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 16 장 4. 삼천리방방곡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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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7-31 22:3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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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 16 장 4. 삼천리방방곡곡에
4. 삼천리방방곡곡에
백두산기슭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조국광복회건설운동은 만주전역과 삼천리방방곡곡에 료원의 불길처럼 거세차게 번져갔다.
나라와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일관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구절구절은 민족의 넋에 새로운 활력을 심어주고 삼천리 온 강토가 광복열망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들, 로동자, 농민들과 더불어 지식인, 청년학생, 수공업자, 종교인, 민족자본가를 포함한 애국적인 온 겨레가 하나의 광복전선에 합세하였다.
조국광복회건설운동은 장백을 비롯한 서간도와 만주땅에서 먼저 활발히 벌어졌다.
만주지방에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이 빠른 속도로 추진될수 있은것은 이 지방의 항일운동력사가 깊고 군중토대가 좋았기때문이였다. 90만에 가까운 재만조선인들은 그 한명한명이 다 인화성이 강한 화약과 같은 존재들이였다. 그들은 불씨가 와닿기만 하면 아무때나 폭발할수 있는 위력한 폭탄들이였다.
반일애국력량의 총집결이라는 대과제는 만주지방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생소한것이 아니였다. 카륜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문제가 하나의 의정으로 심각하게 론의되였고 이 회의를 시발로 하여 조선의 혁명가들이 각계각층의 항일력량을 망라하는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피어린 노력을 기울여왔다는것은 세상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만주지방사람들은 통일전선운동의 시련에 찬 력사와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이런 토양우에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씨앗이 빠른 속도로 움트고 자라난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에서도 역시 시범단위를 먼저 꾸리고 그것을 모체로 하여 사방에 조직을 늘여나가는 방침을 취하였다. 그런 시범단위들은 우선 조직건설의 기초가 있고 운동경험이 있는 곳, 군중의 사상동향이 좋고 혁명성이 강한 곳, 지하전선을 움직여나갈수 있는 지도력량이 일정하게 마련되여있는 곳들에 선참으로 꾸리였다.
회원 3명이상이 되면 분회를 꾸리게 하였고 분회가 3개이상이면 지회를 꾸리게 하였으며 지회가 3개이상이면 구회를 꾸리게 하였다. 조국광복회 현조직은 여러개의 구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것이였다.
우리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적의 군대와 경찰기관, 관공서에도 꾸리게 하였다. 적기관들에 복무하면서 지하혁명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그 당시는 조국광복회 특수회원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특수회원들은 일본지도관들의 감시가 살벌한 정안군내에도 있었다.
한편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작전지역에 조직들을 내오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그 린접구역들과 국내깊이에로 조직을 확대해나가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조국광복회창립직후 우리는 밀영에서 먼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회의를 열고 부대내 전체 병사, 지휘관들을 조국광복회에 가입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조치는 부대안의 모든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일치한 요구에 의한것이였다. 그들은 사령관이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추대되였는데 우리도 회원이 되여 통일전선운동을 위해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는가고 한결같이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조국광복회조직에 받아들이고 전민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우는 선전자, 조직자가 되라고 고무해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대원들은 모두가 자기앞에 부과된 력사적사명감을 깊이 간직하고 각당, 각파, 각계각층 군중을 조국광복회조직에 결속시키는 통일전선운동의 기수가 되였다.
우리가 서간도일대의 거의 모든 마을들에서 조국광복회조직을 빠른 속도로 내올수 있었던 전제의 하나가 바로 이 기수들의 역할에 있었다.
그 당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주역을 담당한것은 조선인민혁명군 무장대오에서 선발된 정치공작원들이였다. 그들중에는 한때 조국광복회창립준비위원회에 망라되여 활동하던 성원들도 포함되여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불씨가 되여 만주대륙에 통일전선운동의 열풍을 일으키였다.
1936년 가을에 벌써 왕청, 화룡, 훈춘, 연길을 비롯한 동만의 여러 현들에서는 조국광복회조직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전날 대황구유격구가 자리잡았던 병랑구에는 농민협회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조국광복회 훈춘현 병랑구지구위원회가 결성되였다. 《3.1월간》창간호는 북간도에 파견된 한 정치공작원이 화룡지방 혁명가들의 열렬한 찬성과 일치한 동의밑에 4개의 중심촌에 조국광복회 분회와 무장부대를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끝낸데 대한 소식을 실었는데 이 하나의 실례만 놓고보더라도 그곳 인민들이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짐작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만일대에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을 주관한것은 동강회의에 참가하였던 대표들이였다. 그들은 먼저 항일련군부대안의 조선인병사, 지휘관들을 조국광복회조직들에 가입시키고 그 병사, 지휘관들을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으로 무장시키였다. 그다음에는 그들중에서 정치적식견도 높고 선동력도 좋은 사람들을 선발하여 조선인거주지역들에 파견하였다. 이 사람들이 지방의 혁명가들과 손을 잡고 반석, 화전, 통화, 즙안, 몽강, 환인, 관전, 휘남을 비롯하여 남만의 여러 도시들과 농촌들에 조국광복회조직들을 내왔다.
조국광복회조직망은 북만땅에도 뿌리를 내리였다.
우리는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창립한 후 인차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서 당사업을 하고있던 김경석에게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보내주었다. 그는 동만에 있을 때에도 연길현 삼도만일대를 중심으로 당사업을 하였다. 나는 삼도만에 있는 동만특위 비서처를 방문하였을 때 그를 처음으로 만나보았다. 그 당시 김경석은 《민생단》혐의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있었는데 다홍왜회의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와 눈물을 흘리였다고 한다. 우리는 주보중의 요청으로 그를 북만부대에 보내주었다. 김경석은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5군내의 조선인병사, 지휘관들속에 침투하고 핵심들을 선발하여 조국광복회지부를 내왔다. 주보중은 우리의 요청에 따라 5군 군장의 자격으로 이 지부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떠밀어주었다.
이것이 효시로 되여 조국광복회조직들은 방정, 통하, 발리, 탕원, 요하, 녕안, 밀산을 비롯하여 북만의 여러 현들에도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그 사품속에서 액목현반일동맹도 조국광복회조직으로 개편되였다.
이 동맹의 맹원들속에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을 맨처음으로 전달해주고 동맹을 조국광복회조직으로 개편하도록 유도한 인물은 그 당시 방진성과 함께 독립려단을 이끌고 관지부근에서 활동하던 최춘국이였다.
북만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에 대하여 말할 때 김책의 로고를 들지 않을수 없다. 김책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입수하자 그 강령을 한자한자 목판에 새겨가지고 수백부나 찍어냈다. 그가 손수 찍어낸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과 각 현의 지방혁명조직들에 널리 배포되였다. 김책은 여러차례의 회의들을 통하여 조국광복회조직망을 확대하고 그 조직들을 실천투쟁속에서 단련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요하현 삼의툰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격문을 발표하여 우리의 조국광복회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들은 그 격문에서 《제군들이여! 조국을 잊지 말라.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지방당파를 불문하고 사소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반일을 하는 동포들은 모두 단결하여 반일공동전선에 매진하자. 일반동포들은 돈있는 사람은 돈을, 무기있는 사람은 무기를, 로력있는 사람은 로력을 조국독립을 위한 반일전선에 바치라.》고 호소하였다. 북만사람들의 이 호소는 우리의 목소리와 일치하였다. 남만의 전우들도 같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처럼 만주지방의 조선사람들은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을 민족대단합의 경륜을 가장 빠르게 실현할수 있는 공명정대하고 애국애족적인 로선으로 받아들이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의 주되는 목표는 어디까지나 2천여만의 동포들이 살고있는 국내에 있었다. 그것은 당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도, 무장투쟁의 확대발전도 다같이 조국을 기본무대로 하여 전개하며 조국인민의 힘을 주력으로 삼아 수행할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한 남호두회의의 정신과도 일치하는것이였다.
조국광복회조직망을 국내깊이 확대하는데서도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들이 품을 들여 육성한 서간도지방의 핵심적인 혁명가들과 우리의 직접적인 영향밑에서 통일전선운동에 매진하던 북부국경지대의 선각자들이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국내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일본침략자들의 무자비한 탄압과 종파분자들의 로선상착오로 말미암아 매우 간고하고 복잡한 조건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조국광복회조직들이 국내에 확산되는것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국내깊이에로 밀려오는 통일전선운동의 파도를 어떻게 하나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공격의 예봉은 우선 국경일대의 애국자들과 애국적인민들에게로 돌려졌다. 우리의 공작선이 와닿을수 있다고 인정되는 단체들과 개인들, 우리의 사상과 로선에 동조하며 우리의 무장투쟁에서 민족재생의 길을 찾는 모든 애국지사들과 운동자들은 적들이 가장 엄중시하는 탄압의 대상이 되였다. 압록강이남의 조국인민들은 서간도의 성시와 부락들에서 총소리와 나팔소리가 나고 화광이 충천해도 그것을 마음대로 들을수도 구경할수도 없었다. 인민혁명군이 대안의 성시나 부락들을 치는 날이면 적들이 강변에 나와서 구경군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단속하였기때문이였다. 그들은 저들의 패망상이 인민들에게 알려지는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니 혁명군정치공작원들이 국내에 침투하는것이야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하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혁명군의 투쟁소식을 알고싶어하는 국경일대의 인민들은 구실을 만들어가지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슬금슬금 전장을 돌아보군 하였다. 인민혁명군이 적들을 료정내고 돌아간 직후이면 압록강세관을 통과하여 서간도쪽으로 흘러드는 도강자수가 몇곱절이나 불어나군 했다는 삼수, 갑산, 후창지방사람들의 증언은 조국인민들이 우리의 무장투쟁에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가를 보여주는 생동한 실례로 된다.
종파분자들도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발전에 큰 장애를 조성하였다. 그들은 자파세력확장에 혈안이 되여 반일애국력량을 분렬시켰으며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정에 부합되지 않는 기성리론을 교조적으로 주장하면서 애국적인 지식인들과 량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을 일률적으로 배척하고 적대시하였다. 혁명은 계급적토대가 견실한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이 할수 있다는것이 그들의 견해이고 지론이였다.
좌경의 지휘봉밑에서 진통을 겪는 대중운동에 각계각층의 애국력량을 망라할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암중모색의 길에서 헤매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광명을 안겨줄수 있는 출로는 국내혁명에 대한 우리의 영향을 강화하며 조국광복회조직을 전국적범위에로 확대하는데 있었다.
우리는 국내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적령도가 가장 손쉽게 미칠수 있는 북부국경지대의 압록강연안에서부터 시작하여 국내 종심깊이 확대하는 방향에서 진척시키였는데 이 사업의 주요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갑산과 삼수, 풍산지구였다. 이 지구는 우리와 지역상으로 가까왔을뿐아니라 거기에는 국내 여러곳에서 모여온 형형색색의 운동자들과 선각자들, 서간도지방에 친척, 친우, 친지들을 둔 연고자들이 많았다.
갑산, 풍산일대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우리가 권영벽, 리제순, 박달, 박인진을 통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박달이 우리를 만난 후 동지들과 함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고 그 산하에 여러가지 이름을 가진 수십개의 하부조직들을 꾸리였다는것은 이미 서술한바 있다.
갑산지방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데서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와 그 하부조직들도 한몫하였다.
장백현 18도구 주경동지회는 갑산군 강구리에 조국광복회 지회를 내올 때 큰 역할을 하였다. 강구리는 주경동대안에 있는 마을이였다. 지회에서는 허리에 점심밥곽을 차고 주경동에 매일같이 건너와서 밭을 경작하는 강구리의 한 농민을 전취하여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농민은 강구리에 돌아가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로 곧 조국광복회 지회를 조직하였다.
갑산군 운흥면의 백암리지회도 장백현에서 활동하던 조국광복회조직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결성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비롯한 갑산군안의 조국광복회조직들의 산하에는 수많은 림업로동자들과 화전민들, 교인들이 결속되였다.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는 하강구대안에 위치한 삼수지구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조국광복회 광생리지회는 장백현 17도구 왕가동지회 청년부 책임자이며 후날 조선인민혁명군 지휘성원이 된 최경화의 영향과 지도밑에 조직되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고장은 풍산이였다. 풍산은 오래전부터 반일사상이 강한 곳으로서 유명하였다. 풍산지구에는 일제의 조선강점과 함께 고향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북행길에 올랐던 령남지방출신의 화전민들과 허천강발전소공사장에 끌려온 모집인부들이 많았다. 그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일본본토와 조선, 만주의 경제적잠재력을 침략전쟁확대에 모조리 동원하기 위한 계획의 한 고리로 신흥재벌 노구찌를 내세워 수십만kw의 발전능력을 가진 허천강발전소를 건설하게 하였다. 발전소건설에 동원된 수천명에 달하는 그 인부들이야말로 통일전선에 가장 쉽사리 묶어세울수 있는 커다란 력량이였다. 풍산땅에는 또한 수백명의 애국적인 천도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이 살고있었다.
풍산지구를 조국광복회망으로 뒤덮으면 백두산근거지를 개마고원일대에로 확대할수 있었으며 후치령동쪽의 여러 지방들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올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수 있었다. 개마고원일대를 혁명화해야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함경남도의 동해안일대도 혁명화하며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불길을 국내깊이에까지 지펴올릴수 있었다. 우리가 풍산땅을 보는 전략적시야는 이런것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진출한 후부터 풍산지방의 선각자들은 우리와 련계를 가지려고 장백땅에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그런 선각자들중에는 혁명군에 입대할 꿈을 꾸는 사람들도 많았다.
풍산땅에 조국광복회의 씨앗을 심은 박인진, 리창선, 리경운을 비롯한 천도교계통의 인물들은 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적령도를 목마르게 기다리면서 장백에 건너와있던 풍산출신의 애국자들이였다. 맨먼저 리창선이 참군에 성공하였고 그의 소개와 주선으로 박인진이 우리와 만나 통일전선문제를 론의하였으며 리경운이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다가 개마고원일대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되였다.
풍산땅에 간 리경운은 수전공사장의 로동자들속에 들어가 우리의 통일전선로선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정열적으로 소개선전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1937년 봄에 조국광복회 풍산지회를 조직하였으며 그후 박인진과 함께 핵심적인 천도교청년당원들로 생산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조국광복회 풍산지회는 짧은 시일내에 수백명의 천도교인들을 회원으로 흡수하였다. 천남면에서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인 홍군지구 반일로동회가 조직되였다. 1937년 여름 김정숙이 도천리-신파지구 공작을 하면서 풍산지구에 파견한 조국광복회 회원 김유진은 리창선과 함께 황수원언제공사장의 핵심로동자들로 조국광복회 배상개덕지회를 조직하였다.
개마고원일대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풍산지구가 성적이 제일 좋았던것은 그곳에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적령도가 많이 미치였던것과도 관련되여있었다. 혁명군의 여러 소부대들과 소조들이 풍산지구에 진출하여 그곳 혁명조직들을 도와주었다. 나도 신흥지구에 가서 국내혁명가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풍산비밀근거지에 들려 천도교인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은 1930년 탄부들의 폭동으로 전국인민들의 동정과 지지를 불러일으켰던 신흥지구에도 뿌리를 내리였다. 신흥지구를 처음으로 개척한것은 장백현 도천리에서 국내공작원으로 파견되여나온 조국광복회원 리효준이였다.
압록강연안과 개마고원일대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점차 동해안일대의 도시들과 농촌지역들에로 확대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은 동해안일대를 개척하는데서도 비상한 조직력과 전개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1937년 여름부터 여러차례에 걸쳐 랑림, 부전, 신흥, 홍원, 북청, 리원, 단천, 허천일대에 나와 리주연, 리용, 주동환을 비롯한 국내혁명가들과의 밀접한 련계밑에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을 진행하였다.
주동환은 우리와의 련계를 맺어보려고 서간도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서간도에서 왕가동촌장의 소개로 권영벽의 공작선에 흡수되였다. 권영벽과 주동환은 룡정대성중학교시절의 동창생이였다. 주동환이 장백과 연길지방에서 반일계몽사업을 많이 해왔고 또 국내에 나가서도 혁명운동에 관계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이상이나 감옥살이까지 했다는것을 알게 된 권영벽은 그에게 북청, 단천지방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맡기였다.
주동환은 국내에 나오자 북청에서 조정철과 함께 김경식 등을 흡수하여 조국광복회 지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지구위원회산하에는 짧은 기간에 10개에 달하는 분회가 조직되였다.
그후 주동환은 고향에 돌아와 동료들과 함께 조국광복회 단천지회를 조직하였다. 단천지회는 산하에 단천읍을 비롯한 여러곳에 분회를 두고 북방친목회와 남방친목회와 같은 친목단체들을 조직하여 거기에 많은 군중을 묶어세웠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조국광복회 장백현 하강구위원회에서는 많은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키였다. 그때 위인찬도 여러 동무들과 함께 흥남지구에 파견되였다. 군수공장들이 많이 집결되여있는 산업중심지 흥남에서 하강구의 지하공작원들은 조국광복회 흥남지구위원회를 내오는데 성공하였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원산에 침투한 정치공작원들은 선진적인 반일청년단체인 고려회 성원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묶어세웠다. 고려회는 대중을 의식화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반대하는 투쟁과 일본인악질교장을 축출하기 위한 동맹휴학도 조직하였다.
조국광복회 도천리지회조직에서 파견된 지하공작원들은 홍원지방에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내왔다. 그 조직의 명칭은 홍원농민조합이였다. 조합은 자기산하에 여러개의 지회를 두었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은 이외에도 리원과 부전, 함흥 등 여러 지방들에 뿌리를 내리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동해안의 북부 여러 산업중심지들과 농어촌들에서도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 지방은 북부국경지대의 도들가운데서 일찌기 《길림바람》이 많이 들어간 고장이였다. 우리가 동만에서 유격구를 꾸려놓고 무장투쟁을 할 때에도 이 고장 인민들속에는 혁명적영향이 크게 미치였다.
항일무장투쟁의 직접적인 영향과 후원밑에서 이 지방 인민들은 일찍부터 반일구국투쟁에 적극적으로 떨쳐나섰다. 이 지역의 농조운동은 그 적극성과 완강성으로 하여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함경북도지방은 어느모로 보나 대중의 의식화, 조직화를 비교적 빨리 다그쳐나갈수 있는 곳이였다.
우리는 이 지방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우수한 정치공작원들을 수많이 파견하였다. 국경을 끼고있는 북부 시, 군들에는 소부대들까지 들이밀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소부대들과 소조들은 함경북도안의 여러곳에 비밀근거지들과 활동거점들을 꾸리고 그에 의거하여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 대중운동을 지도하였다.
한편 우리는 이 지방의 여러 시, 군들에서 반일운동관계자들과 대중단체지도자들을 근거지에 데려다가 일정한 기간 교양을 준 다음 출신지역들에 다시 들여보내여 통일전선운동을 지도하게 하였다. 청진사람이 청진지방운동을 지도하거나 무산출신이 무산지방운동을 지도하는것은 실정에 맞는 사업지도를 할수 있게 하는 점에서도 유리하였지만 항일혁명이 심화되는데 따라 점점 더 늘어나는 공작원의 수요를 보충하는데서도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였다.
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애국투사들에 의하여 함경북도지방에서는 로동계급이 많이 집결되여있는 무산, 청진, 어대진, 연사일대와 길주-혜산선철도를 낀 농조세력이 강한 남부 시, 군들에서부터 먼저 조국광복회운동의 불길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37년 여름에는 벌써 이 고장들에서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의 결성을 보게 되였다. 조국광복회조직은 날을 따라 더욱 확대되여 19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서는 그 조직의 수가 수십개에 달하였다.
함북지방에서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기 위한 운동이 가장 폭넓고 심도있게 벌어진 곳은 연사와 무산지구였다. 그것은 1930년대 후반기 우리가 서간도를 떠난 후 연사, 무산대안인 올기강류역에서 주로 정치군사활동을 하였고 또 그무렵에 국경지대의 혁명운동에 활력을 주기 위하여 연사, 무산지구에 소부대들과 소조들을 자주 들여보낸 사정과도 관련된다. 최일현도 소부대를 데리고 연사지방에 다녀왔고 오일남도 7~8명으로 구성된 소조를 인솔하고 그 지구를 다녀왔다. 오중흡련대장 역시 50여명으로 구성된 4중대 성원들을 거느리고 이 고장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우리의 소조들과 소부대들이 연사땅에 한번씩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이 고장에서는 조국광복회지회들과 분회들이 조직되군 하였다.
연사지구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 공헌을 한 지하공작원은 최원봉과 윤경환이였다. 최원봉이 연사지구조국광복회 책임자라면 윤경환은 연사지구 당조직책임자였다. 그 두사람은 다 장백에서 우리가 키워낸 공작원들이였다.
지금 대성산의 혁명렬사릉에 안치된 항일혁명투사들가운데 최원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형이 바로 최원봉이다.
최원봉은 속대가 굳고 궁냥이 깊으며 혁명성이 강한 사람이였다. 그의 이런 우점을 맨먼저 찾아내고 그것을 값높게 평가한 사람이 바로 김주현이였다. 김주현은 동강에서 선발대의 임무를 받고 장백에 나왔을 때 최원봉을 찾아내여 권영벽과 리제순에게 소개하여주었다.
장백현 18도구 영화동이라면 원군사업을 잘하는것으로 이름난 고장이였고 항일혁명투사들을 많이 배출해낸것으로도 유명해진 고장이였다. 바로 이 영화동에서 조국광복회 지회장 겸 당소조책임자로 활동한 사람이 최원봉이였다. 그의 활동을 배후에서 지도한 사람은 김주현과 김세옥이였다. 그들의 지도와 격려밑에 최원봉은 조국광복회조직도 내오고 당소조도 뭇고 생산유격대도 조직하였다. 김주현은 18도구에 올 때마다 최원봉과 김세옥의 집 뒤고방에 거처하면서 지하혁명조직들의 사업을 도와주었다.
최원봉은 유격대후방가족들을 잘 교양하여 그들을 고스란히 조국광복회조직에 받아들이였다.
1936년 가을 3종점부근전투가 있은 후 나는 밀영에서 원군물자를 지고 짐군들과 함께 우리를 찾아온 최원봉을 만나보았다. 얼핏 보아도 똑똑하고 책임성이 높은 사람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체통이 별로 크지 않은 중키의 사람이였는데 군중을 잘 통솔하였다. 그의 구령 한마디에 짐군들이 모이기도 하고 헤쳐지기도 하였다. 최원봉은 우리에게 군사정보도 여러차례 보내주었다.
1937년 5월경에 우리는 무산군을 비롯한 북부지방들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최원봉을 연사지구에 파견하였다. 연사지구에 도착한 최원봉은 다른 공작원들과 함께 연면수상류일대의 떼무이공들과 류벌공들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분회조직을 꾸리였다.
최원봉의 성실한 방조자인 윤경환은 김일이 장백현 8도구 가재수에서 공작할 때 그 고장의 조국광복회조직에 망라되여 활동하던 사람이였다. 그는 김일과도 인연이 깊었지만 김성국과도 친분이 이만저만 두텁지 않았다. 그도 최원봉처럼 원호물자를 지고 우리 밀영에 여러번 왔다갔다. 우리가 가재수를 치고 밀영으로 철수할 때에도 윤경환은 전리품을 지고 짐군들속에 섞여 우리를 따라왔다.
적들은 유격대에 짐을 지고간 사람들을 빠짐없이 장악하고 그들속에서 조직선을 찾아내려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 체포의 위험이 목전에 다가왔다는것을 깨달은 윤경환은 가족들을 데리고 동만에 옮겨와 신개촌이라고 부르는 올기강류역의 옥돌골 상촌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후 우리는 윤경환을 연사지구에 파견하였고 그를 이 지구 당조직책임자로 추천하였다. 언제인가 윤경환은 조직성원들과 함께 후방물자를 지고 곧은골에 주둔하고있던 우리 부대에 찾아왔다가 연사지구에 분포된 조국광복회 분회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할수 있는 지구위원회의 조직과 관련한 문제를 론의하고 갔다고 한다.
나는 이미 국사봉회의에서 연사지구 동무들에게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요한 조언을 준바가 있었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운동을 한걸음 더 발전시키자면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조직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할수 있는 정연한 지도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했더니 그들이 다 그 조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였다.
윤경환이 짐을 지고 우리 부대에 찾아온것은 리동걸(김준)이 적들에게 체포되기 전의 일이였다고 생각된다. 리동걸은 청봉밀영에서 과오를 범하고 책벌을 받은 후 연사, 무산지구에 나와 정치공작을 하였다. 그는 최원봉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연사지구의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
우리는 리동걸의 후임으로 국내공작경험이 있는 김정숙을 연사지구에 파견하였다.
김정숙이 연사로 나갈 때 무장소조도 그와 동행하였다. 김정숙은 그때 연사지방 혁명가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조국광복회 연사지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가 그 회의를 마치고 사령부로 돌아와서 연사조직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재봉기 한대를 내놓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최원봉을 비롯하여 조국광복회 연사조직에 망라된 애국자들은 무산지구전투때에도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리동걸과 최원봉, 윤경환의 희생으로 하여 연사지구 조직공작의 내막은 오래도록 비밀로 묻혀있었다. 그 비밀의 일단이 세상에 비로소 알려지게 된것은 1970년대초 우리 당의 혁명력사와 관련한 사료를 수집하는 사업이 전군중적으로 벌어지던 때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서선지방과 중부조선, 남부조선일대에서도 열매를 맺었다. 우리는 북부조선일대와 함께 서부조선, 중부조선, 남부조선일대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도 응당한 주의를 돌리였다.
평안남북도지방은 황해도지방과 더불어 민족주의세력이 매우 강성했던 지역이였다. 서부조선일대는 천도교세력과 기독교세력도 대단히 강하였다. 그런데 이 종교세력이 순수 신앙에만 매달려있은것이 아니라 애국애족을 하였다. 3.1인민봉기 당시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포함한 조선의 3대종교세력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는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선지방의 청년들속에서는 김혁, 차광수, 강병선을 비롯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도 많이 배출되였다. 우리는 공영과 강병선을 통하여 일찍부터 이 일대에 손을 뻗치였다. 우리의 공작원들은 불이농장소작쟁의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룡천지구에 나가서도 군중을 의식화하였다. 불이농장소작쟁의는 반일에서 살길을 찾고있던 이 지방 인민들의 강의한 투쟁정신과 애국열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서북조선일대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 신의주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1937년 7월초에 이 도시에서는 조국광복회 신의주지회가 결성되였다. 8월에는 빈농민들과 류벌로동자들을 망라하는 리산반일회가 위원에서 조직되였다. 지하공작원들은 압록강중류지대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련속적으로 꾸려놓았다. 강병선은 일가친척이 모두 천도교인이라는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교의 줄을 잡아쥐고 조직공작을 능숙하게 벌려 여러개의 조직들을 만들어놓았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의 뿌리는 후창군과 철산군에도 뻗어갔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위하여 양덕과 덕천, 평양과 해주, 벽성 등지에도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였다.
평양과 평안남도일대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는 리주연, 현준혁, 최경민 등이 큰 공로를 세웠다.
리주연이 단천에 있다가 평양으로 나온것은 반일운동을 새로운 고장에서 더 통이 크게 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평양정창고무공장 직공반일회, 평양곡산공장 로동반일회, 남포반일회 등은 다 리주연이 꾸려놓은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였다.
대구에서 감옥생활을 마친 후 평양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현준혁은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을 받아물고 승호리세멘트공장 로동계급속에 들어가 조국광복회 지회를 조직하는데 참가하였다.
나의 4촌동생 김원주가 망라되여있던 조국해방단과 강서지구의 일심광복회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이였다.
한때 무송에서 우리 아버지의 혁명사업을 성심성의로 후원해주다가 조국에 나온 최경민은 양덕지구에서 통일전선운동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그는 유교를 믿는 사람들속에까지 깊이 스며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조국광복회조직에받아들이였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은 평안남도 온천지방에도 있었다.
황해도지방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서는 우리 공작원들에 의해 흡수된 민덕원이 주역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일대에는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이 개척한 림시비밀근거지들이 많았다. 이 근거지들에서 활동하던 우리 공작원들이 민덕원을 쟁취하여 그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 인입하였다. 민덕원을 비롯한 황해도지방의 애국자들에 의하여 도안의 곳곳에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련이어 태여났다.
동해안중부지방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로동계급이 많이 집결되여있는 천내지구와 양양, 고성, 문천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였다. 천내리세멘트공장 반일로동회는 규모도 컸지만 실천투쟁을 잘한것으로 유명하였다. 양양의 속초구국회와 고성의 장전반일회도 조국광복회조직이였다.
남부조선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 관련된 자료들은 국토분단으로 하여 충분히 발굴되지 못하고있지만 일제경찰자료들에 남아있는것들만 해도 그 수는 많다.
최근에는 일본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 그 활동에 관한 자료가 여러건 발굴되였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오까야마를 비롯하여 도꾜에도 있었고 교또나 오사까, 혹가이도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것이다.
20여만의 회원을 가지고 전민항쟁에로 육박하던 조국광복회조직은 조선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쌓아올린 하나의 기념비이다.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력량을 민족해방위업에 조직동원하는데서 이 조직들은 실로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가운데서도 첫째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높이는데서 세운 공헌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 인민들은 통일전선운동과정을 통하여 조선의 해방은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이룩하여야 한다는 사상, 무장한 원쑤들과는 반드시 무장으로 맞서야 한다는 사상, 조선인민이 민족적독립을 이룩하자면 계급, 성별, 년령, 당파,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여 일치단결해야 하며 전세계 피압박인민들과 련합하여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게 되였다. 인민대중의 비약적인 사상의식의 발전은 1930년대 후반기의 민족해방투쟁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요인으로 되였다.
인민대중의 사상의식의 개조에서 특기할것은 그들이 무장을 들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국해방의 주력으로 보고 우리에게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면서 우리의 령도를 더욱 충실하게 받들어가게 되였다는 사실이다. 조선민족해방투쟁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 인민혁명군의 중심활동거점인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진행되였다.
조선의 인민대중은 백두산에서 울리는 목소리라면 어떤것이나 다 절대적진리로 받아들이였고 대소와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실행하였으며 백두산을 지원하는 일이라면 지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조선혁명의 령도중심에 대한 인민대중의 충실성은 곧 인민혁명군에 대한 물심량면의 지원으로 표현되였다. 전국의 인민은 재력과 금력, 인력, 정신력을 다 동원하여 우리를 후원해주었다.
조국광복회조직들은 유격대를 도와주기 위한 전인민적인 운동을 힘있게 벌리였다. 조국광복회 갑산지회에서는 원래 천도교인들이 바치는 《성미》를 천도교중앙에 올려보내군 했었는데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그 《성미》를 조직적인 방법으로 인민혁명군에 보내였다. 인민혁명군이 식량고생을 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서간도사람들은 결혼잔치, 환갑잔치, 생일잔치감으로 모아두었던 쌀마저 서슴없이 보내주었다.
조국광복회 신의주지회 조직성원들은 압록강에 수풍발전소언제가 준공되던 1938년경까지 우리 부대의 활동구역에 짐배로 원호물자를 실어왔다. 그 원호물자들가운데는 천, 신발, 소금, 화약, 뢰관, 도화선을 비롯하여 별의별것이 다 있었다. 언제가 준공되고 배길이 막힌 후부터는 중국 단동시의 3번통과 6번통에 각각 원호물자를 모아두는 장소를 정해놓고 거기에 물자를 집결시켰다가 자동차와 철도로 관전, 홍경, 통화지방에서 활동하는 인민혁명군의 대부대들과 소조들에 보내주었다. 마전동분회의 어떤 조직원은 반t이상의 화물을 실을수 있는 돛배를 한척 사서 낮에는 삯짐을 실어 돈벌이를 하고 밤에는 조직성원들이 수집한 원군물자를 싣고 슬금슬금 인민혁명군을 찾아가군 하였다.
조국광복회원들은 백두산에서 1,000리이상이나 멀리 떨어져있는 서울에서도 혁명군의 활동에 필요한 후방물자를 구해서 보내주었다.
조국광복회 북청조직의 한 성원이였던 전조협은 북청군 속후 《삐오네르사건》에 관계한 《죄》로 형무소에서 감옥살이까지 한 사람인데 1937년 이후부터는 조직의 위임에 따라 서울에 가서 지하공작을 하였다.
그는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공작을 벌리면서 한편으로는 유격대지원을 위한 모금사업으로 물지게장사를 시작하였다. 원래 북청사람들은 물지게장사를 하여 서울공부를 하는 자식들의 학비를 대주는것으로 유명하였다. 전조협에게는 서울공부를 시킬만 한 자식이 없었지만 혁명을 위하여 물지게를 지였다.
그는 물지게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천, 신발, 백로지, 의약품, 등사잉크를 비롯한 원군물자들을 마련하였다. 그가 원군물자들을 구하여 북청에 부치면 그곳 조직에서 우리한테 보내주군 하였다.
한번은 그가 아침 일찍 물지게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로상에서 녀자용금시계를 얻은 일이 있었다. 부자집녀인들도 흔히 찰수 없는 고급시계였다.
그는 시계임자를 찾기로 결심하고 언덕길주변의 집들을 돌아다니였다. 시계는 가게방집 딸이 약혼선물로 받은것이였다. 시계를 찾은 가게방집사람들은 그 시계의 본값보다도 더 많은 사례금을 주었다. 결국 그 돈으로 많은 원호물자를 마련하게 되였다.
그 금시계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는 가게방집사람들과 혈육처럼 가깝게 지냈다. 가게방집사람들은 전조협의 영향을 받아 항일유격대를 무한히 동경하게 되였으며 유격대를 돕는 일이라면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전조협이 요구하는 물자들을 직접 장만하여 북청에 부쳐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울의 평범한 소시민가정도 조국광복회원의 안내로 원군운동에 참여하게 되였다.
조국광복회 국내조직들은 삼천리방방곡곡에서 태업, 파업, 시위, 폭동, 소작쟁의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일제의 강도적수탈을 반대하는 투쟁,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 일제의 대륙침략과 전쟁정책수행에 타격을 주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조직지도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통하여 조선의 혁명가들이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은 이 운동을 통하여 당조직건설의 조직사상적기초를 더욱 튼튼히 마련한것이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조직들에서 육성된 핵심들로 전국각지에서 당소조들을 무었다. 이 소조들이 결국은 조국광복회조직들도 지도하고 대중투쟁도 지도하였다. 투쟁속에서 태여나 투쟁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끊임없이 단련된 당조직들이야말로 장차 해방된 조국땅에서 근로대중의 위력한 정당을 창건할수 있는 초석으로 되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은 또한 조선의 혁명가들로 하여금 대중단체조직건설의 풍부한 경험도 쌓게 하였다. 이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해방후 그처럼 짧은 기간에 민청, 직맹, 녀맹, 소년단과 같은 계층별 대중단체들을 건설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과정을 통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의 유구한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진실로 애국적이고 애족적이며 혁명적인 강유력한 통일전선의 참모습을 창조하였다. 백두산을 축으로 하여 형성된 반일민족통일전선은 우리 나라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전통으로 되였으며 우리 인민의 억센 기상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의 전 과정은 조선인민이 분렬이나 대립보다 통일이나 화합을 더 좋아하는 인민이며 당파와 소속, 신앙에 관계없이 하나의 기발밑에 뭉쳐 싸워나갈수 있는 뛰여난 의지를 가진 인민이라는것을 확증해주었다.
로동당시대의 우리 인민들은 그 단결력의 최고형태인 온 사회의 일심단결을 이미 오래전에 실현하였다. 이제 남은것은 두쪽으로 갈라진 북남의 통일이다. 조국통일은 나의 일생을 관통하고있는 변함없는 의지이고 신념이다. 반만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은 마땅히 하나의 통일국가에서 살아가야 하며 또 살아갈수 있다는것이 민족통일과 관련된 우리의 립장이고 관점이다. 무슨 담보를 가지고 북남통일이 실현될수 있다고 말하는가. 우리에게는 민족대단결이라는 위력한 무기가 있다. 그리고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통해 이룩한 민족통일전선의 풍부한 경험이 있다.
반세기전에 이미 통일전선의 경륜을 훌륭하게 이루어온 우리 민족이 왜 지금에 와서 민족대단결을 실현하지 못하겠는가. 그 리유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무조건 통일전선을 해야 한다. 통일전선만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 민족이 생존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통일전선은 민족이 민족으로 살아남는데 필요한 영원한 생존방식이다. 민족이 살아나갈 길도 통일전선에 있고 민족이 부흥하고 번성하는 길도 통일전선에 있다. 이것이 내가 해내외의 우리 동포들에게 하고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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