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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연재24]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1. 수난자들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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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8-21 08:5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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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4]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1. 수난자들의 후손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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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에 창작된 전인광 북녘 작가의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이 지금 북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소설은 타이의 어느 한 산간벽촌에서 일어난 두 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살해사건을 파해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첫 서두에 이렇게 씌여져 있다.

《나는 죽더라도 증명할것입니다. 력사가 증명하고 내가 증명합니다. 이 력사를 지워버려서는 안됩니다.》 - 한 조선녀성의 증언중에서 -

 

<조선의 오늘>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4. 15문학창작단의 작가들을 비롯하여 나라의 관록있는 작가들이 《하나의 조일관계력사론문》《바늘끝도 안들어가게 구성이 째인 작품》《이렇게도 쓸수 있겠구나 하는 창작적묘리를 깨우쳐준 소설》이라고 평가하는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은 작가의 피타는 사색과 탐구불같은 열정과 높은 창작적기량에 의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라고 밝혔다.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네덩이의 얼음>을 연재한다.





(제 24 회)

제 5 장

1. 수난자들의 후손

 

아끼꼬가 찾아오기 전까지 이마무라는 대학원 기숙사 3층 6호, 그 방을 별로 살뜰하게 생각한적이 없었다.

기숙사 어느 층, 어느 방에 들어가도 볼수 있는 꼭같은 규격의 다다미와 카텐, 침대와 책상 등 기물들이 자리잡은 그의 기숙사방은 호수와 층수가 다를뿐 특별히 정을 붙일만 한것이 없는 방이였던것이다.

하지만 아끼꼬가 찾아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마무라는 그 방에 류다른 정이 붙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이마무라는 1호동 3층호실에서 다른 한명의 대학생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대학원전용의 2호동으로 방을 옮겼다. 대학원생부터는 혼자 쓰는 방을 리용했기때문이였다.

가세가 든든치 못한 집안의 도움으로 걸음마다가 돈인 도꾜대학의 입학금, 등록금을 힘들게 충당하며 공부에 전념하는 이마무라에게 기숙사는 말그대로 저녁늦게 들어가 잠이나 자고 급하면 전열기를 켜고 라면으로 한끼 굼때고 차나 끓여마시고 나가군 하는 자취방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방이여서 늘 퀴퀴한 쉰내가 풍기고 찐득한 담배내가 배여돌았다.

이마무라를 찾아오면 아끼꼬는 그 방의 쉰내와 담배내부터 쫓아내는데 달라붙었다. 산보하다 들어오라고 이마무라를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열고 환기부터 했다.

방바닥 구석구석을 닦아내고 책상우를 정리한 다음 기물들을 제자리에 놓고 카텐을 치고 향수를 뿌려 정결한 자기식의 안방을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밖에서 어정거리다 방에 들어서면 이마무라는 삽시간에 싱그러워지고 활력과 생기에 넘치는 방안공기에 놀라서 멈칫 서군 했다. 그 청결한 느낌이 새삼스러워 돌아보면 아끼꼬는 늘 방싯 웃군 했는데 그 얼굴이 그대로 한떨기 꽃이였다.

이마무라는 애인을 찾아오는 처녀이니 한두번 그러다 말겠지 했다.

하지만 언제고 꼭같았다.

오늘도 저녁시간에 오겠다는 약속이 있어 이마무라는 꽁초가 수북한 재털이를 털고 침대밑에 뒹구는 라면봉지, 빈 병들을 비닐구럭에 넣어 오물장에 내다버렸다. 대충 물걸레질까지 했다.

그러나 그게 아끼꼬의 눈에 찰리 만무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아끼꼬는 반기는 이마무라에게 물었다.

《아직 저녁전이지요?》

이마무라가 끄덕이자 상긋 웃으며 들고 온 음식구럭지를 들어보인다. 그리고 어딘가 멀끔해진 방안을 둘러보더니 침대에로 간다.

할깃 이마무라를 흘겨보더니 두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무라가 그밑에 깊이 쑤셔넣은 속옷과 내의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다.

그것들을 비닐구럭에 담아놓고 곁묻어나온 휴지와 담배꽁초들은 말끔히 오물통에 넣어 척 내밀었다.

《자, 어서 버리고 와요. 온 세계가 금연인데 이마무라씬 담배 너무 피우거던요.》

사랑스런 애인의 투정은 생억지도 귀여운 법인데 이 정결한 처녀의 요구는 하나하나가 꼭 누이가 남동생을 건사하는 그런 자세다.

《하, 이거…》

마지못해 하듯 밖으로 나오니 나무마다 하얀 서리꽃이 피였다.

밤새 지겨운 과제에 지쳤던 심신이 상쾌해졌다.

아끼꼬의 그 웃는 얼굴이 노상 눈앞을 감돌아 이마무라는 저도 몰래 싱긋 웃었다.

오물을 버리고 한달음에 층계를 뛰여올라온 이마무라는 문을 열다가 그만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방가운데 놓인 상에 아끼꼬가 생일과자를 놓고 작은 양초들을 꽂고있었다.

《오늘 몰랐어요?》

아끼꼬는 생긋 웃는다.

그제야 이마무라는 빙긋 웃었다.

《제 생일 모르기야… 하지만 아끼꼬가 이렇게 준비해올줄은 몰랐지.》

《자, 어서 앉아요.》

이마무라의 나이대로 스물여덟대의 양초를 다 꽂고 아끼꼬는 라이터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일어나 전등을 끄고 카텐을 쳤다. 은은한 불빛에 두 청춘의 얼굴이 감미롭게 변했다. 《아끼꼬…》

이마무라는 감동에 젖어 조용히 불렀다.

쳐다보는 아끼꼬의 눈빛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마무라가 아끼꼬를 알게 된것은 대학 3학년때이던 이른봄 어느날, 할아버지가 장기입원해있던 와까야마현 기이산장의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돌아올 때였다.

세이스께할아버지의 병이 한결 차도가 있어 자기를 알아보며 이름까지 부르던 모습이 되새겨져 이마무라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뻐스정거장까지 걸어내려가고있었다.

2월말이여서 산기슭의 구석진 곳에는 아직 눈이 쌓여있었다.

소나무숲이 우거진 산굽이를 도는데 어떤 처녀가 얼음장이 떠내려가는 개울을 건느지 못하고 망설이고있는것이 보였다.

징검다리가 있었으나 눈석이에 불어난 개울물가운데가 너무 넓어 아무래도 신을 벗고 건너야 할판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남자를 보자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먼저 건너가라고 한발 물러섰다.

제잡담 신발을 벗고 시내물에 들어서던 이마무라는 숨이 막힐듯 쩌릿한 찬 기운이 골수까지 올리뻗쳐 《에, 치거…》 하고 그만 진저리치며 물러 섰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처녀가 《어쩌나!》 하며 신을 벗고 물에 들어설지, 징검다리를 건늘지 허둥거린다.

차거운 얼음물속을 자기는 그냥 건는다 해도 처녀는 힘들것 같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마무라는 성큼 다시 얼음물속에 들어 섰다.

대여섯개 징검돌중에 간격이 너무 넓은 가운데구간만 대책하면 될것 같았다.

낑 낑 갑자르며 물속에 자빠져있는 돌을 들어 가운데구간에 눕혀놓았다. 그리고 처녀에게 그 가운데구간까지 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소리쳤다.

《자! 빨리 이 손을 잡소. 난 발가락이 막 빠지는것 같소.》

《어쩔가요? 미안해서…》 하면서도 이마무라가 급하게 다그치니 처녀는 별수없이 세개의 징검돌을 건너와 그의 손을 잡고 금시 놓은 돌을 짚었다. 그런데 자리가 잘 안 잡힌 돌이다보니 기우뚱했다.

《아!》

처녀는 어쩔새없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의 손을 잡고있던 이마무라는 자기쪽으로 넘어지는 처녀를 어망결에 덥석 안아버릴수밖에 없었다. 뭉클한 처녀의 어깨와 가방까지 겹쳐안은 이마무라는 《에 치거, 에 치거.》 하는 소리를 연방 지르며 첨벙, 첨벙 물을 차며 걸어나갔다.

물가에 나와 내려놓으니 처녀는 어쩔새없이 남자에게 안기여버린 금시의 일이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 몸둘바를 몰라했다.

그런 그를 보며 이마무라는 허허 웃고말았다.

처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여 다 젖은 이마무라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이참, 이걸 어쩌나. 정말 안됐어요. 선생님, 저때문에… 어쩌지요? 옷이 다 젖어서…》 하며 당황해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런 때 멀리에서 달려오는 뻐스가 보였다.

《아, 뻐스가 오누만. 자, 빨리 가서 탑시다.》

이마무라는 덜덜 떨면서도 처녀의 가방을 든채로 재촉했다.

그는 젖은 옷그대로 달릴수밖에 없었다.

뻐스에 올라서야 이마무라는 금시 떨리던 몸이 한결 나아졌다.

처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보는것을 멋적게 가방으로 가리고 어색해하는 이마무라의 젖은 바지를 보며 난처해 눈길을 허둥거렸다.

그러다 눈길이 마주치면 빨개진 얼굴을 건사할데가 없어 숙이군 했다.

문득 그 수집어하는 얼굴을 보며 이마무라는 가슴에 어떤 감정의 설레임을 느꼈다.

갸름한 얼굴에 촉촉히 일어선 속눈섭, 웃을 때면 하얀 이가 반짝이는 작은 입, 다감한 감수성과 끓어넘치는 생의 활력이 온몸 어디라 없이 충만되여 흐르는 처녀의 모습은 이마무라의 눈길을 떼지 못하게 했다.

정거장옆의 찜방에서 옷을 말려 입고 역으로 나와 렬차까지 같이 타다보니 자연히 통성하게 되였는데 알고보니 아끼꼬는 도꾜대학 사학과 학생이였다. 이마무라가 정경과다보니 학부가 달라 면식이 없었을뿐이지 결국 같은 대학이였다.

아끼꼬는 론문문제로 이미 퇴역하여 산속의 양로원에 들어가있는 한 로학자를 만나러 왔다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여 그들은 자주 만나게 되였다.

마치 누가 만들어준 인연같아 이마무라는 자연히 아끼꼬에게 관심이 갔다.

무랍없이 아끼꼬의 기숙사에 찾아가고 도서관에도 함께 갔다.

그렇게 지내면서 보니 아끼꼬는 너무 정결했다.

사실 이마무라는 지나치게 고상하기보다 마음 푹 놓고 퍼더앉아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녀자친구가 더 좋았다. 어떤 때는 아끼꼬가 데려오는 녀자동무들이 더 대하기 편안했다.

그래선지 야유회에 애인들을 데리고 놀러 가면 이마무라는 아끼꼬가 질투나할 정도로 활달하고 개방적인 아끼꼬의 녀자친구들과 더 웃고 떠들며 밀려다녔다.

아끼꼬는 그걸 보며 웃고말뿐이였다.

예상외로 대학모임이나 가부끼(일본의 민속놀이)때면 아끼꼬 역시 요염을 떨고 웃기는 역을 곧잘했다.

허나 생활로 돌아오면 늘 자기옆을 깨끗이 정돈하며 조용히 사는 처녀였다. 이마무라는 그게 좀 낯설었다.

이마무라는 어릴적부터 랭소적이고 론리적인 성격이였는데 어쩐지 비슷한 성격인 아끼꼬를 대하면서부터는 제가 엉너리 부리고 웃기고 퍼더앉아 떠들고 소리치며 이질적으로 변해갔다.

그만 만나면 제가 먼저 언죽번죽으로 변해지고 점점 다혈질에 우스개소리 잘하는 락관적인 호남아풍으로 변신하군 했다.

날이 흐르며 둘은 하루라도 못 만나면 속이 탈 정도의 사이가 되였다. 그들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어느날 저녁 기숙사에서 헤여지게 되였을 때 이마무라는 가슴속에 불붙는 격정을 견디기 힘들었다.

사무치는 어떤 충동에 이끌리여 아끼꼬를 꽉 포옹하는 순간 열망에 타는 이마무라의 두눈에서 그가 무엇을 바라는가를 읽게 된 처녀는 《이마무라씨! 잠간만요. …》 하면서 그를 가까스로 떠밀고는 두손으로 흩어진 머리를 다듬으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의자에 가앉았다.

아직 흥분의 물결을 주체 못하는 이마무라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려 아끼꼬는 조용히 말했다.

《이마무라씨! 우리 결혼때까지는… 그때까지 기다려줘요. 제가 조선사람의 후손이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일본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너무 관대하고 그것이 생활에 풍속화된 그게 싫어요. 그러지요?》 하고 살짝 웃으며 물었다.

이마무라는 멋적고 무안해 그만 함께 웃고말았다.

아끼꼬가 가겠다고 일어서자 여느때는 늘 따라나가 바래주던 이마무라는 얼굴이 붉어져 잘 가라 손짓하고는 돌아서려 했다.

그런 그를 아끼꼬는 애인이 가는데 바래주지도 않겠는가고 트집을 걸어 우야 끌고 나갔다.

별빛이 흐느러지게 총총한 조용한 공원길에 들어서자 아끼꼬는 이마무라의 팔을 끼며 말했다.

《이런 문제를 내놓고 말하기 쑥스러워 지금껏 가만있었지만 두 민족의 문화적차이란게 있잖나요.》

이마무라는 머쓱했지만 지지 않고 웃으며 분위기를 넘겼다.

《아끼꼬, 그런 문제들과 우리 이야긴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잖아. 감정을 론리로 분석하는 애인만큼 대상하기 힘든 청춘이 어데 있겠어. 법륭사 비구니가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만났군.》 하며 눈을 흘겼다.

《아이참.》

아끼꼬는 어이없어 웃으며 이마무라를 흘겨보았다.

《아니,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이 문제 솔직히 얘기 좀 해요. 그게 앞으로 우리가 서로를 옳게 대하는데도 필요하다고 봐요.

누군가 사랑은 두 인격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면서도 서로가 독특한 자기 빛갈을 잃지 않고 가꿔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이마무라씬 어떻게 생각해요? 사랑하는 과정이 남녀 어느 한쪽이 제 빛과 자기 모습을 잃어가는 과정이고 자기를 닮게 하거나 자기 빛갈로 동화시키는 과정이라면 그 사랑이 얼마 갈가요?》

《계속하오.》

《진정으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꽃을 꺾지 않고 그 꽃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싱싱하게 피여있도록 물을 주며 가꿔준다지 않아요? 우리 이런 마음으로 서로 바라볼수 있는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고 고무하며 한생을 가요. 예? 저 소나무와 마로니에처럼…》

아끼꼬는 눈앞에 가지런히 서있는 두 나무를 가리켰다.

《가지와 잎으로 얽히고 의지하고 섰지만 서로의 독특한 향기와 빛갈이 있어 더 아름다워보이는 한쌍!》 하며 이마무라를 쳐다본다.

이마무라는 새삼스레 아끼꼬를 돌아보았다.

《아이참, 왜 그렇게 봐요?》

이마무라는 아끼꼬의 말에서 그 녀자자신의 순결하고 청초한 모든것을 다 보는것 같았다.

그에 대비되는 자기가 어딘가 부끄러워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실 전 자라면서 량쪽 조부모님들에게서 이런 가정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이것은 우리 조선사람들이 수천년을 이어온 풍속이거던요.

그런 마음으로 혼례전까지 서로를 소중히 여겨주고 존중해주는것이 무엇이 나빠요?》

그날 이마무라는 아끼꼬가 말하는 조선사람들의 도덕과 풍속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완전히 압도당하는 기분이였다.

조선인들의 그 풍속에는 어딘가 지나친 종교적인 신성의 감정이 있다고까지 생각되였다.

어쨌든 그 이후부터 이마무라가 아끼꼬에게 마구 근접하기 어렵게 저어된것만은 사실이였다.

(에이! 애인이라는게 손도 막 잡기 힘들잖아?

지금 현대 개방시대에 그런 봉건의 부덕을 지키는 애인이 어디 있어? 혹시 내가 싫어 이러는건 아니야?)

이마무라는 이런 극단의 생각까지 들자 가슴에 불이 일어 견딜수 없었다.

어느날 더 참을수 없어 그 생각을 털어놓자 아끼꼬는 어떻게 그런 한심한 생각을 다하는가며 이마무라의 어깨를 사정없이 두들겨댔다.

그 사랑의 매를 맞으며 아끼꼬의 순결을 지켜주는것이 정말 자기들의 사랑을 더 깊고 뜨겁게 승화시켜가는 자기 둘만의 신성한 하나의 의식이라는 생각이 파고들어 이마무라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느날 방송에서 일본군성노예문제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규탄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끼꼬는 말했다.

《남녀의 성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인간적완성에의 축복인데 그걸 일본사람들은 가장 추악한 동물적인것으로 타락시켰거던요.》

《…》

이마무라는 그에 응대할념을 못했다.

일본사람들이 쾌락과 향락의 도구로 인식하는 성문제를 조선사람들은 얼마나 거룩한 인간의 범절로 만들어놓았는가.

그리고 실상 그 범절은 그야말로 얼마나 인간다운것인가.

사실 이마무라도 성충동을 인간의 무의식의 본질로 보는 프로이드나 윙의 리론은 인간을 본능을 못 벗어나는 동물의 한 분류로 본것일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아끼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자기의 자존과 인격과 범절이 정연한 녀자, 이런 녀자는 정말 한번 믿고 사랑을 맺으면 일생 변함이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 예로부터 동방례의지국이라더니…

그 이후부터 이마무라는 그 어떤 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우들이 잡아끄는 녀자대학생들과의 사교모임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와 사귀고싶어 웃어오고 감정을 표현해오는 다른 녀대학생들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버려 무의식중에 미안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어색해지군 했다.

이마무라에게는 어려서부터 거의 습벽으로 굳어진, 이따금 혼자서 멍히 앉아 인생을 초탈한듯 한 허무감에 잠겨있는 때가 있었다.

한생 정신이상자가 되여 느닷없이 공포에 질려 방구석에서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너털웃음을 웃으며 개짖는 시늉을 하고 벽에다 오줌똥을 문지르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온갖 험한 뒤시중을 다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아버지와 어머니, 그런 집이 싫어 이마무라는 늘 집을 뛰쳐나와 친구네 집에 가있거나 거리를 헤매군 했다.

도꾜대학에 입학했을 때 온 마을이 떨쳐나 그를 칭찬했지만 그날에도 이마무라는 내심에 휩쓸어드는 끝없는 외로움과 허무감, 고독감을 어쩔수 없어 강변에 나가 한나절을 앉아있었다.

애수에 병든 그의 마음은 그 어떤 충격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생의 무의미, 이렇게 살아선 도대체 무엇을 어쩐다는것인가?

즐거운것이 별로 없었던 성장과정의 파편들우에 비쳐오는 불우한 자기 운명을 되새기며 눈물을 흘렸다.

대학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고독과 허무감이 찾아올 때면 그는 자살하고싶은 극단의 생각까지 들어 역으로 나가 철길주변을 어슬렁거린 때도 있었다.

그는 점차 아주 이률배반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친구들에게 감동할 정도로 친절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비위가 거슬리면 순간에 사나워지고 그런가 하면 지겨울 정도로 생트집을 걸고 심술을 부려 그들을 진저리나게 만들었다.

그래야 제 속이 풀렸다.

강당에서 과제를 변론할 때도 학생들이 입을 벌리고 바라볼 정도로 열정적이였지만 기숙사에 돌아올 때 그의 마음은 벌써 비에 젖은 음울한 숲처럼 끝없는 우수와 외로움에 잠겨있었다.

그런 때 아끼꼬와 알게 되였다.

허무적인 생활의 염증에 지친 그에게 아끼꼬는 생명의 숨결이 되고 지향이 되였다.

힘들 때마다 자연히 그의 가슴에 불꽃처럼 떠오르는것은 아끼꼬였다.

아끼꼬를 생각하면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전열기옆에 앉은듯 차겁던 심경이 훈훈해오는것이였다.

오늘도 공부를 끝내고 기숙사에 누워있던 이마무라는 방안의 적막이 진저리나게 싫어 손전화로 그를 찾았다.

《아, 이마무라씨! 무슨 일이예요. 나 지금 무척 바쁘거던요.

닷새후에 도미꼬와 강당에서 맞붙게 돼있는거 알지 않아요. 빨리 말해요!》

이마무라는 그런 그에게 시간을 내라고 할수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

이마무라가 침묵을 지키자 아끼꼬가 독촉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빨리 말해요. 나 시간없다는데…》

《아니 그저, 아끼꼬를 보고싶어서… 됐어.》 하고 시들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헌데 인차 전화가 들어왔다.

《아이, 이마무라씨, 지금 어디예요?》

그 목소리는 벌써 심중한 어조였다.

《어, 나 지금 기숙사에 있어.》

《그래요?》 하고 잠시 뜸들이는가싶더니 《됐어요. 내 곧 가겠어요. 2시간후. 알겠어요? 기다려요. 예?》 하고 오히려 제가 다짐해나섰다.

민감한 처녀는 어느새 전화를 거는 이마무라의 심드렁한 목소리에서 그의 심경을 들여다본것 같았다.

두시간후에 아끼꼬는 틀림없이 기숙사에 나타났다.

짙은 청색샤쯔에 크림색면바지를 입고 웃으며 들어서는 그는 물기머금은 한알의 과일같았다.

방안의 공기마저 달라지는듯싶었다.

《아직 저녁전이지요? 우리 나가요.》 하고 생긋 웃으며 이마무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요쯔야뒤골목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락가게였다.

이마무라는 아끼꼬와 떨어져 앉는게 싫어 마주앉겠다는 그를 자기옆에 나란히 앉혔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주문도 하기 전에 접대원이 가게의 고정메뉴인 도시락과 국을 네모난 그릇에 담아가지고 왔다.

그들은 별치않은 음식이지만 별식을 먹듯 입을 다시며 달라붙었다.

《맛있군.》

《녜, 게다가 상당히 눅어요.》

아끼꼬는 정말 맛나게 열심히 먹었다.

제 먼저 끝낸 아끼꼬는 긴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가져갔다.

《호, 천천히 해요. 이마무라씨, 난 점심도 건넸더니 이제야 살것 같애요.》

그리고 곧게 편 두손의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피곤해?》

《음…》

아끼꼬는 머리를 끄덕였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아끼꼬고보니 공부에 짓몰려 피곤해하는 그 모습이 애틋하게 가슴을 저리게 한다.

《여기 기대.》

식탁을 물리며 이마무라는 아끼꼬의 어깨를 자기쪽으로 당겨안았다.

아끼꼬는 스스럼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여오며 소릇이 눈을 감았다.

《아끼꼬!》

《응.》

《내가 말이야. 아끼꼬를 너무 좋아하는것 같애. 너를 좋아하는 내 생각의 절반을 뚝 떼서 너에게 주고싶어.》

아끼꼬가 긴 속눈섭을 치올리며 눈을 떴다.

《왜요?》

《그러면 나를 생각하는 아끼꼬의 생각이 그만큼 커질테니까. 그럼 이렇게 찾기 전에 제 먼저 달려올게 안야.》

《호호호.》

아끼꼬는 오래간만에 소리내 웃으며 그 정찬 눈길로 이마무라를 쳐다보았다.

《정말?》

 이마무라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 이마무라씨!》

 아끼꼬는 가슴속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두손을 벌려 이마무라의 목을 꼭 껴안았다. 가슴에 실려오는 처녀의 체취에는 무한한 생의 기쁨과 감동이 환희로운 대지처럼 충만되여있었다.

이마무라는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가슴이 뻐근하도록 올리치미는 격정에 숨마저 가빠졌다. 마음속에 배회하던 찬바람과 우울이 한꺼번에 잦아드는듯싶었다.

아끼꼬의 부드러운 잔등을 떨리는 손으로 어루쓸며 이마무라는 물었다.

《아끼꼬, 아끼꼰 진저리날 정도의 고독감, 외로움에 시달려본적이 없어?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진적이 한번도 없는가 말이야?》

마음속의 갈등이 내비친 혼란된 시선으로 아끼꼬를 쳐다보던 이마무라는 그의 몸이 서서히 굳어지는것을 느꼈다.

《…》

아끼꼬는 눈을 뜨며 이마무라를 쳐다보았다. 사색적인 눈을 쪼프린게 그 깊은 내면을 종잡을수 없게 했다.

잠시 이마무라가 한 말의 의미를 새기듯 말이 없던 아끼꼬는 졸음이 싹 가신듯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머리빈침을 뽑아 입에 물고 몇번이나 흩어진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고정시켰다.

반듯하게 뒤로 묶은 아끼꼬의 머리결에서 청청한 숲의 싱그러운 냄새같은것이 풍겨왔다.

《허탈감과 우울증, 인생에 대한 번뇌와 고민, 이건 어쩌면 이 자본주의 일본의 대부분 우리 나이 젊은이들이 겪게 되는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겠어요? 문제는 그런 감정을 어떻게 인생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치유하고 극복해가는가, 여기에 있는거지요.》

《그럴가?》

《실상 나도 그런 실의에 빠진적이 많았거던요.》

《정말 그런적이 있었어?》

《예.》

《언제?》

《대학에 입학한 첫해에…》

아끼꼬는 그때를 돌이키는듯 눈을 감으며 조용히 계속했다.

《늘 모자라는 돈때문에 바둥바둥 뛰며 초저녁부터 식당의 식기며 그릇을 닦는 고역을 치르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비칠거리며 돌아오고… 미처 잠을 깨지도 못한채 대학에 나가 시간을 쪼개여 공부를 해야 하고 수업을 마치기 바쁘게 입원한 어머니 병구완으로 달려가고…

1년을 그렇게 버티다 끝내 탈진해 거리에 쓰러지고말았어요.

이틀만에 깨여나니 모든게 귀찮고 싫더군요. 이런게 인생인가 하는 체념에 더는 이렇겐 못살겠다. 끝내 대학을 포기하고 집으로 갔어요. 그리곤 허탈에 빠져 방에 붙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의 이 절망을 할아버지가 가늠하신것 같아요.

어느날인가 저를 앉히고 아무 연고없이 자신이 살아온 과거이야기를 해주시겠지요.

조선에서 징용으로 끌려와 일본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단나라는 차굴공사장에서 겪었던 몸서리치는 지옥도를 이야기하셨어요.

매일같이 채찍에 맞고 발길에 밟히며 굴을 파고 천근 무거운 돌을 등짐으로 나르고 썩은 보리밥으로 끼니를 에우며 8년을 굴속에서 살았대요. 헌병놈들은 조선사람들이 조금만 앉아있어도 일을 태공한다고 참대봉으로 때리고 도망친다고 모여놓고 칼로 목을 치고 체벌을 가한다며 한쪽귀를 자르군 했대요.

잘린 귀를 붙잡고 강둥강둥 뛰며 울던 조선의 순천에서 끌려왔다던 한 어린 소년 이야기를 할 때 할아버지는 우셨어요.

<말그대로 숨막히는 절망의 나락이였다. 하지만 그런 지옥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상처에 생긴 피고름을 빨아 뱉으며 허기진 배를 졸라매고 또 졸라매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집에서 눈이 까매 기다리는 처자식이 항상 눈앞에 있었다.

짐승들이 인간을 이기지는 못한다, 이 왜놈들이 꼭 망한다는 확신, 새로 끌려온 인부들이 들려주는 김일장군님의 항일빨찌산이 백두산밑의 보천보를 쳤다는 꿈같은 소식, 그 소식들이 죽어가던 피줄을 뛰게 하고 절망의 눈에 희망의 불을 달아주었지.

경미야, (제 조선이름이 경미였어요.) 어떤 고난에 들어도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그것은 벌써 스스로가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것이나 다름없다. 인생은 어떻든 한번 살아볼만 한 가치가 있는것이란다.

인생살이에 무슨 일인들 없겠니? 하지만 악으로 버티고 의지로 이겨내며 고비고비를 톺아 산마루에 올라서서 느끼는, 나를 이겨냈다는 그 마음의 승리감, 그 보람을 어디에 비기겠니? 그런 인내와 보람으로 이어가는것이 인생이다. >

할아버지의 그 말씀에서 전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처럼 죽음과 고통의 지옥속에서도 희망의 빛 한점을 안고 끝끝내 인생의 산마루에 올라선 그런분들에 비하면 내 이 고민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것인가?

그리고 생각했어요. 쉽게 주어지지 않는 한번의 인생, 부모님들이 힘들게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억척같이 살리라고…》

아끼꼬는 이마무라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내가 너무 철학자연하지 않아요? 쬐꼬만 대학원생주제에…》

《…》

이마무라는 처녀의 이야기에서 받은 감동에 젖어 인차 대답을 못했다.

《우리 나가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끼꼬는 돈을 치르고 인차 뒤따라나왔다.

아끼꼬는 이마무라의 손목을 잡고 걸으며 할아버지와 자기 가정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려주었다.

일제패망후 할아버지는 고향인 조선의 강릉, 그 바다가마을로 돌아가지 못했다.

굴속에서의 오랜 고역속에 페병이 든 할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르다가 불덩어리로 변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철길옆에 쓰러졌다.

그를 구원한것은 선로순찰을 나왔던 한 일본철길원이였다.

마음고운 그 철길원은 할아버지를 업고 다 찌그러진 함석으로 대강 지붕을 씌운 빈민촌의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철길원부부의 정성어린 구완으로 두달만에 할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집에 병원간호원으로 일하다 미군의 폭격으로 한다리를 잃은 딸이 있었다. 그 집에 머무르며 미모에 마음이 상냥한 처녀의 심성을 알게 되고 더구나 그의 간호로 소생하게 된 할아버지는 그 딸과 살았으면 하는 철길원부부의 애절한 마음을 차마 뿌리칠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돈이 없어 의족도 못한 처녀를 부축하고 결혼식을 했다. 1년후에 그들사이에 태여난것이 아끼꼬의 아버지였다.

아들이 성장하여 철도대학을 나오고 《히까리》의 기관사로 되여 장가갈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수소문하여 조선사람인 어느 조그마한 제과회사 사장의 딸과 결혼시켰다.

할아버지의 고국에 대한 못 견디는 열망의 표현이였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아끼꼬가 7살 나던 해에 그만 렬차충돌사고로 사망하고말았던것이다.

그토록 굳세인 할아버지도 그때는 아끼꼬를 붙안고 며칠간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남편이 사망한 후 회사 사장의 딸로 크게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는 며느리가 그처럼 가정의 무거운 짐을 다 지고 일떠설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

어린 아끼꼬를 키우고 시아버지를 봉양하면서 어머니는 열심히 가발을 만들어 팔았다.

하루에도 숱한 주문을 수소문해 받아가지고 와서는 종일 물감과 머리칼속에 묻혀있다가는 저녁이면 온통 물감범벅이 되고 물퉁게진 손가락을 한참씩 더운물에 담그어 물감독을 뽑군 했다.

아끼꼬가 소학교에 입학할 때는 까만색과 금발만이던 머리물감이 세월의 흐름속에 차츰 보라빛으로, 회색, 갈색, 노란빛으로 변해갔다.

백열등만 넘치던 거리가 노랗고 파란 네온등의 광란적이고 자극적인 색갈로 변해가듯 일본처녀들의 머리칼도 생리적인 멜라닌색소를 떠나 유럽과 남아메리카, 이국녀자들의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색갈로 변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번 돈으로 아끼꼬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갔다.

세월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인생을 망망한 바다와 같이 내려다보는 할아버지는 대학생인 아끼꼬에게도 더없는 생활의 교사였다. …

아끼꼬는 이마무라에게 할아버지가 자기들의 관계를 묻던 이야기는 하지않았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며 속으로 방싯 웃었다.

아끼꼬가 이마무라를 알게 되고 사귀게 되면서 몇번 집에 함께 가게 된 일이 있었다. 그 과정에 어쩔수없이 할아버지도 그들사이를 눈치채게 되였다.

할아버지는 어느날 저녁에 웃으며 물었다.

《젊은이가 잘 생겼더구나. 마음갖춤새두 신실해보이구. 헌데 경미야! 꼭 일본청년이여야 하겠느냐?》

아끼꼬가 얼굴이 빨개 머리를 숙이자 할아버지는 더 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끼꼬는 할아버지가 조선처녀인 자기가 일본청년을 사랑하는게 마음에 안 들어하는줄 알았다.

조바심치며 며칠간 눈치만 살피던 아끼꼬는 어느날 할아버지에게 이마무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다.

이마무라가 어린시절부터 겪은 그 집안의 파란많은 경난이며 그 과정에 성격마저 이그러져 우울과 허무감속에 인생의 앞날을 암담히 바라보고있는 한 일본청년.

《할아버지! 이마무라씨는 이제 인생의 희망을 저에게 걸고있는거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그곁에서 떠난다면 아마 그는 인생을 절망하고말거예요.》

《그렇게까지 널 사랑하냐?》

《…》

《음- 역시 집안은 숨기지 못하겠구나.》

할아버지는 긴 한숨끝에 오래동안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아마 해방직후 자기가 다리 하나 없던 불행한 일본처녀를 차마 그냥 두고 떠나지 못했던 그때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아끼꼬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도 모르고 이마무라는 여전히 제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걷고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공원속의 의자에 가앉았다.

《이마무라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인기소설이라고 극찬하는 하루끼의 장편을 읽어봤어요?》

《읽었어.》

《감상이 어땠어요?》

《눈물이 나더군. 그 감상적인 주인공 와다나베가 꼭 나 같았어.》

《제 보기에도 어쩐지 비슷해요.》

《그래? 참, 이런…》 하며 이마무라는 게면쩍게 웃었다.

《사실 언제부터 묻고싶었는데 아끼꼬는 어쨌어? 그 책 독후감이…》

《내가 한때 겪었던 염세의 독소를 그 책에서 다시 절감했어요. 그토록 사랑했던 나오미와 기꾸찌, 애인과 하루낮동안 웃고 떠들다 돌아가서는 아무 예고없이 뜻모르게 자살하는 기꾸찌, 그에 뒤이은 와다나베와 나오미의 사랑,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정착 못하고 정신병원으로 간 나오미의 련이은 자살, 그를 잃은 허무감을 못이겨 한달을 배낭 하나 메고 전국을 방랑하는 와다나베…

그 와다나베는 작가자신이라고 보는데 결국 이런 류 소설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그처럼 열광한다는건 바로 그 책을 통해 인생에 비낀 염세와 타락한 삶의 허무감, 어디에도 출로가 없는 고립무원함을 그 책의 인간들과 함께 호흡할수 있기때문이 아니겠어요.》

《옳게 봤어. 내 심정이 그랬으니까. 그런 책이 대량 팔리고있다는 거기에 지금 일본젊은이들의 절망의식이 비껴있는거지. 아끼꼬의 할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내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구만.》

《그렇다니 다행이예요.》

이마무라의 말에 아끼꼬는 반색했다.

《인생론의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에 범람하는 온갖 철학과 사회학에 저저이 렬거되는 주제이지만 할아버지가 한생의 수난많은 체험의 단순한 귀결로 결론지은 그 말, <인생은 어떻든 한번 살아볼만 한 가치가 있는것이다. >라는 말보다 더 심도깊고 의미깊은 말은 없다는걸 나도 깨달았어요.

가장 평범한 보통사람이지만 그보다 더 소박하고 강인한 사람이 없을 우리 할아버지, 그래선지 할아버지의 주름깊은 얼굴을 한참 보고있느라면 인간의 온갖 고초를 다 품어안은 넓은 대지와 같은 웅심이 느껴지거던요.

할아버지의 고무속에 난 다시 대학으로 올라왔어요.

그후부턴 내스스로도 내면이 더 강해지고 건강한 삶에 대한 내 지향이 단단해지는걸 느끼게 되더군요.

이마무라씨! 이런 자아를 확신한다면 그 허무감, 고독감이 인생에 정말 무익한 감정이라는걸 느끼게 되지 않을가요?》

인생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

이마무라는 내심 긍정하며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직후에 있은 제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아끼꼬는 대학에 다시 올라온 직후 부업으로 꽃방에서 일하며 성공하던 이야기를 했다.

꽃방에서의 일은 단순했다.

공부가 끝나는대로 달려가서 사람들이 생일이나 결혼식, 여러가지 기념축일들에 직접 오거나 전화를 걸어 신청한 꽃들을 주인이 시키는대로 날라다주면 되는것이였다.

아끼꼬는 자전거를 타고 부지런히 꽃을 날라갔다.

매일매일의 주문자가 별로 많지 않은만큼 급료는 적었다.

처음 몇번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던 아끼꼬는 어떤 사람들은 미처 전화를 걸 시간이 없거나 바쁜 업무나 일에 몰려 미처 련락을 하지 못해 꽃을 사가지 못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아끼꼬는 생각해보다가 행정사무소로 갔다.

꽃방이 있는 지역주민들의 세대명단과 전화번호, 그들 가정 매 사람들의 생일과 결혼날자들을 알아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날들에 맞춰 전날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저, 래일이 자제분의 생일이 아닌가요?》

《아, 그렇습니다.》

《자제분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누구신가요?》

《여긴 꽃방인데요, 꽃이 필요하시다면 봉사해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정말 마침이군요. 고마워요.》

《저, 래일이 두분의 결혼 스무돐이 되는 날이 아닙니까? 두분의 금슬을 축하합니다. 혹 래일 꽃이 필요하시다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이거… 우리도 잊고있던걸… 정말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

축일을 알고있으면서도 벌이에 바빠 미처 생각이 닿지 못하던 사람들, 더구나 까맣게 잊고있던 사람들은 상냥한 축하인사뒤에 꽃봉사까지 해드리겠다니 너도나도 고마워 언제 어디로 가져다달라고 신청을 했다.

《잊고 살던 축일을 알려주는 의미도 좋고 꽃에 대한 수요도 배로 뛰여 오르니 나때문에 주인은 많은 돈을 번다고 기뻐하고 내 급료도 오르고… 내 인생 내가 틀어쥐고 살자는 각오로 달라붙으니 생활이 확연히 달라지 겠지요.》

이마무라는 이처럼 담차게 총명한 처녀였던가 하는 생각을 가무리지 못하며 오래도록 아끼꼬를 바라보았다.

《이마무라씨, 우리 인생을 그렇게 틀어잡고 가요.》

아끼꼬는 이렇게 말하며 또 조용히 웃었다.

샘물같이 맑으면서도 그윽한 그 눈빛,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할수 없는 어떤 령혼의 힘이 느껴지는 얼굴이라고 이마무라는 생각했다.

그 눈빛에 이마무라는 머리를 끄덕여 진심으로 응답했다.

기또라고분 3차공개가 열리기 전날 그들은 가까운 오사까만의 해안가에서 하루를 함께 보내고 아스까촌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새벽녘에 기차에서 내린 그들은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바다가 모래불을 오래도록 산보했다.

새벽려명이 서서히 밝아오는 수평선, 끼륵끼륵하는 갈매기울음소리에 섞여 절주있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페부가득 적셔주는 청량한 새벽공기.

미명의 고요속을 손을 잡고 오래도록 걷던 이마무라는 어느 한순간 아끼꼬에게 돌아서며 그와 입을 맞추었다.

아끼꼬도 끝없는 사랑에 충만되여 불타는 이마무라의 그 열렬한 숨결을 말없이 뜨겁게 받아주었다.

너무 깨끗하고 순결해 사랑하면서도 손끝조차 건드리기 저어스럽던 아끼꼬와의 첫 입맞춤이였다.

숨막힐듯 벅차오던 그 순간의 환희를, 그와 거닐던 바다가의 그 숲과 안개를 이마무라는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였다.

그들은 오전 내내 오사까만의 풍광을 즐기며 바다가에서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했다.

모래불에 두팔을 뻗치고 비행기들이 오르내리는 인공섬의 간사이항공역너머 멀리 시꼬꾸섬쪽에 시선을 주었던 이마무라는 옆에 앉아 하얀 발로 물장구치는 아끼꼬를 돌아보았다.

《아끼꼬 할아버지의 고향이 조선 강릉의 바다가라면서? …》

《예, 강릉바다가의 경포대경치가 그렇게 절경이라고 할아버지는 늘 외웠어요. 그 강릉이 조선의 명인인 리률곡이 난 곳인데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지은 시라며 할아버지가 저에게 배워준 시가 생각나는군요.》

《어떤 시게?》

《들어볼래요?》

이마무라는 호기심 가득하여 머리를 끄덕였다.

아끼꼬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조용히 외웠다.

 

            내 고향 천리길은 가고가도 산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물가에는 둥근달이 외롭고

            경포대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 이리저리 모래불 날을제

            고기배는 바다우로 오고갈테지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서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가

 

이마무라는 가슴이 뭉클해서 굳어진듯 처녀를 보고있었다.

봉긋 솟은 가슴에 손을 얹고서 너무도 절절히 읊는 아끼꼬의 그 모습에서 그리고 조선의 향토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 시구절에서 이마무라는 아끼꼬가 어쩔수 없는 조선처녀라는것을 새삼스레 느끼고있었다.

눈빛이 샘물같이 정갈한 처녀, 그 눈이 반짝이는것은 샘솟는 물방울이 해빛을 반사하는 그 광채같다.

늘 고요한 웃음을 머금고있지만 그 내부에는 사랑과 시와 음악으로 충만된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한 리지적인 처녀가 살아 숨쉬고있는가.

정오가 가까워 시계를 들여다본 이마무라는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자, 이젠 가자구. 도미꼬가 이번 변론에선 아마 단단히 아끼꼬를 벼르고있을거요.》

그들은 바다가식당에서 대충 점심을 먹고 나라시로 들어가는 전차를 탔다.

조춘일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물었다.

저아래 바다가에서는 낚시군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무라야마가 돌아보니 멀리 뒤켠에 앉아있는 사다께가 아무 일 없으니 이야기를 더해도 된다는 뜻의 신호를 해왔다.

무라야마는 물었다.

《그러니 아끼꼬와 도미꼬가 기또라고분공개를 전후해서 격렬한 론쟁을 벌렸다고 하던게 그때겠군.》

《예, 그게 지난 3월 기또라고분 3차 조사공개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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