 조달을 위해 보석상과 고위 공작자 자택을 침입한 ‘지에스 작전’과 ‘봉화산 작전’ 그리고 당시 민중에게 공분을 산 악덕 기업 동아건설 회장 자택을 강탈한 ‘땅벌 작전’ 등은 민중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이것은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가 살인한 박정희 유신체제를,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타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민전 성원들은 성명·시위의 반유신 투쟁을 뛰어넘어, 해방공간이나 4월혁명공간처럼 혁명적으로 자기 몸을 던졌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0월 4일 김영삼의 제명 결의안이 통과되던 엄중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10월 9일과 16일(이후 박정희 암살 후 11월 13일) 남민전 사건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폭력에 의해 적화통일을 기도해 온 대규모 반국가 조직체’, ‘자생적 공산혁명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84명을 검거한다.
이때 권오헌 선생도 체포되어 3년 4개월의 징역을 살게 된다. 선생은 출소 후 본격적인 남민전 동지 등 양심수 석방 운동과 후원 활동에 뛰어든다.
당시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 항거했던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민주인사들이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만든다. “민가협” 이름 자체가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어야 구속자가 해결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선생은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활동한다. 앞에 나서는 것은 금물이었다고 선생은 말씀하셨다.
▶ 남민전 동지 등 “양심수 석방 운동”과 후원 활동
민가협과 선생의 노력으로 남민전 사건의 관련자들이 1983년 8월 14일, 12월 23일과 1988년 8월 14일, 12월 20일 등 네 번에 걸쳐서 특별사면으로 무기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까지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이는 정부 스스로가 남민전에 대해 재평가한 결과였다. 공안당국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공산집단이라 했지만,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대외예속을 걱정하는 민족적 양심과 가공할 유신체제의 폭압에 반대하는 민족민주세력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주동한 “양심수 석방운동”은 양심수후원회의 창립 이념이자 주된 사업이었다.
권오헌 선생은 “양심수 석방운동” 등으로 2000년 제11회 <사월혁명상>을 받는데, 선정 이유이다.
“◎양심수 석방과 후원사업
1982년부터 남민전 사건 구속자 가족, 재일 교포 구속자 가족 등 장기수가족협의협 회원들과 함께하며 문익환 목사님이 이끈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갈릴리교회>’, NCC 인권위원회의 ‘목요기도회’, 김승훈 신부님등 정의구현사제단이 주도하는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미사 등 행사와 각종 사회단체 집회에서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의 반파쇼 민주화운동과 반외세 민족자주 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등 석방운동의 조직화 체계와 민족민주운동으로의 정립에 노력했음.
1985년 12월 10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민족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 장기수가족협의회, 청년·민주인사가족운동협의회, 노동자농민구속자가족협의회들이 한데 모여 ‘민주화실천운동협의회’로 출범하는 데 참여, 양심수 석방운동을 한층 높은 단계로 올리며 1988년 12월 22일 남민전 사건 등 (이른바 시국사범) 양심수 전원 석방하는 데 중요 역할.
1989년 3월 19일 대전, 대구, 광주, 전주, 안동 등 교도소와 청주 감호소에 갇혀 있는 260여 장기구금 양심수들의 석방과 후원을 위한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결성에 참여, 처음으로 이들을 양심수로 규정 석방운동과 후원활동(면회, 편지, 영치금·품, 자매결연 사업 등)을 하였고 장기구금 양심수뿐 아니라 학생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 통일운동, 사회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모든 양심수들의 석방과 후원사업을 해오며 1999년 말까지 장기구금 양심수 모두를 석방케 하는 데 노력.
◎ 출소한 장기구금 양심수 지원사업
양심수후원회는 1989년 한 독지가의 성금으로 구로동에 ‘만남의 집’을 마련,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풀려난 장기구금 양심수 가운데 가족이 없거나 머물 곳이 없는 분들을 함께 사시게 했고 그 뒤에도 또 다른 독지가(후원회원)의 도움과 일본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많은 후원회원들의 성금으로 봉천동, 갈현동에 ‘만남의 집’을 마련하였으며 대전 ‘사랑의 집’ 광주 ‘빛고을 탕제원’ 대구 ‘민들레의 집’을 마련하는데 지원하는 등 출소선생님들의 머물 곳 마련과 생활지원 사업을 확대해 오고 있음.
출소 선생님들 모두를 대상으로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등 협력을 얻어 종합검진과 구강검진(보철 포함), 안경 맞춰드리기 등 건강 관련 사업을 격년제로 해 오고 있으며 증상에 따라 입원치료를 주선하고 간병을 하고 있으며 지방 양로원에 계신 분들을 정기, 부정기 방문과 지원사업을 해오고 있음.”
▶ 이인모 선생 송환과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
이후 선생은 1991년 양심수후원회(후원회) 회장을 맡으면서,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을 전개한다. 특히 선생은 감옥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조선에서 통일사업하러 내려온 장기수들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하셨다.
선생은 “장기수는 수십 년을 감옥에 살고 있지마는, 조국의 자주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다. 이거 하나만 갖고서도 양심수다.”라고 정의하고 장기수 석방운동을 전개한다.
선생이 들려준 감동적인 증언이다.
“최초로 수십 년 동안 밖의 사람을 못 보던 분들한테 우리가 면회를 가고, 편지를 보내고, 영치금을 보내고 영치품을 보냈습니다. 이게 그분들로서는 아주 참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우리도 사람 취급을 받는구나.’ 수십 년 동안 누구 한 사람 찾아오거나 누가 돈 한 푼 주는 사람 없는데…. 우리가 양심수라고 한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은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기되면서 풀려난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선생의 송환 운동으로부터 시작됐다.
선생은 1992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제4차 총회에서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노인 송환운동”을 특별사업으로 채택하고 기독교인권위원회를 비롯한 천주교, 불교 등 인권·종교 단체들과 <이인모 노인 송환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993년 3월 17일 이인모 선생 송환을 이루어 냈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어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 송환운동도 선생은 적극 추진했다.
2000년 <사월혁명상> 선정 이유에 나와 있는 “비전향장기수 송환운동”이다.
“양심수후원회는 1992년부터 고향과 가족을 북녁에 두고 있는 장기구금 양심수 고향가기운동을 벌여 1993년에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노인의 귀향을 실현했고 이어 전쟁포로로서 원적지 송환을 요구하는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 송환추진운동을 해 왔으며 1999년엔 모든 비전향장기수의 조건없는 송환을 목표로 다른 종교, 인권, 사회단체와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 통일부 장관 면담, 토론회 등을 통해 송환촉구와 사회여론화에 힘을 모으고 있음.”
선생은 이후 25여 인권·종교·사회단체로 구성된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여, 1999년 2월 25일과 12월 31일 마지막 출소한 비전향장기수 21명을 포함한 63명의 비전향장기수를 6‧15공동선언 제3항에 의거 마침내 2000년 9월 2일 북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63명의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대상자로서 통보받지 못한 분과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며 전향 무효선언을 하면서,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분들도 반드시 송환되어야 한다고 선생은 주장하며 그분들의 송환을 제일 열심으로 활동했다.
특히 선생은 민족분단 최대의 희생자인 고령의 장기수 선생님들의 문제는, 당면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인도적 문제라고 항상 논리를 펴왔다.
▶ 양심수후원회를 민족민주운동단체로 한 단계 발전시키다.
이후 선생은 양심수후원회를 여기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한 단계 발전시킨다.
선생이 후원회를 민족민주운동단체로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다. 1999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행동연대>와 <국가보안법 폐지 범국민연대> 결성을 선생이 주도한 것이다.
2000년 <사월혁명상> 선정 이유에 나와 있는 “국가보안법 등 반민주악법. 제도 철폐운동”이다.
“양심수 석방운동은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목요집회가 8년쨰 이어오고 있는 외에도 민가협은 민변. 인권운동사랑방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 국제캠페인을 벌여오고 있으며 특히 1999년에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행동연대’ 결성을 주도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범국민연대회의 결성을 추동하면서 3차에 걸친 국가보안법 폐지 ‘범국민행동의 날’ 대중집회와 2차례 ‘민중대회’ 대국회 총력투쟁등 집회와 거리행진, 국회 청원 등을 하고 토론회 공청회 강연회 등을 개최했음.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하여 보안관찰법. 사상전향제 폐지, 준법서약제 철회 안기부법 폐지와 양심수 석방과 정치수배해제 등을 언론매체들에 기고하고 집회, 강연, 토론회 등에 직접 참여해 왔음.”
선생은 ”양심수 석방운동”은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라고 주장하며, 선생의 모든 역량을 이 운동에 쏟았다.
또한 후원회는 “양심수는 개인이나 소수 이익이 아니라 보다 많은 다수의 이익, 공동선, 사회정의를 위해 양심에 따라 활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뿐 아니라 후원회 회원들은 “양심수 석방운동”과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똑같다며 적극 선생의 뜻에 동참하며 항상 앞장서 왔다.
특히 선생은 2012년 소위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과 2013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사건’ 구명 운동과 당을 엄호 지지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이석기 의원 석방운동’에도 적극 활동했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기획하고 주도한 이른바 ‘중국 저장성 류경식당 종업원들의 집단 탈북사건’ 진상규명 및 송환운동과 평양시민 김련희 씨 송환운동을 선생은 주도했다.
▶ 원칙주의자는 아니지만, 원칙을 선생은 중시했다
선생은 현장주의자는 아니지만, 현장을 선생은 중시했다.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폐지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을 위해 각종 집회와 기자회견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다. 원로로서 운동의 모범과 자세를 후진들에게 보여 주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민중과 함께하려는 혁명가의 자세가 너무나도 후배들에게는 아름답고 인상 깊었다.
선생은 병마가 덮치기 전까지는, 한평생을 쉬지 않고 반외세와 민족자주 그리고 통일운동에 몸 바쳐왔다. 무엇보다 공통점은 구하고(求同) 차이점은 그대로 둔다(存異)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으로 통일운동 단체들의 통일단결을 위해 선생은 헌신했다.
선생에게는 적이 없었고 동지를 헐뜯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또한, 선생은 운동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나 역량 배치 면에서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고 단체들의 다양성을 존중했다. 하지만 때로는 다양성이 지나쳐 혼란으로 비치는 부분에서는 선생은 단호히 단결을 주문했다.
특히 선생은 조선과 민족 문제에 대한 양비론은 단호하고 엄격했다.
그뿐만 아니라 단체의 정치적 견해를 절대시하면서 다른 단체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한다든지, 단순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만이 아니라 운동을 주도하려는 분파적 패권적 경향은 선생은 용납하지 않았다.
원칙주의자는 아니지만, 원칙을 선생은 중시했다.
말이 아닌 실천으로 선생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현장을 누비며, 역사의 순간순간 고비마다 위엄 있게 행동하며 민족민주운동을 단결시켰다.
또한, 선생은 민족해방과 민중해방 역사에 발자취를 뚜렷이 남긴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존경하는 권오헌 선생님!
선생은 가셨지만 우리는 선생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반미자주통일에 대한 붉은 신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못다 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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