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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는 동포들의 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돕고자 북녘 매체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 글들이 본회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님을 공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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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4.19혁명 49돌-집권자들의 6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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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9-04-19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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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요지경 지도자들이 수두룩 하단 말인가



민족통신 예정웅 논설위원은 4.19혁명 49주년을 기해 남녘 대통령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요지경 지도자들이 수두룩하다고 지적했다. 남녘사회는 4.19학생의거가 일어난지 이제 49주년을 맞지만 아직도 제 주권을 외세에 빼앗긴채 강대국의 식민지 처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8.15해방의 기쁨을 맛보자 말자 남녘 땅은 일장기가 내려지고 곧 바로 미국의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리고 미국의 지배와 간섭의 시대는 그 종말을 고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남녘의 집권자들을 옭아 매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시기부터 지금까지 남녘 집권자들의 처지를 조명한 글을 게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민심을 잃은 기득권 세력은 심판받는다.사진은 이기붕의 집이 불타는 모습




[논단]4.19혁명 49주년과 남녘 대통령의 60년 역사

요지경 지도자들이 이렇게 수두룩 한가


*글:예정웅 민족통신 논설위원


《국민들에게 쫒겨 하와이로 도망친 초대 대통령 이승만》


예정웅 논설위원
그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 했다. 불안과 초조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전전긍긍 했다. 그의 미국인 부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 였다. 새벽 6시가 되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24시간 중 가장 어둡게 보이는 때가 새벽녘이다.

그는 챙겨 두었던 짐 가방 두 개를 응접실로 옮기라했다. 그의 가방에는 달러뭉치가 꽤 들어있었다. 이승만, 그는 부패한 독재자 였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도 교포들이 한 푼 두푼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해 미주교포 사회에서는 사기꾼으로 취급 했다. 미주교포 독립운동 사료에 이승만의 역할은 보잘것없었다.

그는 본처와 아들을 버리고 프란체스카와 연애질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몇일 전 신임 내무부장관 홍진기로부터 청년학생들의 4.19시위 상황을 보고 받고 떨고 있었다.(참고: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를 대충 수습하는 척하면서 최인규를 내무장관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홍진기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홍진기는 내무장관이 되자 "마산 시위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여 3.15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정당한 항거를"빨갱이 조작"으로 몰아 탄압하려 했던 장본인이다.)

4월19일에서 26일까지 서울에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은 183명이 었다. 중상자가 6000명~7000명,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부상자 10000여명, 그중 250여명은 종신 불구자라고 보고 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청년 학생들이며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점거 하려던 수만 명의 시위대에게 내무부 장관 홍진기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는 "무조건 발포 사살하라"고 했다. 학생 시위대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자주통일 이루자" 라는 구호를... 이승만은 한손을 사례치며 홍진기의 보고를 중단 시켰다. 이승만의 오른쪽 안면 경련이 이 날은 더 심하게 떨었다.

밖에는 주한미 대사 메카나기(Mc carnagie)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허정 과도수반은 도착하지 않았다. 6시 40분이 되자 허정 과도수반이 도착 했다. 그도 밤샘을 했는지 눈이 충혈 돼 있었다. 상황은 긴급 했다. 이화장에서 김포까지는 30마일이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김포공항까지 30~40분이면 도착 할 수 있었다.

김포공항은 1960년대까지 미군 전용공항이었다. 해외 출장이나 외국을 가려면 미8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려 갈아타야 했다. 당시 남한의 민간항공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말 했던가? <식민자라면 더러운 일제의 식민지 보다 미제국주의 식민지가 났지 않은가. 일제는 조선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지만 미 제국주의 식민지는 그나마 원조라도 받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사고의 폭을 넓혀라! 민족의 자주성이나 주체성이 없는 사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그런식으로 자위 할 수 있다.그러나 사람들이여! 일제의 직접적인 식민지 지배 착취와 약탈 보다 미제국주의 신식민주의적 보이지 않는 착취와 약탈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한은 주한미군 1인당 평균 10만달러가 넘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국토의 엄청난 지대가 임대료 한푼 받지 못하고 공짜로 미 제국주의 군대에 기지로 내 주고 있다. 우리가 주한미군 군사기지에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세운다면 그 이익은 우리것이 된다.미제국주의의 착취와 약탈은 어디 이것 뿐인가? 미 군사기지는 기름찌거기로 오염되고 공해로 땅이 죽어가고 있다. 그 모든 폐해는 오늘의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다. 자주성이 없는 이 나라, 군사주권이 상실된 이 남한 땅은 친미주의자들의 사대매국행위로 말미암아 민족에게 끼치는 해악은 돈으로 따질 수없는 실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와 착취, 약탈을 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 사실을 아는가.

남한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치러지기 직전까지 미국과 국제기구(UN)의 원조를 받고 살아 왔다는 사실 말이다. 김포에서 9시에 출발 할 쌍발 미 군용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 매카나기 대사는 이승만에게 몇일전 국무성에서 온 <망명허가 전통문>을 보여 주였다. 그리고 여권에 비자가 찍혀 있음도 확인해 주었다. 모든 절차는 신속하게 준비되었다. 이승만의 도피가 노출 될 것을 염려 해 처음에는 여의도 미 군용비행장(당시 여의도는 미군용 비행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에서 출발하기로 한 것을 변경, 김포공항으로 로 바꾸었다.

미군용 쌍발 비행기는 김포-오끼나와-하와이 코스로 날아가게 돼 있었다. 반민주, 반민족적인 친미사대 매국노 이승만, 그의 마지막 생은 그렇게 도망자의 처량한 신세로 전락 되고 말았다. 이승만과 그의 두 번째 처 프란체스카의 도피행각을 도와준 사람은 주한미 대사 메카나기(MCcarnagie)와 허정 과도수반이 였다.

한편 이승만의 양아들이 였던 이기붕과 그의 처 박 마리아, 아들 이강석은 이승만이 혼자 미국으로 도피한 것을 알게 되자 허탈감에 빠졌다. 이강석은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머리를 향해 리퍼벌 권총을 발사했고 자신도 머리에도 권총을 쏴 자살한다. 그들의 시신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응접실을 피로 흥건히 물들이고 참혹하게 죽었다.

1960년 4월 28일 오전 9시 이승만은 2천만 국민들에게 쫒겨 자기가 태어난 고향 땅과 조국을 버리고 국민들마저 버리고 아무도 몰래 미국상전의 품으로 떠났다. 이게 우리의 초대 대통령의 최후의 모습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치욕의 역사가 인가. 수많은 애국자들을 빨강이로 몰아 죽이고 민족주의적인 양심적인 사람들을 정치테러와 암살로 제거한 그 죄 많은 독재자, 수십만명의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우익독재자, 결국 그는<하와이>에서 객사하는 것으로 추한 자기의 생을 마감 한 것이다. 그의 일생에 지은 죄의 업보가 아닐 수 없다.

《 심복부하 한테 암살당한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비극적인 최후 》


1979년 10월 26일 저녁 조금 늦은 밤이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 7시경에, 잘 차려진 술상이 들어왔다. 두 명의 처녀가 술시중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한 여인은 심00, 다른 여인은 김00였다. 술김이 한껏 오르면 둘 중의 한 여인은 박정희의 침실에서 잠자리를 같이 해애 할 여인이다. 박정희 재임 중 이런 식으로 성욕을 채운 신인 탈랜트. 영화배우 괜찮은 여성이 약 40여명 쯤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에는 박정희에게 여자를 대주는 부서 까지 존재해 있어다니 말 해 무엇 하겠는가. 청와대에서 가끔 벌어지는 싸움판에 육영수의 눈통에 피멍이 들고 이마에 멍든 자국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박정희가 잿털이를 집어던져 얻어맞아 생긴 상처라 했다. 4월26일 밤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도 동석했다. 김재규가 마련한 술자리 였다. 7시 40분 김재규는 "각하 정치 잘 하시오" 한 마디를 하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박정희를 사살했다.

차지철은 변소로 피하다가 피격됐다. 박정희를 쏜 권총 실탄은 3발이 였다. 두발은 가슴에 정통으로 한발은 외쪽 갈비뼈를 관통해 나갔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폭정을 하던 독재자,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자들을 잡아들이는데 혈안이 된 일제의 앞잡이 일본관동군출신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이름)가 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믿는다는 심복부하 한데 사살되었다.

박정희는 옆에 앉아있던 여인의 품에 쓰러졌다. 다음날 신문 1면에는 이렇게 장식되고 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박정희를 살해) 박정희 암살의 3가지설이 지금도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 정치적으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 김재규의 갈등, 상호견제로 김재규가 정치적 진퇴위기에 몰린데 대한 반항 설,

▲ 김재규의 좌절감에 따른 공격성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는 설,

▲ 그러나 사건의 본질은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박정희 제거계획을 오래동안 김재규와 모의해 왔다. 김재규가 사형당하기 직전 한 말이 있다.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 너희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미 CIA와 남한의 중앙정보부는 사촌지간이 아닌가. 박정희 암살로 유신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졌으며, 제2의 박정희가 나타난다. 그가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이 쿠테타를 일으켜 장권을 탈취하고 군사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질서 전략은 국민들이 장기집권으로 염증을 느낀다고 할 때 미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그 정권을 소멸시킨다 새 정권이 탄생시켜 식민지지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미국의 보이지 않는 힘은 그렇게 작용한다.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한반도정책과 관련해 깊은 정치적 음모가 항상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암살사건은 일명 <10.26 사건>이라 한다. 그 사건은 김재규와 미CIA, 그들 자신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을 구세주처럼 믿었던 박정희의 인생도 그렇게 추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 전두환의 백담사 유배, 노태우의 비자금과 김영삼의 안기부 1200억 비자금 》


전두환 하면 광주민중항쟁과 함께 역사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국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퇴임 후 백담사 유배를 당한다. 당시 상황은 이렇게 기록한다. 퇴임 후 여유롭게 일본을 여행하던 전두환은 화들짝 놀라 급거 귀국한다. 정치판 상황을 눈치 챈 듯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서울의 한복판에 전임 대통령이자 친구인 전두환이 있다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국민들이 원하니 잠시 외국에 나가있다가 들어오라며 사실상 <해외망명>을 권한다. 이에 격분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외국엔 죽어도 못나가겠다. 차라리 감옥을 가겠다고 한다.

노태우와 전두환은 타협했다. <외국망명> 대신 절이나 한적한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겠다고 했다. 전두환의 현대판 조선시대<귀향살이>는 그렇게 합의된 것이다. 전두환과 이순자는 설악산의 <백담사> 유배에 들어간다.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 유배 생활을 한다. 여기 전두환의 시(?)가 있다. 석두에서 나온 사고력과 실력을 볼 수 있어 소개한다. 너무 웃지는 마시라.

<백담사의 추억>
전두환

백담사에서 나는 내 마누라와 같이 도를 닦았다.
눈이 내리면 무릅까지 쌓이는 첩첩산골 백담사에서 나는,
경호원들과 같이 뒷산에 올라 불고기를 구워 먹으며 도를 닦았다.
그리고 감옥소에서도 도를 닦았다
경호원도 없는 외로운 독방에서 도를 닦았다.
단식을 하면서 도를 닦았다.
<출처 : 전두환과 백담사의 추억 - 오마이뉴스 E>

무슨 <도>를 딱았는지 모르지만 2년 후 노태우는 전두환을 풀어 준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때 아예 전두환과 노태우를 <12·12 쿠데타> 및 <5·18 광주민중항쟁운동>의 강경탄압의 진상규명에 대해 처벌할 것을 결심한다. 김영삼이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지 얼마 않돼 그 말을 번복하고 결단을 내린다.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하고 헌법재판소가 특별법의 합헌결정을 내림도록 함으로써 수사가 가능하도록 몰아갔다. 노태우는 대기업 총수 등 40여 명에게서 41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지자 서울 구치소에 즉각 구속 수감된다. 재판부는 전두환에게 <12.12 내란음모죄> <5.18 광주민중학살죄><수천억원대 비자금조성>등의 죄목에 사형을 선고하고 노태우에게는 <반란죄><내란죄><수뢰죄>를 적용징역 22년 6개월을 각각 선고>하였다.

이런 자들이 한 나라의 국가를 통솔한 대통령이 였다는 사실에 당신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가. 김대중은 이들을 사면해 준다. 그렇다면 김영삼은 깨끗한 정치인이 였을까? 그도 부패한 정치인 대열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김영삼은 1995년 지방선거와 1996년 총선 때 약 1200억원의 비자금을 안기부 통장에 숨겨두고 신한국당 선거자금으로 돌렸다. 당시 김영삼의 심복 안기부 기조실장 김기섭은 그 비자금은 김영삼의 대통령의 대선 자금이라 했다.

김영삼은 IMF로 국가경제를 파탄시킨 장본인이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김영삼 역시 차떼기 당의 원조인 민자당-한나라당 출신이다. 부패한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안기부에 1200억원의 비자금을 감추어 놓았다는 전에서 전두환이나 노태우와 다를게 없다.

《이명박과 엘리카 김, 김경준. BBK사건은 끝났는가? 》


세상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의 인연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악연이라고 한다."이명박이 L.A 동포사회와 인연을 맺은것은 1994년쯤이다. 이명박과 에리카 김(Erica kim)과 운명의 만남 된다. 전류는 저항이 가장 적은 선을 따라 흐른다. 그러나 전구는 저항이 있기 때문에 빛을 낸다.

이명박과 에리카 김, 두 사람의 얽힌 인연은 그랬다. 그 둘은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성간의 오해(?)를 살 만한 사이였다. 에리카는 코넬대 정치학과와 UCLA 법대를 나온 뒤 변호사로 활동, 한인사회 일에도 활발하게 참여한 커리어 우먼(Career women)이었다. 젊고, 지적이고, 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눈에 띄었을 법하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교포 젊은 여성들 대부분은 순수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발랑까지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바보같이 착하다. 이명박과 에리카는 단 둘이 초졸하게 있을 때도 있었고 어느 사업가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도 같이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즐겼다. 에리카는 자주 서울을 방문했다.

이명박은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 그녀를 만났고 식사도 같이 했다. 1995년 서울 힐튼 호텔에서는 내 노라는 실세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리카의 <나는 한국인>이란 책의 출판기념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명박은 출판기념회에서 에리카와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그 즈음 에리카는 이혼했다. 에리카와 이명박이 가깝게 지낼 때 남편과 틈이 벌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돌았다. 에리카는 동생 김경준을 이명박에게 소개했다. 이명박은 김경준과 동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경준 역시 촉망받는 청년 엘리트였다. 코넬 대학을 나왔고 왓튼스쿨 MBA를 마첬다. BBK사건이 한창일 때 에리카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나한테는 항상 잘해줬다. 사건이 나서 사이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한국에 나가면 항상 공항에서 시내까지 픽업해 주었다> 에리카는<내가 자존심을 버리고 다 불어 버리면 이명박은 끝장>이라고 말했다. 여자가 가장 상처 받을 때는 언제인가. 배신에 대한 증오감 겹쌓일 때가 아닌가. 여자가 품는 저주의 독기는 오뉴월의 서릿발처럼 무섭다 했다.

김경준은 이명박을 회장님이라고 부르기보다 <매형><매형>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는 소문도 있다. 사람이 황금과 명예, 권력과 지위가 혼합된 개념이 되면, 내적 자아의 요구에 대해 눈이 멀게 된다. 이명박과 에리카의 인연은 악연이 됐다. 이명박은 장래가 촉망될 한 젊은이의 인생을 망처 놨고 착한 한 여인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욕망에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이명박의 인생은 위선과 비굴함이 범벅된 거짓의 삶을 살아왔다. 그 영향은 이명박의 정치가 얼마나 거짓의 정치를 하는가에 집약된다. 그는 전과 14범이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 성공적인 삶인가? 명예를 거머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돈을 많이 벌기는 했지만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황금과 명예와 권력을 거머쥐기는 했지만 국민들 누구도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이명박 주변인사들 중 누구하나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인물들이 있는가?

BBK 사건의 결론은 미완이다. 새날이 오면 이명박이 퇴임하는 날 지체 없이 BBK사건은 재조사 돼야 한다. 이명박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 BBK사건을 맡았던 특검들, 재판부, 법무부까지 법정에 세워야 한다. 진실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보여 주어야 한다.

《 노무현을 500만불 짜리 부패정치인으로 때려 잡으려는 이명박의 정략,술수 》


지금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잡는데 모든 정략,술책이 총동원 되고 있다. 보수우익들의 총 궐기인가? 그렇다. 전략적 방침은 세 갈래 방향으로 전개 되고 있다.

⦿ 정치적으로 노무현을 타켓으로 몰고가 민주당을 무력화시키고, 국회정치를 손아귀에 넣는다.

⦿ 사회적으로는 강력한 공안정국으로 시민운동을 선제 제압, 대규모 촛불시위운동과 국민저항의 재발을 막고 사전 무력화 시킨다.

⦿ 모든 보수우익 언론매체을 이명박 언론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전략이다.

지금 MBC PD수첩 팀의 담당 PD들의 구속수사, 신경민 아나운서의 하차, 김미화 코메디언의 하차사건은 MBC방송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파괴바람이 여기에 기인 한다. 조,중,동과 T.V방송들 언론매체가 총 동원돼 노무현 죽이기에 나섰다.

이명박은 보은 사례로 조,중,동에 방송진출 권을 흔들고 있다. <500만불 부정부패한 노무현 만들기>가 조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무현의 500만불> 사건은 굴려 부풀리는 눈덩이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노무현을 죽여야 진보세력을 와해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참으로 저급한 정치적 모략술책이다. 이명박과 청와대, 국정원은 초기에는 김대중을 잡으려고 했다. 김대중을 먼저 칠까? 노무현을 잡을까? 저울질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김대중을 잘못 건드려 <호남의 민심폭동>이 전국적으로 반 이명박 투쟁으로 번지는 것이 두려웠다.

지난 1년 동안 이명박은 공안탄압을 어떻게 진행 했는가.

▲ 민족미주세력 핵심들에 대한 체포 투옥-무조건적 ▲ 떡검 수사-흐지부지 ▲ 촛불시위 수사-국제적 인권탄압 압력, ▲주경복과 공정택 서울교육감 선거 수사-흐지부지,▲ 영부인 사촌언니 수사,-흐지부지 ▲ 대통령 사위 주가조작 수사-흐지부지, ▲용산 참사 수사-아예 하지 않음, ▲미네르바 수사-강경 ▲ 조중동 불매운동 수사-강경 ▲삼성 떡값 수사-흐지부지, 이명박은 노무현 500만불 스캔들에 추부길을 끼워 넣고 공정성과 균형을 맞추려고 해다.

그러나 이상득과 여권 핵심부는 건들이지 않았다. 여론조성 전술에 실패 했다. 이명박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2007년 대선 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수십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은 현 정권을 강타할 초대형 태풍이 될 수 있다. 천 회장과 이명박은 고대 61학번 동기이다.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 회장이 박 회장에게 받은 수십억원이 이명박의 경선, 대선자금이다. 박연차→천신일→ 이명박 대선자금 이 고리의 실체를 벗겨라...새날이 오면. 이명박이 퇴임한 후에 BBK사건은 재조사하고 이명박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

4.19혁명 49주년을 맞는 지금 남한의 역사를 들여다 볼 때 60년은 치욕의 역사였다.

조국의 남녘 땅에는 분단이후 정치지도자들의 모습이 천태만상이다. 어쩌면 요지경 지도자들이 이렇게 수두룩 하단 말인가. 남한의 대통령이라는 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대북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들의 정치는 언제나 친미사대주의와 반북대결 노선을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조국통일을 위해서 단 한번도 정치적으로 노력해 본적이 없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 했고 하나같이 부패 했다. 그들은 민족의 자주권 보다 미국을 더 숭배했으며 친미사대주의 매국노들이였다. 이들의 삶은 추하고 흉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고 마감 할 것이다. 이 60년의 치욕의 역사, 우리 국민은 제데로 된 지도자가 없는 나라의 불행의 역사에 살아 온 것이다. 외세의존, 친미사대주가 계속되는 한 남한의 불행은 계속 될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사람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나라가 사대주의를 하면 망하게 된다. 자주성은 나라와 민족의 생명"라고 말했다.<김일성 저작집33권 246페지> 이 진리의 말이 이 가슴에 찡하고 다가오는 것은 왜 그럴까.(끝)

2009.4.14




[출처 :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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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1차확대회의 진행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확대회의 지도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2월 25일(목)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2월 25일(목)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2월 24일
자력갱생대진군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
불법무효한 협잡문서 《한일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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