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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 〈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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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8-09-11 07:3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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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4〉

세계체육계를 경탄시킨 60년대 체육신화

 

천리마시대가 낳은 체육명수들

김숙미 기자

 

 

(왼쪽부터)한필화씨, 박두익씨, 신금단씨

 

련이은 기적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람홍색공화국기가 올라갈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들먹이고 세차게 흥분되였다. 늘 보던 공화국기가 보다 큰 의미로 안겨왔다.》

 

선수생활을 한 1960년대 무려 11번에 걸쳐 세계신기록을 갱신하였으며 국제경기들에서 28개의 금메달을 쟁취하여 륙상계의 《녀왕》으로 불리운 신금단씨(80살, 인민체육인). 1960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즈나멘스끼형제상》쟁탈 국제륙상경기대회 800m달리기경기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세계신기록(2분 4초 5)을 세웠을 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1960년대, 사회주의건설에서 새로운 혁명적대고조를 일으켜나가며 전반사회가 앙양되는 속에 조선의 체육인들이 세계무대에서 련이어 창조한 체육신화들은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는 인민들의 가슴가슴을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으로 한껏 부풀어오르게 하였다.

 

1966년 월드컵 이딸리아팀과의 경기에서 꼴을 넣는 박두익선수

 

특히 1966년 영국에서 개최된 제8차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조선은 세계를 경탄시키는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이 대회에 아시아나라가 참가하는것은 이것이 처음이였을뿐더러 조선은 우승후보였던 이딸리아를 1-0으로 타승하여 아시아나라로서 최초로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16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이 속한 3조에는 구쏘련, 칠레, 이딸리아의 세계적강자들이 들어있었다. 먼저 구쏘련팀, 이어 칠레팀과 경기를 치르어 1무 1패의 조선은 다음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만사가 끝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세계선수권보유팀인 이딸리아팀을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전반 42분경 총알같은 차넣기로 결정적인 선제꼴을 안아왔다. 그 순간에 대해 박두익씨(82살, 인민체육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꼴을 넣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 너무 기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고 조국에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였다는 생각으로 가슴뻐근함을 금할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이딸리아팀을 상대로 1-0이라는 기적적인 승리를 이룩하였다.

 

당시 조선은 리상벽 인민방송원을 현지에 파견하여 현지실황중계방송을 진행하였는데 박두익씨는 이딸리아팀을 이긴 후 방송실에 찾아가 마이크 너머로 조국인민들을 향해 이렇게 웨쳤다.

 

《조국인민들이여, 조선팀이 세계선수권보유팀인 이딸라아팀을 타승하였다!》

 

당시 세계축구계에서 이름없던 조선팀의 눈부신 성과에 대해 세계언론들은 대서특필로 보도했고 주최국인 영국의 애호가, 시민들도 조선팀을 열렬히 응원하고 진심어린 지지성원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조국에서는 그해 10월 체육신화를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한 박두익, 신금단씨에게 우리 나라의 첫 인민체육인칭호가 수여되였다.

 

신금단선수(1964년 일본에서 촬영)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상전

 

8강신화로 일약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친 박두익씨는 그 당시 평양시의 구역마다에 조직된 축구구락부출신이 아닌 평범한 로동자였다. 구역축구경기 때마다 공장대표로 출전하여 두각을 나타낸것이 계기가 되여 1957년에 현재 평양체육단 축구선수로 되였다.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태여난 신금단씨 역시 희천공작기계공장에서 선방공으로 일하였다. 1958년 자강도에서 진행된 도체육경기대회에 공장대표로 처음으로 참가한 그는 100, 400, 800m달리기경기들에서 단연 1등을 한것으로 그해 9월 내무성체육단(압록강체육단의 전신)에 들어가게 되였다.

 

청소년시기에 체계적인 훈련도 받은적이 없고 훈련환경과 조건도 변변치 않았지만 전후 재더미우에서 사회주의건설에 도약대를 마련한 천리마시대 체육인들 조건타발을 몰랐다. 그들은 수령의 사랑과 믿음에 떠받들려 오직 사상의 힘으로 난관을 뚫고나갔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사회주의경제건설에 대한 령도로 그토록 분망하신 속에서도 체육인들이 국제경기들에 나갈 때마다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시였으며 성과를 안고 조국에 돌아오면 그들을 친히 만나주시여 크게 고무격려해주시였다.

 

《당시 경험도 없이 국제경기에 처음 참가했지만 조국에서는 나를 어엿한 륙상선수로 내세워주었다. 내가 11번이나 세계신기록을 세운 요인은 위대한 수령님의 기대와 신임에 기어이 보답하려는 결사의 각오, 하면 된다는 의지를 굳게 가지고 극한점마다에서 자기를 이겨내는 사상전을 벌렸기때문이다.》(신금단씨)

 

《그때 우리는 축구공이나 축구신발을 비롯한 경기 및 훈련기재는 모두 우리것들이였다. 남의 나라것을 부러워하거나 조건타발을 몰랐다. 우리는 빼앗긴 조국을 찾아주시고 인민들 모두가 잘 사는 사회주의제도를 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에 조금이라고 보답하자는 생각으로 가슴 불태우며 훈련하고 경기함으로써 지금도 세계가 잊지 못하는 1960년대 조선축구신화를 창조할수 있었다.》(박두익씨)

 

1971년 준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 속도빙상경기에 참가한 한필화선수(오른쪽)

 

체육강국건설의 기초

 

《오늘 우리 나라 체육기술은 김정은원수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새로운 발전의 전성기를 맞이하고있다. 체육강국건설은 그 기초가 1960년대에 마련되였다.》

 

60년대 또 하나의 체육신화를 창조한 한필화씨(76살, 인민체육인)는 오늘 온 사회에 몰아치는 체육강국건설의 뜨거운 열풍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필화씨는 1960년대 전반기 속도빙상계의 혜성으로 나타나 명성을 떨쳤다.

 

1964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그에서 진행된 제9차 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에서 그는 3,000m경기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이것은 여름철을 포함하여 조선의 처음되는 올림픽메달이였을뿐아니라 1924년부터 40년동안 계속되여오던 겨울철올림픽에서 아시아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메달을 쟁취한것으로 하여 세계빙상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후에도 그는 1966년 노르웨이에서 있은 세계속도빙상선수권대회 3,000m경기에서 3등, 67년 프랑스에서 진행된 제10차 준동기올림픽경기대회 1,500m경기에서 3등, 3,000m경기에서 2등을 하는 등 국제경기들에서 련이어 메달을 획득하였다.

 

그의 눈부신 경기성과는 수도 평양에 스케트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겨울마다 스케트는 청소년들속에서 인기를 모으며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보통강, 대동강에서, 각지 학교들에서도 운동장에 물을 넣고 얼음판을 만들어 스케트타기로 땀을 흘렸다.

 

한필화선수에 의하면 1960, 70년대만 하여도 빙상경기는 도적인 경기는 물론 전국적인 청소년 및 청년경기대회, 공화국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경기체계가 세워져있어 유능한 빙상선수들이 자라날수 있었으며 빙상종목기술이 발전할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내의 단천광산기계공장에서 스케트를 대량생산하여 전국의 수요를 원만히 보장하였다.

 

오늘 김정은원수님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속에 체육부문에 대한 국가적투자와 물질적보장이 날로 늘어나고 체육인들에 대한 우대와 배려가 높아가고 있다.

 

《우리 체육인들은 원수님의 크나큰 사랑과 배려, 기대에 눈부신 경기성과, 경기실적으로 보답하기 위해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있다. 원수님께서 제시하신 체육강국, 축구강국은 머지 않아 빛나는 현실로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한필화씨)

(김숙미기자)

일본방문의 일화와 추억

 

그토록 세계에 명성을 떨친 신금단을 비롯한 조선의 체육선수들이 1964년 도꾜에서 진행된 여름철올림픽경기대회 때에 일본 도꾜에 왔지만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신금단선수가 국제륙상경기련맹이 인정하지 않는 신흥세력경기대회 참가선수였다는 리유로 그의 참가자격을 박탈하였다. 결국 조선은 도꾜에서 선수들을 철수시키고 중국, 인도네시아와 함께 올림픽출전을 거부하였다.

 

당시 기자회견에 나선 신금단씨는 《체육선수는 그 어느 나라에서 하는 경기에도 참가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와 중국, 인도네시아만 참가못하게 하는가. 그러니 나는 조선이 올림픽출전을 거부한것은 정당하다고 본다.》라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1963년 일본에서 진행된 세계선수권대회 때 일본당국은 경기에 참가한 한필화선수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표기하였다. 그뿐더러 그가 500m경기에서 3위를 하였는데 시상식에서 공화국기가 게양되는것을 달가와하지 않고 4위로 외곡하였다. 한필화씨는 시상식참가를 거부하였다.

 

그후 한필화씨는 1971년 삿보로에서 진행된 준겨울철올림픽에 참가하였다.

 

그는 엄혹한 정세속에서 1963년과 1971년 2차례에 걸쳐 방문한 일본에서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이 보내준 신심어린 응원과 고무격려, 정성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고 말한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월남한 오빠때문에 한필화씨의 일본체류기간 남조선기자들이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그런속에서 진행되는 경기에 나선 그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등을 떠밀어준 총련일군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한필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별의별책동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총련일군들, 특히 조청일군들이 호위를 맡아 호텔에서도 밤새 애써주었다. 녀성동맹원들은 경기에서 이기라고 끼니때마다 인삼탕, 소꼬리탕을 비롯한 별식과 약재를 마련해주었다. 총련일군들과 동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밤새워 말해도 끝이 없다.》

 

신금단씨도 비록 경기에는 참가못했으나 그는 일본 니이가따에서 재일동포들이 남녀로소할것없이 다 나와서 환영해준 그 열정은 지금도 잊지 않고있다고 말한다.

 

[출처: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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