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거대한 박물관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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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12-26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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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미 기자의 통일뉴스 취재단 방북기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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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비행기는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3박 4일동안 통일뉴스가 첫 단독 방북취재를 다녀왔다. 겨울에 평양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새로운 계절에 만나는 평양, 4년여가 지난 평양은 또 얼마나 변해 있을까하는 생각에 출발을 앞둔 시간 내내 마음이 설렜다. 2003년 8.15공동행사와 제주평화축전 백두산 채화식 취재차 방문했던 9월, 그때도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평양에 내렸었다. 두 번째 방문시 환절기인데다 백두산 취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준비를 못했던 나는 평양 체류기간 내내 추위에 떨었다. 이번에는 내복에 가장 두터운 외투까지 빠짐없이 챙겨 입었다. 하지만 평양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때문에 두터운 외투는 짐처럼 느껴졌다.
선양공항을 출발한 고려항공기는 20여분이 지나자 거대한 산맥이 눈에 들어오면서 시야가 탁 트였다. 순간 기내방송에서는 “지금 우리 비행기는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특유의 북녘 톤으로 안내방송이 나왔다. 남북의 교류가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중국여행을 하며 들렀던 곳 중에 한곳이 압록강변이었다. 압록강변에 홀로 서서 손만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을 지척에 두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압록강에는 북중간에 놓인 철교를 통해 끊임없이 물자가 오고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선양에서 이륙한지 40여분 만인 오후 5시경에 평양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늘 공동행사 취재차 왔던 것과 달리 첫 단독취재가 주는 다양한 실무까지 병행해서 그런지 수화물을 찾는 것부터 지체되기 시작했다. 입국 수속을 완전히 마치고 공항을 나설 때는 이미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4년만에 다시 찾은 보통강려관 우리를 초청한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측과 조선륙일오편집사 측 인사들이 벌써부터 나와서 다소 늦어진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몇 년 사이 못 본 얼굴들도 있고 안면이 있는 분들도 있었다. 사방이 깜깜하고, 하늘에 별들이 총총 떠 있었다. 가끔 자동차 불빛에 비친 사람들, 삼삼오오 혹은 둘이서 이야기꽃 피우며 그 어둠속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참 활기차 보였다. 퇴근시간인 듯 제법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차로 숙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시골 할머니집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착하면 그리운 할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음식과 함께 반가이 맞아줄 것만 같아 설레였다.
오후 6시경 숙소에 도착해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북측이 초대한 환영만찬에 참석해 인사를 나누었다. 첫 단독 방북취재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방북 기간 중 좋은 취재를 많이 하길 바란다는 내용의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산해진미가 코스별로 나오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 주식인 평양냉면까지 정말 배부르게 먹었다.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일정을 확인한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서해 직항로를 이용하면 1~2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바다 건너 중국까지 발 도장 찍고 돌아오느라 하루 온종일 걸렸다. 몸은 몹시 피곤했으나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객실 창문을 통해 평양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온통 어둠이었는데, 제법 많은 살림집(아파트)에서 불빛을 쏟아냈고 도시 야경을 보는 듯했다. 메모도 하고 객실에 비치된 텔레비전을 방송을 보면서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정을 위해 호텔 안내 데스크에 모닝콜도 잊지 않았다. “손을 들고 흔들어 보이라~” 약간은 긴장돼서 그런지 예정된 기상시간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그래도 쉬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띠링~ 띠링~” “7시 일어날 시간입네다.” 하루 일정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일어나는 것을 미룰 수 없어 자리르 털고 일어나 제일 먼저 창밖을 살폈다. 여명에 평양시내의 전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침을 챙겨먹고 산책이라도 해볼까하고 서둘렀다. 아침을 먹고 막간을 이용해 카메라를 들고 보통강변을 산책하는데 서설이 보였다. 멋진 풍경을 기대하며 왠지 마음이 들떴다.
우리를 에스코트(?) 하던 북측 안내원들은 “그렇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누가 좋아하겠나?”며 “손을 들고 흔들어 보이라~”고 이곳 정서에 서툰 우리들이 무대포로 들이대는 방식이 답답했는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보통강려관 주변을 한바퀴 돌아본 뒤 평양 참관 일정이 시작됐다.
북 조선화의 독특한 발색은 평양의 일상의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측 언론 최초로 보도한 인공지구위성관 우리 일행이 3박 4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방문할 참관지는 3대혁명전시관(중공업관/인공지구위성관), 개선문, 만경대 사적관과 고향집, 고려의학과학원, 조선혁명박물관, 동평양 대극장, 당창건기념관 등이었고, 2000년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의 면담이 예정돼 있었다. 이번 참관지는 대규모 방북단 취재 시에는 가보지 못한 곳들이 많아 관심이 컸다.
북 노동당 총노선인 사상, 기술, 문화 3대 혁명노선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자료들을 집대성한 종합 전시관이다. 주체사상로작전시관, 중공업관, 새기술혁신관, 인공지구위성관/전자공업관, 경공업관, 농업관 등 6개 전시관으로 이뤄졌다. 이중 우리가 참관한 곳은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 참관지중 한곳으로 알려지면서 관심을 모은 중공업관과 현장에서 즉석으로 참관이 이뤄진 인공지구위성관 두 곳이었다. 특히 남측 언론사로는 최초로 참관하는 곳이어서 우리 일행의 관심이 집중된 인공지구위성관은 1998년 8월 31일 발사해 세계를 놀라게 한 ‘광명성 1호’ 발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전시돼 있었다. 광명성 1호는 대륙간탄도탄과 동일한 기술체계를 갖는 인공위성이다.
중공업관은 북의 전력, 석탄, 금속, 광업의 현황 등이 전시돼 있어 풍부한 지하자원에 대해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은 3대혁명전시관을 참관할 때쯤에는 함박눈으로 바뀌어 내렸다. 모두들 “좋은 징조”라며 입을 모아 기뻐했다. ‘기념비적 창작물’에 숨겨진 숫자의 조합 개선문은 평양 방문자들에게는 필수 코스로 정해져 있는 곳이다. 개선문은 김일성 주석의 조국 개선을 기념하여 70돐 생일을 맞은 1982년 4월 15일 제막됐다.
조국 광복 후 개선한 김 주석은 현재 개선문 옆에 있는 김일성 경기장에서 45년 10월 14일 평양 시민들을 모아놓고 그 유명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 하여야 하며...’라는 첫 연설을 했다. 북측의 ‘기념비적 창작물’들은 대체로 정치적 의미를 상징하는 숫자들의 조합으로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개선문 목란꽃 장식이 70개인 것은 김 주석의 70돐 생일을 기념해서이고, 김일성 경기장 앞 대형 모자이크 벽화는 45년 10월 14일 연설을 기념해 길이가 45m, 높이가 10.14m로 되어있다. 연설 내용을 담은 기념비와 벽화의 총 길이 75m는 김 주석 탄생 75주년인 87년에 세워진 것을 상징한다. 점심을 먹고 참관한 곳은 만경대 사적관과 고향집 방문이다. 만경대 고향집은 평양 방문시마다 참관하는 곳이었으나 만경대 사적관은 처음 방문했다. 만경대 고향집은 김 주석의 생가를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곳이고, 사적관은 김 주석 일가의 혁명 활동의 역사를 전시해 놓았다.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았을 땐, 농한기를 맞아 집단농장에서도 참관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방북 취재의 관심 분야 중 하나인 고려의학을 위한 취재를 위해 늦은 시간까지 우리 일행을 성심껏 맞아준 현철 부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환자들의 정성이 마음 깊이 남아있다. [관련기사 보기] 해방후 격동의 시기를 증언한 당창건기념관
다음 참관지인 동평양 대극장은 최근 미국의 대표적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년 2월 공연장으로 알려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곳이다. 동평양 대극장은 89년에 건립돼 최근 1년 반 정도의 개보수를 거쳐 올해 1월 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새 단장을 마친 곳이다. 화려한 ‘무리등’(샹들리에)과 대형 벽화 ‘울림폭포’를 비롯해 황해북도 평산시에서 나는 대리석들이 눈길을 끌었다. [관련기사 보기]
이 건물은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서 당시에는 ‘왜촌’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다. 1920년 일제가 상공회의소령을 내리면서 청진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11개(신의주, 진남포, 원산, 평양, 경성, 인천, 목포, 군산, 부산, 대구)의 상공회의소 건물을 건설한 곳으로 그중 서북도 일대의 공업과 상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사용하던 이 건물을 개조해 당 청사로 사용했던 곳이다. 1970년 2월 10일 김 주석이 이곳을 찾아 당 중앙 청사로 사용할 당시를 고증해주고 문, 창문틀, 돌을 다 버리지 말고 그대로 원상복구를 하는데 이용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현지지도 이후 8월까지 건물을 완공한 후 내부 진열을 마친 뒤, 김 주석이 10월 11일에 현지지도를 나온 날을 개관일로 정했다. 개관 후 5차 당대회에 참가했던 당 대표들이 첫 참관했다. 사적관은 2층 건물인 청사, 숙소, 기타 사적들로 구성됐다.
49년 1월까지 집무했던 곳인 두 번째 집무실은 2차 중앙당대회부터 4월 남북연석회의,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준비, 당 창건 준비, 4월 남북연석회의 대표들과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은 물론 여운형 선생을 두 차례 만난 곳이라고 한다. 당창건사적관을 참관하는 동안 해방 후 격동의 시기에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위해 헌신했던 민족의 지도자들과 이름모를 민초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 했다.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그해 9월 2일 북으로 송환된 63명의 비전향장기수 중 우용각(77), 최선묵(79), 최하종(80) 선생을 보통강 려관에서 셋째 날 저녁에 만났다. 지난 2003년 공동행사 취재차 방문했을 때도 만난 적이 있는데, 4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들은 모두 건강한 모습이었다. [관련기사 보기] (기사 이어집니다) |
[출처: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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