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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 〈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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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8-08-17 06:4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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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2〉

무수한 영웅전사를 배출한 3년간의 전쟁

 

김지영기자

 

 

《자기 수령, 자기 처지를 아는 사람들의 용감성》

 

일제식민지시기 평안남도 맹산군의 산골막바지에서 살던 때에는 《너무도 가난하여 어린시절엔 신발이라고는 모르며 자랐다.》는 량봉린씨(86살). 그가 조선인민군에 입대한것은 《조국해방후 김일성장군의 은덕으로 학교를 다니고 인간다운 생활을 누린 체험이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수령을 알고 자기 과거를 알며 자기 처지를 아는 사람은 대담한 용감성과 투지를 발휘할수 있다.》

 

 

3년간의 전쟁을 통해 불굴의 조국수호정신과 대중적영웅주의가 높이 발휘되였다.

 

 침공을 좌절시켜 반공격으로

 

그는 포병부대에 배치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그의 부대는 적들의 침공을 좌절시켜 노도처럼 반공격으로 넘어갔다.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에 입성하였다. 량봉린씨는 4t을 넘는 포차를 이끌고 한강을 도하하였다.

 

경상북도 영천에서 전투를 벌릴 때에 후퇴명령을 받았다.

 

량봉린씨

 

《중상자를 싣고 충천북도까지 후퇴했는데 시가전이 벌어진다고 하여 포를 배치하고있으니 키가 큰 간부가 나타나서 동무네 포 4대를 모두 전선사령부에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후날에 알았는데 전선사령관 김책동지였다. 우리들은 적들이 버린 차량에 포를 싣고 전선사령부를 향하였다.》

 

그해 9월 전선의 형편은 급변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련속적인 반공격에 의하여 쓰디쓴 참패를 당한 미군은 태평양방면의 륙해공군을 총동원하고 지중해함대의 함선들과 추종국가군대들까지 모조리 끌어들이였다. 증강된 대병력으로 적들은 락동강계선에서 발악적인 《총공세》를 시도하는 한편 인천지구에서 대규모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적아력량관계의 변화와 전선형편을 통찰하신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적의 진군을 최대한 지연시켜 인민군주력부대들의 전략상 일시적후퇴를 보장하는 한편 강력한 반공격집단을 형성할데 대한 전쟁 제2계단의 전략적방침을 제시하시였다.

 

해방전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소작농을 하던 리보승씨(87살)가 조선인민군의 정찰분대장으로 월미도에 배치된것은 그해 7월말이였다. 인천앞바다에 가로놓인 0. 66㎢의 면적에 해안선의 길이가 4㎞에 불과한 자그마한 섬에 포진지와 감시소를 꾸리고 8월말부터 화력지휘훈련을 진행하였다.

 

《나는 정찰분대장으로서의 사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적들이 인천항에 집결하는 상황을 항상 주시하고있었다.》

 

불타는 섬, 월미도에서

 

4문의 포를 가진 인민군 중대와 300여척의 함선에 1,000여대의 비행기를 가진 5만대군과의 대결. 소설과 영화로 옮겨져 오늘도 새 세대들에게 불굴의 조국수호정신과 대중적영웅주의를 전해주는 월미도전투는  《위대한 령장을 모신 23살난 중대장 리대훈과 맥아더와의 대결》이였다고 리보승씨는 회고한다.

 

《9월 9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중대장이 체육경기를 조직하였다. 월미도와 소월미도사이 왕복 10리의 수영경기를 진행하였다. 이튿날 중대장이 76mm포로 적의 순암함이나 구축함을 파괴할수 있는가고 물었는데 병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명중시킬수 있다, 자신있다고 웨쳤다. 철갑탄을 장전하여 적함선의 연유탕크나 포탄창고를 때리면 충분히 가능하다는것이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월미도에서 적의 상륙을 3일간 지연시키면 락동강까지 나갔던 인민군이 한강 이북으로 넘어갈수 있다고 하시였다. 리대훈중대장은 병사들의 사기넘친 함성을 들으며 주석님의 명령을 관철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였다고 한다.

 

리보승씨

 

첫날 전투는 9월 13일. 리보승씨에 의하면 《함선 300척이니 인천앞바다가 새까맣게 되였다.》고 한다. 아침 7시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여 1시간안에 섬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였다. 리대훈중대장은 적함선이 섬에서 800m계선에 들어서자 처음으로 한바탕 해보자며 포사격을 명령하였다. 그가 함선을 섬에 접근시킨것은 썰물의 시작을 기다린것이였다. 바다물이 밀려나가자 적들은 당황망조하여 일제히 퇴각하였다.

 

첫날 전투에서 15명이 희생되고 부상한 8명이 후송되였다. 포는 4문중 2문이 마사졌다.

 

《남은 인원은 24명. 그때 제일 걸린 문제가 물이였다. 몸에 수분이 없다보니 말을 하지 못해 나무꼬챙이로 글을 써서 지시를 주었다. 남은 두문의 포도 변변치 못했는데 마사진 두문에서 필요한 부속을 뜯어 맞추었다. 병력도 재편성하였다. 그때 우리는 김일성장군께서 찾아주신 조국땅을 마지막까지 지키겠다는 일념이였지,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은 없었다.》

 

9월 14일 적들은 만조를 리용하여 함선을 들이밀었다. 포병들은 멸적의 기상을 폭발시켜 철갑탄을 쏴댔다. 이틀째 전투를 마친 시점에서 포는 1문밖에 남지 않았다. 인원은 11명이였다. 그날 밤 적들이 함포사격을 감행하였다. 리보승씨는 부상당하고 의식을 잃은채 서울의 병원으로 실려갔다.

 

《며칠후 전선사령관인 김책동지를 만나 다른 부대에 소속되여 전략적후퇴를 하게 되였다. 거기서 월미도 중대에서의 마지막무전이 전투 사흘째인 9월 15일 8시 40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리대훈중대장 이하 7명이 적땅크를 향해 맞받아 나갔다는 내용이였다…》

 

위훈의 별무리로 영원히

 

월미도방위자들은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적 구축함 3척을 포함하여 각종 함선 13척을 격침,격파하고 적의 상륙을 사흘간 지연시켜 아군이 전략적 후퇴를 할수 있는 길을 열었다.

 

포차를 이끌고 신의주까지 후퇴한 량봉린씨는 그해 겨울 다시 남쪽을 향하였다. 조선인민군 근위 제19고사포련대에 속한 그의 중대는 평양의 중심부 평천리(당시)에 포진지를 정하였다.

 

《김일성장군께서 계시는 평양을 목숨으로 사수하자! 우리 중대원들은 누구나 이런 불타는 심장의 맹세를 안고 적기와의 판가리싸움에 떨쳐나섰다.》

 

높은 고도에서 수평비행하던 《B-29》대편대가 평천리의 공장과 주민지대들에 맹폭격을 가하며 내려꽂힌다. 적기와 고사포병과의 싸움은 말그대로 하늘과 땅에서의 육박전이였다.

 

《우리 고사포병들은 저 불길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불사조>라는 평가도 받았다.》

 

 

전쟁에 참가한 로병들은 적전투기와의 싸움은 하늘과 땅에서의 육박전이였다고 증언한다.

 

그후 최고사령부가 건지리로 옮겨지고 량봉린씨의 중대도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건지리에서도 적기를 쏴떨구었다. 1953년 7월 27일 10시에 정전이 되였는데 적들은 9시 50분까지 폭격을 계속하고있었다. 그날 밤 총참모부에서 야외에다 불을 켜고 승리의 축배를 들라고 했는데 나는 술을 먹지 않고 포를 정비하였다. 일단 전투가 재개되면 싸워야 하는데 내가 취하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는 고사포를 이끌고 열병훈련장에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야 비로소 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국가행사가 준비되고있는 사실을 알았다.

 

1953년 8월 15일 김일성주석님의 령도밑에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국을 타승하고 조국의 자주권과 존엄을 영예롭게 수호한 승리자들의 환희가 차넘치는 속에 전승열병식이 성대히 거행되였다. 량봉린씨는 주석단에 계시는 김일성주석님을 우러르며 보무당당히 행진하였다. 그날 저녁은 명령에 따라 고사포로 전승의 축포를 쏘았다. 《불사조》라고 불리웠던 포중대의 생존자는 밤하늘에 전쟁으로 희생된 전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심장으로 웨쳤다고 한다.

 

《전우들의 넋은 이어진다. 그들은 오늘의 축포성과 더불어 조국의 하늘가에 위훈의 별무리로 영원히 아로새겨질것이다.》

 

[출처: 조선신보]

 

 관련기사

►〈력사의 증인을 찾아서/공화국이 걸어온 70년의 로정 1〉북남대표들에 의한 전조선중앙정부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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