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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분계선 위에 올라 통일만세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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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9-23 07:4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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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계선 위에 올라 통일만세 불렀다”<방북기> 김일성 주석 일주기에 즈음해 북에 다녀와서 / 박용길

박용길장로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1919년 10월 24일-2011년 9월 25일) 장로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방북기를 본사가 입수했다. 박 장로는 북측의 초청으로 1995년 6월, 김일성 주석 1주기에 즈음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한 혐의로 그해 8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이 방북기는 박 장로가 평양에 들어간 1995년 6월 28일부터 판문점으로 귀환한 7월 31일까지, 그가 북녘에서 가보고 겪고 느낀 점을 일기 형식으로 소박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7월 8일 일주기 행사 때에는 흥미로운 대목들이 있다.

박 장로가 김 주석 일주기 추도식이 열린 금수산기념궁전에서, 그 당시 공식석상에 거의 공개되지 않아 육성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상주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정말 어려운 길을 오셔서 고맙습니다”는 김 위원장의 육성을 직접 들은 것이다.

또한 추도식이 시작되기 전 ‘검은 상복을 입은 자그마한’ 김 주석의 부인 김성애 여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며, 저녁에는 기념궁전에서 개최된 만찬에 참석하여 김 주석의 동생 김영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과도 인사를 나눈 점이다.

박 장로가 소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조전을 보내왔으며, 북은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3』이라는 책에서 박 장로를 ‘통일애국인사’로 소개하고 있다. 올해는 박 장로 탄생 100주년이자, 오는 9월 25일은 8주기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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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구순을 맞은 박용길 장로 [자료사진-통일뉴스]

1995년 6월 28일이 밝아왔다. 호텔 앞에서 버스로 성전(成田)비행장에서 북경행 비행기로 2시경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평양 가는 비행기는 한 주일에 화, 토 두 번뿐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지체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북경에 내리니 40대 남자분이 기다리고 있다가 특별기가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으니까 밖에 나갈 것도 없이 짐만 옮겨 실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잠시 후에 짐을 찾아서 고려항공이라고 쓴 작은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는 조종사 두 분과 접대하는 아가씨 한 분, 우리 일행이 탔고 짐도 더러 앞에 실려 있었다.

날씨가 몹시 더운데 아가씨는 예쁜 비단 부채 하나씩과 음료수, 과자, 건어포 등을 내놓으며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 내가 70이 넘은 노인이라고 비행기 안에는 누워서 갈 수 있게 침대까지 마련해놓고 누워서 가라고 한다. 나는 앉아서도 넉넉히 갈 수 있다고 하여 의자로 옮겨 앉았다. 평양까지는 1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여 좀 쉬고 있는 동안에 순안 비행장에 다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드디어 북녘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구나 하며 감격해 할 사이도 없이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 예쁜 화동들과 많은 각계에서 나오신 분들의 영접을 받았다. 한복을 짧게 입은 예쁜 화동들에게 반갑다는 인사말과 함께 꽃다발을 받아 안고 응접실로 들어가서 첫인사 말씀을 앉아서 발표하였다.

첫 인사 말씀

49년 만에 밟아보는 이 땅, 평양. 꼭 6년 전에 문익환 목사가 도착성명을 발표하던 이 자리에서 흰 소복을 입은 제가 또 다시 첫 인사 말씀을 올리려하니 감회가 깊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인데, 어느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문화민족인데,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할까요. 사랑해도 사랑해도 끝이 없는 사이가 우리 사이인데, 그동안 나온 7·4공동성명, 7·7선언, 남북합의서, 4·2공동성명 등 수많은 문서들에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 한 공동체인 것을 세계만방에 공표했는데, 왜 오도 가도 못하고 천만 이산가족이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 못하며 애를 태우고 있는 걸까요.

저는 본래 서울태생입니다. 그러나 저의 친정어머니는 구한말 일본인에게 무장해제 당하신 아버지와 같이 평북 대유동에서 사시다가 그 곳 회당골에 묻혀 계십니다. 저는 53년 동안 어머님 성묘 한번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대유동에서 60리 떨어진 북진에 있던 남동생도 생사를 모르는 채 53년을 지내왔습니다.

지금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70, 80 고령이어서 생이별한 채로 세상을 떠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감옥에서 20년, 30년 살다가 출소한 장기수들이 가족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 한시도 늦출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통일입니다.

저는 남편 문익환 목사를 통일제단에 바치고 일 년 반을 보내면서 너무도 뜻밖에 나라의 어버이를 잃은 북녘 동포들과 주석님 유가족의 비통한 심정을 같이해야 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이곳에 달려왔습니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뿐 아니라 먼저 가신 분들의 유지를 살아있는 우리들이 이어받아 통일의 큰 뜻을 기어이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어야 하겠습니다. 문 목사의 시 한수를 읊음으로써 첫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손바닥 믿음

이게 누구손이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손이 손을 잡는다
잡히는 손이 잡는 손을 믿는다
잡는 손이 잡히는 손을 믿는다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인정이 오가며
마음이 마음을 믿는다
깜깜하던 마음들에 이슬 맺히며
새날이 밝아온다

1995년 6월 28일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박용길

환영 나온 분들과 우리는 여러 차에 분승하여 평양시내로 들어갔는데 이미 날이 어두웠다.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에 헌화를 하였는데 그 넓은 동상 앞에는 어찌나 많은 꽃들이 놓여 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꽃밭을 이루고 있었고 동상은 실물 크기의 몇 배가 되는지 웅장한 모습이었다.

숙소는 가까이에 있었는데 문익환 목사가 묵었다는 모란봉 초대소를 조금 지나서 언덕위에 있는 흥부초대소였다. 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큰 방을 혼자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20평도 더 되 보이는 큰 방이 셋이 나란히 있는데 한 방은 응접실이고 한 방은 사무실이고 한 방은 침실이었다. 텔레비며 큰 책상이며 냉장고며 옷장이며 경대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나를 위해 비서 격으로 도와준 분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대학교수 부인이고 두 아들의 어머니였고 기독교 대표로 외국에도 나간 일이 있어 우리는 1992년 여름에 미국 뉴욕에서 이미 만난 일이 있는 구면이어서 더욱 마음 든든하였다. 옆의 방에는 의사와 간호원이 상주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진찰을 하고 어디를 가나 꼭 같이 다니면서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동행하신 정경모 선생을 수행하는 분들이 있는 방을 지나 그 다음 방에 역시 큰 방이 두 방이나 배당이 되었다. 식사 때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큰 방에 열 사람가량 앉을 수 있는 원탁에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외출을 하여도 대개는 초대소에 돌아 와서 같이 식사를 하였는데 수행원과 간호원이 교대로 같이 참석하곤 했다. 식당에도 텔레비전이 있어서 뉴스도 듣고 때로는 비디오도 보고 하였는데 긴 영화를 볼 때는 영화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큰 장소에서 몇몇이 앉아 구경을 하곤 하였다.

식사 메뉴는 다양하여서 마실 것도 여러 가지고 산해진미가 다 나오므로 우리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정 선생은 북에서는 식량이 귀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한다는 말이 있는데 너무 미안하니 반찬을 줄여 달라고 하였으나 언제나 다 못 먹을 정도로 여러 가지 반찬이 나왔다. 삼복에는 특별히 단고기를 잡수시겠냐고 문의가 왔는데 우리가 사양하였더니 그날은 털이 부숭부숭한 꽃게가 통째로 나와서 환성을 지르며 모두 좋아하였다.

하루 세끼 음식을 들 때마다 돌려가며 감사 기도를 하였는데 손님이 오시거나 해도 언제나 기도로 시작을 하였다. 식량이 넉넉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후이기 때문에 식사 때는 굶주리는 이웃들을 생각하고 음식을 먹게 되기까지 수고한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드렸다. 마시는 것 중에서 깊은 산에 가면 실개천 같이 즙이 흘러내린다는 들쭉술이 단연 인기를 끌었다.

흥부초대소는 2층으로 되어 있는 석조 건물인데 주위에 나무도 우거져 있고 앞마당에는 둥근 화원이 있었는데 가지각색 예쁜 꽃들이 피어있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얼마든지 산보도 할 수 있는 곳인데 나는 하는 일 없이 마음이 바빠서 자연과 더불어 즐길 사이도 없었다.

넓은 침대에서 하룻밤 편히 쉬고 맛있는 아침을 먹은 후에 우리는 만경대 김 주석 생가를 방문하였다. 그 할아버님(김보현)이 농사를 지으면서 지내시던 집을 옛 모습대로 보존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농기구들이며 옛날 사진들도 걸려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김형직 장로나 어머니 강반석 님이나 삼촌들도 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30대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 우리 시어머님께서 한 집안에서 학자가 난다던지 애국지사가 난다던지 하는 것은 당대에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시던 말씀을 되새기면서 방마다에 전시된 물건들 더욱이 조촐한 부엌살림들을 돌아보았다. 그때는 너무도 가난해서 옹기집에서 버리는 다 찌그러져서 얼마 담지도 못할 독을 이전(二錢)을 주고 사서, 이고 왔다는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집에는 시계가 없었는데 아이들은 일찍 학교에 가야 하니까 강반석 어머니는 동네 집에 가서 시계를 보고 와야 하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늘 물어볼 수가 없어서 어떤 때는 어둡고 추운 아침에도 시계소리를 기다리다 듣고야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한다. 그래서 강반석 어머니는 시계를 가지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7월 1일에는 쑥섬 혁명사적지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1948년 김구 선생, 김규식 선생 등이 참석한 남북 연석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그때 쓰던 돗자리를 비를 맞을까봐 유리로 집을 지어 씌워 놓았고 그때 올라갔던 원두막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졌고 그때 모였던 분들의 성함이 큰 돌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낯익은 한분 한분의 성함을 되새기며 통일을 위하여 평양으로 뛰어오셨을 그 분들의 노고를 되새기었다. 그때의 연석회의가 성공적으로 열매를 맺었다면 남북분단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들이 얼마나 많이 애를 쓰셨을 텐데...

칠골교회 예배 (7월 2일)

북에 와서 처음 드리는 예배였다. 칠골교회는 김 주석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봉수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이다. 예배 전에 김 주석 외가를 돌아볼 수 있었는데 어려서 외가에 와서 창덕학교를 다닌 일이 있어서 공부하던 작은 방도 볼 수 있었고 어릴 때(14세)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집 옆에는 강반석 어머니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신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나는 교회 옆에 세운 동상이라 “성경”을 들고 있나 생각했었는데 신문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 뜻밖이면서도 그 시절에 신문이 얼마나 애국적인 생각을 갖게 했을까 생각되었다.

교회는 자그만 했지만 많은 교인들이 문밖에까지 모두 나와서 박수로 환영해주었다. 대예배 기도는 여자 분이 인도를 하였는데 얼마나 열렬하게 기도를 드리는지 나라사랑의 열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6년 문 목사가) 이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고 들었는데 아담한 교회를 세우게 되어서 기뻤다. 설교말씀도 힘있고 감격스러운 말씀이었다.

잠깐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강반석 어머니는 반석은 바위를 의미하는데 더욱이 강반석은 굳는 바위라고 해석된다고, 30대에 독립군 남편을 뒷바라지 하느라고 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다 요절한 꿋꿋한 그분은 훌륭한 아들을 길러냈는데 여러분들도 칠골의 정신으로 꿋꿋한 애국적인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사말씀을 하고 손을 잡고 둘러서서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열성을 다하여 통일의 노래를 부르니 금방 통일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같은 옷 입고 같은 말 하면서 헤어져 살아야 하다니 언제나 한데 어울려 살 수 있을까?

개선문

평양거리는 굉장히 넓고 자동차가 적어서 시원해보였다. 공기도 맑고 가로수는 좀 적어보였는데, 거리 이름들은 광복거리, 개선문거리, 천리마거리, 승리거리 등으로 불리며 지하철역들은 지명이 아니고 뜻있는 단어들로 이름 지어 있었다. 네거리마다 젊은 아가씨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푸른색 제복에 모자를 쓰고 가죽장화를 신고 지휘봉을 든 모습은 아름답고 장해보였다.

개선문은 화강암 만 오천 개로 만들었다는 데 빠리의 개선문 같은 인상이었다. 김 주석 70회 생신을 기념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70송이 목란(國花)이 돋을새김으로 삭여져 있고 가로 50m, 세로 60m 높이의 문 꼭대기에는 김일성 장군 노래가 앞뒤로 새겨져 있었다.(1982.4.14. 완공)

웅장한 개선문 옆에는 개선 연설을 하는 젊은 혁명가의 초상과 연설문이 채색타일로 세워서 있었는데 정교한 타일화는 꼭 그림같이 보였다. 1945. 10. 14 개선 장면이었다.

주체사상탑

1982년 4월 김 주석 70회 생신을 기념하여 세운 탑으로, 탑의 높이는 170m, 탑신 150m, 봉화 20m, 25,500개의 화강석을 무어 쌓아올린 70개의 단으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세계 각국에서 마음을 담아 보내온 고급 석재에 새겨 보낸 수많은 축하석비가 장식되어 있었다. 모두 다른 나라의 말들로 새겨진 석재들은 각각 다른 색깔의 아름다운 돌들이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탑장으로 계시는 자그마한 키의 황순희 탑장은 마침 1919년생이어서 저와 동갑이었는데 생일이 한두 달 먼저여서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분은 1930~40년대에 독립군으로 온갖 격전을 경험한 분으로 그 자그마한 체구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서 남자들 틈에서 싸워 왔는지 의심이 날 정도였다.

마침 방명록에 문 목사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라는 글이 있었는데, 그 밑에 꼭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모두 저를 위해 남겨논 자리라고들 하였다. 저는 그 자리에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자주 하는 백성, 우리는 하나”라는 글을 남겼다.

주체사상탑 봉화는 밤이면 꼭 불이 타오르는 것 같이 보였고 빨간불은 평양 어느 곳을 가나 쳐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봉화였다.

평양 거리는 류경(柳京)이라고도 하는데 대동강 변에 버드나무가 늘어져있고 가로수로 느티나무, 미루나무, 방울나무(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등이 심어져있었다. 여성들이 여러 면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편리한 시설이 갖추어져있다고 한다. 밥공장, 떡공장, 김치공장, 탁아원 등 아침에 쌀을 맡기면 돌아올 때 밥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대중교통 수단으로는 무궤도 전동차가 있는데 버스와 비슷하고 허공에 전깃줄이 있어 연결되어 다니나 땅에는 그냥 바퀴가 타이어 그대로다. 정거장 곳곳에 줄을 지어 차를 기다리는 많은 시민들이 서있었다.

만경대소년학생궁전

학생 소년들을 위한 종합적인 과외교양기관이며 건물인데 만경대소년학생궁전을 비롯해 각 곳에 꾸려진 궁전들에는 여러 가지 실험실, 공작기계실, 도서관, 체육관, 예술소조실 등이 현대적으로 꾸려져 학생소년들을 키우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수백 개 방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드나들며 여러 가지 재주들을 배우고 있었다.

문 목사가 소년궁전에 가서 국어를 익히는 소조에 들어갔을 때 1, 2, 3학년 어린이들이 편지에 대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학년 여학생이 편지 봉투를 들고 “이 편지는 우표를 붙여도 배달이 안 된단다” 하자, “왜 그럴까?” 하고 1학년 남학생이 물었다. 그러니까 3학년 여학생이 이 편지는 남한에 광주로 가는 편지거든 하더란다. 그때 문 목사가 극중에 뛰어 들며 “그 편지 내가 가서 전해줄 게” 하였더니 모두가 매달리면서 울음을 터뜨려 울음바다가 되었단다.

그때 그 1학년짜리 남학생이 이제는 커서 12살짜리 학생이 되었는데 저를 보더니 제가 그때 나왔던 “임일광입니다”하며 매달리는 것이 아니닌가. 그래서 제가 손을 붙잡고 다니면서 많은 것을 구경하고 금박으로 복자가 새겨진 황금빛 복주머니를 선사했다. 한 방에 들어갔더니 13, 4세 되는 여학생들이 나와서 긴 연설을 하는데 문 목사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왜 같이 안 오고 혼자 오셨느냐고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온 교실이 울음바다가 되었지요.

붓글씨 쓰는 방에 들어갔더니 꼬마들이 모여 앉아 글씨를 쓰는데 얼마나 힘있게 잘 쓰는지 놀랬어요. 제일 꼬마가 달필로 ‘조국통일’이라는 글을 써서 저에게 선물을 한다고 하는데 이름 옆에 여섯 살이라고 써서 더욱 놀랬지요. 그림을 그리는 방에서도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피아노, 바이올린, 아코디언, 무용교실이며 수예를 하는 방에도 들렀는데 어찌 수를 빠르게 안과 밖이 꼭 같이 놓아지는 안팎수를 너무도 잘 놓고 있었어요. 갖가지 풍경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들을 수놓는데 너무 아름답고 신기하였습니다.

지난번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 왔을 때 이 소년학생궁전을 돌아보며 너무 감격스러워서 내외분이 같이 끝없이 춤을 추었다는 말을 듣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수(繡)교실에 주고 온 우리나라 새서방 새색시 목인형도 아름다운 수로 나타나리라 생각했지요.

노래며 춤이며 재주를 부리는 구경을 나중에 했는데 어떻게 모두 잘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금은재화로는 웃을 수 없지만 아이들로는 웃을 수 있습니다’는 유명한 말을 김 주석은 남겼다한다. 이런 일생을 지니고 살 모든 재주들은 전부 무료로 공부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과외비 없는 나라이다. 김 주석은 해마다 정월 초하루에는 소년궁전을 찾아서 어린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재롱을 보면서 기뻐했는데, 그 사진이 크게 확대되어 걸려있었다. 저는 소년궁전을 나오면서 “나라의 앞날은 어린이 세상”이라는 글을 남겼다.

초대소에서의 하루

아침 6시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세수하고 샤워하고 간단한 빨래를 할 때도 있고 책을 읽곤 하였다. 7시 반쯤 되면 의사와 간호원이 와서 혈압도 재고 진맥을 하고 돌아간다. 아침 8시에는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맛있는 음식을 들면서 그날의 뉴스도 듣게 된다.

9시가 되면 대개 정 선생과 다른 승용차로 두 대나 세 대가 나가게 되는데 옆에는 종교담당을 하시는 장재철 씨가 타시곤 하였다. 멀리 가지 않을 때는 숙소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지만 먼 곳에 갈 때는 특별한 음식들이 준비되기도 했다.

방이 넓은데다 세 개나 있으니 소제하는 분이 맡아서 소제를 깨끗이 하고 다림질할 것은 의자에 걸어놓으면 나중에 예쁘게 다려서 다시 걸어놓는다. 빨래는 자꾸 내 놓으라 부탁을 받지만 간단한 빨래니까 늘 혼자 하였더니 권하다 못해 나중에는 포기하는 모양이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초대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안 볼 때는 자기 방에서 책을 읽기도 하며 쉬곤 하였다.

한번은 아침을 먹는데 강 비서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와서 응접실로 내려갔더니 중국에서 김정일 장군에게 ‘리즈’(리치)라는 실과 선물이 왔는데 특별한 것이니까 보내니 맛을 보라고 정 선생과 나에게 따로 따로 한 상자씩이 전달되었다. ‘리즈’라는 과일은 크기가 큰 호도만 한데 껍질색은 재색이나 풀색을 띠고 진주색 밤색의 얼룩점이 있다. 플라타너스 열매 같았다.

껍질은 잘 벗겨지는데 베끼면 하얀 물기 있는 열매가 달고 맛이 있고, 씨는 반들반들한 양살구 씨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시원하고 달기만한 맛인데 그 실과는 양귀비가 좋아해서 비행기가 없던 때라 말에 실어 날라 양귀비에게 가져오곤 했다 한다.

‘리즈’라고 들었는데 조선말사전에는 리치나무라고 적혀있었다. 사철 푸른 넓은 잎 키나무의 한가지로 나무의 높이는 8~15m이고 직경은 30~50cm 정도이며 여지, 여주라고도 부르는데 여지(荔枝), 호로(葫蘆)과에 딸린 덩굴 풀로 balsam-pear로 불리고 학명은 momordica charantia라고 한단다.

귀한 물건이니 식당으로 가져가 여럿이 나누어 먹자고 하였더니 끼마다 몇 개씩 나오는데 나중에는 껍질까지 벗겨서 나오곤 하였다. 신 것을 못 먹는 나에게는 식후에 안성맞춤이었다.

모란봉초대소 방문 (7월 5일)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우리 숙소 가까이 모란봉초대소가 있었는데 정복을 한 젊은 군인이 꽃밭사이 초소에 늘 서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면 꼭 경례를 부치곤 하는데 나는 그 군인이 늘 서있는 것이 안쓰러웠다. 아름다운 꽃밭에 서있는 모습은 꼭 그림 같았다.

모란봉 초대소는 문 목사와 정경모 선생, 유원호 선생님이 6년 전에 유하셨던 곳이어서 숙소에 들러 사무실이며 응접실, 침실 등을 주의 깊게 돌아보았다. 1989년 4월 1일 김 주석이 문 목사 숙소를 탐방하여 손을 잡고 거닐던 복도를 걸어보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바로 옆에 모란봉 공원 을밀대가 있어서 언덕을 올라 을밀대로 향했다.

을밀대(乙密臺)

평양의 명소로서 모란봉 마루에 있는 대(臺)와 그 위에 있는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편집자 주), 네모지게 다듬은 작은 돌로 약간 안으로 오그라들게 쌓아올린 높이 11m의 축대 위에 앞면 3간 측면 2간의 합각지붕을 한 누정이 있다. 지금 있는 축대와 누정은 1714년에 고쳐쌓고 지은 것이다. 오늘은 근로자들의 좋은 휴식터로 되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을밀대에 올라 휴식을 나온 사람들과 섞였는데 마침 그림을 그리는 예술학교 대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앉아서 풍경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그들은 정 선생과 나를 그 자리에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후에 초상화를 두 장씩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초상화를 처음으로 받게 되어서 기뻤는데 한 장은 아주 저를 꼭 닮은 그림이었다. 정 선생은 그 학생들에게 일본에 가서 그림도구들을 사 보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나직이 하셨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초상화를 받은 답례로 ‘서울에서 평양까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내려오면서 대학생들 치고는 작고 어리다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더니 남북이 학제가 다르기 때문에 대학생이래도 1~2년 차이가 난다고 들었다. 평양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모란봉을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감회가 깊었다. 평양의 명소를 걷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꿈이 곧 깰 것만 같았다.

7월 7일에 있었던 일

김용순 씨가 점심을 초대한 일이 있는데 의사당으로 갔더니 다른 사업이 갑자기 생겨서 약속을 못 지키겠으니 요해를 바란다고 하여 다시 시간을 잡는다는 것이 7월 7일 점심때 고려호텔 회전식당으로 초대되었다. 갑자기 김용순 씨가 일어나서 제 앞에 서더니 허리를 굽히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해서 나는 아마 또 다른 사업이 생겨서 먼저 자리를 뜬다는 얘기인가 했더니 갑자기 저더러 식사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식사기도를 드리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 분은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분이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남한에 갔더니 음식을 먹을 때 명함을 돌리고 인사를 많이 하더라고 명함짝을 자꾸 돌리니 어디 음식을 먹을 수 없더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그분이 특별히 부탁한다면서 7월 7일 저녁 대대적으로 열리는 1주기 추모행사에는 참석치 않는 것이 좋겠다고 미리 이야기들을 한 것 같아서 나가지 않기로 하였다.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돌아와서 고생할까봐 정치적인 집회를 피하게 함)

드디어 김 주석의 1주기 제삿날이 다가왔다. 7월 7일 밤은 밤새도록 추모행렬이 끊기지 않는 날이란다. 만수대 언덕 동산에 있는 거대한 동상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꽃다발, 꽃바구니들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느즈막한 열시 지나서 나갔는데도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의 행렬을 기다리느라 좀 지체를 하다가 꽃바구니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애도의 묵념을 드리고 저는 대한민국 백성으로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여기에 왔다는 것을 되새겼다. 꽃바구니 리본에는 ‘김일성 주석님 조국통일은 걱정 마시고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문 목사와 남한의 민주인사들을 대신하여 박용길 드림’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지만 많은 인민들의 발은 끊임없이 이어져 밤을 꼬박 새웠다고 들었다.

7월 8일 김 주석 일주기

오전 10시에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추도식이 있는데 우리는 아침 일찍 9시 전에 금수산으로 갔다. 응접실에서 조금 기다리는데 김정일 상주가 수행원과 같이 나타나서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문 목사는 김정일 비서를 만나지 못하였고 영화에서도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정말 어려운 길을 오셔서 고맙습니다” 했다.

   
▲ 1995년 7월 방북한 박용길 장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는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건강한 모습이어서 병약하다는 것은 뜬소문이구나 싶었다. 추도식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김 주석 부인 김성애 여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분은 자그마한 분이 검은 상복을 입고 계셨다. 저는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희고 검은 상복차림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밖으로 나와서 김정일 상주와 함께 개관테이프를 끊는 데까지 걸어가서 금가위(선물로 들어왔다 함)로 넓고 빨간 테이프를 끊고 궁전 안 영생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주의 안내로 영생관 안으로 들어가 대형 유리관 속에 검은 양복을 입고 높은 한국식 둥근 베개를 베고 빨간 이불을 가슴까지 덮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시신 왼쪽 허리, 머리, 오른쪽 허리 등 세군데서 묵례, 조의를 표한 후 밖으로 나와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10만이 넘는다는 군중들은 군악대의 연주와 연설 등 한 시간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군악대의 김일성찬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것으로 추도식을 마쳤다.

저녁에는 기념궁전에서 개최된 만찬에 참석하여 김 주석 동생 김영주 씨를 비롯하여 간부 되는 100여명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이름표가 붙어있는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었는데 가지각색 요리가 많이 나왔지만 순 녹두지짐이 별미였고 김 주석이 평소 즐기던 감자국수가 인상적이었다.

독립군 시절 독립군에게 식량을 대주는 사람은 무조건 희생이 되었기 때문에 어디어디에 감자밭이 있다는 것만 가르쳐주면 밤중에 가서 캐어오곤 했단다. 백두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동네라 몹시 추워서 시기를 놓치면 감자가 꽁꽁 얼어붙어버린단다. 버릴 수도 없고 하여 언 감자를 물에 담가 앙금을 가라앉혀서 국수를 뽑는데 색은 까맣고 볼품없지만 쫄깃쫄깃하고 맛있는 국수를 콩국이나 깨국에 말아 먹는데 아주 맛이 일품이었다. 이 음식이 기념궁전에서는 유래가 있는 음식으로 명물이라고 한다.

영생관을 만드는 데 그 큰 공사를 백층계가 넘는 계단이며 건물을 일 년 만에 완공할 수 있었다고 상주가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통이 큰 사람, 말도 못할 효자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오늘 하루 내 어깨에 지워졌던 중한 책임을 다 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김 주석 일주기 조문은 무사히 끝난 셈이다.

봉수교회 예배

문 목사가 6년 전에 찾아갔던 봉수교회로 주일예배를 드리려 가는 날이다. 특별히 문 목사 흉상이 들어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통일의 사도라고 새겨 넣은 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받은 금반지를 끼고 문 목사가 끼고 갔던 안경을 쓰고 봉수교회로 갔지요. 교인들이 문밖에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꽃다발과 박수를 받으며 맨 앞자리로 나갔다. 그때 계시던 목사님은 너무 반가워하시며 조문 온 데 대한 감사 말씀을 많이 하셨다.

성가대가 흰 가운을 입고 늘어서서 좋은 노래를 불렀지요. 이번에도 공중기도는 여자 분이 열렬하게 드리셨는데 북에서는 어디를 가나 여자 분들이 많이 등용되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흐뭇했다. 여자들에게 주어진 지위나 임무를 오히려 여자들 자신이 사양하는 편이라 하더군요. 예배를 마치고 손을 잡고 둘러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힘차게 불렀다.

여운형 선생 따님은 예배 때마다 예쁜 한복을 입고 오셔서 사진도 찍고 같이 예배를 드렸지요. 이 목사님은 문 목사와의 만남을 회상하시면서 좋은 설교를 해 주셨는데 국가에 대한 충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에 와서 북 동포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다니 만감이 가슴에 넘쳤다.

만수대창작사 (7월 9일~11일)

만수대창작사에는 여러 가지 부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림, 도자기(조각), 판화, 문학 등등 여러 부문이 준비되어 있었다. ‘창작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형상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김정일)’

자기의 전문분야를 인정받으면 창작실과 재료 등이 제공되는데 그림, 조각, 도자기실 등을 둘러 볼 수 있었고 돌로 조각을 하는데 들렀더니 개선문의 꽃 조각을 이곳에서 다 했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어느 창작실 문을 여니까 바로 앞에 문 목사 동상이 저를 맞아주어서 깜짝 놀랐지요. 전에 이태영 박사, 이우정 의원, 한명숙 님이 평양에 가서 그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신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생각지 않을 때 보게 되어 그랬겠지요. 그리고 제가 아직 모르고 있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하나는 보통 양복을 입은 큰 초상화였고, 하나는 5001번 수번을 단 죄수복을 입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한 손에는 책을 든 모습이었는데 정말 실물을 꼭 닮게 그려 있어서 정말 반가웠다.

옆에는 임수경 양의 얌전한 모습이 보이더군요. 구경을 하고 돌아 나오며 “이제 저는 다 보았으니까 갑니다”하고 동상한테 말을 하였더니 모두가 재미있다고 웃었다. 문 목사의 열흘 동안의 통일여행이 이렇게 여러 곳에 자취를 남기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 문익환 목사가 1989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포옹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평양지하철

평양지하철은 서울지하철의 10배 가까운 지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모든 역마다 승강장과 지상 사이에 에스카레타가 설치돼있었다. 에스카레타(자동층계)를 타고 한참 내려가야 하는데 자동층계가 어찌 빠르게 움직이는지 어지럼증이 날 지경이었다.

한참 내려가서 내려놓는데 북한주민들이 말하는 지하궁전이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디나 호화롭게 장식되어있고 모든 역이 대리석 돔형으로 되어있으며 각기 다른 모자이크 벽화와 호화찬란한 전등들이 달려있고 전동차들은 작고 좁아 보였다. 버스는 위에만 전깃줄에 달아 있고 밑은 땅위를 그냥 지나가는 차들이었는데 50전을 받는다고 한다.

평양에서 한 달이나 있으면서 돈 구경을 못 했으니 아마 팔자가 좋은 셈인지 모르겠는데, 지하철이 나중에 생기면서 요금이야기가 나왔다는데 김 주석이 똑같아야 한다, 그래서 50전으로 통일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역 이름이 하나같이 지명이 아니고 영광이니 부흥, 봉화, 승리, 통일, 개선, 혁신, 광복, 건설, 광명, 낙원 하는 뜻있는 이름이었고 역장님은 6년 전에 문 목사를 안내 했었다고 자꾸만 문 목사 이야기를 되살리고 있었다. 역구내에도 큼직한 응접실이 붙어있어서 과자며 음료수를 내 놓았다. 역구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해서 손을 들어 답례를 하고 어린 애기들을 안아주면서 축복을 하였다. 어디서나 어린 아기들은 귀엽고 우리들의 희망이라는 것을 느꼈다.

단군릉

김 주석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손을 붙잡고 평양 밖을 지나다닐 때 “저기 우리나라 조상 묘가 있단다” 하시던 생각이 나서 우연히 찾게 된 것이 7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비석을 찾고 공을 들여 찾은 끝에 유골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다. 단군 양위분의 유골을 다 찾을 수는 있었는데 5011년이 되었다고 고증을 얻을 수 있어서 그 자리에 웅장한 능을 만들고 유골도 전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사라는 것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난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면서 올바르게 살아서 후손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는 것을 생각게 하였다.

김 주석이 단군릉을 찾고 너무너무 감격하고 기뻐하며 감개무량하다고 여러 번 되풀이하셨다는 이야기를 최덕신 씨 부인 유미영 천도교 지도위원장과 여연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삼대혁명전시관 (7월 12일)

삼대혁명이란 사상, 기술, 문화의 혁명을 의미하며 실천에서 위대한 생활력을 발휘하고 있는 가장 정확한 노선이라 한다. 사상적 지도와 과학기술적 지도를 결합하고, 위가 아래를 도와주며 근로인민대중을 발동하여 사상, 기술, 문화를 다그쳐 나가는 새로운 형식의 지도방법이라 한다.

온갖 기계 모형과 북에서 생산되는 광석, 석탄, 기계 등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전시물들이 놀랄만한 정도로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볼 것이 많아서 도저히 다 돌아볼 수 없었다. 일부만 보는데도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저는 감상문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튼튼하여라 통일조국의 앞날이여
끝모를 투지와 가능성
길이 빛나리라”

이인모 선생 방문

문 목사가 1993년 3월 6일 석방된 후 맨 처음으로 부산에 달려가 치료를 해드리고 기를 넣어주며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마음 졸인 이인모 선생이기에 이번에 꼭 만나고 돌아오고 싶었다. 과일을 한바구니 사들고 방문하였더니 마당에 옥수수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고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이인모 선생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부인과 딸 손녀, 손자가 반가이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주치의가 67명이 붙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서 살려놓았다고 하며, 김 주석이 문병을 오곤 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충격을 많이 받아 실어증이 생겼다고 부인이 통역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못 알아듣고 부인하고만 통하는 이야기를 하셨다. 남쪽에는 자기를 끔찍이 돌봐준 김상원 가족들과 그밖에 신세진 여러분을 잊지 못하고 보고 싶어 하셨다. 평양에서는 최고훈장을 타시고 인민학교 이름은 이인모학교로 바꾸고 영웅대접을 받는다고 하셨다.

부인이 음악선생님인데 피아노를 늘 가지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듣고 김 장군이 피아노를 사보내고, 감옥에서 추워서 고생했다고 풀빛 나는 양단 이부자리를 보내왔다고 한다. 생일이면 푸짐한 생일상도 차려서 보내왔다 하고 북 전역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아래위 층에 꽉 차 있었다.

그동안 백두산, 금강산도 구경 다니고 온 가족이 떠받들어 주니 늘 감격해서 피아노 소리만 들어도 눈물을 흘린다고 부인이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다. 다과를 차려놓고 먹으라고 하셔서 실과를 좀 들고 너무 흥분하실까봐 사진첩을 구경하다가 일어서서 나오니까 그리 섭섭해 하시고 후에 예쁜 꽃병을 숙소로 보내 오셨다.

장기수 어른들은 30년, 40년 옥고를 치르고 나오셨으니 이제는 70, 80 되는 노인들이 잠시나마 가족들의 품에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도 될 텐데 하며,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가 없다. 한 분, 두 분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시는 것을 어찌 심상히 볼 수 있겠는가? 다른 분들도 가족을 만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금수산기념궁전 나무심기 (7월 13일)

어제 심으려던 둥근 향나무 심기가 비가 몹시 오는 바람에 오늘로 연기되었다. 아침시간에 기념궁전으로 갔더니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제일 좋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흙도 검고 부드럽게 준비되어 있어서 향나무를 심고 쓰다듬고 물도 주었다. 돌비석에는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박용길이 심은 나무’라고 새겨져 있었다. 준비하는 사람들이야 힘을 썼겠지만 정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는 말을 연상케 했다.

나무를 심은 자리는 김 주석이 늘 즐겨 거닐던 자리였다고 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무를 심게 되어 주위 분들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통일이 된 후에는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을 텐데 그때에는 많이 자란 향나무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서해갑문

그 길로 남포로 가서 대동강 하류를 가로막는 서해갑문을 보았는데 가로막는 둑이 8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농공업 발전을 위해서 대동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서해갑문은 최대의 댐이었다. 다목적 댐으로 여러 가지가 계획되고 있고 평안남도와 황해도로 수로를 여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큰 배가 드나들 때는 수문을 열어서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영국에 있는 다리를 생각나게 한다.

날씨가 맑으면 전망이 좋다는데 마침 안개가 짙어서 유감이었고 우리와 동행한 김 씨는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르겠는데 무얼 바라봐” 해서 모두 웃었다. 안내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는데 이 서해갑문을 세움으로 가뭄에 물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여러 가지로 농사에나 배가 다니는 데나 이로운 일이 많다고 애교 있는 아가씨가 설명을 하였다.

이렇게 크고 놀라운 공사가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문 목사는 서해갑문을 사람의 힘으로 건설하였다는 것 하나만으로 북은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가슴으로 만난 평양’에 쓰고 있다.

나는 방명록에 “서해에서도 해가 뜬다. 슬기로운 조상의 공적 자손만대에 이어가리”라는 말을 남겼다.

평양산원 (7월 14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평양산원을 방문하는 날이다. 50대의 여자 원장님과 많은 간호사들이 문밖에 나와 열 지어 서서 환영하는 사이로 들어오는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주셨다. 방마다 최신의 의료시설들이 마련되어 있고 임산부는 등록하면 아기를 낳을 때까지 21번을 의무적으로 진찰을 받아야 하며, 그 동안 몸에 병이 있으면 무슨 과에서나 다 치료를 해주기 때문에 건강한 몸으로 애기엄마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방 저 방 돌아보는 중에 여러 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임산부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나를 도와주는 김 선생도 진혁, 봉혁 두 아들을 이곳에서 낳았는데 비용은 무엇이나 다 무료이고, 얼마나 편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생아실에 가니 삼태자를 나란히 눕혀 놓았는데 인큐베이터에도 삼태자가 누워있었다.

이 산원은 개원한지 15년 되었는데 7월 12일로 200번째 아기가 태어났다고 신문에 난 것을 읽고 하도 이상해서 질문을 했더니 원장님이 설명을 하시는데 쌍둥이는 치지도 않고 세쌍둥이와 네쌍둥이만 합해서 200번 경사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 산원에서는 세쌍둥이가 나면 여자인 경우에는 금반지에 빨간 보석을 셋을 박아서 생년월일을 새겨서 주고 남자면 장도에다 빨간 보석을 박아 주는데 어머니께 같은 반지를, 아버지에게는 같은 장도를 드리고 거기에 생년월일을 새겨 형제가 헤어져도 그것을 보고 만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 자라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15년 동안에 200쌍이 나왔다면 한 달에 한번 태어났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렇게 세쌍둥이 네쌍둥이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상할 정도였다. 어떤 분은 북한은 공해가 덜하고 아마 물과 공기가 맑아서 이런 경사가 자주 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하셨고 김 주석은 “이것은 아마 우리나라가 잘될 징조가 아닌가”라고 해석하였다고 들었다. 저는 방명록에 아래의 글을 남겼다.

새 생명을 받아 키우는 손길들의 소중함이여!
황금나팔 울려 퍼질 자랑스런 꿈나무들이여!

김정숙탁아소 (7월 14일)

탁아소는 넓고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여러 가지 놀이터이며 설비가 잘되어 있었는데 한 방에 들어가니 병원놀이를 하고 있었다. 간호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모자를 쓴 다섯 살 정도의 어린이들이 실제로 병을 진찰하면서 무슨 약을 먹으라고 처방도 하고 치료에 필요한 주의를 주면서 재미있게 병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을 보았다. 환자도 되어보고 의사도 되어보면서 배우는 것이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노래공부며 율동이며 그림이며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여자들이 어느 부문에서건 많이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크고 편리한 탁아시설이 있으니까 마음 놓고 일을 할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율동반에서 같이 어울리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곧고 맑은 금쪽같은 열매들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구나
가지가 휘어지도록
그 향기 멀리멀리 퍼지어라

김인서 님의 가족들 (7월 16일)

서울에 있는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하실 때 만나 뵌 김인서 님의 가족을 만나게 되어 기뻤다. 동생 되시는 분과 두 따님이 초대소로 찾아오셔서 반가이 만났다.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를 만나셨어요” 하면서 기가 막혀하는 가족들을 보니 할 말이 막혀 버렸다.

“우리 아버지 칠순이 금년인데 꼭 여기 오셔서 같이 지냈으면 좋겠어요. 꼭 돌아오시도록 힘써 주세요” 하던 말이 귀에 쟁쟁한데 나는 돌아와서 감옥살이와 병원에 주거제한으로 그 분을 만나 뵈지도 못한 중에 11월 18일 광주에서 칠순잔치를 하셨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따님은 그래도 전화통화는 해외에 나갔을 때 할 수 있어서 아버지의 음성은 들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애타게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아득할 뿐이다. 새해에는 크고 둥근 해가 우리 한반도에 환히 비춰 오기를 바랄 뿐이다.

묘향산 (7월 15일)

처음으로 북의 기차를 타고 묘향산으로 향했다. 초대소 식당에서 애를 쓰며 일하는 김 군이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하여 기차식당에서 먹었다. 이 기차는 김 주석이 타시던 기차라며 자랑을 하였는데 역시 편안하고 전망도 좋은 식당차였다. 옆에 침실도 있었지만 모처럼의 기차여행이라 다 같이 노래들도 부르며 지냈다. 옛날에 묘향산에는 가본 일이 있었지만 얼마나 경치도 좋고 아름다운지 우리 김 대통령은 이렇게 좋은 구경을 놓치셨구나 싶었다.

1994년 7월 25일은 허망하게 넘어가지 않았던가. 김 주석이 직접 묘향산 숙소에서 준비를 하고 심지어 냉장고까지 열어보면서 이번에는 서로 양보를 해서라도 일이 성사되게 하자고 측근들에게 이야기하고 다음날도 또 같은 말을 하면서 통일이 되면 남쪽에서 대통령을 해도 되고 북쪽에서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까지 하였다는데 갑자기 가슴을 안고 쓰러지셨다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1995년 통일원년,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고 굳게 손잡고 약속한 두 분이 같은 해 같은 병으로 가시다니 이렇게 우리 한반도는 통일을 늘 구어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피가 터지도록 아픈 가슴이다.

보현사의 스님 (7월 16일)

역사적인 보현사 이런 산골까지 폭격을 하다니 40만 인구인 평양에 만도 46만 톤의 폭탄을 퍼부었다니 아직도 폭격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만고의 명산 묘향산의 보현사 스님께서는 6년 전에 오셨었다는 문 목사와의 대화를 하나도 잊지 않고 되새기면서 그리워하고 계셨다. 같은 스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팔만대장경이며, 옛 비석들이며, 그윽한 산사의 정적을 맛보았다. 하도 묘하고 향기로운 자연을 이렇게 읊어보았다.

묘향산

흰 구름 서리서리
첩첩 푸른 산 휘어 감고
맑은 물은 장한 바위
얼싸안고 솟구치네
이름 모를 산새들도
목청 높여 우짖는데
유구한 5000년에
처음 갈린 겨레들을
금수강산 한 피 받은
남남북녀 하나되게
대자연의 품에 안겨
통일노래 부를 날을
우리 소원 이뤄주렴
산수절경 묘향산아  

1995. 7. 16

다음날은 스님의 안내로 폭포와 계곡을 찾으려 했는데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굵어졌기 때문에 포기하게 되었다.

국제친선전람관

김 주석, 김 장군에게 세계 여러 나라 수반들과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보내온 귀중한 선물들을 진열해놓은 전람관인데 그 수가 엄청나 11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전람관을 아직도 더 짓고 늘리는 중이었다. 심지어 작은 악어 손가방까지도 쓰지 않고 전시해놓았으니 보낸 쪽에서는 섭섭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선물 중에 상아가 너무 많아서 그 쪽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나라보다 평양에 상아가 더 많다고 조크를 하기도 했단다.

대학졸업생인 여자 안내원이 11만점이 넘는 선물들을 어느 나라 누구가 보냈다고 써 놓은 것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머리가 좋아야겠다고 느꼈다.

어디 가나 여자 안내원이 나타나는데 노동력 부족한 여자들을 안내원으로 일하게 하고 남자들은 같은 곳에서 다른 일을 보게 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 같이 일하므로 오래 할 수 있는 영구적인 직업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물이라 그런지 너무너무 좋은 물건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오묘하고 향기로와라 지구상의 온갖 보물
이곳에 보존되는 큰 뜻은 역사가 말하리라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이며
가지가지 물건들 없는 것이 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한반도에 모여 들다니
조공을 바치는 나라도 조공을 받는 나라도 없는
평등한 나라여야 하는데 그 동안 약소민족으로서
받은 설움이 이제는 존경을 받는 나라로
남북이 합치면 더 큰 나라가 될 텐데
사랑해야 한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통일되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의심하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는 거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울 수 있다.
사랑하자 사랑하자 사랑해서 어서 한 몸이 되자
1995년도 그냥 저물어 가야 하는가?

백두산, 삼지연 (7월 18일)

우리 일행은 특별기편으로 백두산 관광에 나섰다. 의사, 간호사, 기자님들, 비디오 촬영반들, 비행사, 비행기 안내양 모두 많은 일행은 삼지연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안내양 두 사람은 둘이 다 미인이고 조금 닮아서 쌍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백두산 밀영인 귀틀집을 찾아갔다. 그 포악한 일본군들도 이 밀영만은 찾아내지 못했단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원시림 속을 깊숙이 들어가고 또 들어가서 하늘도 보이지 않을 정도에 밀림으로 찾아가니 귀틀집이 보였는데 굵은 통나무를 우물 정자로 엮어서 벽체를 쌓아 올려 지은 집인데 사이사이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말라고 이끼를 채워 넣고 손잡이는 언 손이 들어붙지 말라고 노루 발목을 두 개를 묶어서 늘어트렸는데 그것을 잡고 열어보니 털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추운 산 속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무엇을 먹고 입고 살았을까? 잃은 나라를 도루 찾으려고 생명을 내 놓고 활동했던 옛 어른들을 생각하고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지휘관이 있던 사령부라는 방에는 작은 책상, 의자 하나, 칠판에다 호롱불 하나, 그 옆방은 더 좁은 보좌관들의 방이 있었는데, 작은 난로가 놓여 있었다. 무서운 눈을 피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했을까? (북쪽에서는 식의주라고 한다는데 먹는 게 더 귀중하다는 뜻이란다)

얼음같이 찬 샘물이 돌 틈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물맛이 좋고 그 물을 마시면 10년은 젊어진다고 한다.

귀틀집 앞에는 빨간 김정일화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 꽃은 일본의 한 원예사가 20년 동안 연구하여 새로 키워낸 것인데 1988년 2월에 김정일화로 명명하여 보내와 식물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베고니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인데 이 꽃의 크기는 보통 10~20cm 이상이나 된다.

첫 꽃이 핀 다음 차례로 피어올라 가면서 10~15개의 꽃송이가 넉 달 이상이나 핀다. 한 포기에 수꽃과 암꽃이 따로 핀다. 줄기는 모가 나며 30~4cm정도이다. 이 꽃은 우리나라와 세계 여러 나라에 뿌리내리며 널리 퍼지고 있다고 한다.

샘물 옆에 큰 돌벽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김 주석이 아들 김정일 장군을 칭송하는 한시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한글로 그 뜻이 풀이되 있었다.

송시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수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 돌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 땅 뒤흔든다

1992. 2. 16 김일성

세계 역사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후계자 문제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많은데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100% 신뢰하고 송시를 남길 수 있는지 그런 아버지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에서 후계자 문제는 30년 전부터 부자가 같이 일하고 배웠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일이라고 누구나 알고 있었다. 외모도 생각도 음성도 성격도 똑같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삼지연 못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연못 셋이 클로버 잎같이 붙어있어서 삼지연이라고 한다는데 연못가에 있는 조형물이 물에 비치는 것이 그림 같았다. 그 곳에는 김 주석 동상이 망원경을 목에 건 모습으로 크고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고, 그 밖에도 여러 군상 조형물인 흠모편, 진군편, 숙영편 등 삼지연 대기념비인 군상들은 실지로 그때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하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용사들의 뜻을 이어 빛나는 조국통일을 이룩하자.”라는 글을 남겼다.

늘 흰 한복만 입고 다니다가 이번 등산길에는 바지와 잠바 차림으로 나섰지요. 문 목사, 평양 다녀온 후 한복만 입기로 다짐하였었는데 이번 등산복은 저를 위해 마음 써주시는 주위 분들의 사랑의 표현으로 알고 운동화에 모자까지 쓰고 영산에 오른 거죠.

60, 70년 전에 밀림사이에 서 있던 구호목이라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천이나 먹을 구할 수 없는 산 속에서 나무껍질을 베껴서 거기다 아마 숯 검덩으로 썼을까요. 여러 가지 구호가 적혀있었다. 이것으로 서로 알리면서 힘을 얻었겠지요. 어떤 나무에는 ‘남녀평등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글씨도 남아있었어요. (김 주석 부인의 솜씨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한다.)

독립군들이 옷이 다 해져서 새 옷을 입어야겠는데 하얀 광목 밖에 없어서 나무껍질을 베껴 삶아서 그 물에다가 물을 드렸다 한다. 두 주일 동안에 군복 600벌을 지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렸단다. 그래서 여자 독립군 몇 명은 불도 없는 밤에 달빛 아래서 재봉틀을 돌렸는데 600벌이면 아래위 1200가지를 만들어야 하지요. 얼마나 신명나게 일을 했던지 두 주일이 되기 전에 군복 600벌을 거뜬히 해내었다고 한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죠.

그 산속에서 산딸기, 취나물을 뜯으며 얼마나 식의주 때문에 고생을 했겠어요. 김정일 장군이 탄생했다는 귀틀집에는 조각조각 무은 이불이 얹혀 있었는데 애기를 쌀 천도 솜도 없어서 대원들이 자기 옷을 뜯어서 조각 조각 무어서 이불을 만들었다는군요. 그 이불이 너무 귀해서 지금도 얹어놓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백두산 등산에는 언제나 날씨가 큰 문제가 된다는데 아침부터 얼마나 날씨가 좋은지 모두 들떠 있었다. 맑은 하늘 푸른 물에 해까지 쨍쨍 나주어서 정말 복 많이 받은 일행이라고 생각되었어요.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길을 떠났을 때 멀리 올려다 보이는 산에는 ‘김정일’이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었는데 김 장군 50세 되는 해에 1942. 2. 16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을 1942개 쌓아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예쁜 노란 꽃이 피어있는 푸르고 넓은 언덕을 돌고 돌면서 올라가는데 승용차가 높은 곳에 공기와 기압에 못 이겨 허덕허덕하면서 숨이 차하는 바람에 길에 서 있는 차도 있었고 거기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특수한 차가 고안되어야 한다고도 하였다. 우리 일행은 정 선생님이 다리가 아프시니까 아무래도 차로 올라가야겠지만 정상까지 차로 올라가니 눈앞에 천지가 보였기 때문에 등산도 하지 않고 등산을 다 한 셈이 되었다.

백두산은 영산이라고 말하는 그대로 너무나 신비스러운 산이었다. 좁은 입으로 어찌 다 형용할 수 있으랴. 두 손을 번쩍 들고 통일만세를 불렀다. 백두영산이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루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저절로 ‘백두산으로 찾아가자’라는 노래를 불렀다.

안내하는 군인은 우리를 반기면서 나에게 노란 백두산 꽃을 꺾어주고 백두산 산정의 돌을 세 개나 집어주면서 열심히 설명하였고 우리는 김 주석이 사진 박은 자리에 서서 사진도 찍으며 즐거웠다. 백두산 꼭대기까지 힘 안들이고 올라가는데도 더 편리하게 하느라고 케이블카까지 놓고 있으니 그럼 등산을 하는 맛은 못 볼 것 같았다.

연변에 있는 호근이에게 전화를 하니 20일에 백두산 등산을 한다고 해서 하루 차이만 아니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했었지요. 같은 백두산이라도 연변에서와 북한에서 올라가는 거리가 얼마나 멀 텐데 말이다. 삼지연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하룻밤 쉬고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삼지연 못가까지 주치의와 같이 거닐다가 백두산 등산에 아쉬움을 남기며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이 있을까? 우리 백성들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살면서도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는 걸까? 고마워할 수 없는 걸까? 아름다운 강산에 아름다운 백성이 살면 지상낙원이 될 텐데, 통일이 되면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지상낙원을 이루겠지, 다짐해본다.

아침저녁으로 숙소에서 책을 읽는 동안 낯선 말들을 적어보았다.

가드라든다                         빳빳하게되면서 오그라든다
가슴 후더워지는
간참
갈마드는                            의문 엇갈려 일어나는 의문
갑삭하게                            가볍게
강익한 투지
건늠길                               횡단보도
견결한                               꿋꿋하게 굳세다
고드롭게
고아댄다                            떠든다
곧추                                  곧바로
굼니며
궁냥                                  궁리
귀틀집
귀를 강구었다.
굽인돌이                            모퉁이
굼땠다.
까마밤중
꽁다리 연필
꽃망울 소녀
끊어 번지고
나물 무치게                       나물무침
눈굽을 적시었다.                 눈 가장자리를 적시었다
눈굽에                              눈 구석이나 가장자리에
너렁청한                           확 트이고 시원스럽게 넓은
다심한                              걱정이나 마음 쓰이는
다불리었다                        빠르게 다그치다
답새겨 대야
되알지게                          야무지게
돌아치는 통에
돌따서                             돌아서
뒤거두매                          마무리
드릴권리
두간두간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어지는
두리에                             하나로 뭉치게 되는 둘레
뒤더수기                          뒤덜미
드팀없는                          틀림없는
드놀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로두(路)                           길거리
료해하다                          양해하다
랭돌이                             랭동 차디찬 구들방
랭동고                             냉장고 냉동창고
막능당의 힘에 대한             莫能當 당해낼 수 없는 힘에 대한
만시름                             온갖 시름
만풍년                             큰 풍년
망종들                             망할놈의 씨알머리들
맵잤던지                          매섭게 독하거나 사납던지
목고채                             목도채 집을 걸어서 어깨에 메는 막대기
면바루                             면바로 바로 정면으로
모지름                             괴로움을 견디어내거나 무엇을 이루려고 안타 까워함
모대겼으나                       몹시 괴롭고 안타까워하였으나
명론탁설                          名論卓說 훌륭하고 뛰어난 학설
머밋머밋                          머뭇머뭇
무어가지고
물 투성이                         물을 뒤집어 쓴 모양
바빠맞은                          몹시 급해진 
바재이다가    
바줄당기기                       줄다리기
발가놓은                          벗겨놓은
발편잠
밤잠을 스치기도 한다
받최뚝
빠빳하게
부름소리                          소리를 내어 부르는 소리
빛 뿌린 것이다
사품치며
새빠지게도                       경우와 기대에 어긋남이 있게도
생등적                             나면서부터 지니고 나는
쏠라닥
셈평좋게도                       태평하고 넉살좋게도
수원(수행원)                     사업을 보장하기 위해 따라 다니는 사람
숙봐요                            실제보다 낮추어 보아요
수더분하게                      까다롭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세간살이                         살림살이
슴배어 있는                     조금씩 스며들어 안으로 배어있는
숫저운                            순박하고 수집어하는
숫보았으나                      깔보았으나
슴벅이였다                      눈까풀을 움직여 감았다 떴다 했다
아름찬 것                        두 팔을 벌려 껴안는 둘레의 길이에 가득한 것
아부재기                         아우성
아뿔사                            낭패날 때 쓰는 말
애오라지                         절절한 마음으로 한갖
알심있게
어리 쓸었다.
어줍게                            둔한 것 같고 자유롭지 못하게
오사리채로
陽奉陰違                         겉으로는 지지하는 체 하며 속으로는 반대하고  딴 짓을 하는 것
얼떠름한 표정                  얼떨떨한 표정
엇서기                            어긋나게 맞서다
요구성                            요구하는 정도나 성질
우렷히                            희미한 가운데 은근하면서도 뚜렷하다
울바자가 되어주는
위요된
일떠서                            일어나서
일본새를 밝혀주신             일하는 본새나 모양을 밝혀주신
유포하여
은을 내었다
은정어린                         은정의 뜻이 가득 깃들어있다
인차                              얼른 바로
자신심                           자신감
작식대                           식사를 마련하여 공급하는 유격대의 한 대오
짬시간
조폭한 행동
재세를 하지 않음             건방지거나 교만하게 굴지 않음
쬐쬐하게
지어 (심지어)
지청구                          못마땅하게 여기며 책망하는 말
지내비좁은                    너무 지나치게 좁은
직방                            직바로
직승비행기                    헬리콥터
쪽잠                             잠깐 자는 토끼잠
찔게                             반찬
쥐락펴락                       쥐었다 폈다 마음대로 하는 것
창발적                          남이 알지 못하거나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새롭게 이루는 것
타래치며 
타매                            침을 뱉으면서 꾸짖는다
패가며
피타는                         노력 피가 마르는 노력
포치해 주시오                布置
행처불명                       어디갔는지 모른다
헛자라는게                    농작물이 필요 없이 커가며 연하고 마디 사이가 길게 되다
확집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여 양보하지 않는 것
헤덤비다니                    어쩔줄 모르고 덤비다니
후치질                         후치로 밭고랑을 갈아엎는 일
후더워 지는 것               감격과 흥분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희붐히                         날이 새려고 밝은 기운이 어렴풋이 비쳐오는  모양

 

어머니 성묘 (7월 21일)

어머니 성묘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 우리 친정집 이야기를 해야겠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원래 서울 태생이신데 아버지가 구한말 기병장교로써 박 참위라고 하였는데 말을 타고 길에 나서면 예쁜 대장 나왔다고들 하였다 한다. 그 무렵 민영환 님 자결한 집에도 들르셔서 창호지에 붉은 피가 뿌려진 것을 보셨다고 한다.

무장해제 당하신 것이 마음아파 분석기술을 배우셔서 깊은 산골 광산으로 가셨는데 처음에는 황해도 수안광산에 가셨다가 평안북도 창성군에 있는 대유동(大楡洞) 광산 분석주임으로 수십 년을 근무하셨다.

어머니는 정신여학교 3회 졸업생으로 사범학교를 다니셨고 결혼하셔서 얼마 되지 않아 시골로 내려가시게 되었다. 대유동은 원래 깊은 산골인데다 철도가 지나는 맹중리나 영미에서 360리나 들어간 곳인데 아무 문명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곳이었다.

1920년대 그곳에 가셔서 교회 하나 밖에 없는 곳이었는데 학교도 세우고 유치원도 세우셔서 어머님은 원장으로 아버님은 교장 일을 보셔서 박 교장님, 현 원장님으로 통하셨다. 문화시설이 없는 곳에서 여러 면으로 계몽사업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교회의 권사로 풍금도 치시고 성경도 가르치시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편물바늘로 모자, 장갑, 목도리 등을 짜는 법을 가르치시고 요리 등도 가르치시며 문화사업에 힘쓰시다가 1942년 양지바른 산언덕에 모셨었다. 그 옆에는 적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해방 후 남쪽으로 내려와서 53년이 되도록 성묘를 못하였다.

아이들을 다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시키시고 두 분만 그 곳에 계셨었는데…… 이번에 제가 평양에 가서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곳을 약도로 그리고 동생 박용주에 대해서도 수소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었다. 얼마 후 현장으로 찾아갔던 답사팀이 어머니 묘비를 찾았다고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왔다. 이미 53년이나 세월이 흘렀고 묘소가 비탈진 언덕이었기에 산사태라도 났으면 비석이 땅에 묻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지거나 흙에 묻히지도 않고 서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진을 보니 봉분은 돌보는 이가 없어 무너졌고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성묘를 가야겠는데 북한 쪽에서는 어머니의 기일인 7월 25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이 미안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성묘하기를 원했더니 7월 21일로 날이 잡혔다. 원래 첩첩산골이라 교통이 불편해서 오래 걸린다고 직승기(헬리콥터)를 내기로 결정되었다.

아침 일찍 9시에 떠나서 9시 50분경에 도착할 예정으로 큰 운동장 네 구퉁이에 봉화를 올리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데 날씨가 구름이 끼어서 떠나지 못하고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 구름이 조금만 있어도 못 떠난다고 군인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11시에나 떠날 수 있었다. 직승기가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기자 몇 분만이 동행할 수 있었다. 날아가도 날아가도 첩첩 푸른 산만 보이니까 동행하는 분들은 어떻게 이런 산골에 와서 살았느냐고 놀라워했다.

두 시간 이상이나 도착이 늦었으니 화동이나 동민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모진 바람을 일으키며 봉화가 타오르고 있는 운동장에 직승기가 내렸다. 오래 기다리던 대유동 유지들이 많이 보였고 예쁜 화동도 꽃다발을 들고 치마가 거센 바람에 날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 화동들은 꽃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꼭 와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 2009년 4월 5일 일본 도쿄 재일본 한국YMCA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방북 4.2공동성명 20주년 기념 남북화해와 평화를 위한 일본포럼’에 참석한 박용길 장로. [자료사진 - 통일뉴스]

승용차로 숙소에 들렸다가 일기의 변화를 생각하고 지체 없이 금방 산으로 직행을 하였다. 산에 올라가기 전에 두 노인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한 분은 아버지 도시락을 나르던 아가씨가 70세가 되신 김인숙 님이었고, 한 분은 어머니 유치원에 다니던 원생인데 69세로 이경심이라는 분이었다.

53년 만에 만났는데도 얼굴이 익었고 서로 알아보면서 얼싸안았지요. 눈물로 인사를 나누는데 저더러 아버지도 닮았고 어머니도 닮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반가워하시더군요. 묘소에 올라가는 길을 층계를 새로 만들고 봉분도 크고 훌륭하게 잘 만들고 잔디도 파랗게 자라고 있었어요. 앞에는 제상도 정성껏 차려 있고 많은 분들이 모여 계셨지요.

저는 너무도 감격해서 어머님 봉분과 비석을 쓸어 보며 울음을 터뜨렸어요. ‘어머니 불효자식이 53년 만에 왔습니다’ 하고 울음을 삼키면서 인사를 드리고 정 선생님과 같이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205장 예수 ‘앞에 나오면’을 부르고 정 선생님이 기도를 올리셨죠.

사람들이 뚝딱뚝딱하더니 어느 틈에 묘소 옆에 천막을 치고 대유동 여러분들이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굉장한 잔치가 차려졌다. 평양에서도 음식을 날라왔다 한다. 기자님들과 동네 분들 모두 모여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잘 돌보아 드릴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요. 옆에 있던 교회당은 폭격으로 없어졌고 통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비석 뒤에는 가족의 이름이 있으려니 했더니 대유동 유지 분들의 성함이 8, 9명 새겨져 있었어요. 모두가 생생히 기억나는 분들이어서 다시금 고마움을 느꼈지요.

주위 분들은 53년 전에 일을 어떻게 그렇게 기억하느냐고 놀라워하더군요. 이경심 할머니는 자녀분을 9남매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다 대학을 졸업시킬 수 있었다고 가난한 시골 사람이 어떻게 교육을 시켰겠느냐 나라에서 다 공부시켜 주었으니 이런 나라는 다시없을 것이라고 감격해 하더군요.

맛있는 음식들을 나누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날씨가 달라지면 직승기가 뜨기 어렵다고 부랴부랴 돌아오게 되었어요. 직승기에 올랐는데 화동들이 달려와서 갑자기 가지 말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놀라기도 하고 달래느라고 힘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 날라 가는 것 같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기체는 떠올라서 다시 끝도 없는 푸른 산 위를 날라서 평양으로 돌아왔다.

비행장에는 전송 나왔던 백인준 님이 또 다시 마중을 나오셨다. 그 분은 윤동주 친구 분으로 문 목사와 6년 전 만나 이야기도 많이 한 분인데 이번에 제가 갔을 때는 문 목사 일로 눈물지으며 이야기도 잘하는 분이라는데 도무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아 송구스러웠다. 이렇게 53년 만에 어머님 성묘를 했으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뉴욕, 토론토에 계신 두 언니께 보고전화를 했더니 언니는 “비석이 그 자리에 있었니”하며 놀라워 하셨다.

북에서는 길을 낸다던지 할 때 비석이나 유골을 반드시 옮겨 놓았다가 꼭 유족에게 돌려주지 훼손되는 법이 없으니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던 생각이 나서 감사하였다. 그런데 용주 동생은 6년 전에도 지금도 거듭 찾지 못하여 섭섭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 급하게 떠나와야 하니 아쉽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고맙기도 하고 참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동명왕릉 (7월 20일)

백두산에 오른 후 오늘은 쉬는 날인데 정 선생님이 동명왕릉 가시기를 원해서 오후에 우리 일행은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을 향해 떠났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夢, 기원 전 58~19년)은 부여 임금 금와왕의 장자인 대소(帶素)의 모해를 피하여 남으로 행하여 압록강 연안 졸본촌에 이르러 새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고 한다.

주몽설화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로, 어머니는 바다 용왕인 하백의 딸 유화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몽의 아들 류리의 이야기라 한다. 왕릉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고 부속 건물에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려져 있었다. 왕릉 앞에는 좌우로, 오른쪽에는 무신 네 사람 왼쪽에는 문신 네 사람의 석상이 서 있었는데 무신들은 갑옷을 걸친 말을 대동하고 있어서 옛날 전쟁 때는 짐생에게도 갑옷을 입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장충성당 미사 (7월 23일)

장충성당에서는 벌써 몇 주일째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늦게 오늘에야 가게 되었다. 여자들은 예뿐 수건들을 쓰고 미사를 드리기 때문에 나는 흰 모자를 쓰고 참석하였다. 미사를 드리고 성찬 예식이 있은 후 내가 간단한 인사 말씀을 하였다. 모두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맨 나중에는 ‘김일성 찬가’를 부르자고 인도자가 부르기 시작하니 교인들도 모두 같이 부르는데 나는 모르기 때문에 듣기만 하였다.

좀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는데 마침 문 씨네 일가친척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왔다. 장재철 님께서는 섭섭해 하셨지만 예정된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고려호텔에 와 보니 일가 분들이 와 계셔서 반가이 인사를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순옥이는 아들하고 원산에서 왔는데 동네분들이 왜 만나러 가지 않느냐고 재촉을 하였다 한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알고 있었다고…… 원산에 같이 가기를 순옥이는 원했고 저도 문 목사가 늘 노후에 원산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순옥이는 새끼손을 걸면서 “통일되면 원산에 꼭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친척들과 헤어져서 정 선생님이 부탁을 받고 찾기 원하시던 분을 몇 십 년 만에 만나서 반가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몇 십 년 만에 그리던 친구를 찾을 수 있어서 동경에 계신 어떤 분은 좋으시겠다고 생각하며 나도 축하를 보냈다.

국적이 다른 사랑하던 사람들이 수십 년 만에 소식을 알게 되었으니 그냥 감격할 수밖에. 일생 처녀로 늙은 환갑 할머니께 행복 있으라.

조선예술영화촬영소 (7월 25일)

정문 앞에 도착하니 문예봉 씨가 차에서 내리고 있어서 반가이 악수를 하였다. 오전에 우리 일행이 온다고 하여 나왔다가 다시 또 오후에 나왔다고 하며 1917년생인데 예쁜 여름 한복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내가 “문 씨는 대개 훤하고 마음이 좋지요?” 하니까 “그렇지 않은 문 씨도 있지요” 하는 대답이다.

둘이 손을 붙잡고 그 넓은 촬영소를 돌아보았는데 도시, 농촌, 궁궐 유명한 거리들이 있어서 마음대로 세트장으로 이용이 되는데 너무 넓어서 걸어 다닐 수가 없어 자동차를 이용해야 된다고 한다. 그래도 부족한 때는 외국으로 나가서 촬영하게 된다니 규모가 어마어마한 데는 놀랠 뿐이다.

촬영소가 넓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귀한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마음 놓고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간 날도 배우들은 촬영준비를 다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아! 시인께서 오셨습니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놀랐다. 가는 곳곳마다 소감을 방명록에 적어야 했는데 길게 쓸 수 없어 짤막한 글들을 남겼더니 나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볼 것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간단한 글을 남기고 이별을 해야 했다.

“동방에 노래와 춤을 사랑하는
한나라 있어
하늘은 쪽빛처럼 푸르고
물은 수정같이 맑더라
신명나는 슬기와 용기로
삼팔선을 날려보내리
영광 있으라 해뜨는 나라여!”

방명록에 남기고 떠나왔다.

통일 논의 (7월 26일)

북 사회과학원 산하 통일문제연구소장 김 씨 내방을 받고 통일에 대해서 논의하였는데 김 소장이 “저는 이번에 듣기만 하기로 하고 찾아왔습니다” 하기에 평소 제가 생각하고 있던 문 목사의 통일방안을 설명하였다.

남북이 오랜 분단으로 말미암아 체제와 사상 등이 너무 이질화되어 있으므로 빠른 시일 안에 통일을 위하여는 우선 국호를 정하여 UN에 단일국가로 등록을 하고, 통일이 되어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통일정부를 남과 북에서 신망 있는 인물을 뽑아서 통일 논의를 전담케 하여 밥을 지어 뜸을 들이듯이 군사, 법률, 문화, 교육 등 한 가지씩 통일해 나가는 통일방안이 제일 손쉬운 통일방안이라고 설명하였더니 “그것 참 좋은 통일 방안입니다. 그 안을 반영하도록 하지요” 하며 헤어졌다.

북쪽이 통일 방안은 물론 첫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원칙과 둘째, 전민족대단결 10대원칙과 셋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인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바이니까 설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환송 만찬회 (7월 29일)

만수대예술극장 연회장에서 환송 만찬회가 열렸다. 때로는 공연도 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고 사방 벽에는 아름다운 사계절 금강산 경치가 걸려 있었다. 많은 원탁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앞좌석에는 언제나 주빈을 위한 긴 식탁이 놓여 있었다. 이름표가 놓여 있는 자리에 둘러앉아 연회는 시작되었다.

김용순 위원장의 인사말씀이 있은 후 제가 인사말씀을 하였다. 맛있는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고 평양의 명물인 순 녹두지짐은 별미였다. 끝으로는 유래가 깊은 감자국수도 나왔지요.

만찬에는 김정일 장군이 참석을 못한다고 먼저 선물을 전달받았는데 예쁜 곽에 든 산삼 세 뿌리와 음식을 잘 들고 건강하라는 뜻에서 은수저 한 벌 그리고 북의 국화 목란 꽃을 돋을새김 한 금반지를 선물 받았다.

답례 삼아 정 선생님과 같이 백두산을 불렀고 나중에 기자들의 강권에 못 이겨 제가 혼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며 많은 우리들의 동지들을 생각하였다. 김용순은 “가사가 참 좋습니다”라고 하셨다. 끝으로 수박이 큼직하게 나왔는데 또 화채가 나와서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만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했다.

금수산기념궁전 (7월 30일)

아침 일찍 금수산기념궁전에 가서 영생관에 들렀다. 평양에 조문 와서 벌써 한 달이 되는데 한 번 다시 영생관에 들러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크고 화려한 방명록에 첫 번째로 글을 쓰게 되어 다소 당황하였다.

김 주석님

80평생 그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시고
활짝 꽃피는 봄을 맞이하고 가셨지만
빛나는 업적들을 자손만대에 남기셨습니다.

통일을 못보고 가셨기에 ‘활짝 꽃 피는 봄을 맞이하고’라는 말이 이른 것 같았지만 매해 정월이면 어린이들을 품에 안고 “어린이는 왕이다”라고 재롱을 보며 귀여워하신 사진들을 보면서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나오면서 정문 앞에 심은 나무를 다시 한 번 돌보고 가겠다니까 ‘잘 자랄 것입니다’하며 주위 분들과 같이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김 주석이 즐겨 산보를 하시던 큰 나무 옆에 심어진 나무가 푸르게 잘 자라서 통일된 후에 우리 후손들이 와 볼 때는 큰 나무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그 앞에 돌비석이 옛일을 말해 주리라고 흐뭇함을 느꼈다. 자취를 남긴다는 것이 곧 역사인가 보다.

평양을 떠나며 (7월 31일)

아침 여덟 시에 평양체육관 앞 광장에서 환송모임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많은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이미 나와 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 양형섭, 대남 사업 담당 비서 김용순, 유미영, 여연구, 백인준 그밖에 여러 분들이 나와 계셨다. 장재철 님이 환송사를 해주셨고 제가 어제 밤에 급히 준비한 글을 낭송하였다.

떠나는 인사 말씀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진달래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오는 우리 7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조선이라네
하늘 높고 물 맑은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있어
노래부르며 춤추며 오순도순 살았는데
태백산줄기 끊어진 일없이 튼튼하건만
어이하여 남북으로 갈려 오도가도 못하는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아내와 남편이 50년이나 갈라져 편지 한 장 못 받아보고
전화 한 통 못하는 천만 이산가족이 있다니
20세기 문명시대에 지구상에 하나뿐인 분단국이 있다니
제 나라 제 강토를 오르내린 죄로 감옥에 가야하는 나라가 있다니
맑고 티없는 착한 어린이들 눈에서 진주 같은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안타까움
통일 통일을 노래하며 마구 매달리는 그 뜨거운 가슴가슴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차마 물리칠 수 없어 통일되면 다시 올게 약속하며 헤어지던
그 맑은 어린이 씩씩한 젊은이 주름진 노인들
단군할아버지는 5011년이라는 과학적인 고증을 얻었다는데
그때부터 이어 내려온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백두산 호랑이가 한번 어흥 소리칠 때도 되었는데
우리 모두모두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치면서 푸른 조선반도 단일기를 힘차게 흔들 때도 되었는데
같이 울고 같이 웃는 한 핏줄임을 보여주어야 할 때도 되었는데

우리 모두모두 떨쳐 일어나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누구의 손을 기다릴 때는 지난지 오래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천세만세 외치며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하나로 어울려야 한다
하나로 허물어져야 한다
내 나라 내 조국을 일으켜 세우자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은 지구 밖으로 튕겨버리자
우리한데 어울려 조종의 산 백두산을 찾아가자
우리한데 어울려 남단의 산 한라산을 찾아가자
수정 같은 맑은 물 나누어 마시며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통일의 산정으로 오르자
흐르는 눈물 서로 닦아주며 목이 터져라 통일노래 부르자
신명나게 통일춤을 추어보자 쓰러질 때까지
조국통일 만세 통일조국 만만세

1995. 7. 31
평양을 떠나 서울로 가는 박용길

 

이어서 선물들을 받았는데 첫 번째가 큰 문 목사의 초상화였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수예품이며 예술품 약재 등 많은 선물을 받아서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가랑비를 헤치고 많은 승용차들이 개성을 향하여 달렸는데 연도에는 많은 인민들이 조국통일을 부르짖으며 남녀노소가 모여들어 애타게 외치고 있었다.

얼마 동안 가다가는 잠깐씩 서서 그 지방에서 나온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선물을 받는 절차가 몇 차례씩 이어졌다. 자동차 주위로 사람이 몰려들어 차가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 어머니는 서울에 계세요”라는 목소리도 들려 왔다.

제 옆에는 강 비서가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팔을 다칠까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셨다. 꽃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여 통일조국을 부르짖는 인파들 가운데는 중고등학교 밴드들도 나와서 제복을 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11시경에 개성에 도착하였는데 개성은 초등학교 6학년 때면 수학여행을 오던 곳으로 선죽교며 낯이 익은 곳이었다. 물론 개성 인삼으로도 유명하지만 일제시대 때 일본 상점 물건을 사지 않는 애국지사들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성균관에 들어섰는데 천년이 넘는다는 아름드리 고목이 서있는 아주 경치 좋은 곳인데 이곳은 1000년 동안 성균관이 있었고 서울에 있는 성균관은 500년이 된 곳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세우려고 계획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성균관이라는 말이 학교를 가리키는 말인데 성균관대학이라고 하면 학교라는 뜻이 두 번 들어가는 거라고 김 주석이 지적하셨다고 한다.

선죽교 옆에서는 많은 여자 노인들이 모여 즐기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을 보고 아는 체도 하고 인사를 하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죽교 정몽주의 선혈은 그 전보다 더 흐려져 있는 느낌이었다. 개성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개성은 인삼의 고장이라 삼계탕이 나왔고 음식들이 맛이 있어서 점심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성을 떠나 판문점으로 향하였는데 옆에 타고 계신 강 비서는 저에게 “평양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셔서 잘 말씀해 주십시오” 한다. 그렇게 부탁을 안 하여도 가서 보고들은 것은 이야기를 해야겠고 우리가 그동안 50년이나 갈라져 있는 동안에 이질화된 것을 하나하나 하나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이를 위해 힘써 일해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분계선을 넘어

판문점에 도착하니 많은 분들이 손에 손에 꽃을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잠시 쉬면서 잣죽을 나누는데 옆의 방에는 아침부터 평양에서 받은 선물들이 벌써 진열되어 있었다. 드디어 판문점 북측 건물 현관에 전송 나오신 분들이 한 줄로 늘어서 계셨다.

한 분 한 분 악수를 나누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제 한쪽에는 유미영 님이 한쪽에는 여연구 님이 부축을 해 주셨고 제 작은 까만 가방을 장재철 님이 들어주셨다. 왼편으로 좀 걸어서 내려오려고 했는데 기어이 군인들이 말리며 못 가게 해서 바로 발 아래 계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분계선으로 다가갔다. 많은 꽃다발 중에서 하나를 들고 분계선 위에 올라서 북쪽을 향해 통일 만세를 부르고 많은 환호성을 들으며 남쪽을 향해 통일 만세를 불렀다.

군인들이 부축을 하며 판문점 남쪽 경비지역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7월 25일자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는 서류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

건강진단

우리가 평양에 도착한 6월 28일부터 옆방에는 의사와 간호원이 상주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혈압을 재고 진맥을 하고 체중도 재고 하였는데 한번은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뇌 검사로부터 눈 검사, 심장 검사, 피 검사, 대소변 검사까지 받게 되었다.

진단 결과 심장에 24시간 기계를 달고 교회에도 가게 되었는데, 가벼운 허혈성 심장 질환 증세가 있다고 해서 웃어 버렸다. 문 목사가 안양 교도소에 있을 때 같은 병명을 의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부이기로 병명까지 같을 게 뭐냐고 웃어버렸다.

그 후 매끼 식후 30분이면 노란 환약 세 개를 가지고 왔는데 한약 냄새가 나고 빛깔도 한약 같았는데 그 약을 먹고 나면 가슴이 편안하게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매일 세 번씩 약을 먹다가 떠나오게 되니 의사가 좋은 약이라고 이번에는 하얀 알약을 가져왔는데 경찰병원에서나 다른 병원에서도 자기 병원 약이 아닌 것은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70평생 병원에를 안 다녔기 때문에 건강하게 문 목사 옥바라지를 하였는데 평양에 가서 이런저런 환자가 되고 말았다. 심장 질환, 가벼운 당뇨, 저혈압, 피에 기름기가 있다는 등 이러한 병들은 낫는 병이 아니라서 식이요법으로 음식을 조종하며 지내야 한단다. 계란 노란 자위도 안 되고 기름기 있는 음식도 안 되고 한다니까 조심하고 소식을 하고 있다.

 

[출처: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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