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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학학회 비망록, 간또대진재때 감행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일본의 국가적인 테로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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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9-01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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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8월 31일 비망록을 발표하여 간또대진재때 일본정부가 어떻게 조선인대학살을 계획하고 악착하게 감행하였는가를 세상에 고발하였다. 비망록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간또대진재는 자연의 재난과 함께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선민족에게 강요된 인공적인 재난도 기록하고있다.

  1923년 9월 일본 간또지방에 발생한 대진재를 조선인탄압의 좋은 기회로 삼은 일본정부는 내무성, 군대, 경찰과 《자경단》을 비롯한 극우익단체들까지 동원하여 열흘남짓한 기간에 무려 2만 3 000여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대참극을 빚어냈다.

  이 천인공노할 조선인대학살만행은 당시 일본정부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감행된 민족배타주의적인 인간살륙이였으며 국가적인 테로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오늘까지도 그 죄를 개별적인 일본인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진상규명과 배상을 한사코 회피하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간또대진재때 일본정부가 어떻게 조선인대학살을 계획하고 악착하게 감행하였는가를 세상에 고발하기 위하여 이 비망록을 발표한다.

1

  지금으로부터 85년전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리히터척도로 7.9의 대지진이 일본의 간또일대를 휩쓸었다.

  일본력사상 미증유의 대지진이 일어나자 간또지방 특히 도꾜부는 삽시에 무서운 혼란상태에 빠졌다.

  수십만채의 집과 건물이 순식간에 파괴되고 화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숱한 사람들이 깔려죽고 불타죽는 참사가 빚어졌다.

  강한 지진과 폭풍, 그로 인한 화재로 69만여세대의 주민들이 리재민으로 되고 사상자는 무려 16만 6 000여명에 달하였다.(일본사전 《고지엔》 1991년판 588페지)

  한편 한지에 나앉은 수많은 리재민들은 여진의 공포와 불안속에서 헤덤비며 대피소동을 벌리였다.

  9월 1일 오후 도꾜의 《궁성》앞 광장에 30만여명이, 우에노, 야스구니진쟈부근에 5만~10만여명의 피난민들이 집결하였다.

  그야말로 도꾜부일대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이 엄중한 사태는 자연의 재해앞에 속수무책으로 있는 정부에 대한 일본인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제1차세계대전후의 경제공황속에서 1918년의 《쌀폭동》과 같은 인민들의 반정부폭동으로 위기를 겪은 쓰디쓴 체험을 안고있던 일본지배층은 그들의 대중적진출과 소요를 우려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러한 감정을 반영하여 일본정부가 《치안유지》를 위한 《긴급조치》로 고안해낸것이 혼란의 책임을 재일조선인들에게 넘겨씌우고 일본인들에게 민족배타주의사상을 불어넣어 그들을 조선인숙청에로 부추기는것이였다.

  일본정부는 이렇게 하는것이 《최악의 상태》, 《불길한 사건》의 발생을 막고 사회정치적위기를 완화시키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인정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허위소문을 조작하여 대대적으로 류포시키는 한편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전시계엄령》을 공포하였다.

  허위소문을 만들어 사회에 조직적으로 퍼뜨린 장본인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있으면서 3.1인민봉기에 참가했던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학살한 내무대신 미즈노 렌따로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조선인폭동》설이 내무성 경보국장과 도꾜경시청총감 등에 의하여 전국에 류포되였다.

  경보국장과 도꾜경시청총감은 후나바시해군무전국을 통하여 《조선총독부》와 각 지방장관들앞으로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 《조선인들이 도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있다.》 등의 허위전보를 날렸다.(《관보》호외 1923년 12월 16일, 중의원의사속기록 제5호)

  후날 후나바시해군무전국 소장이 《경보국장으로부터 야마구찌현 지사앞으로 보내는 조선인폭동과 관련한 소신이 있었다.》, 《…요꼬하마, 도꾜 등지에서 일어난 그들의 폭동이 조직적인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태가 간단치 않다고 자각했다.》(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29페지)고 말한것은 일본지배층이 계획적으로 《조선인폭동》설을 조작류포시켰으며 많은 일본사람들이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경보국장과 도꾜경시청총감이 《조선총독부》와 각 지방장관들앞으로 보낸 3건의 《조선인폭동》설에 관한 허위전보증거물이 후날 일본국회중의원에 제출되였다.

  이에 대하여 한 의원은 《이 3건의 전보문은 모두 9월 3일에 발신되였지만 사실은 9월 1일 내지 2일에 도꾜에 파견되였던 공용사(심부름군)가 가져온것으로서 후나바시해군무전국으로부터 보내온것이다. 이 전보문의 최고책임자가 당시의 내무대신 미즈노 렌따로였다는것은 말할나위없는 명백한 사실이다.》(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479페지)고 밝혔다.

  그는 이 사실을 확증하는 후나바시해군무전국 소장에 대한 예심조서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자경단》원 8명이 조선인 16명을 죽인 사건에 대한 지바지방재판소 공판때 범인들이 후나바시해군무전국 소장이 조선인을 《죽여도 좋다.》고 지시하였기때문에 살인을 감행하였다고 고발한 문건이였다.

  이에 대하여 소장은 《1일 피난민으로부터 조선인이 폭탄을 던져서 경시청, 〈궁성〉 등이 불타고있다고 한 이야기가 있었기때문에 오후 7시 전국에 송신하여 알렸다. 도꾜에서 돌아온 공용사가 가져온 …전보문에는 경보국장이 야마구찌현, 후꾸오까현의 두 지사에게 조선인들이 도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있기때문에 당분간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오는 자는 제지시키라고 지시한것도 있었다.》(일본 《법률신문》 1923년 11월 20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소장이 《1일 피난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국에 송신》하였다는 자백은 사실을 외곡한 허위변론이였지만 《조선인폭동》설은 내무성에서 날조한것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으며 이것은 다른 증언에서도 폭로되였다.

  내무성의 지시에 따라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한 거짓소문은 보다 다양한 내용으로 과장류포되였다.

  도꾜경시청산하 각 경찰서관내의 류언상태를 분석한데 의하면 일본정부는 9월 2일 오전에는 《부정선인(불온, 불량한 조선사람)의 습격》, 《화재는 조선인의 방화》,오후 1시경에는 《선인 200명이 살상, 략탈, 방화하면서 도꾜로 육박》, 《조선인이 부녀자를 살해하고 우물에 독약을 던졌다.》, 오후 6시경에는 《수백명의 조선인무리가 일본인을 습격하고 진격해온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제교형리들은 이러한 형형색색의 거짓소문을 류포시킴으로써 일본인들속에 조선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증오심을 조성하였으며 정부가 《전시계엄령》을 공공연히 조작할수 있는 객관적조건과 조선사람들을 합법적으로 대량학살하기 위한 구실을 마련해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러한 거짓소문의 근거는 전혀 없었으며 그 허위성은 일본사법성의 극비문서 《진재후 형사사범 및 이와 관련한 사항조사서》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 의해 여지없이 드러났다.

  특히 9월 4일 미국신문 《아츠리셔데트 프레스》가 《진재전역에 있어서 조선인의 폭동, 일본인에 대한 학살준비에 관한 풍설은 매우 많지만 전혀 근거는 없다.》고 보도한것은 그러한 허위선전의 진상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였다.

  일본정부는 《조선인폭동》설을 전국에 류포시킨데 기초하여 조선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용인하는 《전시계엄령》을 조작공포하였다.

  9월 2일과 3일에 일본왕의 《칙령》으로 도꾜부와 가나가와현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에 계엄상태가 선포되였으며 간또계엄사령부가 발족되였다.

  《전시계엄령》은 원래 법적수속절차상 먼저 추밀원고문관들의 심의를 거치고 《관보》를 통하여 발포되여야 성립될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이 법적규정을 완전히 무시한채 《전시계엄령》을 발동시킨것은 조성된 위기를 사전에 신속히 모면하는것이 《최대지급과제》였고 정부관료들이 이 문제에서 공통된 립장을 가지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서둘러 공포된 《전시계엄령》은 제9조, 제14조를 《적용》하여 간또일대를 이른바 《림전지역》으로 규정하였다.(륙군성문건《륙보 3573호》 1923년 9월 6일)

  이 계엄령은 재일조선인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적》들이 도꾜를 목표로 하여 폭동과 방화, 습격 등의 방법으로 《침공》하고있다는 어처구니없는 구실로 재일조선인들을 탄압학살할것을 법제화한 극히 도발적이고 야만적인 명령이였다.

  그것은 당시 한 중의원의원이 《무장을 갖춘 대장이란 자에게 〈적〉이란 누구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조선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조선인은 왜 적인가.〉고 물었더니 〈상관의 명령이니 할수 없다.〉고 대답하였다.》(일본 《요미우리신붕》 1923년 10월 22일)고 말한것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대진재로 인한 일본인민들의 반정부적진출을 조선인학살에로 돌려놓기 위하여 무근거한 《조선인폭동》설을 퍼뜨린 다음 《전시계엄령》을 공포하였으며 적수공권의 재일조선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학살하기 위한 《전투》준비를 갖추어갔다.

2

  간또계엄사령부는 《전시계엄령》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을 《적》으로, 《폭도》로 규정하고 군대와 경찰, 《자경단》 등에 《조선인박멸》을 위한 《전투》개시를 명령하였다.

  계엄사령부는 고노에사단과 제1사단을 비롯하여 간또지방에 있던 륙해군병력을 도꾜와 요꼬하마지구에 집중배치하였다.

  9월 8일 현재 계엄지구에 집결된 군대만 하여도 3만 5 000여명에 달하였으며 10일에는 5만 2 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정부는 극우익분자들로 《자경단》, 《청년단》을 비롯한 살인단체들을 조직하게 하고 군대,경찰과 협동할것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자경단》은 도꾜부에 1 595개, 가나가와현에 603개, 사이다마현에 300개, 지바현에 366개, 이바라기현에 336개, 군마현에 469개, 도찌기현에 19개 도합 3 688개나 되였다.(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73페지)

  결과 간또일대는 군대와 경찰, 《자경단》, 《청년단》 등으로 차넘치게 되였다.

  계엄사령부의 지휘밑에 도꾜와 요꼬하마지구에만도 군대검문소가 70여개나 설치되고 수백개에 달하는 파출소와 주재소들이 2차검문소로 지정되였으며 그곳을 통과하는 인원들가운데서 조선사람들을 엄격히 식별처리하였다.

  살인악당들은 조선사람을 색출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 썼는데 그 대표적인것은 일본말로 5원 55전을 발음시켜 알아내는 방법과 이마에 수건을 동여매는 방법, 생년월일을 일본식으로 말을 시키는 방법 지어 무작정 마구 때려 비명소리를 듣고 알아내는 방법 등이였다.

  아무리 일본말을 잘하고 일본생활에 익숙된 조선사람이라도 이 물음들에 답변할 때에는 일본인과 꼭같이 발음하거나 행동하기 어려웠으며 비명소리는 불의에 가해진 타격에 대한 반응이기때문에 민족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이였다.

  한편 군대, 경찰과 야합한 《자경단》 등의 깡패들은 조선인학살을 부추기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메가폰으로 《조선인습격》, 《조선인이 독약을 우물에 던지며 방화하고있다.》고 고함치며 돌아쳤다.

  이자들은 손에 장총, 일본도, 단도, 날창, 참대창, 곤봉, 쇠갈구리를 비롯한 각종 흉기를 들고 거리와 마을, 집안팎은 물론 지어 산속과 강가, 초원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조선사람사냥》에 미쳐날뛰였으며 조선사람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살해하군 하였다.

  일제교형리들의 조선인학살만행은 참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한것이였다.

  조선인학살에 참가하였던 한 일본군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있던 나라시노기병련대가 출동한것은 9월 2일 정오경이였다. 〈적은 제국수도(도꾜)에 있다.〉고 소리치며 실탄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도꾜시에 진입하였다. … 련대는 첫 행동으로 먼저 렬차를 검열하였다. …어느 렬차도 초만원으로서 기관차에 쌓인 석탄더미우에까지 사람이 파리떼처럼 뒤덮여있었다. 그속에 섞인 조선인은 모두 끌어내여 즉시에 총검으로 찔러죽이였다. …련대는 저녁부터 본격적인 조선인사냥을 개시하였다.》(일본잡지 《일본과 조선》1963년 9월호)

  또한 한 경찰은 사이다마현의 한 경찰서에서 있은 조선인학살만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참살정형은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수 없었다. …어린이들을 줄세워놓고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잘랐으며 그 다음 그 부모들도 찔러죽이였다. 살아남은 조선인의 팔을 톱으로 켜는 자도 있었다. 그것도 도중에서 팽개치고 또 다른 사람을 톱질하는 광경은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죽은 사람들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것도 보였다. …경찰서구내는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수 없는 형편이였다.》(일본도서 《조선인강제련행의 기록》  235~236페지)

  간또대진재시의 조선인학살진상을 해명하기 위하여 무어진 조사단의 한 성원은 학살만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자경단〉원들은 조선사람을 붙잡아 몸을 전주대에 묶어놓고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벤 다음 배를 찔러죽이였으며 기차칸에서 여러명의 조선사람을 순식간에 창문밖으로 내던지였다.》(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331페지)

  참으로 조선사람을 《적》이라고 하며 닥치는대로 죽인 이 악귀같은 살인만행은 일제야말로 천인공노할 인간백정의 무리이며 우리 민족의 피맺힌 원쑤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일본정부의 이렇듯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희생된 재일조선동포들은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밝혀진것만 하여도 무려 2만 3 000여명에 달하였다.(일본도서《조선총독부 진재관계문서》1924년판, 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345페지)

  일제야수들은 후날 조선사람들에 대한 대학살행위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시체를 집단적으로 매몰하거나 석유를 뿌려 불태워 없애버리는 이중적인 범죄행위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다.

  참으로 일제는 짐승도 낯을 붉힐 살인마들이였다.

3

  일본정부는 조선인대학살만행을 악랄하게 벌리는 한편 공정한 사회여론의 규탄과 범죄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 진상을 은페, 외곡하는 파렴치한 책동을 감행하였다.

  내무성을 비롯한 일본정부기관의 막후조종밑에 벌어진 군대와 경찰, 《자경단》 등의 잔악한 조선인학살만행의 영향으로 하여 대진재로 인한 일본인들의 반정부적감정은 어느정도 눅잦혀지고 위기는 일단 가셔지는듯하였다.

  그런것만큼 당시 일본정부앞에 제기된 초미의 문제는 조선인학살의 책임과 그 진상을 어떻게 모면하며 은페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일본정부는 《전시계엄령》을 공포한 후 대진재의 피해를 가시기 위한 《림시진재구호사무국》을 조직하고 그안에 치안담당총사령부로서 경비부를 설치하였다.

  경비부에는 내무성의 인물들과 계엄사령부, 경시청, 륙군성 등의 책임관료들이 망라되였다.

  경비부는 치안문제가운데서도 재일조선인문제에 대한 제반 《대책》을 협의결정하는데 특별한 힘을 넣었으며 간또일대에서 벌어지는 조선인학살행위를 뒤에서 직접 조종하면서 그 진상이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도를 강구하는데 모든 력량을 집중하였다.

  일본당국자들은 재일조선인학살을 주도한것이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밑에 재일조선인들이 《범죄행위》를 감행하였기때문에 《자경단》 등이 그것을 저지시킨것이라고 사실을 외곡선전하기로 하였다.

  이로부터 경비부는 무엇보다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이 조선사람들의 《망동》으로 흥분된 《자경단》 등에 의하여 빚어진것으로 사실을 외곡하고 이것을 전국에 그대로 선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9월 3일이후 조선인대학살만행이 간또일대에 삽시에 퍼져가는데 당황한 일본정부는 치안담당기관들에 그 책임을 《자경단》 등에게 전가시킬것을 강하게 지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활하게도 공식보도를 통하여 《자경단》 등이 조선인학살에 《자중》할것을 《호소》하기도 하고 앞으로 군대와 경찰의 지도밑에 행동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하는 연극을 꾸미였다. (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74~75페지)

  그러나 이것은 결국 조선인학살의 책임을 《자경단》 등의 독단행위인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정부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간계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후에 벌어진 사건들만 보아도 《자경단》 등은 오히려 군대, 경찰과 밀접히 협동하여 조선사람들에 대한 학살만행에 더욱 기승을 부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경찰들의 조선인학살에 대해서는 극비에 붙이면서 《자경단》 등에게만 책임을 전가시킨것은 일본정부의 교활성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보인 추태였다.

  경비부는 또한 정부의 범죄책임을 은페하려는 목적밑에 조선사람들의 이른바 《폭행》과 《범죄행위》를 날조하면서 《사실의 진상》을 재일조선인들의 《폭행》이 그 배후에 있는 《적색주의자》 즉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종된것으로 외곡선전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5일의 극비문서 《조선인문제에 관한 협정》이 그 대표적결정안이라고 할수 있다.

  이 협정의 해당한 조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내외에 조선인문제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진상으로서 선전하는데 힘을 넣으며 장래 이것을 사실의 진상으로 할것. …조선인의 폭행은 많았고 …박해를 받은자는 적지만 일본인이 박해를 받은 자는 많다. …조선인에 대하여 함부로 큰 박해를 가한 사실은 없다.
  둘째로, 조선인의 폭행 혹은 폭행미수사실을 극력 조사하고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인정시켜야 한다.
  …
  일곱째로, 해외선전은 특히 적화일본인 혹은 적화조선인이 배후에서 폭행을 선동한 사실이 있다는것을 선전하는데 노력할것.…》(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79~80페지)

  보는바와 같이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폭행》을 가한 《범죄자》로 락인하고 조선사람들의 《폭행》사건이 많은 반면에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을 크게 박해한 사실은 없다고 시비를 전도하였으며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조선인들의 《폭행》을 선동하고 지도하였다는 날조된 사실을 《진상》으로 외곡해서 널리 선전하도록 하였다.

  경비부의 이 협정은 그야말로 도적이 매를 드는 격의 날강도적행위였으며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을 제가 조작하고는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전가시킨 히틀러도 무색케 할 파렴치성의 전형이였다.

  허위선전방향을 제시한 일본정부는 다음과 같은 《경고》에 기초하여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길로 나갔다.

  즉 정부는 《조선인에 관한 기사는 특히 신중히 고려한 조건에서 일체 게재하지 않도록 하며 이후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린 출판물에 대하여서는 일체 판매배포를 금지》한다는것을 선포하고 해당기관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자료해설 18페지)

  여기서 《조선인에 관한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도록》 경고한 목적이 얼핏 보기에는 류언방지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전파된 거짓소문을 그대로 보존하고 외곡된 보도를 비판시정하려는 기사의 게재를 금지시키려는데 있었다.

  그것은 《조선인폭동》설이 전혀 무근거한것이라고 비판한 보도기사들이 이미 정부측의 강제조사에 의해 삭제당하고있었으며 출판보도기관들은 《정확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명색밑에 정부가 작성한 관제자료만을 넘겨받아 보도할수 있게 한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이 자료들이란 바로 《조선인문제에 관한 협정》에 따른 허위자료들이였다.

  그리고 9월 4일부터 10월중순까지 도꾜, 요꼬하마, 오사까 등 대도시들의 일간신문들은 한결같이 강한 통제를 받았으며 따라서 그 어느 신문에도 조선인의 《폭행》,《범죄행위》를 부정하는 기사는 단 한건도 실을수 없었다.

  그와 반대로 《부정선인의 배후에 주의자》, 《선인과 주의자가 강탈강간을 저질렀다.》,《폭탄가진 선인 수십명 총살》 등 거짓소문보다 더 과장되고 날조된 허위기사만이 전국의 모든 출판물에 범람하였다.

  이처럼 일본정부는 《자경단》등의 조선인대학살만행이 《응당》하고 《정당》한 자위행위인것처럼 비호하면서 저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민족배타주의적살인범죄를 감추려고 발악하였다.

  일본정부의 조선인대학살진상자료의 인멸행위는 특히 이른바 조선인《보호》조치를 요란하게 광고한데서도 나타났다.

  일제교형리들은 저들이 저지른 조선인학살범죄를 감추기 위하여 그것을 극비에 붙이는 한편 정부가 조선사람들을 적극 《보호》하였다는 역선전에 광분하였다.

  그러나 실지로 그러한 《보호》를 받은 조선사람들은 군대와 경찰, 《자경단》 등의 폭행과 추격, 죽음의 고비에서 겨우 벗어나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였다.

  일본정부는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위험분자》, 《폭도》로 지목하고 무작정 강제련행하여 집단적으로 《수용소》에 감금시키고 죄인처럼 취급하였으며 《전쟁포로》로 다루었다.

  일본당국의 《보호》를 받았다는 조선사람들이란 바로 이렇게 강제련행되여 《수용소》에 갇힌 포로아닌 《포로》들이였으며 그 수는 무려 2만 3 715명에 달하였다. (일본출판물 《현대사자료》 6권 자료해설 24페지)

  《수용소》에 끌려간 그들은 모진 학대와 갖은 고생을 겪었을뿐아니라 대다수가 후날 진재복구에 징발되여 무보수로동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파렴치한 일본당국자들은 내외에 마치도 저들이 조선사람들을 《자경단》 등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였으며 그들에게 《직업》을 주었다고 뻔뻔스럽게 선전하였다.

  이처럼 일본정부와 그 하수인들이 감행한 조선인대학살만행과 학대행위는 그 규모와 수법에서의 교활성, 잔인성 등에 있어서 력사에 보기드문 반인륜적범죄였다.

  그러나 현시기 일본정부는 죄많은 과거를 묻어버리고 재일조선동포들을 집요하게 박해하고있으며 우리 민족에 대한 적대행위를 계속 하고있다.

  수난에 찬 력사의 체험자인 우리 인민은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다.

  일본이 지난날 침략자, 략탈자로서 우리 민족에게 끼친 불행은 너무나도 크고 많으며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도덕의 모든 분야에 걸쳐 걸머진 빚은 헤아릴수 없이 방대하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는 죄많은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할 대신 《대동아공영권》을 망상하면서 과거에 저지른 범죄를 전면부정하고있다.

  오늘 우리 인민은 나라도 주권도 없던 어제날의 약소민족이 아니라 존엄높고 강력한 자위적국방력으로 위용떨치는 사회주의강국의 주인으로 된 힘있는 인민이다.

  만약 일본정부가 이를 망각하고 함부로 날뛴다면 그때는 백배, 천배의 보복을 절대로 면할수 없으며 과거의 죄행에 대하여 성실히 반성하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의 백년숙적으로 남아있게 되리라는것을 똑똑히 명심하여야 할것이다.

[출처: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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